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存齋先生實記 存齊先生年譜
○八月初一日別友人有詩 詩曰墓堂 平昔講紎綸此日男兒有幾人滄海血流腥滿地臨分相勗在成仁 ○以鄭大 益爲淸野之任劉名蓋掌軍務 大益與先生爲强近之戚 同入城約以死守先生使爲淸野之任曰慈 夫人何不奉來答以無人扶舁先生乃抄送 軍人擔輿入城及城陷與弟大有擁衛其母 而出騈死一刀得全其母○名蓋有孝友行 先生使掌軍務同力禦賊及城陷望先塋再拜而死 ○十六日賦將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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正自蔚山進薄城下 賊大至先生躬督戰晝夜不懈南門樓上有小 窓先生開而射賊賊丸掠額而過略不變色挺身當窓 十八日大將白 士霖棄城而遁城遂陷先生與趙公宗道死 之 士霖欲棄城走使人言於先生曰賊盛而 逼豈不怖哉先生厲聲曰吾己分死何怖 之有土霖遂縋下其家屬卽遁去官奴宋仁連急來報曰白公已逃請速出先生曰此奴訛瘀使
鄭惟榮
往視之寂無人蹤夜半賊從東門而入子嶼及吏民號泣以請曰事已至此願早爲計先生笑曰此吾死所自南們佩 弓矢爲大將儀往于軍器命焚之俄而賊刃 飛下先生猶射賊不已尋遇害○趙公病臥 幕中聞城且空往見先生於南門曰我與君 當此面再拜同死於此樓足矣遂遇害○
鄭惟榮
從先生入城籌畵軍謀至是亦同死
先生子履常履厚女柳文虎妻履常妻愼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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同日死之 先生嘗戒一家曰脫有急當先自決無爲賊汚令各懷弦索佩小刀 其日兇鋒猝逼先生謂二子曰我義不可出 汝等可將母以避女壻姜遵先率先生夫人 及其妻出城得免二子執手訣曰父已死義 我等何忍偸生乎抱父罵賊拜被害長女柳 文虎妻隨夫出城伏草奔間文虎被虜郭氏 哭曰父死而生者爲夫哉也夫已俱亡復何 所恃遂自縊而死履常妻愼氏聞其夫死亦自縊於林木
安義邑誌 [誌] 人物 李朝
鄭惟文 九柳齋輳子自幼天資粹美讀書早服九柳公庭訓文詞精篤孝友兼至無意仕進又氣宇宏偉志節卓犖當壬辰之亂與嶧陽鄭惟明倡義旅赴義將金沔陣協贊兵謨又往火旺山城與忘憂 堂郭再祐同禦寇丁酉再警與弟
惟榮
惟武
同入黃石山城與存齋郭䞭大笑軒趙宗道共力守城及城陷與二公幷殉節享靖忠祠號杏村
嶠南誌卷之六十 安義郡 人物
鄭惟文 靖節公矩后號杏村卓榮有志節宣廟中司馬倡義旅火旺黃石役皆立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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桐溪先生文集卷之二 / 文 / 一鄕呈文 庚子年
一鄕爲依公論報使事。臣之忠。子之孝。婦之烈。是所謂三綱之行。三者而一不立。國不可以爲國。是以自古帝王。莫不崇重斯軌。旣筆之書以傳諸後。又旌其閭以顯於時。所以扶植之義。至矣盡矣。本縣雖十其室。而自變亂以後。死於孝者二。死於烈者三。
忠義衛柳橿。私奴銀浩。所謂二孝子也。
草溪鄭氏。完山李氏。旌善全氏。所謂三烈婦也。
嗚呼。死者。人之所難也。宇宙歸來。人物幾何。而歷數其死於忠與孝與烈者。則或曠世而一有之。或天下而一人焉而已。斯二子三婦者。乃能幷生於一鄕之中。人性之善。果不可誣。而其爲鄕里之榮。爲如何哉。有此名節而湮沒。可惜。表而出之。非明府而誰。伏願具由牒報于巡相。使之轉聞于朝。而旌表其閭。俾時之人後之人。有所矜式。男子而過之者曰。爲忠孝者亦若是。女子而見之者曰。爲人婦者當如是。則比屋可封之俗。庶復見於今日矣。右人等就死顚末。錄在于後。此皆公論所著。若其溢一辭。欺明府。罔國家。則一鄕雖無人。亦不爲此。
忠義衛柳橿。士人也。丁酉八月。擧家入黃石山城。十六日夜。城陷。橿負其母出城。令其弟榎扶去。以其父老不克步。橿還入賊中。扶曳以行。其父知不得免。斥而去之曰。我已矣。汝其先出。橿號泣扶持曰。父在此。子出何之。俄而同死一刃。嗚呼孝哉。
私奴銀浩。與其父入黃石山城。城陷之夜。失父於亂兵之中。銀浩先出城。求其父不得。還入城中。負父膝行。至城底遇賊。一刃之下。父子同仆。
草溪鄭氏。僉知全珩之妻也。母柳氏。以孝烈聞于鄕。達于朝。鄭氏性行。得於閨庭者爲多。戊戌四月十九日。避亂入山谷。倭奴猝至。鄭氏被執。賊迫令前行。鄭氏不從曰。汝賊何不速殺我。我雖死。義不可見汚於汝。罵不絶口。賊怒而加刃。與其女同抱而死之。
完山李氏。僉知鄭應辰之妻。完山正之女。四月十九日。避亂山谷。遇賊被執。李氏以死自誓曰。吾何忍從汝賊行。其亟殺我。罵不絶口。賊怒而刃。異其頭足焉。
旌善全氏。察訪鄭惟悅之妻。珩之女。年纔踰三十。有姿色。先是避亂之日。嘗請於其父曰。願得小刀。父曰。何用。對曰。脫有緩急。無水不能溺。無木未易縊。若佩此刀。可以自裁。父義之。四月十九日。入山谷遇賊。與其母同被執。賊以刃脅使行。全氏奮。罵不絶口。賊猶不卽害之。曳之而去。手攀木根。木根皆絶。賊不得已刃之。全氏以手蔽其母身。一指先斷。遂抱其母而死。身無完肉。人謂之孝烈俱全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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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창현감 한형
桐溪先生文集卷之二 / 傳 / 鄭大益,大有兄弟傳。
丁酉之亂。黃石一城之人。爲白士霖所罔。敗衄殆盡。寔八月十八日也。鄕人鄭大益,大有兄弟。扶其母。使其僕吾佐美負行。兄弟前後擁衛。踰山城之東北隅。緣崖越澗。十步九僵。行到長水洞口。天已向明。賊鋒將逼。不獲已。擇深密處。藏其母。兄弟各伏於其傍。賊先獲其母。以刃背擊之。大益,大有一時叫號而出。以身翼蔽其母。兄弟騈死於一刃。而其母得全。竟以天年終於家。斯可謂之死親埋名者非耶。其時以孝死者。如士人柳橿。私賤銀浩等。皆以鄕議。已蒙旌表之典。而斯二人者獨未焉。其故何哉。蓋大益爲淸野之任。而與太守郭䞭。爲強近親也。臨危同事。托以死生之約者。宜無不至矣。當纂嚴之日。三邑士民。携老幼。皆至城下。朝暮且入。因
居昌縣監韓詗之言。
一時雲散波潰。各自爲避兵之計。而大益一家。因大益在城中。未能隨衆散去。䞭益堅死守之志。問大益曰。慈夫人何不奉來。大益卽答以無人扶曳。䞭乃抄送軍人。擔輿入城。于時。三里士族之家入城者。僅以三四數。其餘皆在外者也。由是。群議譁然以爲。大益不當奉八十之母。自投於必死之地。以是之故。幷與其就死之正。與日月爭光者而莫之稱。此不可使聞於他邦者也。噫。茲城雖小。亦王事也。民而服王事。義也。而身縻任事。又與凡民異矣。旣與賢守共事。而彼以誠問安。得不以實告。雖欲巧計謀避。䞭方銳意守城。忠義奮發。脫或失對。安保其不以軍法從事乎。以大益料事之智。其卜度之詳矣。議者不量其間情勢。一向非之。其亦不恕之甚矣。甚者。至謂大益解遣其子。從便避亂。而獨以其母入城。豈愛其母不如愛其子乎。此則尤不近情理。當其時。䞭之以其母爲問者。豈不以其母在此。其子安往云爾。而稚兒有無。曾不以介意。則分遣而圖存。亦一道也。豈以愛有輕重而然也。城陷前數日。大益來到其家。猝聞倭奴已犯隣境。則勺水不能入口。步由月城路。行無人跡處四五十里。冒矢石入城。城陷之夜。母子兄弟。相失於交臂之間。唯其生之圖。不顧恩義者。比比有之。大益兄弟。終始扶衛。卒以身代斃。而脫其母於兇刃。以此觀之。大益死孝之心。自分久矣。曾謂不愛母而能如是乎。設使大益當初失誤之擧。果有如議者之言。而論人之道。重在其終。終之所就。如是卓卓。則從前脣舌。自當如水之於海。氷之於夏日也。不此之爲。而猶追細微之事。欲掩其難掩之大節。退之所謂不樂成人之美者。不幸而近之矣。可憾也已。大益字彥謙。大有字彥休。草溪人。雖無學術。兄能明慧解事。弟有慷慨志。平居養鷹犬。躬漁獵。供甘旨甚。死時。兄年丙午。弟年丁巳。其母柳氏。孝烈婦也。是年。二子死於孝。越明年一女一外孫女。死於烈。其僕吾佐美。臨難不去。盡瘁負護。卒與二主同死。死於忠也。孝,烈,忠三綱。何其備於一家耶。嗚呼休哉。余欲立赤幟久矣。而衆咻之中。難以獨舌爭。囁嚅而不敢發。以待是非之定。日下思之。負罪危命。不可以朝夕期。不及今圖之。終沒孝子之名。則余亦與有罪焉。故記其梗槪。以竢夫首公論者得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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桐溪先生文集卷之二 / 書 / 上李相 元翼 書
秋氣淸爽。伏惟台候若序以健。區區瞻慕。懷不自抑。前承不拒。獲登龍門。旣賜之坐。又假之色。若待以不甚庸陋者然。不佞何以得此。飽德歸來。以心語口曰。此行所得不旣多乎。暴白先賢心跡。一幸也。利見陽剛君子之德。二幸也。得此二幸。雖死無憾。歸見父老。未免有驕色也。竊念相國。位極人臣。而自處如布衣。功蓋一國。而自視常不足。苟以士爲名。則雖鄙陋如某者。亦必迎接之不怠。禮遇之不衰。吐哺之勤。何以過此。易所謂勞謙之德。相國有之也。雖然。相國之爲此。豈徒然哉。將以來人之言而取人之善也。若虛受榮遇之幸。而不思報效之地。則相國之望孤矣。某之愚拙。不忍爲此也。敢有一言之獻。而相國肯信乎否。
白士霖應死之罪。前旣面陳其略。而相國亦旣深然之矣。今者。縣人幼學禹惇,劉義甲等十餘人。以士霖殺其父兄。探復讎之刃。杖討賊之義。懷疏千里。遠叫五雲。其情誠可痛。而其義誠可尙也。第念窮鄕晩出。足未躡王都。旣無援引於朝行。又乏知舊於城中。雖有格天之誠。而何緣自達。雖有感人之義。而誰肯聽信。況廷臣旣以無罪誣啓。而脫其死云。則雖聖明在上。而安能必其不主於先入也。賢公卿在下。而安能保其不忽於賤言也。有必復之讎。而無可復之勢。則九原無辜之冤。何時而可洩。人間一天之恥。何自而可洒也。人皆有父兄矣。見其號天叫地之痛。孰不爲之流涕也。士霖之罪。非獨數人等所讎。爲公論者莫不痛心。何者。倖於成功。而外爲守城之形。急於偸生。而先爲鼠竄之計。使郭䞭,趙宗道等。由己而死於一刃。三邑無辜之士民。自我而肝腦塗地。敗軍之罪。殃民之惡。萃於一身。唯此數語。足以斷斯獄矣。相國欲得其詳。則惇等袖中。必有所藏矣。若惇等之疏。得達天聰。而聖不自斷。議及大臣。則相國於此。可陳其不可不殺之狀矣。雖例下其疏。議不及大臣。而相國亦可挺然獨啓。陳其必殺無赦之義。則天聽庶可回矣。民讎庶可復矣。當其時。相國方在南中。熟知黃石顚末。故惇等之所望於相國者。爲不淺矣。若謙抑太過。不肯爲一言。以爲公論之赤幟。則奸人有福矣。國家無祿矣。奈如之何。大抵爲相之道。不徒淸苦簡默之爲貴也。必明以辨邪惡。斷以行威刑。使爲善者有所勸。爲惡者有所懼。然後庶乎無負於相道矣。某敢以此爲知遇之報。不以人微見棄則幸甚。情隘辭蹙。不知所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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桐溪先生文集卷之二 / 書 / 與崔季昇 晛 書
飮名已久。相見太晩。且於稠廣也。未得從容承誨。可愛風神。常在夢想中。卽惟老炎。雅況休勝。僕自洛還。屬耳先賢心跡。賴吾兄瀝血之文。暴白無餘。儒林幸也。亂後事蹟。吾鄕亦有若干可錄。而先人姓名。亦在其中。故不敢自爲。屬諸校任句幹。只依前日已成之籍書上耳。第恨稽緩至此。恐未及錄於大書特書之筆也。然此事體面重大。不可容易爲之。必廣加聞見。從容裒聚。以就十分完備。然後庶無後憾。豈可限以時日。苟焉成就而已乎。僕亦嘗有意於此。而人微事巨。久不敢發。幸如吾兄者爲之。眞可謂稱其事也。吾南才府之稱久矣。至於亂後。精忠大節。孝子烈婦。比肩接跡。不一而足。而旌表之典。未遑於明時。太史之筆。未及於幽遠。將使磊磊落落者。泯泯而無所傳。吾兄收而錄之。表而明之。欲使軒天地而不滅。傳億萬而不朽。其責不旣重乎。責之重則其成之固不可輕也。
前月上洛時。見李相元翼。語及此事。僕以吾兄所爲告之。李深嘉之曰。吾前爲體使時。以聞見錄成二卷。將進于上前。自上以更加詳實爲敎。故還送本道。未推矣。又曰。裒集之後。當就文章巨公。穩括成書。然後可傳於後。吾亦欲以將成未成之意。爲一語。書其尾云。恐吾兄之不得聞。故及之耳。今茲錄送者。皆一鄕公論。無一毫可疑。望錄之無遺也。郭義士事蹟。詳在朴公傳中。皆足取信者。善惡皆當存之。故僕嘗著白士霖罪狀。爲一覆瓿之資。今忘其荒拙。而幷錄以送者。欲吾兄之考其實耳。凡褒人罪人。當以其實。過實不可也。沒實亦不可也。此皆吾輩所目見。比諸以耳者。則未必不加詳實焉。裁之折之。在吾兄巨筆。珍重自愛。以卒盛美。不具。再拜。金鶴峯有再造嶺南之功。金松菴有悍禦一方之力。二人事蹟。不可不詳錄。聞李公魯氏。有龍蛇錄云。想已求見耶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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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실록 94권, 선조 30년 11월 14일 辛丑 1번째기사 1597년 명 만력(萬曆) 25년
감사 이용순이 한형의 처 이씨, 조종도의 죽음을 포장하도록 건의하다
경상도 관찰사 이용순(李用淳)이 치계하였다.
"황석 산성(黃石山城)이 패몰필 적에 거창 현감(居昌縣監) 한형(韓詗)이 군병을 모집하는 일로 밖에 나가 있고 아내 이씨(李氏)는 【이정암(李廷馣)의 누이동생. 】 성 안에 있었는데 이때 적이 이미 성을 침범하자, 한형에게 편지를 띄우기를 ‘지금 나는 그래도 피해 나갈 수 있으나 다만 성 안의 사람들이 거창의 군민(軍民)이 붕괴된 것을 낭군의 죄로 돌려서 여종을 아내 대신으로 성 안에 들여보내야 한다고까지 말하니, 만약 첩이 먼저 나간다면 그 누(累)가 반드시 낭군께 미칠 것이기에, 첩은 여기에서 죽는 것으로써 낭군께 보답하겠다. 만약 낭군이 미처 오기전에 성이 함락된다면 형세가 반드시 붕괴될 것이기에, 이에 백금 두어 냥을 가지고 구급의 도움을 삼을까 한다.’ 하고, 성이 함락되려고 하자 지키지 못할 것을 알고 그의 딸 한씨와 함께 스스로 목을 찔러 같이 죽었으며, 시비(侍婢) 한 사람도 스스로 목을 찔러 따라 죽었습니다. 함양 군수(咸陽郡守) 조종도(趙宗道)는 처자를 이끌고 산성(山城)에 들어가서 지키다가 적의 형세가 다급해져 성 안이 붕괴되자, 종도가 백사림(白士霖)에게로 달려가서 방책을 논의하려고 하였는데, 【사림은 김해 부사(金海府使)로서 성을 지키는 주장(主將)이 된 자이다. 】 벌써 도피하였으므로 다시 곽준(郭䞭)을 남문으로 찾아가서 손을 잡고 말하기를 ‘형세가 이미 여기에 이르렀으니 죽음이 있을 뿐이다.’ 하고, 드디어 그의 아들 조영혼(趙英混) 및 곽준과 함께 모두 피살당하였습니다. 이상의 사람들은 다 죽음을 제 갈 길로 여기고 조용히 자처하였으니, 각별히 포장하여 풍화(風化)의 근본을 삼아야 합니다."
○辛丑/慶尙觀察使李用淳馳啓曰: "黃石山城敗沒時, 居昌縣監韓詗, 以募軍事在外, 妻李氏 【李廷馣之女弟也。】 在城中時, 賊已犯城, 寄書于韓詗曰: ‘今我猶可出避, 但城中之人, 以居昌軍民之潰散, 歸罪於郞君, 至以婢代妻, 入城爲言, 妾若先出, 則累必及郞君, 妾當死於此, 以報郞君。 郞君若不及來而城已陷, 則勢必奔竄, 玆將白金數兩, 以爲救急之資。’ 城將陷, 知不可守, 與其女韓氏, 自刎同死, 侍婢一人, 亦自刎以從之。 咸陽郡守趙宗道, 挈妻子, 入守山城, 賊勢已急, 城中潰散, 宗道馳往白士霖, 要有講議, 【士霖, 以金海府使, 爲守城主將者也。】 已爲逃避, 往見郭䞭於南門, 執手相告曰: ‘勢已至此, 有死而已。’ 遂與其子英混及郭䞭, 皆被殺。 右人等, 皆視死如歸, 從容自處, 各別褒崇, 以爲風化之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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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일기[중초본] 9권, 광해 2년 1월 5일 壬午 1번째기사 1610년 명 만력(萬曆) 38년
황석 산성 방어에 희생된 수령 및 곽준 일가에 대한 포상을 예조에서 아뢰다
예조가 아뢰기를,
"황석 산성(黃石山城)을 죽음으로 지킨 수령 및 공로가 드러난 곽준(郭䞭)·곽이상(郭履常)·곽이후(郭履厚)·한형(韓詗)과 그의 처 이씨(李氏)와 그의 딸 김건(金楗)의 처 한씨(韓氏), 곽준의 딸 유문룡(柳文龍)의 처 곽씨(郭氏), 충의위 유강(柳橿), 서인 박은후(朴銀厚), 조종도(趙宗道)와 그의 처자 등의 사절(死節)한 사실은, 본도의 장계로 인하여 지난해에 충신·효자·열녀 등을 차례로 표창하여 추증할 때 이미 정문(旌門)과 복호(復戶)를 하라고 계하하셨으므로 그 행적을 별단에 써서 아뢰었습니다. 함양 박봉(朴菶)의 처 노씨(盧氏)도 황석산에서 사절하였으므로 본도의 장계에 의하여 본조에서 함께 기록하여 아뢰었는데, 지난해에 의정부에서 인원이 너무 많다고 하여 삭감하는 중이어서 아직 다시 마련하지 못하였습니다. 〈감히 아룁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알았다. 곽준 일가의 충효 대절은 사람으로 하여금 존경심을 일어나게 하니 표상하는 은전을 마땅히 넉넉하게 하여야 할 것 같으며, 그리고 박봉의 처 노씨도 마땅히 정표하여야 할 것이다. 어찌 인원이 많다고 하여 그 선행을 버리겠는가. 다시 대신과 논의하고 〈복계(覆啓)하여〉 시행토록 하라."
하였다. 좌의정 이항복과 영중추부사 윤승훈이 의논드리기를,
"규정 이외의 은전은 마땅히 상의 명에서 나오는 것이니 감히 논의할 수 없습니다."
하였고, 우의정 심희수와 청평 부원군 한응인이 의논드리기를,
"황석 산성이 함락되던 날 충효와 절의가 모두 곽씨의 집안에 모였으니 포상을 후하게 하여 존경하고 권장하는 모범이 되게 하더라도 안 될 것이 없으며, 나아가서 노씨의 절행 같은 것도 표창하여 가상하게 여김이 마땅하고 인원수의 많고 적음은 거론할 바가 아닙니다."
하니, 답하기를,
"심희수와 한응인의 의논대로 하라."
하였다.
ⓒ 한국고전번역원 | 조창래 (역) | 1992
○庚戌正月初五日壬午 禮曹啓曰: "黃石山城, 以死守之守宰及表表人郭䞭、郭履常、郭履厚、韓詗・妻李氏、其女子金楗妻韓氏、郭䞭女柳文龍妻郭氏、忠義衛柳橿、平 庶人朴銀厚、趙宗道・妻子等事 死節事狀, 則因本道狀啓, 頃年忠臣、孝子、烈女等, 第褒贈時, 已以旌門、復戶啓下, 故其行迹, 別單書啓矣。 咸陽 朴菶妻盧氏, 亦死節於黃石山中, 因本道狀啓, 本曹竝爲抄啓, 而頃年議政府以爲‘過多’, 在減去之中, 時未更爲磨鍊矣。 (敢啓。)" 傳曰: "知道。 郭䞭一家忠孝大節, 令人起敬, 其褒贈之典, 似當加優。 且朴菶妻盧氏, 亦當旌表。 豈可以人多之故, 廢其善行? 更議大臣, (覆啓)施行。" ○左議政李恒福、領中樞府事尹承勳議: "規外恩典, 當出上命, 不敢容議。" 右議政沈喜壽、淸平府院君 韓應寅議: "黃石城陷之日, 忠孝節義, 咸萃於郭氏之門, 褒贈加厚, 以爲聳動激勸之典, 未爲不可, 至如 盧氏節行, 亦宜褒嘉, 人數多寡, 非所論也。" 答 啓曰: "從 沈喜壽、韓應寅議 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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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일기[중초본] 40권, 광해 9년 7월 12일 甲戌 5번째기사 1617년 명 만력(萬曆) 45년사간원이 사옹원 주부 성흔, 부령 부사 조영혼의 파직을 청하다
○司諫院啓曰: "司饔院主簿成忻, 爲人陰狡, 家行悖戾, 見棄人類, 累被臺評, 請命削去仕版。 監察羅茂春, 爲人邪妄, 行己麤鄙, 遽授本職, 物情駭怪。 請命罷職。 咸鏡一道, 連年大無, 流亡盈路, 餓莩塡壑。 撫摩安集, 責在字牧, 而武臣守令, 唯務割剝, 不知撫字之爲何事。 頃日廟堂, 請遣文官, 其意有在。 今者差出, 皆是武夫, 而富寧府使趙英混, 門地卑賤, 人物庸劣, 邊鎭蘇殘之策, 決非此人所堪。 請命罷職, 其代各別擇遣。
答曰: "成忻徐當發落。 羅茂春遞差。 趙英混乃忠臣宗道之子也, 備局已爲議薦, 試遣可矣。 他餘事依啓。"
광해군 9년 정사(1617) 7월 12일(갑술)
09-07-12[05] 사간원이 사옹원 주부 성흔, 부령 부사 조영혼의 파직을 청하다
사간원이 아뢰기를,
“사옹원 주부 성흔(成忻)은 사람됨이 음험하고 교활하며 집안에서의 행실이 패려해서 사람들에게 버림받았으며, 여러 차례 대간의 논박을 받았습니다. 사판에서 삭제하라고 명하소서. 감찰 나무춘(羅茂春)은 사람됨이 사악하고 망령스러우며 행실이 거칠고 비루한데, 갑자기 본직에 제수되었으므로 물정이 해괴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파직하도록 명하소서.
함경도는 해마다 흉년이 들어서 떠도는 자가 길에 가득하고 굶어죽은 시체가 골짜기를 메우고 있습니다. 이를 무마하여 안정시키는 책임은 수령들에게 있는데, 무신(武臣) 수령들은 오로지 재물을 긁어들이기만을 일삼아서 어루만져 길러준다는 것이 무슨 일인지도 모르고 있습니다. 지난번에 묘당에서 문관으로 수령을 뽑아 보내기를 청한 것은 그 뜻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번에 차출한 것은 모두 무부들입니다. 부령 부사(富寧府使) 조영혼(趙英混)은 문벌이 미천하고 인물이 용렬하여, 잔약해진 변방의 진을 소생시키는 계책은 결단코 이 사람이 감당할 바가 아닙니다. 파직하도록 명하고, 그 대임자를 각별히 뽑아 보내소서.
사옹원 참봉 김숭지(金崇址)는 사람됨이 거칠고 억세며 관무를 봄에 있어서 비루한 일이 많았습니다. 파직하도록 명하소서. 국자감의 아장(亞長)은 바로 사유(師儒)의 직책입니다. 그러므로 참으로 청선(淸選)이 아니면 함부로 제수할 수 없는 것입니다. 사성(司成) 윤민헌(尹民獻)은 명망이 드러나지 않았는데 갑자기 본직에 제수되었습니다. 체차하도록 명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성흔에 대해서는 천천히 결정하겠다. 나무춘은 체차하라. 조영곤은 바로 충신 조종도(趙宗道)의 아들이며 비국에서 의논하여 천거하였으니, 한 번 시험삼아 보내보는 것도 무방하다. 다른 나머지 일은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 한국고전번역원 | 정선용 (역) | 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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桐溪先先文集卷之四 / 墓誌 / 忠義衛尹公墓誌銘 幷序
公諱劼。字子固。姓尹氏。高麗開國功臣莘達之後。坡平之尹。甲於東方。年代次序。稽諸譜牒。班班可見。公曾祖諱汝霖。判官。祖諱瑊。振勇校尉。父諱安鼎。監役。妣李氏。宗室縣監環之女。以甲午四月三日生公。公形容頎峻。音韻如鍾簧。望之知其爲人英也。早歲落南。不克歸京都。仍爲安陰人。爲人磊落明直。不喜與人俯仰。治居第生產有條法。御僮使以威。家政齊整。閨門肅如也。先塋在仁川地。弟劭居其下。公以路遠不能隨時節躬奠掃爲恨。常以秋夕往省無失期。年過六十。猶能自力。間歲而行者再三。奉先之需。務爲豐潔。釜鼎器皿。必躬莅滌濯焉。與其弟友愛尤篤。每相遇共被而臥。磨肌而戲。雅有志節。庭中植松,竹,梅,菊。扁其堂曰節友。日痛掃漑相對。涉獵書史。頗通古今。臨事善剖決。與人語。洞露心肝。無有隱情。尤善敎誘人。見人非誤。據理明倫。開導其善心。而消沮惡萌。人之感化者多。歲丁酉。値倭奴再動兵。梧里李相國受命體察南方。以黃石山城。爲三邑入保之地。于時。人士皆知城不完。潰奔者過半。公獨以爲保守。王命也。雖知其危。豈可逃避。於是題詩窓心曰。寧爲死義鬼。不作投林生。決意入城。未幾城陷。賊躝入。公踰城行數十步許。天已明。不可行。以身蔽木而免。其時。年壯足健者死以千數。而公以老病蹣跚。獨不被禍。豈神明感其義。有所扶持而然也。旣出。人或問之曰。公之入城何意。不死又何義歟。公曰。以朝廷命令入城義也。主將先潰。我無獨死之理。況不期生而生者乎。問者無以應。方其踰城時。有一人失足顚墜。重傷其股。公亟命抽佩刀。刺其傷處血出。其人卽起行。噫。此豈人所能爲者哉。追鋒在咫尺。死生只一瞬。而爲影響昧昧之人。從容欲活其命。蓋公之平生用心多類此。公多才局。一時儕流。皆以治劇解紛許之。而公亦自信不疑。使其得其位。試其所蓄者。則其濟物之功爲如何。而惜乎。其終爲澤而不爲川也。公以萬曆丁未七月六日。終于家。距生之年七十有四。後三年。公配柳氏亦沒。合葬于縣治之東馬峴甲坐庚向之原。柳氏亦全州著姓。有諱潤春之女。郡守轂之孫。都承旨季潼之曾孫。生於乙巳。男女四人。男曰應錫。有才器。早歲。女三。其壻曰金光道,鄭蘊,盧脊也。應錫子女有五。洪,深。其男也。鄭有禎,李壽檍,其壻也。一女幼。光道無子女。蘊有三子。昌詩,昌訓,昌謨也。脊有一子。曰亨弼也。二女。曰楊汝梅,朴尙質也。公有庶子。曰應恥。公之出城無恙。繄此子是賴。生子女若干。內外嫡,庶,孫,曾男女廿餘人。蘊早歲委禽公門。得公之終始最詳。故乃爲之銘。銘曰。公惟器也。器之美者。旣剛且頔。若劇若難。于錯于盤。用無不適。安於農圃。無意世路。未試涓滴。磊落之志。倜儻之氣。閉此玄寂。惟後人斯。愼無傷虧。我銘之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