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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충사(雙忠祠)는 충렬공 이대원(李大源, 1566~1587)과 충장공 정운(鄭運, 1543~1592)의 충혼을 모시는 사당이다. 이대원은 1587년 녹도만호(鹿島萬戶)가 되어 남해안에 출몰하는 왜구를 물리쳤고, 다시 흥양(고흥)에 왜구가 침입하자 이에 맞서 싸우다가 손죽도 해상에서 순절했다.
정운은 1591년 녹도만호가 되어 1592년에 옥포 · 당포 · 한산해전에서 일본군과 싸웠으며 부산 몰운대 앞바다에서 순절했다. 이순신 장군의 요청으로 이대원을 모시고 있던 사당에 정운을 추가로 모시게 되었다. 녹도만호를 지낸 이대원과 정운 두 사람의 충신을 모시게 되면서 사당의 명칭을 쌍충사로 변경했다.
쌍충사 및 녹도진 성터 입구
ⓒ 한국학술정보 | CC BY-NC-ND
사당 쌍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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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재란 때 소실된 것을 1681년(숙종 7)에 새로 지었으며, 2년 뒤인 1683년 조정으로부터 쌍충사 사액을 받았다. 1735년(영조 11)에 보수했고 1868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해 철거되었다가 1922년 고흥 유림에서 뜻을 모아 다시 지었다.
현재의 건물은 1942년 일본인들이 폐허로 만든 것을 1947년에 ‘녹도 쌍충사 복구 기성회’가 결성되어 사당을 중건했으며 1957년에 다시 고쳐 지었다. 경내에는 1947년에 중건된 사당과 1957년에 건립된 강당, 관리사 등의 건물이 있다.
쌍충 영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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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충사 묘정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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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물 배치는 맨 위쪽에 앞면 2칸, 옆면 1칸 반의 사당이 있고 사당 아래 왼쪽에는 앞면 5칸, 옆면 3칸 규모의 팔작지붕 강당이 있다. 오른쪽 밑으로는 관리사를 배치하여 강당과 마주 보게 했다.
도양읍 봉암리 해안가 언덕 위에 자리하고 있는 쌍충사 앞에 서면 녹동 항구와 소록도를 바라볼 수 있다.
쌍충사에서 바라본 소록대교(사진 왼쪽은 소록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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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원
함평사람 이대원의 자는 호연(浩然)이다. 1583년 18세에 무과에 급제하고 1586년 21세의 젊은 나이에 선전관이 되었으며, 이어 1587년 녹도만호에 부임했다.
이대원은 왜구가 남해안에 출몰하자 즉시 출동하여 왜구의 우두머리를 포로로 잡았으며 그의 직속상관인 전라좌수사 심암(沈岩)에게 왜구와의 전투 경과를 보고했다(제1차 손죽도해전, 1587. 02. 10.).
이대원 영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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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에서 심암은 평소 이대원과 가까운 관계에 있던 한 여인에 대한 관심이 있던 차에 이대원이 세운 공로마저 탐이 나기도 하여 그를 불러 그 공을 자신에게 돌릴 것을 요구했다. 이대원은 이를 거절했고 심암은 며칠 후 전열을 가다듬고 다시 공격해 온 수많은 왜구를 격퇴하라고 이대원에게 명을 내렸다.
이대원은 출정하기 전에 지원군을 보내준다는 약속을 믿고 기다렸으나 전투가 시작되어도 지원병은 오지 않았고, 수많은 왜구 선박에 둘러싸여 싸우던 그는 적의 포로가 되었다. 왜구 수장은 그에게 항복할 것을 종용했으나 이대원은 거부했고 결국 그는 왜구 선박의 돛대에 묶인 채로 살해당했다(제2차 손죽도해전, 1587. 02. 17.).
〈이대원 절명시(絶命詩)〉
진중에 해 저무는데 바다 건너와
日暮轅門渡海來(일모원문도해래)
병사는 외롭고 힘은 다하여 이 내 삶이 서글프다.
兵孤勢乏此生哀(병고세핍차생애)
임금과 어버이 은혜 모두 갚지 못하니
君親恩意俱無報(군친은의구무보)
한 맺힌 저 구름도 흩어질 줄 모르네.
恨入愁雲結不開(한입수운결불개)
- 이대원이 제2차 해전 당시 지은 시
제2차 해전에 앞서 현지 관찰사의 장계로 심암과의 일을 알게 된 조정에서는 심암을 교체하고 후임에 이대원을 전라좌수사로 임명했으나, 때는 이미 이대원이 살해된 다음의 일이었다. 후에 이씨 문중과 이대원의 여인이 억울함을 글로 적어 조정에 상소했다. 조정에서는 이대원에게 병조참판의 벼슬과 ‘충렬’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선조 임금은 손죽도에 사당을 지어 순절한 이대원 장군의 위패를 모시게 했는데 이것이 이대원 사당(李大源祠堂)각주1) 이다. 제사는 매년 음력 3월 3일에 모시고 있다.
쌍충사 연혁
1587. 02. 17. | 정해왜변 당시 녹도만호 이대원 손죽도해전에서 전사. 사당 녹도사에 배향 |
1592. 04. 13. | 임진왜란 발발 |
1592. 09. 01. | 정운, 부산포해전에서 전사. 이순신, 녹도진의 이대원 사당에 정운을 함께 배향할 수 있도록 선조 임금에게 장계를 올려 합향하게 함. |
1597 | 정유재란 당시 녹도사 소실. 네 번 헐리고 다섯 번째 건립됨. |
1683. 06. | 숙종 임금 쌍충사 사액. 매년 양력 4월 30일 쌍충제전 거행 |
1735. 01. | 영조 임금, 쌍충사 제수 하사 |
정운
정운(鄭運, 1543~1592)의 본관은 하동이며, 전라남도 영암(현재의 해남군 옥천면 대산리)에서 출생했다. 1570년(선조 3) 무과에 급제한 뒤 거산도찰방 · 웅천현감 · 제주판관 등을 역임했다. 평소 강직한 천성 탓에 재임 중 상관들과 알력이 있었고, 시기의 대상이 되기도 하여 관료 생활은 순탄하지 못했다. 그의 나이 49세 되던 1591년 유성룡의 천거로 녹도만호에 임명되었다.
녹도만호진은 왜구가 빈번하게 침입하는 길목에 위치하는 진이다. 그가 만호로 임명된 해가 임진왜란 발발 1년 전이었는데 정운은 부임과 동시에 군기와 병선을 철저히 점검하고 관리하기 시작했다.
정운 영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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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2년 2월 이순신은 휘하부대 순시에 나섰다. 이순신이 녹도진을 찾았을 때 정운은 녹도만호로 있었는데 전쟁대비에 만전을 기하고 있었다. 정운이 준비를 더욱 치밀하게 한 이유는 1587년 인근 해역에서 ‘손죽도해전’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손죽도사건 이후 조정은 해안지방 방어책을 마련하면서 용력을 인정받던 정운을 녹도만호로 임명했고 정운은 부임 직후부터 방어태세를 확실히 하여 당시 상관이었던 전라좌수사 이순신의 칭찬을 받았다.
1592년 5월 1일 임진왜란 발발 18일째인 이날 전라좌수영으로 수군 장수들이 모였다. 왜란 초기 경상우수사 원균은 일본군의 공격을 피해 사천 곤양 부근에 이르러 전라좌수사 이순신에게 원군을 요청했다. 다수의 전라좌수영 장수들은 경상도 해안으로 출동할 것을 주장했고, 전라좌수사 이순신은 전라우수사 이억기가 도착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5월 3일 밤 장수 중 한 사람인 녹도만호 정운이 이순신을 면담하고 출전을 강하게 요청했다. 단독면담 직후 이순신은 동명이인의 중의장 이순신(李純信)을 불러 출전준비를 명했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경상도 출병을 결정하면서 정운은 이순신이 지휘하는 조선수군의 선봉장이 되어 옥포 · 적진포 · 당포 · 당항포 · 한산해전에 참가하여 분전했다.
8월 24일 전라좌수영군은 경상좌수영군과 연합함대를 이루어 일본수군이 진을 치고 있는 부산포를 공격하기로 했다. 9월 1일 이른 아침 부산포를 향해 가던 중 동풍이 갑자기 일어나고 파도가 넘어 들어 조선수군은 함대를 정비하여 화준구미에 당도했다.
인근 해역에서 일본전함 5척을 만나고, 다대포 앞바다에 이르러서는 8척, 서대포 앞바다에서는 9척, 절영도에서는 2척을 만나 모두 격파했다. 이어 부산포로 돌진했는데 일본함선 400여 척은 선창 동쪽의 산기슭에 줄지어 정박하고 있었다. 이때 우부장(右部將) 정운은 죽음을 무릅쓰고 분전했다. 다수의 적군을 사살하고 적선 100여 척을 격파하면서 군기를 노획하는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정운은 9월 1일 몰운대 앞바다에서 전투 도중 적탄에 맞아 전사했다. 그의 사후에 병조참판 직위와 충장(忠壯)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쌍충사는 1990년 2월 24일 전라남도 기념물 제128호로 지정되었다.
각주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