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하찮은 벗들과 놀기
중고서점에서 나의 오래된 시집을 발견할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누군가의 손때로 낡은 그것을 가판대에서 뽑아 들고 온갖 상념에 잠기곤 한다. 그러다가 나의 시집이 또 어느 사람에게 색다른 매력으로 다가갈 것이라는 데 생각이 미치면 나도 모르게 입가에 안도의 미소가 번진다.
빽빽이 들어선 서적들 틈을 비집고 나와 이제는 정말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넉넉지 못한 낯선 눈길과 손길을 마다하지 않고 맞이하는 나의 분신을 바라보고 있으면 애틋한 마음과 함께 시 쓰는 일에 새로운 의욕과 용기가 솟는 것을 느낀다. 세상에서 잊힌 것 같던 옛 작품이 누군가의 손에 들려 와 가난한 이들과 가깝게 사귀는 현장에서 나의 창작활동이 이전과는 다른 쓸모와 보람을 찾게 되는 것이다.
나에게 문학으로서의 시 쓰기는 실체의 존재성을 일깨우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특별히 남달리 미미하고 보잘것없어 눈에 띄지 않거나 쉽게 무심해지고 소외되는 대상들에게 스스로 얼마나 의미가 큰 존재인가를 깨닫게 하는 데 정성을 들인다.
이 하찮은 벗들은 앞으로도 줄곧 나의 시의 주인공만을 고집할 것이다. 그러니 이들과 한 몸으로 어울려 놀면서 일상에서 지치고 상처받는, 그러면서 사는 재미를 잃어가고 있는 그네들이 가만히 자기 자신을 들여다보며 위안을 받는 작품을 만드는 일에 열중하는 외엔 다른 방도가 없을 것 같다.
시 쓰는 일은 지극히 개인적이고 고단한 작업이다. 늘 감정을 절제하고 난해하거나 공허한 언어유희에 빠지는 것을 경계하면서, 복잡한 감정 속에서 떠오르는 비논리적이고 불완전하고 부정확한 이미지들을 생동감 있는 언어로 단순하고 군더더기 없게 표현하려고 애쓰지만 시 다운 시 한 편 얻는 것이 뜻대로 되지 않는다. 언제쯤이면 독자를 진정 깊은 시적 감동의 세계로 이끌 수 있을지 요원하기만 하다.
이즈음에는 간혹 잊고 지내던 그리움의 대상을 소환하기도 하는 이 행위가 점점 옅어져 가는 나의 색깔마저도 잡아놓지 못하는 헛된 일이 되기가 다반사인데, 이처럼 실속 없는 노역이 여전히 하루하루를 이끌어 주는 힘으로 요동치고 있으니 참으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지난 추석 부모님 뵈러 고향 선산을 찾아가는 길에서 만난 그 녀석이 생각나는 저녁이다.
자동차 펑크를 때우러 들어간 국도변 카센터에서 타이어 홈 속에 깊이 박혀 있던
녹슨 못 하나를 뽑아 들고 아직 젊어 보이는 사장이 의아해 하는 나를 향해 일갈한다
요것이 뭔 잘못 있나유
야 대가리 밟은 차바쿠가 문제지
대가리 건드려 봐
워디 안 서는 놈 있나유.
[출처] 인터넷 캡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