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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022환언(강석준집사님 정리)
요 8:31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요 8:32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기도) 하나님 아버지! 오늘도 우리 인생을 부르셔서 하나님의 계시를 주시려고 성령으로 역사해주심을 감사합니다. 오늘도 우리 하나님 앞에 나와 겸손히 영생을 얻으려고 믿고 순종하는 우리 성락인들, 베뢰아 사람들에게 크신 은혜 베풀어 주시옵소서. 예수 이름 받들어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하나님의 의도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이를 이름 하여 베뢰아라고 불러왔다.
지난 60년동안 모든 핍박과 어려움을 다 견디면서 왔다.
나무도 60년이 되면, 엄청나게 큰 고목이다.
이런 고목을 뿌리 채 뽑으려고 한다든지, 부정하면 어떻게 할까.
우리 성락 교회는 오십년이 넘었다.
나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그 많은 조롱과 핍박을 다 듣고, 견디면서, 두려워하지 않고, 50년을 지켜왔다.
지난 50년 동안 하나님은 내 안에 부어주신 하나님의 진리와 은혜의 복음을 다 쏟게 하셨다.
내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주의 종이 될 때는 성경을 75독 했지만, 그것은 하나의 자료들, 비유였다.
이것들을 한순간에 조립하여, 내 심령에 넣어주시고, 이 연약하고, 배우지 못한 사람의 입술을 통해 쏟아내기 시작했다.
그것이 벌써 50년이다.
처음에는 내가 공부하지 못한 무식한 사람이었지만, 그 다음 꾸준히 공부하고, 열심히 내 지성을 키우면서도, 한번도 ‘하나님의 의도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변하지 않았다.
62년도에 목숨 내놓고 시작한 것이 그대로 온 것이다.
나는 김성현 목사를 신뢰한다.
그가 정말 아버지가 가꾸어 온 50년의 깊은 뿌리를 고주박이로 만들지 않고, 그 위에서 자란 큰 나무가 되길 바란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통해서 하신 일을 기억해 보라.
골리앗을 대장으로 해서 블레셋이 이스라엘을 위협할 때,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울왕은 벌벌 떨고 후퇴했다.
이제까지 승승장구하던 사울왕이 쫓기는 것을 보고, 아버지의 양을 키우던 목동, 다윗이 일어나서, 블레셋과 골리앗을 향해 외치고 나간다.
너희는 큰칼과 갑옷을 입고 나왔지만, 나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나간다고 하였다.
그래서 물맷돌만 가지고 나갔다.
모든 것이 절대적으로 연약하지만, 그는 하나님이 주신 큰 담력을 가지고 나갔다.
그 때까지 블레셋과 골리앗이 볼 때, 얼마나 가소로울까.
골리앗의 키는 현대기준으로 3미터 가까이 된다고 한다.
골리앗이 큰칼을 차고 앞에 나왔을 때, 다윗은 어린 소년이었다.
얼마나 우습겠는가.
그러나 다윗은 지금 장난하러 나간 것이 아니다.
그 많은 블레셋 군대를 향해 혼자서 싸우러 나간 것이다.
그 대장 골리앗을 향해서, 싸우러 나가는 것이다.
이것이 동화가 아니다.
이스라엘 역사에 기록된 실화다.
그는 자기 아버지의 양을 돌보면서, 양을 지키기 위해 훈련했던 물맷돌을 휘두른다.
내가 어렸을 때도 많이 했다.
손으로 던지는 것보다 두 배 이상은 멀리 나간다.
아마 골리앗이 볼 때는 어린아이가 재롱떠는 것 같이 보였을 것이다.
그리고 이제 사울왕도 물러났고, 어린아이가 나왔구나 비웃었을 것이다.
그러나 다윗은 장난하는 것이 아니다.
자기의 직분을 따라서, 익혔던 자기의 것으로 하나님을 의지해서 전투한다.
그리고 마침내 그 물맷돌은 골리앗의 이마에 떨어져, 그 우람한 골리앗 장군은 나가떨어졌다.
그 뒤에 있던 블레셋 군대가 얼마나 놀랐겠는가.
다윗은 그 뒤에 둘러싸고 있던 수많은 블레셋 군대를 두려워하지 않고, 넘어진 골리앗에게 가서 골리앗의 칼을 뺴어 들어, 골리앗의 목을 잘랐다.
나는 항상 그 생각을 한다.
골리앗은 많은 훈련을 했고, 그런 지식과 능력이 있고, 경험이 있었다.
그러나 다윗은 전쟁의 경험이 없었다.
양을 키우던 목자다.
내가 60년 전에 출발할 때, 그와 똑같았다.
나는 그 때도 그것을 생각했다.
감리교의 종교재판은 엄격하다.
그냥 몇 사람이 아니라, 감리교의 정회원이 나온다.
감리교의 정회원은 전도사로부터 17년을 계단을 올라간 사람이다.
시험보고, 논문 쓰고, 기다려 올라간다.
그 이상의 거물 목사들이다.
감리교의 감리사가 되려면, 십칠 년 이상 되는 정회원이어야 한다.
그 때, 나는 서리(임시)전도사였다.
서리 전도사로서 그들 앞에서 섰을 때, 상상해보라.
오늘날처럼 어른을 무시하는 시대의 사람들은 생각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 때는 나이 한살만 더 먹어도, 굉장히 두려워하고, 어려워했다.
그런데, 이것은 공식적으로 정회원들과 서리전도사가 재판에서 만나는 것이다.
서리는 아무런 경력이 되지 않는다.
나는 두 번 이나 그런 종교재판을 받았다.
이것은 영적으로 완전히 사형선고를 받는 것이다.
나는 거기서, 침례에 대해 강력하게 주장하였다.
그리고 거기서 심판을 받고, 감리교를 떠났다.
이제 나는 받아줄 곳이 없었다.
그래도, 광야에서 천막을 치고, 내 속에 부어주신 하나님의 진리를 쏟아부었다.
그 이적과 능력은 엄청났다.
내가 체험한 이적들을 일일이 간증하지 않는 까닭은 일반적으로 예수 믿는 자들에게 당연히 따라야 할 일이기 때문이다.
나만이 그 일을 하는 것처럼 나타내지 않으려고, 그 어렸을 때도 그렇게 했다.
서리전도사마저도 끊기고, 그저 전도인이 되었을 때, 똑같은 심령으로 했다.
김기동목사는 죽은 자도 살리고, 앉은뱅이도 일으키고, 귀신도 쫓아내는 큰일을 했다는 전설의 존재가 되지 않으려고 나와 똑같이 당신도 할 수 있다고 하였다.
내가 땀을 흘릴 때, 당신이 땀을 흘리지 않았기 때문에 못하는 것이지, 할 수 있다고 부탁한 것이다.
내 이후에 그런 일을 하는 자가 없으면, 나는 전설의 존재가 된다.
그러나 내 이후에도 똑같은 일을 하면, 보편적인 표적에 불과하다.
주님은 내가 하던 일을 나를 믿는 너희도 할 것이요, 이보다 큰일을 하리라고 하셨다.
성락교회 위에 베뢰아, 베뢰아 위에는 시무언이 그 지조가 있었다는 것을 여러분이 꼭 인정하고, 잘 알아주기 바란다.
내가 장로교에서 대학원까지 10년간 신학을 했으면서도 왜 장로교 간판을 붙이지 않고, 침례교에 있었으면서도, 침례교에 머물지 않았는가.
이는 내가 감리교에서 투쟁하다가 심판을 받았던 것처럼 내 지조가 흔들리지 않는 것이다.
지난번에 배웠지만,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언약을 하셨기 때문에 아브라함을 통해서, 이삭, 에서로 이어져야 한다.
이삭의 아들, 에서가 당연히 이삭의 뒤를 이어야하는데, 에서가 하나님의 약속된 복을 경히 여겼다.
그래서 야곱에게 복이 당연히 가는데, 야곱은 에서의 약점을 자기가 이용했다.
야곱은 형을 속이고, 아버지를 속였다.
에서가 하나님이 주신 복을 경히 여길 때는 야곱은 쌍둥이니까, 그냥 자기 차례가 된다.
야곱이라는 말은 형의 발꿈치를 잡고 나왔다는 뜻이다.
그래서 가만히 있어도 올 텐데, 상대편의 약점을 이용했다.
그래서 팥죽 한 그릇으로 에서를 속이고, 아버지를 속이고, 나중에는 얍복 강가에서 하나님(천사)을 기어이 자기 고집으로 꺾었다.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야곱의 뜻을 관철하고 말았다.
하나님이 네 고집이 이겼다고 하시고,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주셨다.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이 분명히 역사적으로 시작했다.
이는 하나님의 의지를 꺾었다는 뜻이다.
오늘날 사람들이 이것을 좋게 보고, 야곱처럼 하나님도 이겨야 한다고 한다.
이런 무서운 오해를 하고 있다.
오늘날 현대교회는 이스라엘을 편든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아니라, 야곱을 편드는 것이다.
야곱은 에서와 다른 몸이 아니라, 한 몸이다.
한쪽이 안 받으면, 당연히 받을 것을 야곱이 형을 속이고, 아버지를 속이고, 얍복 강가에서 하나님의 의지를 꺾고, 제 고집대로 하였다.
이것을 영적으로 생각하라.
내가 하나님을 이겼다는 것이 맞는가.
바벨탑은 당시 언어가 하나고, 구음이 하나이므로, 노아의 후손들이 탑을 쌓았다.
하늘에 닿도록 탑을 쌓아 하나님과 겨루자고 한다.
언어가 하나니까, 통일적이다.
노아 홍수 이후에, 노아의 후손들이 어떻게 일하는가 하나님이 보셨다.
비록 노아의 홍수가 있을지라도, 창대하고, 번성하라, 땅에 충만 하라 하신 명령은 살아있다.
그런데, 바벨탑은 그것을 부정하는 것이다.
이것이 인본주의다.
민주주의라는 것이 인본주의다.
우리는 신본주의라고 하고, 하나님의 뜻 대로라고 한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자만이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지, 내 뜻대로 들어갈 수 없다.
강도가 십자가에 달려, 자기 뜻대로 들어갈 수 없기 때문에, 나를 기억해달라고, 당신의 뜻대로 나를 도와주소서, 당신의 뜻에 맡긴다고 하였다.
그런 자를 데려가시는 것이다.
오늘 현대교회가 이스라엘을 편들고, 이스라엘 쪽에 섰다.
이스라엘은 야곱의 자손이다.
곧 하나님을 꺾은 야곱의 자손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언약은 영원한 언약이다.
시 105:5 그 종 아브라함의 후손 곧 택하신 야곱의 자손 너희는 그의 행하신 기사와 그 이적과 그 입의 판단을 기억할지어다
시 105:6 그 종 아브라함의 후손 곧 택하신 야곱의 자손 너희는 그의 행하신 기사와 그 이적과 그 입의 판단을 기억할지어다
시 105:7 그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이시라 그의 판단이 온 땅에 있도다
시 105:8 그는 그 언약 곧 천 대에 명하신 말씀을 영원히 기억하셨으니
시 105:9 이것은 아브라함에게 하신 언약이며 이삭에게 하신 맹세며
시 105:10 야곱에게 세우신 율례 곧 이스라엘에게 하신 영영한 언약이라
변치 않는 분이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자기 의를 가지고 계시다.
하나님이 변하신다면 의가 없는 분이다.
변하지 않기 때문에 의로운 분이시다.
그래서, 하나님의 약속은 지켜간다.
시 105:11 이르시기를 내가 가나안 땅을 네게 주어 너희 기업의 지경이 되게 하리라 하셨도다
시 105:12 때에 저희 인수가 적어 매우 영성하며 그 땅에 객이 되어
시 105:13 이 족속에게서 저 족속에게로, 이 나라에서 다른 민족에게로 유리하였도다
아브라함의 자손이 적을 때는 수가 적으니까, 여러 곳을 거치며 인구가 늘어나게 하셨다.
그러다가, 애굽에 가서 백만 명으로 민족의 구실을 할 수 있을 때, 내 백성이라 하시고, 끌어내셨다.
이는 하나님이 약속을 지키신 것이다.
야곱이 얍복 강가에서 하나님을 이겨서 따낸 승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원한 언약이다.
이것을 겉 넘지 말라.
그런데, 사람들이 야곱이 신앙이 좋아서, 기어코 하나님의 의지를 꺾고, 얻어낸 복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이다.
인류가 죄인이 되었어도, 하나님의 언약을 위하여, 자기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아 피 흘리게 하시면서 까지 자기 언약을 세우신다.
피 없이 세운 언약이 없다.
하나님의 첫 언약도 피로 세우셨고, 새 언약도 피로 세우셨다.
이렇게 하나님은 자기 언약을 지키기 위해, 자기가 피를 흘리시면서까지 역사하신다.
그 다음에 이스라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여호와)이 왕 노릇하는 것을 불안 해 했다.
그래서 하나님이 없는 이방민족처럼 왕을 달라고 구하였다.
하나님이 이것을 너무나 실망하셨다.
그렇게 세운 것이 사울 왕이다.
이때부터 하나님이 왕이 아니고, 사울이 왕이다.
그런데, 사울 왕이 다 죽이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불순종하고, 좋은 것은 하나님께 드리겠다고, 살려놓았다.
제사는 제사장이 하게 되어있다.
사무엘도 제사장이다.
제사장을 초월해서, 사울 왕이 제사를 예비한다.
사무엘이 저 짐승의 소리가 무엇이냐고 사울 왕에게 물으니까, 하나님께 감사하는 제사를 드리려고 제물을 준비했다고 한다.
그 때, 사무엘이 사울 왕에게 “왕이시여, 당신이 하나님을 거역하고, 하나님의 뜻을 무시하고, 이렇게 하였으니, 하나님도 당신을 버리셨습니다.”라고 했다.
사울 왕을 세웠지만, 사울왕도 결국 버림받았다.
사울왕은 베냐민 지파 사람이어서, 베냐민 지파도 왕손이다.
사울이 제하여지고, 미리 말씀하신대로 유다지파에게서 다윗을 데려다가, 사울이 세운 왕의 나라를 잇게 하였다.
마태복음1장에는 다윗부터 시작하지만, 다윗은 나라를 세운 사람이 아니다.
사울이 왕의 나라를 세웠다.
다윗은 사울이 세운 왕위를 물려받은 것이다.
사울왕의 딸 미갈이 다윗의 아내가 되어, 다윗은 사울의 사위로서 계보를 잇는다.
다윗이 유다의 혈통이지만, 사울왕의 딸에게 장가가므로, 그는 유다를 떠나, 사울의 모든 지위와 권한을 잇는다.
이스라엘은 다윗의 왕국이 아니라, 사울왕의 왕국이다.
이미 처음부터 아비를 속이고, 하나님을 꺾고, 마침내 하나님을 부정한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없는 나라가 되었다.
그러니까, 바벨론에게 침략당해도, 하나님이 말리지 않으시고, 큰 나라들에게 침범을 당해도, 하나님이 관심을 두지 않으셨다.
이제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아무 기대도 하지 않으시고, 오직 하나님의 언약만 지킬 뿐이다.
이스라엘 왕위가 끊기고, 14대가지나 요셉이라는 남자가 마리아에게 장가간다.
요셉은 다윗의 자손이지만, 그냥 평민, 목수다.
나사렛은 마리아의 고향이다.
요셉은 마리아에게 장가가서, 나사렛에서 뿌리를 내린다.
다윗은 유다자손인데, 베냐민의 왕위를 얻기 위해 장가갔고, 이와같이 요셉은 마리아에게 장가간다.
마리아는 솔로몬의 형, 나단의 후손이다.
나단은 다윗에게 아들이지만, 이미 다윗은 자기의 계보를 다 만들었기 때문에, 다윗의 후손이 아니라, 이새의 뿌리로 시작한다.
예수가 이 가운데서 오셨다.
예수는 다윗의 자손이 아니라, 오직 이새의 뿌리다.
마태가 쓴 마태복음은 유대인을 향해서 쓴 것이다.
유대인이 예수를 너무 거부하기 때문에, 유대인들에게 예수를 접근시켜서, 소개하는 것이다.
마가복음과 다른 점이 그것이다.
마가는 직접적으로 예수로부터 시작한다.
그러나 마태는 다윗부터 시작한다.
성경은 이새의 뿌리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다.
다윗의 가지에서 난 것이 아니라, 이새의 뿌리에서 한 새싹이 나온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자기가 하신 약속을 지키신다.
이삭에게서 한 씨가 나오리라.
이는 마귀를 멸할 자다. 대적의 문을 밟는다.
음부의 대문을 부수는 자다. 마귀의 권세를 부수는 자다.
그가 나올 것이라는 약속은 절대로 변치 않고, 그 약속을 지켜서, 이스라엘 땅에서 나오지만, 다윗의 왕조와는 관계없는 나단의 뿌리에서 나온다.
다윗왕의 아들, 솔로몬, 르호보암, 이렇게 왕들의 계보가 있지만, 나단은 나단 이름만 있고, 그 후손 이름이 따로 나오지 않는다.
누가복음에만 처음 나온다.
이렇게 땅속에 들어가 있으니까, 아무도 못 본다.
하나님이 사울 왕 때 이미 떠나셨다.
결국 다윗왕조도 우상 숭배하는 나라 바벨론에 의해서 다 없어졌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메시야를 기다린다.
메시야는 구원자라는 뜻인데, 그리스도라는 말이다.
메시야를 기다리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이는 다윗 왕을 모델로 한, 다윗 왕과 같은 사람이 와서, 구원해주길 바라는 것이다.
사울 왕이 죽은 후에, 다윗이 왕이 되어, 망했던 이스라엘을 구원하듯이, 다윗 같은 왕을 기대한다.
메시야는 다윗 같은 왕을 말한다.
그리스도는 헬라의 표현이고, 메시야는 히브리 표현이다.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 헬라식으로 읽지 말고, 히브리식으로 읽어야한다.
그런데, 현대인은 예수를 자꾸, 마태가 주장하는 것처럼 다윗의 자손으로 묶는다.
예수께서 요한에게 침례를 받으시므로, 하나님은 분명히 선을 그으셨다.
다윗의 자손이라 하지 않으시고, 내 사랑하는 아들, 내 기뻐하는 자라 하셨다.
이때부터 다윗의 자손으로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아들로서 생애를 갖는다.
소경이 다윗의 자손 예수라고 했다고 해서, 소경이 주장한 말이 진리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소경은 사람들의 말대로, 다윗의 자손 예수라고 부른 것이다.
다윗의 자손이 무슨 큰 위력이 있거나, 구원하지 못한다.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자가 우리를 구원하셨다.
요 14:21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요 14:22 가룟인 아닌 유다가 가로되 주여 어찌하여 자기를 우리에게는 나타내시고 세상에게는 아니하려 하시나이까
요 14:23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저에게 와서 거처를 저와 함께 하리라
요 14:24 나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내 말을 지키지 아니하나니 너희의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니라
요 14:15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요 14:16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요 14:17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신다.
가룟 유다처럼 타락하고, 범죄 했어도, 그 제자들을 끝까지 사랑하신다.
하나님은 처음과 나중, 알파와 오메가, 처음부터 끝까지 여일하시다.
우리를 구원하신 것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구원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아바’는 하나님으로 봐야지, 어떤 혈통과도 관계없다.
그런데, 오늘 현대교회는 이스라엘과 연을 맺으려고 한다.
이스라엘 지도자들에게 예수는 화 있을진저라고 하셨고, 세리와 창녀가 하늘에 먼저 들어간다고 하셨다.
그런데, 오늘날 현대교회는 이스라엘에 대해 아주 부러움을 갖고 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건국사를 교리사로 여긴다.
우리 베뢰아는 그렇지 않다.
세례는 주후300년경, 로마 카톨릭 교회가 설립되므로, 로마 교황이 예수와 끊기 위해 시작한 것이다.
당시 로마는 종교적으로 혼잡했다.
여기서 가장 중요시 한 것은 고대로부터 내려온 여신이었다.
여신 사상이 가장 큰 세력을 갖고 있다.
그리고 잡다한 종교들이 있다.
이것을 통일시키기 위해, 종교통합을 시킨 것이 카톨릭이다.
카톨릭은 보편화라는 뜻이다.
그래서 그들은 불교와도 조화된다.
이들의 중심은 여신사상이다.
그 때, 기독교는 로마의 다른 종교들과는 달리 교리가 분명하고, 예수라는 중심이 있어서, 기독교를 다른 종교와 묶었다.
여기에 여신사상을 도입하여, 예수 위에 마리아를 높였다.
예수를 낳은 자는 여자라 하는 것이다.
카톨릭은 마리아를 완전히 신성화하고, 기도할 때도 마리아의 이름으로 기도한다.
혼인잔치에서 예수께서 마리아의 부탁에 내 때가 이르지 않았다고 하셨음에도, 물로 포도주를 만들어 주었다고 해서, 어머니 말을 거절할 수 없다고 중점으로 내건다.
카톨릭에서는 마리아를 빼놓을수 없다.
여기서 예수를 마리아의 아들로 교리화 시키려면, 예수와 끊어야 한다.
그래서 침례대신 세례를 도입했다.
침례가 예수교회의 진리다.
하나님의 첫 언약은 죽으리라는 것이다.
그가 육체로 오셔서, 죽으리라.
예수는 죽으러 왔다고 하셨다.
그래서 십자가에서 예수가 죽으실 때, 다 이루었다고 하셨다.
첫 약속을 다 이루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죽은 자를 무덤에 장사지냈다.
그리스도를 장사지냈으니, 이제 그리스도가 없다.
그러므로 죄 없는 자가 죽으실 때, 영이 죽은 것인데, 그가 죽으시므로, 선악과의 정녕 죽으리라는 말씀이 이루어졌다.
정녕 죽으리라 하신 것은 육체가 죽는 것이 아니라, 영이 죽는 것을 말한다.
지옥 불에 들어가는 것, 영이 죽는 것이 둘째 사망이다.
원죄로 인해서, 죽게 된 우리를 예수께서 대속하셨다.
원죄는 선악을 아는 법(죄)이다.
이것을 양심의 법이라고 하고, 이스라엘에게는 축소해서 열 가지로 율법(십계명)이라고 한다.
이것은 죄와 사망의 법이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므로, 죄와 사망의 법이 완전히 죽어버렸다.
그래서 예수란 이름은 죄에서 구원이다.
이제는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되었다.
그래서 그리스도는 죽고, 예수의 이름은 우리 마음속에 들어와 있는 것이다.
그는 그리스도라는 사람(인자)으로 오셔서, 죽으셨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우리가 첫째 사망에서 살아난 것이다.
그런데, 이 진리를 벗어나면, 대신 죽을 자가 없다.
이것이 둘째 사망이다.
예수가 죽는 것을 첫째 사망이라고 한다. 예수가 죽은 것이 우리가 죽은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침례를 받는다.
예수의 죽음과 연합하는 것이다.
사망을 그가 담당하셨다.
둘째 죽음은 백 보좌 앞에서 심판받아 죽는 죽음이다.
그것은 살릴 자가 없다.
진리를 아는 지식을 범하면, 다시는 속죄할 제사가 없다.
할 수 없이 무서운 심판을 받아야 하는데, 하나님의 손에 빠져 들어가는 것이 무서울 진저.
침례가 우리에게 얼마나 중요한가.
예수께서 부활하시므로, 침례는 예수의 부활과 연합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에 연합한 자가 된다.
예수의 첫 번 죽음은 첫 언약이다.
나는 너희를 대신하여 죽으러 왔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처럼 대신 저주받으러 오셨다.
이제까지 창세 이래 부활이 없었는데, 예수께서 부활하신 것은 새 언약이다.
우리가 침례 받으므로, 죽음과 부활에 연합한 자가 되어, 첫 언약을 다 이루었고,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하고, 예수 이름이 우리 심령에 들어왔다.
이제는 육체의 할례보다 마음의 할례를 받으라.
할례는 언약을 몸에 새기는 것인데, 그 육체가 얼마 뒤에 흙으로 돌아가면 더 이상 효력이 없다.
그러나 새 언약의 표로는 마음의 할례를 하라고 한다.
예수의 교인은 도무지 예수와 끊을 수 없다.
예수와 교인을 끊게 하기 위해, 로마 교황은 침례를 금지하고, 세례를 하도록 명했다.
연합해서, 예수와 하나 되었는데, 이것을 끊게 하려고, 침례를 세례로 바꾸었다.
당시 교황은 로마에서 가장 높은 자였는데, 그 명령을 어기면 죽었다.
처음 그 명령이후, 열여덟 명의 청년이 침례를 고집하여, 세례를 받지 않고, 침례 받다가 익사당하여 죽었다.
이 역사가 계속되니까, 나중에는 세례 받던 사람이 깨닫고, 다시 침례 받으려고 하여, 이들을 재침례파라고 한다.
재침례파들이 카톨릭과 장로교와 감리교에 의해 학살당했다.
역사적으로 오천만 명이 순교했다고 나온다.
카톨릭은 마리아와 끊기면, 카톨릭으로 존재할 수 없다.
카톨릭은 교황이 하나지만, 각국의 카톨릭의 의식이 다르다.
마리아를 모시는 교황을 중심으로 하지만, 각국에 가서 토착화 되었다.
기독교는 토착화 되는 것이 아니다.
기독교는 거기서 나오는 것이다.
카톨릭은 백성 속으로 들어간다.
기독교는 그 죄에서 나오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지조가 없고, 진리가 없기 때문에 정신을 차리지 못한다.
그래서 목사들의 설교가 세상 돌아가는 형편에 어깨를 나란히 하려고 토착화하려고 한다.
토착화하면, 사람들이 교회를 욕하지 않는다.
기독교는 나그네다.
그러니까, 항상 욕먹고, 핍박받고, 거부당한다.
토착화를 세속화라고도 한다.
세상으로부터 칭찬을 받고, 긍정적인 대우를 받는 것이 오늘날 현대교회다.
다는 아니지만, 90프로 이상이 토착화 되었다.
이들은 사회참여를 자유롭게 하려고 한다.
광화문에서 시위할 때, 목사가 성경을 인용하면서, 그럴 듯하지만, 토착화하는 것이다.
현재 한국의 장로교는 거의 토착종교다.
장로교와 감리교와 카톨릭이 합하여 침례 받는 자들을 죽였다.
이 세 종교에 의해서 기독교는 순교자가 오천만 명이나 나왔다.
어떤 책에는 로마 카톨릭 지하창고 기록에 보면, 8천만 명이라는 말도 있다.
침례를 부정하면, 예수와 끊긴 것이다.
장로교는 세상에서 미움 받지 않는다.
우리나라 장로교는 유교사상을 많이 접목했다.
장로교 예배를 가만히 보면, 유교 제사 형식이다.
가운입고, 경건하게 촛대들고 간다.
유교 사상과 접목이 되어, 유교 사상에 익숙한 사람들이 장로교에 가기 쉽다.
그러나 우리 베뢰아는 침례를 중심으로 지조가 있다.
침례는 그리스도와 연합한 것이다.
그의 죽으심과 부활에 연합했다.
그의 죽으심으로 내 죄가 사함 받고, 그의 부활에 연합하여, 공중에서 주를 뵐 것이다.
내가 침례 때문에 63년도에 감리교에서 종교재판을 받았다.
내가 굽히지 않는 것은 그리스도와 끊기지 않으려는 것이다.
베뢰아가 하도 욕먹으니까, 부흥이 안 된다.
교회를 개방하면 아주 쉽다.
고전 3:10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내가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 두매 다른 이가 그 위에 세우나 그러나 각각 어떻게 그 위에 세우기를 조심할지니라
고전 3:11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
고전 3:12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고전 3:13 각각 공력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력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력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니라
고전 3:14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력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고전 3:15 누구든지 공력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기는 구원을 얻되 불 가운데서 얻은 것 같으리라
고전 3:16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고전 3:17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그래서 ‘성막의 모형과 실상’이라는 책을 썼다.
고후 6:14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두움이 어찌 사귀며
고후 6:15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고후 6:16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가라사대 내가 저희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나는 저희 하나님이 되고 저희는 나의 백성이 되리라 하셨느니라
고후 6:17 그러므로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저희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 내가 너희를 영접하여
고후 6:18 너희에게 아버지가 되고 너희는 내게 자녀가 되리라 전능하신 주의 말씀이니라 하셨느니라
어떻게 해서, 하나님이 야곱을 떠났고, 이스라엘을 떠났는지 잘 생각하라.
우리는 아무리 핍박이 와도 절대 베뢰아와 성락교회와 시무언을 이간하지 말고, 지우지 말고, 베뢰아를 부끄러워하지 말고, 50년간 뿌리를 깊게 내렸으니, 이 그루터기 위에 건설하기를 바란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오늘도 또 우리에게 말씀을 주심을 감사하며 다음 주간까지 또 우리는 열심을 다하여 믿음을 지키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