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곡집(牧谷集) 이기진(李箕鎭)생년1687년(숙종 13)몰년1755년(영조 31)자군범(君範)호목곡(牧谷)본관덕수(德水)시호문헌(文憲)특기사항김진상(金鎭商), 김원행(金元行), 윤봉조(尹鳳朝) 등과 교유
牧谷集卷之一 / 詩 / 朝陽閣。敬次容齋,栗谷兩先生韻。幷後序
영조 | 14 | 1738 | 무오 | 乾隆 | 3 | 52 | 1월, 이조 참판이 되었으나 나아가지 않다. ○ 2월, 부제학이 되었으나 나아가지 않다. ○ 7월, 경상도 관찰사가 되다. |
영조 | 15 | 1739 | 기미 | 乾隆 | 4 | 53 | 7월, 부제학이 되었으나 나아가지 않다. ○ 8월, 공조 참판, 대사헌이 되었으나 나아가지 않다. ○ 10월, 형조 판서가 되었으나 나아가지 않다. |
原野蕭條滿目秋。爲寬愁緖强登樓。葵心更覺長安遠。坐愛朝陽遍一洲。
余小子以崇禎紀元後再戊午秋。忝叨嶺臬。行部至永川。宿客舘。偶於屛障間。得兩先生遺篇題郡樓者。樓之勝可知。時値大侵。殊無興趣。翌朝歸路。始登朝陽閣。眞絶景。而獨恨壁上無紗籠。以爲後觀。托主人使君。幷刻兩篇。系拙作于下。方揭諸楣間。亦所以著不肖墜落家聲云爾。
蓮軒雜稿跋[李光夏]
嗚呼。斯集卽我六代祖司諫贈領議政蓮軒公之所著也。五代祖左議政容齋公。蓋嘗跋其尾刊行矣。
歲丙子中秋之上旬。六代孫嘉善大夫。咸鏡道觀察使兼兵馬水軍節度使巡察使咸興府尹光夏。謹書。
李宜茂 司諫 연헌잡고(蓮軒雜稿) 昌寧成氏 校理 成熺의 女
李菤 節度使
李芑 領議政
李荇 左議政 文獻(勤學好問曰文 嚮忠內德曰獻)
李荇 | 1478 | 1534 | | | 德水 | 擇之 | 容齋, 滄澤漁叟, 靑鶴道人 | 文獻, 文定 |
李珥 | 1536 | 1584 | | 李見龍 | 德水 | 叔獻 | 栗谷, 石潭, 愚齋 | 文成 |
수곡집(睡谷集) 이여(李畬)생년1645년(인조 23)몰년1718년(숙종 44)자자삼(子三), 치보(治甫)호수곡(睡谷), 수촌(睡村), 포음(浦陰)본관덕수(德水)시호문경(文敬)특기사항송시열(宋時烈)의 문인
睡谷先生集卷之九 / 祭文 / 鏡城興惠祠監司李公 光夏 奉安祭文 癸未
惟我北土。最居絶裔。王澤旣遐。文敎莫逮。愷悌我公。標望淸朝。王簡公能。授以旌旄。公曰艱哉。維北民士。衣食孔窶。奚暇講肄。可哀煢獨。我其慈之。亦有俊秀。我其師之。屬當荐饑。一路顚連。倉無宿儲。民急倒懸。老幼喁喁。如魚在涸。公猶己飢。夙夜籌度。旣罄營帑。又驛以聞。貨販糶移。神施鬼運。旣均旣洽。以哺以耕。流逋還集。父子弟兄。擧免溝壑。惟我公賜。咸曰我公。寔我天只。公旣活我。謂我可牖。養士設廳。庖廩悉具。申以條約。課其勤逸。春秋群居。以講以述。咸思自奮。詩書是攻。變我荒陬。洋洋絃誦。召父之惠。文翁之化。淪我心骨。沒世不磨。村里追思。衿巾永賴。口碑騰頌。棠茇留愛。益土祠張。潮民廟韓。懷德報功。於禮則然。章甫協謀。氓庶子來。棟宇旣訖。穀朝斯差。籩豆靜嘉。侑以罍巵。公歸雖遠。公靈在玆。其始自今。欽祀千春。庶幾歆格。佑我北人。
惠洽活民。功深造士。永世留澤。追思不已。兩丁祝
퇴어당유고(退漁堂遺稿) 김진상(金鎭商)생년1684년(숙종 10)몰년1755년(영조 31)자여익(汝翼), 태백(太白)호퇴어(退漁)본관광산(光山)특기사항이천기(李天紀), 이기진(李箕鎭), 이규진(李奎鎭), 민우수(閔遇洙) 등과 교유
영조 | 14 | 1738 | 무오 | 乾隆 | 3 | 55 | 4월, 대사성이 되다. ○ 11월, 부제학이 되다. |
退漁堂遺稿卷之四 / 詩
戊午秋。李君範按嶺南時。
영조 | 14 | 1738 | 무오 | 乾隆 | 3 | 52 | 1월, 이조 참판이 되었으나 나아가지 않다. ○ 2월, 부제학이 되었으나 나아가지 않다. ○ 7월, 경상도 관찰사가 되다.목곡 |
영조 | 15 | 1739 | 기미 | 乾隆 | 4 | 53 | 7월, 부제학이 되었으나 나아가지 않다. ○ 8월, 공조 참판, 대사헌이 되었으나 나아가지 않다. ○ 10월, 형조 판서가 되었으나 나아가지 않다. |
投其永川朝陽閣詩。余旣和之。後三年庚申。尹季章 鳳五 守是郡。惜此閣頹廢。修而新之。名其門曰覽德。書來求扁字。余樂聞而書副。又成一絶。並前作錄。往要揭君範詩板之左。盖恨不獲登覽。竊願載名其間云耳。
영조 | 16 | 1740 | 경신 | 乾隆 | 5 | 57 | 6월, 이조 참의가 되다. ○ 9월, 부제학이 되다. |
鳳去臨臯問幾秋。朝陽名在但虛樓。使君自是丹山羽。雕飾朱欄映綠洲。
한수재집(寒水齋集) 권상하(權尙夏)생년1641년(인조 19)몰년1721년(경종 1)자치도(致道)호수암(遂庵), 한수재(寒水齋), 황강거사(黃江居士)본관안동(安東)시호문순(文純)특기사항송시열(宋時烈)의 적전제자(適傳弟子). 정호(鄭澔), 이여(李畬), 박광일(朴光一) 등과 교유
寒水齋先生文集卷之十四 / 書 / 答李君範 箕鎭○辛丑三月
경종 | 1 | 1721 | 신축 | 康熙 | 60 | 81 | 조상에 推恩贈爵이 내리다. ○ 8월 29일, 병으로 寒水齋에서 졸하다. ○ 輟朝하고 致祭하다. ○ 10월 16일, 忠州 北村 開川洞 束谷에 장사 지내다. |
從兄台鎭已闋三年之制。此時雖無禫變之節。內外服著復常當在何時。朔望節日。有奉出哭奠之儀。此則何如。
今日之無禫祭。只爲國恤內不可服吉故耳。士子則自祥日已服國制布麻。而婦人雖著微吉之服無妨也。朔望節日之奉出。禮無此文。而實時俗之所行。愚意數數奉出亦似未安。唯在本家量處。
국조보감 제61권 / 영조조 5 / 14년(무오, 1738)
○ 경상 감사 이기진(李箕鎭)이 조정에 하직 인사를 하려 할 때 아뢰기를,
“절의(節義)를 숭상하여 장려하는 것은 나라에 있어 소중한 바입니다. 고려 충신 길재(吉再)에게 시호를 내리고 치제(致祭)하여 격려하여 권면하는 방도로 삼으로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전답(田畓)을 내리고 대나무를 심어주어 포장(褒獎)하였지만 실의한 신복(臣僕)의 뜻을 확고하여 꺾을 수 없었다. 죽은 자도 알고 있을 것이니, 어찌 시호를 내리는 것으로 빛나게 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경연 신하가 아뢰기를,
“정몽주(鄭夢周)와 박상충(朴尙衷)도 모두 고려의 충신이었는데 아조(我朝)에서 시호를 내렸습니다.”
하자, 상이 그렇게 하라고 하였다. 이어 해조에 명하여 세 사람의 봉사손(奉祀孫)을 녹용하도록 하였다.
戊午秋 驪州金退漁子 歷訪時 贈 咸陽鄭熙運 詩曰
영조 | 4 | 1728 | 무신 | 雍正 | 6 | 45 | 3월, 종부시 정이 되다. ○ 8월, 부응교가 되다. ○ 12월, 부교리가 되다. |
噫噫戊申事 信義幾人存
作逆寧無漸 爲忠亦有源
討兇七條策 全節一方言
十載遲公議 余心政鬱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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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존중(李存中, 1703~1761)은 자는 경이(敬以), 호는 척재(惕齋)ㆍ하당(荷堂)이고, 광평대군(廣平大君) 이여(李璵)의 후예이다. 저서로는 《척재집(惕齋集)》ㆍ《국조명신록(國朝名臣錄)》 등이 있다. 본문의 ‘좌의정 형제’는 좌의정 김약로(金若魯, 1694~1753)와 호조 판서 김상로(金尙魯, 1702~1766)를 말한다. 1751년 2월 29일, 이존중이 대사간 때 상소를 올려 권신 김상로(金尙魯) 형제를 신임사화 당시의 적당(賊黨)이라 탄핵하였다. 김약로는 3월 2일에 교외로 나가 명소(命召)를 반납했다. 결국 영조는 이존중이 대신을 능욕했다는 죄명으로 이존중을 거제도로 귀양 보냈다. 본문의
‘격동(格洞) 상국(相國)’은 소격동(昭格洞)에 살던 김재로(金在魯, 1682~1759)를 가리킨다. 동년 3월 25일 인사에서 김재로를 다시 영의정(領議政)으로 삼았다. ‘삼령(三鈴)’은 우의정(右議政) 정우량(鄭羽良, 1692~1754)을 가리킨다. 정우량이 김약로 등을 변호하고 동년 3월 14일에 사직하였다. 《승정원일기》 영조 27년 2월 29일~3월 25일, 《영조실록》 27년 3월 2일~3월 25일. 이존중이 죽고 나서 정조(正祖)는 김상로 형제의 비리를 힘써 탄핵한 공로를 인정하여 그를 이조판서 겸 대제학에 추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