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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고: 청와대 경호실 20년-이효진
이 회고는 대열임관50주년 기념책자 (가칭: 대열 반세기 여정)에 수록할 동기생 현역시절의 자부, 즉 시대별 국가적 국방이슈와 관련해, 각자 어떤 역할과 공헌을 했었던 지에 대한 회고를 수록하는 일환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아래 글은 청와대 경호실로 갔던 동기생들 중 가장 오래 근무하면서 보람있게 이루어놓았던 일들을 담고 있어 전재합니다.
한 가지 덧붙이면 임관50주년 기념책자 수록 개인회고의 마감을 지난번 공지를 통해 최대 8월20일까지로 공지한 바 있어, 이후의 글들은 이곳 대열홈피에는 올려도 책자에 수록될 때에는 게재 자체가 어렵거나 내용의 상당부분이 축약될 수밖에 없음을 다시 한번 더 알리면서 모두 양지해주시길 바랍니다. -주(註) 편집위원 김명수-
♣ 청와대 경호실 20 년 회고
이효진
청와대 경호실로 바뀐 나의 길
육군 사관학교와 청와대. 이 두 요인은 내 인생의 전환점에 너무나 중요한 고리다. 이중 청와대 경호실에서 나는 한국 현대사중 가장 회오리가 심했던 시절을 책임 있는 사회인으로, 성실한 가장으로, 충실한 사명을 지닌 직장인으로 겪으면서 인생의 가장 황금기를 보냈다.
육군사관학교가 오늘의 내가 누리는 삶을 이끌어준 든실한 초석이 되었다면, 청와대는 그러한 기초위에 내 삶의 꽃을 피웠던 시절이 아니었을까. 육군사관학교를 마친 후 잠시 군에 머물다가 청와대로 와서 국가원수의 안전을 담당했던 이러한 인생역정을 겪으리라 누가 상상할 수 있었을까. 이렇게 나의 청와대 입문은 내 뜻과는 상관없이 또 다를 운명의 선에 의해 시작되었다. 운명이라 함은 전혀 꿈꾸지도 생각하지도 않았던 -머물더라도 잠간이라고 생각 했지만 - 청와대가 나의 반평생을 보낸 삶의 터전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나는 수많은 삶의 모습들을, 권력의 영욕과 부침을 ,다양한 사람들을 겪고 보았다.
때문에 경호실은 나를 성숙시키고 나를 발전 시켜준 인생의 도장이었다. 그래서 나의 청와대 시절은 어떤 곳보다 소중하고 의미가 깊다.
1978년 별정직 5급으로 시작한 청와대 경호실은 내 삶의 가장 소중한 시절을 불태웠던 곳이다. 그러나 1992년 김영삼 대통령 당선 때 나는 1급 기획처장으로 경호실을 물러 나왔다. 현역군인 신분으로서 근무했던 1974년부터 1992년까지 약 18년간의 경호실 근무였다.
퇴임한 나에게 주어진 자리는 국민체육공단 건설 본부장이었다. 당시의 인사 관행상 조금은 의외의 인사 조치였다. 그러나 그곳에서 나는 5년을 보내면서 세상의 또 다른 체험을 했지만 동시에 새로운 직장의 문화 속에서 아픔도 겪었던 시간이었다. 그리고 1998년 2월 김대중 정부(1998년 2월-2003년 2월)가 들어서고 나는 다시 경호실 차장으로 복귀하였다.
나는 경호실 근무 중 여러 분야의 근무를 두루 담당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경호실 속성상 쉽지 않은 일이었다. 일선 경호원, 상황실 , 교육과장, 경호계획과장, 전체를 조감하는 감사관, 기획처장 등 다양한 업무 경력이 어쩌면 1998년 김대중 정부가 시작되면서 차장으로 재 발탁 되었던 원인이 아니었나 생각한다. 그리고 2년간의 경호실 차장 재임 시 정말 원 없이 일하면서 마음속에 간직했던 결실을 맺었다고 생각 한다.
그러나 이것이 나 혼자만의 힘이었을까? 결코 아니었다. 많은 분들의 희생과 도움으로 나는 국가가 맡겨준 소중한 임무를 마칠 수 있었다. 부족한 내가 이런 엄청난 임무를 잘 마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던 수많은 분들에게 고마움을 느낀다.
나에게 주어진 마지막 기회 라는 생각으로
그런 각오로 나는 경호실 차장업무에 임했다. 사실 이전같이 많은 시간이 나에게 주어진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차장이라는 자리가 이미 정치적 위치였기에 언제든지 떠난다는 각오로 임해 나의 마음도 자유로웠다. 그래서 좀 더 신념을 가지고 충실하고 알차게 마지막을 장식하겠다는 자세와 못했던 일을 마무리 한다는 심정으로 임했다.
이때 경호실장은 육사 선배인 안주섭 실장으로 대화가 잘 통했고 의사소통이 잘 되었다. 안 실장은 나의 경호실 18년 경험을 소중히 여겨주셔서 나와 경호실 전체의 의견을 항상 경청하셨고 우리의 제안은 거의 통과되었다. 김대중 대통령 역시 경호실에 대한 신뢰가 깊어서 실현하고 싶었던 일에 더욱 날개를 달 수 있었다.
이런 든든한 배경 하에 시작된 차장 시절은 내가 경호실 근무 18년 동안 꼭 이루고 싶었던 일을 실현한 것으로 잊을 수 없는 일이 몇 가지 있다.
리더쉽 교육으로 흔들리는 기강을 잡아
첫째로 경호원들의 정신적 측면의 강화였다. 이는 평소 경호실에 강조된 사항이었으나 당시는 정권 교체로 인한 분위기 쇄신 차원에서 꼭 필요한 작업 이었다. 내가 이렇게 생각하는 배경에는 당시 김대중 정부의 탄생과 함께 공직사회에 불어오는 미묘한 분위기 때문 이었다. 김대중 대통령 당선은 우리나라 헌정사상 처음으로 이루어진 여야의 정권 교체였다.
동시에 5.16 혁명 이후 영남에서 지켜왔던 정권이 처음으로 호남 정권으로 넘어온 깊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 우리나라의 역사적 첫 여야 정권교체인 데다 지역적으로 오랫동안 소외감을 가졌던 호남정권의 탄생 이었다. 허지만 정치 상황은 만만치 않았다. 여소야대라는 부담스러운 국회 구성에다 김종필 씨와의 연합정권 성격 등으로 정정 자체가 불안 했고 언제든지 역풍을 맞이할 소지를 다분히 가지고 출발했다.
그 이유는 오랜 세월 한 지역에서 정권을 이어 받으면서 곳곳에 깊이 뿌리내리고 누렸던 기득권의 프리미엄 때문이라 생각된다. 이러한 기득권의 뿌리는 너무나 단단하여 김대중 대통령의 국정개혁과 변혁의 시도는 변변히 막혔다. 이러한 일이 자주 일어나면서 공직사회의 동요가 뚜렸했다.
새롭게 시작하는 정부로써는 큰 짐이었다. 예측할 수 없는 자신의 앞길에 복지부동 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눈치를 보는 미묘한 풍조가 공직사회에 만연되어 있었다. 경호실도 이러한 분위기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경호실은 대통령의 최측근에서 안위를 책임져야 할 임무를 담당해야 하므로 다른 공직기관과는 달라야 했다. 경호실의 모든 것이 바꿔져야 할 시점 이었다.
이럴 즈음 나는 안주섭 실장의 권고로 셀프 리더십 교육을 직접 받고 돌아왔다. 조직이 흔들리고 중심을 잡아주어야 할 그 시점에 ‘나부터 어떻게 변화 될 것 인가?’ 하는 셀프 리더십의 요지는 당시의 정신적 동요를 막는 좋은 계기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러한 교육을 도입함으로써 경호실 분위기부터 쇄신 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에 경호원 전원에게 상당기간에 걸쳐 교육을 받게 했다. 이는 당시 흔들리는 조직의 분위기를 공고히 하는데 고심했던 안주섭 실장과 나에게는 너무 좋은 결과를 가져왔다고 생각한다.
이런 의도로 시작된 새로운 리더쉽 교육은 경호원들의 자세 변화부터 의식 전환을 가져오는 계기가 되었고, 경호실은 안정적 내실을 기할 수 있었다. 정권 전환기에 경호실부터 안정적으로 자리를 잡을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교육의 덕분 이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리더십 교육은 경호실에 그치지 않았다. 경호실에 이어 정부 각 부처와 국세청, 철도청 등 공공 단체로 이어지며 교육의 파급효과를 가져왔다. 셀프 리더십은 미국 코비박사의 유명한 프로그램으로, 성공한 사람의 7가지 습관이 주 요지였다. 나중에 코비 박사는 김대중 대통령을 만나기도 했다. 이 교육을 전 경호원들에게 확산 시킬때 들어간 비용도 만만치 않았다. 비록 비용은 많이 들었지만 이 교육은 당초의 목적 외 에도 또 다른 파급효과를 가져왔다.
늘 긴장 속에 살아가는 경호원들이므로 자신의 업무에만 빠지다 보면 큰 스트레스로 변화에 둔감해지는 예가 많았다. 그러나 이러한 교육기회는 새로운 지식을 접하며 자신을 계발하는 신선한 자극제 역할도 했다. 바로 이런 것이 일석이조의 효과라고 하지 않을까.
이러한 교육 효과는 내가 퇴임 후에도 지속되어 오늘의 경호원들의 사고방식, 정서, 업무태도, 대민관계 등에 엄청난 변화를 가져 왔다. 물론 내가 재임 시에도 안주섭 실장은 경호실의 삭막하고 경직된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경호실뿐 아니고 청와대 주변에 쳐 있는 바리케이드, 벙커 등을 화대(花臺)로 바꾸어 시민들에게 부드러움을 선사하는 지혜를 발휘했다. 첩첩히 처진 바리케이드를 화대로 만들고 비상시에는 이 화대가 바리케이드 역할을 할 수 있게 했다. 안 실장은 군인 출신이지만 성격이 유연했고 미화에도 많은 관심이 있었다.
내가 퇴임 얼마 후에 당시 경호실 차장 주대준씨 초청으로 경호실을 방문 했는데, 이때 경호실의 분위기가 엄청나게 변화된 것을 느꼈다. 절도 있지만 겸손한 경호원들의 자세, 사무실은 정감 있고 개방된 환경으로 바뀌어 있었다. 잘 꾸며진 일반 사무실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각자의 책상 위에는 가족사진은 물론 꽃병, 인생좌우명 글씨 등으로 잘 꾸며져 있었다. 책을 보는 경호원 들이 유난히 많이 눈에 띄었다. 이런 자연스러운 분위기에서 스스로 일하는 분위기로 눈에 띄게 변화 되어 간다고 주대준 차장은 설명했다.
예전의 권력기관이라는 경직된 분위기가 자유스럽고 성숙되고 세련된 분위기로 바뀌어 있었다. ‘여기가 경호실인가?’ 할 정도였다. 퇴임 후에도 후임자 분들의 투철한 철학으로 경호원들의 정신자세가 꾸준히 변화되고 있다는 생각에 가슴이 뿌듯했다.
경호원을 특정직으로 신분 변환 시키다
두 번째로 경호실 차장으로 가장 보람을 느꼈던 일은 경호원 신분보장에 기여한 것이었다. 경호원 신분을 별정직에서 특정직으로 바꿀 때 심혈을 기울었던 일이다. 우리나라 특정직은 검찰, 판사, 군인, 경찰, 소방, 안기부, 감사원 등 전문직으로 인정되는 직종인데 경호원은 제외되어 있었다.
경호원은 어떤 돌발사태에도 목숨을 바쳐 국가원수와 가족을 보호하는 고도의 전문성이 필요한 직종이다. 그런데 별정직으로서의 경호원은 임면에 대한 확실한 보장이 없고, 경호라는 특수한 임무 임에도 업무상 상해를 입을 시에도 국가보훈을 받을 수 없었다. 국가공무원의 임무를 수행하고 있지만 처우는 요즘 말하는 비정규직 신분이었다. 국가원수의 안위를 책임져야하는 경호원으로서는 사기저하와 소속기관에 대한 소속감 부재, 임무에 대한 긍지감 결여가 걱정될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국가원수의 안전을 위한다는 자부심으로 버티고 있는 정도였다.
1992년 18년의 경호근무를 마치고 나설 때 이러한 불공정한 제도에 실질적 피해자인 나로서는 후배 경호원들만큼은 이런 불이익을 당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또 경호원들의 확실한 신분보장으로 국가원수의 보호에 최선을 다 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 주어야 한다는 것이 오랜 기간 지녀온 생각 이었다. 경호원의 신분보장은 나뿐이 아닌 경호실 전체의 오랜 숙원 이었다. 모두가 알고 있는 경호원들의 신분상 불이익을 해소하기 위해 그동안 경호실의 많은 분들이 노력했지만 번번이 좌절되고 말았다. 그래서 경호실 차장으로 복귀했을 때 이 문제해결에 집중했다. 물론 나 혼자만의 힘으로는 어림없었다. 당시 안주섭 경호실장의 이해와 경호실 전체 직원들의 도움, 김대중 대통령의 확고한 지지가 없이는 어려운 일이었다. 사실 경호원들의 이러한 불이익을 경호실 고위층이 모를 리 없었다. 그러나 경호실 최고 책임자는 법과 규정에 메이지 않고 임면에 대한 여탈권을 쥐고 있어야 그들에 대한 통제가 가능하다고 생각 한 것 같다. 그러나 국가원수를 최 일선에서 보호하는 것이 경호원 임무인데, 이들이 별정직으로 신분상의 불공정과 유고 시 자신의 앞길에 대한 확실한 보장을 가질 수 없다면 업무의욕이나 사명감이 떨어지는 것은 자명한 일이 아니겠는가. 국가 원수를 보호해야하는 만큼 경호원 들은 늘 위험에 노출 되어 있었다. 이런 경호원들이 마음 놓고 경호임무에 최선을 다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업무수행 중 당한 부상이나 유고 시 정당한 대우를 받을 수 있는 처우 개선 이 절실히 필요 했다.
이렇게 야기된 경호원의 신분보장 문제는 경호실 모든 직원들의 오랜 숙원 사업이었으나 단순한 문제가 아니었다. 법률을 개정해야 하고 이를 위해 많은 국회의원들과의 협의과정 등을 거쳐야 했다. 그러나 많은 분들의 도움이 있어 별정직에서 특정직으로 두 계단 상승한 직급으로 변경할 수 있게 되었다. 특별히 국회의원들의 적극적인 지지도 잊을 수 없다.
관계 국회의원들을 찿아가 의논하면 “왜 여태까지 이런 것을 고치지 않았는가?” 하면서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도와주었다. 이렇게 해서 초고속으로 1년 만에 법률이 통과되었다. 목숨 걸고 중요한 임무 수행에 최선을 다 하는 경호원들이 별정직에서 특정직으로 전환됨으로써 신분보장과 업무 수행상 상해 시 국가보훈을 받을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다. 경호원 들은 소속감과 임무에 대한 긍지를 높일 수 있었고 사기 고양에도 절대적 힘이 되었다.
이 일이 가능하게 된 데는 많은 분들의 수고와 노력이 있었다. 경호원의 처지를 잘 직시 하고 큰 지원을 보내주신 안주섭 경호실장과 김대중 대통령의 적극적인 지지가 큰 힘이었다. 나는 18년 경호실 근무로 이러한 실상을 누구보다 잘 알아 조그만 화롯불을 붙였을 뿐 이다. 또 전 직원이 혼연 일체가 되어 적극적으로 호응하고 열심히 뛰어 주어 이 일을 이루어 내었다. 그때 함께 수고한 모든 분들에게 다시 한 번 고개 숙여 감사드린다.
극강의 훈련을 위해 훈련장을 마련하다
세계에 유례가 없을 정도로 한반도 긴장상태를 조성해 가는 북의 악랄함 앞에 남북 간 초미의 대결상태는 갈수록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지경으로 변해갔다. 그래서 대통령의 안위를 지켜야 할 경호원들의 자세나 사명은 더욱 중요 하다.
대한민국 경호원들의 마음자세나 신체의 강건함은 그 어느 국가보다 더 뛰어 나야 한다. 이런 차원에서 나는 재임 시 경호원들에게 확고한 정신자세를 갖추고 뛰어난 경호기량을 위한 방안을 강구했다.
가장 필요한 것은 경호원에게 체계적이고 지속적인 훈련 보강을 위한 전용 훈련장 마련이었다. 이스라엘 방문 시 그들의 잘 정비된 훈련장에서 혼신을 다해 훈련받는 모습을 보고 이를 즉각 우리 경호원들에게 적용했다. 그동안 경호원 교육은 타 군 경 기관에 의뢰하여 실시하는 위탁 훈련이 주루였는데, 즉각반응 훈련이나 실전대비 훈련 등은 잘 정비된 우리들만의 전용 훈련장에서 집중 훈련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이를 김포에 마련했다. 그리고 신체와 정신본능을 초월하는 극강의 훈련을 다 시켰다. 물론 공채로 들어온 초기 경호원들부터 혹독한 훈련을 거친다. 이들 신임 경호원 들은 공군의 초 내성훈련, 육군의 공수훈련, 해군의 UDT훈련 등 강한 정신력 배양을 위한 혹독한 훈련과정을 다 받는다. 초기 경호원들에게는 이러한 강한 정신력 배양에 많은 중점을 두지만, 기존 경호원들에게는 급박한 유사 상황을 설정하여 철저한 대응 훈련을 한다. 개인 호신술, 무도 등은 기본이며 차량운행 시 국가원수에게 위해를 가할 다양한 상황을 설정하고 대비하는 훈련을 한다. 예를 들면 차량운행 시 저격을 상정하고 저격수에 대한 대응사격이라든지, 차량에 위해를 가하려는 적의 기도를 차량으로 분쇄하여 보호하는 훈련 등 실전을 방불케 하는 훈련을 한다.
이때 경호원들의 차량운행 솜씨는 신의 솜씨를 연상케 한다. 위해를 가하려는 차량을 막기 위해 360도 회전하여 이들을 저지 한다든지, 돌진하는 차량을 막기 위한 저지 운전 등은 고도의 훈련을 필요로 한다. 이러한 훈련을 다 소화해 내는 우리 경호원들의 수준은 세계 최강의 이스라엘, 미국. 경호원의 실력에 조금도 뒤지지 않는 고난도 의 기술과 능력을 갖추고 있다. 이러한 훈련의 특징은 수백 번 똑같은 상황을 주어 되풀이 하는 것이다. 머리로 생각할 틈도 없다. 조건반사적이며 본능을 초월 한다. 예를 들면 보통 누구나 총소리가 나면 몸을 숨기는데 경호원은 조건반사적으로 총소리를 향해 몸을 던지고 수류탄도 몸으로 덮친다. 훈련에 임하는 경호원들의 날랜 솜씨는 신의 경지라 느켜질 정도다. 혹독한 훈련의 결과 어떤 상황에 닥치면 본능을 넘어서는 능력을 발휘하여 적에게 강력한 타격을 주고 제압한다. 평상시 무도 훈련도 경호 무도로 즉각 대응훈련을 한다. 이러한 능력을 배양할 수 있는 것은 새로 만들어진 경호훈련장 덕분이라 생각한다.
경호훈련장은 차량 습격에 대비한 훈련까지 하기 때문에 공간도 넓다. 새로 대통령이 취임하면 경호원들은 이런 훈련의 시범을 보인다. 청와대에서 시범을 보이는데 대통령도 이를 참관한다. 김대중 대통령도 시범을 참관한 후 “당신들을 믿는다.”며 큰 격려를 해 주셨다.
이런 강하고 혹독한 훈련을 마쳐야 비로서 경호원 역할을 감당할 수 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엄청난 양의 훈련, 정신무장까지 다 포함된다. 혹독한 육체 훈련과 정신 훈련으로 하루가 달리 변해가는 경호원들의 모습을 보는 것 또한 나의 보람이고 기쁨이었다. 내가 경호원들의 강력한 정신자세와 혹독한 훈련을 강조한 것은 무엇보다 이스라엘 경호원들의 국가 보위에대한 강한 심념과 집념, 임무 수행을 목숨과 바꿀 수 있는 정신적 강인함을 목도하고 난 후였다. 그들의 모든 것은 나에게는 충격이었다. 그곳에서 배우고 느낀 것을 나는 우리 경호실에 그대로 적용하려고 노력했다. 특히 경호원 에게는 임무수행을 위한 강인한 정신력과 철저한 대응훈련 등이 필수라는 생각이었다. 강인한 정신력이 밑바탕 되어야 어떤 상황에서도 이를 이겨낼 수 있다. ‘정신이 서면 모든 것은 된다.’ 는 것을 어떻게 구체화 하는가가 이스라엘을 다녀온 이후 줄곧 나에게 던져진 화두였다.그리고 경호실의 모든 면에 이를 적용하려고 노력했다.
제 3회 아셈(ASEM) 개최 성공으로 경호실 격을 높이다
경호실 차장 시절 또 하나의 보람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국제적 큰 행사를 경호실에서 담당할 수 있게 한 것이다. 김대중 시절인 2000년 10월 20일부터 21일 서울에서 개최한 ASEM (아시아유럽정상회의) 회의부터였다. ASEM은 1996년 태국 방콕에서 처음 연 정상회의였다. 주요 회원국은 동남아세아 국가연합 (ASEN) 7개국과 대한민국, 일본, 중국. 유럽연합 15개국으로 2년마다 한 번씩 아시아와 유럽을 오가면서 개최하는데 김대중 대통령 시절 서울에서 열렸다. 이런 국제행사는 이전에는 안기부에서 총괄 담당했고 외무, 국방, 내무부 등 관련부서가 지원했다. 이런 국제 행사에서 경호실은 각국 국가 원수 경호 담당이 주 임무였다. 하지만 경호실의 꾸준한 성장과 강한 훈련으로 역량을 키워 왔기에 우리가 이를 맡을 수도 있겠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그동안 경호실은 시행착오가 있으면 이를 거울삼아 꾸준히 제도적 개선과 보완을 해 왔고, 공채로 자질이 우수한 경호요원들을 확보했다. 또 전용 훈련장에서 강한 훈련을 통해 그 어느 때보다도 완벽한 경호체제를 갖출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거기에 그동안 해외 세미나 들을 통해 다양한 선진국의 기법도 배웠다.
그래서 경호실 에서도 이 일을 담당 할 수 있는 충분한 인프라가 되어 있다는 판단이 들었다. ‘국제회의 경호임무를 우리가 총괄해보자.’ 하고 자체 의견을 모아 준비계획을 마련했다.이어 총리실에서 관계부처 사람들에게 내가 브리핑하며 준비에 만전을 기했다.
이렇게 하여 서울에서 열린 제3차 ASEM 회의 준비는 경호실에서 총괄 기획했다. 이후 국제 VIP 행사는 모두 경호실에서 총괄하고 있다. 그러나 시작과 준비는 내가 했지만 실제 행사는 나의후임 차장이 이어 받았다. 아셈 회의 10개월 전 나는 2년의 경호실 차장 임무를 마치고 한국 산업단지공단 이사장이라는 새로운 터전으로 옮겨야 했기 때문이다. 이 임무를 준비 하는 즈음 나는 경호실 직원들에게 수시로 정신자세를 강조했다. “이 일을 잘 수행 해야 경호실 역량을 인정받는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가장 우수한 자질과 첨단의 장비,탁월한 업무 수행능력을 갖추고 있다.” 고 격려를 했고 내가 떠난 뒤에도 남아있는 우수한 후배 경호원들이 이를 완벽하게 수행했다.
사실 국제 행사시 마다 개최국이 갖는 가장 큰 애로는 각국 수뇌들의 경호 문제였다. 보통각국 수뇌들의 자체 경호원들에게 많은 불만이 쏟아져 나온다. 수상, 대통령 일정이나 동선 등에 혼란을 가져오는 경우가 많은데 우리에게는 세계가 부러워하는 IT 기술로 잘 정비된 상황실 체계가 구비되어 있었다. 그래서 각국 대표들의 동선 관리나 통제에 큰 도움을 주었고 모든 이들이 이를 부러워했다. 상황실에서의 완벽한 통제는 해외 방송매체에 보도되기도 했다. 아셈회의를 마치고 각국 수뇌들에 대한 경호가 백미였다고 많은 분들이 칭찬했다. 얼마나 자랑스러워 운지 모른다. 이제 한국 청와대 경호실이 아닌 세계적인 경호실로 도약하고 인정받는 계기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성공적인 국제행사 진행으로 또 하나 얻을 수 있었던 것은 경호요원들의 마음자세였다. 자신도 모르는 엄청난 자부심과 긍지를 가지게 되었다. 모든 사람들에게 경호실 격을 높혔다 는 칭찬을 많이 들었다한다.
이는 역대 선배 경호원들의 강한 책인감과 투철한 임무수행 능력 등에서 그 뿌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또 획기적인 공채 제도를 시행한 결과 우수한 인재들이 선발된 것도 성장의 원동력이 되었다. 공채 출신 경호원은 탁월한 외국어, 컴퓨터 실력 등을 갖춘 우수 인재들이 대거 선발되었다. 이러한 우수한 자질을 가지고 선발된 경호원들이기에 엄격하고 혹독한 훈련은 더 큰 효과를 보아 완벽한 경호원으로 거듭났다. 그래서 나는 이들의 역량을 굳게 믿었다. 이렇게 정비된 체제, 우수한 인력 등 인프라가 있었기에 ‘ 반드시 할 수 있다. 아니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우리는 해 낸다.’ 는 각오로 준비했다. ASEM 회의 이후 경호실의 새로운 리더쉽이 확보되고 위상이 달라졌다고 한다.
경호실을 마무리할 시점에 이러한 일을 감당할 수 있어 큰 보람을 가지고 있음에 늘 감사하고 있다. 20년 동안 경호실 경험을 차장 2년 동안 어느 정도 마무리 하고 나온 기분이라면 좀 지나친 생각일까. 이러한 나의 보람은 함께 참여한 모든 분들의 노력과 참여에 더욱 감사한 마음을 전하고 싶다.
마침내 경호실을 물러나다
이렇게 경호실 차장으로 2년을 눈코 뜰 새 없이 보냈다.
그 동안 나름대로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 20후반에 들어온 청와대 경호실. 이제 나도 어느세 희끗희끗한 노년에 접어들고 있다. 김대중 대통령하의 경호실 차장 2년으로 나는 마음에 품고 있었던 일은 다 했다고 생각을 했고 나는 정권 중반기에 들어설 즈음 새로운 경호실의 분위기 쇄신 차원에서 경호실을 물러 나왔다. - 끝 -
2021.8.21. 이효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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