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추를 여니 나비/ 김일곤
아내는 배추를 열어 노랑나비, 한마당 가득 날린다
나는 철없이 나비를 타고 놀다
샛노란 문양 노랑노랑 읽다가
고향집 마당가에서 치자 꽃물들이던 누이 생각하다가
어머니의 쪽진 가르맛길 달려도 보다가 문득
뚱딴지처럼 김장배추가 되고 싶은 거다
아니, 아삭아삭한 김치로 익고 싶다
싸락눈표 소금에 절여진 나는 채반에 다소곳 누워 순명을 고한다
설폿한 날개 밑에 양념이 입혀지고 소가 박힌다
항아리 안에 어긋 나긋 누워서
폭 익으려면
옴짝달싹하지 말라고 지그시 가슴에 누름돌을 올린다
갑갑하고 돌연 서럽기도 하였으나
꾹 참아내며 그냥 한데 섞여 가라앉고 부드러워지며
숙성되기 간절히 바란다
맵고 짠 것들이 함께 어우러지며
함부로 설익지 않고 착 달라붙도록 갖은 양념에 폭 익은 나,
질항아리에서 탈출
끼니마다 나비의 날갯짓으로, 애초롬한 얼굴로,
가족들 둥근상 위에 오른다
긴긴 삼동 고구마 삶기 맞춤한 날은
내 샛노란 날갯죽지가 쭉쭉 찢어져도 좋아
가족들 손끝에서 훨훨
- 2014년 <시산맥> 신인상 당선작
《 심사평 》
어긋남도 틀어짐도 없이 깁고 꿰매는 수행법의 詩
요즘 시단의 현상을 반영하기라도 하듯 대부분의 작품들이 산문시의 형태로 응모되었다. 서정시처럼 행갈이가 되어 있는 대부분의 작품들도 시의 문장이나 플롯들이 산문시나 다름없는 상황이었다. 때문에 서정이 부재한 이미지나 플롯들이 시적 긴장감과 시적 반추의 미학적 특성을 잘 드러내주는 듯도 했으나 어쩐지 약속이나 한 것처럼 한쪽의 방향성을 갖는 문제가 심각한 상황인 듯도 하였다.
그 중에서 김일곤, 박광석, 박정우, 신정순, 원춘옥의 응모작들이 각기 개성이 있고 작품수준 또한 고르고 탁월해 보였다. 그래서 이들의 작품을 최종 본심에 올려 심사위원들은 중론을 모으다가 김일곤, 박광석, 박정우의 작품으로 대상을 좁혀 다시 논의를 하기 시작하였다.
김일곤의 「배추를 여니 나비」에서는 장자의 호접몽을 연상하게 하는 노랑나비가 과거와 현재, 미래를 날아다니며 노닐다가 순명을 고하는 사물(김장김치)이 되고자 한다. 지그시 가슴에 누름돌을 올린 숙성된 삶이 되고자 하며, 가족의 둥근상 위에 올려지기를 바라는 소박하면서도 분골쇄신의 헌신적 사랑이 잘 구현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텍스트가 결연하지 않고 해학적인 묘미를 더한 그 심정의 형상성이 돋보인 작품이었다. 이러한 의미를 갖는 텍스트는 「윤달」에서 새로운 시각(視角)으로 표현되기도 했다. 화자의 어머니가 윤달에 수의를 짓고 있는 모습이 비쳤다. 당신이 입을 수의를 짓는다는 생각만 해도 화자는 울컥해지는데 정작 당사자는 삶과 죽음을 초월한 듯하였다. 어긋남도 틀어짐도 없이 깁고 꿰매는 수행법과 삼베옷 수의에 연꽃 입술과 초승달까지 그리시는 어머니의 모습이 잔잔하게 텍스트와 그 행간에 비친다. 또 「회전문」에서는 판옵티콘(Panopticon)의 원형(圓形)구조로 회전문을 대상으로 삼으며 통제하고 조율하는 섬뜩한 문명의 구조를 하나의 낯선 물질적 대상에 포착하여 풀어내기도 한다. 가볍게 지나치는 구조지만 시인이 제시하는 대상적 의미에 집중하다 보니 생각만으로도 답답하고 어지러운 물건이 되었다. 이렇게 새로운 의미를 제시하는 김일곤의 창의적 발상이 그의 작품 곳곳에서 빛이 났다.
박광석의 「말티즈와 아내」 등의 작품은 재미도 있고 일상에서 발견하는 새로운 의미들이 신선해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치환적인 요소나 의미가 한정되어 있는 것으로 보였다. 일상적인 것에서 작품을 구상하면서도 참신하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그것이 또 상대적인 결함으로 부각되는 것이다. 더욱 의미심장하게 다듬는 시적 텍스트의 밀도를 기대하게 하는 작품들이었다. 또 박정우의 「달빛 살인 1」과 「달빛 살인 2」의 연작은 시적 분위기가 묘했지만 나름대로 신선하고 긴장감을 갖게 한 작품이었다. 묘사와 진술이 적절하게 잘 진행되어 안정감도 있는 작품이었다. 하지만 구현하고자 하는 시적 의미를 연작으로 구성하기보다는 하나의 작품에 집중시키는 것이 더 좋았을 것이라는 평가가 있었다. 작품성이 좋아 보이는 대부분의 연작들도 마찬가지였다. 연작은 연작 나름대로의 시적 의미나 그 가치가 충분하기는 하지만 응모작으로는 아무래도 단편적인 작품이 좋지 않았겠느냐는 중론이었다.
작품 전반에서 보이는 박광석, 박정우의 신선한 감각과 가능성, 그리고 완성도가 높고 원숙한 경지를 보이는 김일곤의 작품을 놓고 가능성이냐 완성도냐를 논의하는 심사위원들의 설전이 뜨거웠다. 하지만 가능성을 높이 산 작품들은 호불호가 분명했고 완성도가 높은 작품들은 심사위원들의 고른 지지를 받아 결국 김일곤의 작품을 당선작으로 내기로 합의하였다. 마지막까지 치열하게 경합을 벌인 박광석, 박정우 님의 문운과 건투를 빌며 당선자인 김일곤 시인께 축하의 말씀을 전한다.
- 심사위원: 김광기(글) 나금숙 박남희 송용구 이영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