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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ARE THE GENTILE TIMES “SEVEN TIMES” OF 2,520 YEARS?
B. 이방인의 때는 2,520년 기간의 일곱 때인가?
When Jesus, at Luke 21:24, referred to the “times of the Gentiles,” or, according to the New World Translation, “the appointed times of the nations,” did he then have in mind the “seven times” of madness that fell upon the Babylonian king Nebuchadnezzar in fulfillment of his dream about the chopped-down tree, as recorded in the book of Daniel, chapter four? And were these “seven times” of madness meant to have a greater fulfillment beyond that upon Nebuchadnezzar, representing a period of 2,520 years of Gentile dominion? In spite of the fanciful arguments put forth in support of these conjectures, positive proof is missing, and serious objections may be raised against them. A critical examination of the Watch Tower Society’s chief arguments, as presented in its Bible dictionary Insight on the Scriptures, will make this abundantly clear.18 누가복음 21장 24절에 예수께서 '이방인의 때'를 언급할 때, 또는 '신세계역'에 따르면, 그는 다니엘 4장에서 기록된 바와 같이 바빌로니아 왕 느부갓네살이 꾸었던 그루터기가 뽑힌 나무에 관한 꿈의 성취로 그에게 임했던 광기의 '일곱 때'를 염두에 두었는가? 그리고 이 "일곱 때"의 광기는 느부갓네살에게보다 더 큰 성취인 2,520년 동안의 이방인의 통치 기간이 일어날 수 있는 의도가 담긴 것일까? . 이러한 공상적 추측에도 불구하고, 이를 뒷받침하는 긍정적인 증거는 없으므로, 이에 대해 심각한 반론이 제기될 수 있다. 따라서 성경 사전인 <통찰>에서 제시된 바와 같은, 워치타워 협회의 주요 논증에 대한 비판적인 검토를 함으로써 이점에 대해 충분히 명확히 해야 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18 |
B-1: The supposed connection between Luke 21:24 and Daniel 4
B-1: 누가복음 21장 24절과 다니엘 4장을 추측으로 연관지음
It is true that in his last great prophecy (Matthew 24–25; Luke 21, and Mark 13), Jesus “at least twice” referred to the book of Daniel.19 Thus, when mentioning the “disgusting thing that causes desolation” (NW) he directly states that this was “spoken of through Daniel the prophet.” (Matthew 24:15; Daniel 9:27; 11:31, and 12:11) And when speaking of the “great tribulation [Greek thlipsis] such as has not occurred since the world’s beginning until now” (Matthew 24:21, NW), he clearly quotes from Daniel 12:1: “And there will certainly occur a time of distress [the early Greek translations―the Septuagint version and Theodotion’s version―use the word thlipsis, in the same way as in Matthew 24:21] such as has not been made to occur since there came to be a nation until that time.” (NW) However, no such clear reference to chapter four of Daniel may be found at Luke 21:24. The word “times” (Greek kairoí, the plural form of kairós) in this text is no clear reference to the “seven times” of Daniel 4 as the Watch Tower Society maintains. 20 This common word occurs many times in both its singular and plural forms in the Greek Scriptures, and about 300 times in the Greek Septuagint translation of the Hebrew Scriptures. In Daniel 4 and Luke 21 the word “times” is explicitly applied to two quite different periods—the “seven times” to the period of Nebuchadnezzar’s madness, and the “times of the Gentiles” to the period of the trampling down of Jerusalem―and the two periods may be equalized only by giving them a greater application beyond that given in the texts themselves. Therefore, the supposed connection between the “times of the Gentiles” at Luke 21:24 and the “seven times” at Daniel 4:16, 23, 25, and 32 appears to be no more than a conjecture. 예수께서는 마지막 날에 관한 예언(마24:25; 누가 21, 마가 13)에서 다니엘서를 "최소한 두 번" 언급했다는 것은 사실이며, 따라서 "황폐케 하는 가증한 것"(NW)을 언급할 때, 그것은 다니엘의 입을 통해 예언된 것이었다(마24:15; 다니엘 9:27). 그는 다니엘 12:1의 말을 인용하여 "나라들이 존재한 이래로 지금까지 없었던 것과 같은 큰 환난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분명히 큰 재난이 일어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그리스어 초기 번역본 - 70인 역과 테오도션 역- 마태 24:21에서와 같은 방식으로 '트립시스'라는 단어를 사용하였다]. 그러나 다니엘서 4장에 대한 명확한 언급은 누가복음 21장 24절에서 찾아볼 수 없다. 이 글에서 "때"라는 단어는 워치타워 협회가 고수하고 있는 다니엘 4장의 "일곱 때"라는 말로 분명하게 언급하지 않는다.20 이 평범한 단어는 그리스 성경에서 단수와 복수 형태로 여러 번 발생하며, 그리스어 70인역에서 약 300번 언급된다. 다니엘 4장과 누가 21장에서 "때"라는 단어는 두개의 다른 의미로 적용될 수 있는데, 느부갓네살 광기의 기간은 "일곱 때"이며, 예루살렘이 짓밟히는 기간은 "이방인의 때"이다. 그리고 이 두 기간은 본문에서 주어진 의미보다 더 큰 확대 해석을 가함으로써 같은 것으로 취급한 것이다. 그러므로 누가복음 21장 24절의 '이방인의 때'와 다니엘서 4장 16절, 23절, 25절, 32절의 '일곱 때' 사이에 연관을 지우려는 해석은 억지 추측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
B-2: The greater application of the “seven times”
B-2: "일곱 때"에 대한 확대된 해석
Several arguments are proposed by the Watch Tower Society to support the conclusion that Nebuchadnezzar’s “seven times” of madness prefigured the period of Gentile dominion up to the establishment of Christ’s Kingdom, viz., a) the prominent element of time in the book of Daniel; b) the time at which the vision of the chopped-down tree was given; c) the person to whom it was given, and d) the theme of the vision. Let us have a closer look at these arguments. 워치타워 협회는 느부갓네살의 광기의 "일곱 때"가, 그리스도의 왕국이 세워지기까지 "이방인의 때"라는 통치기간을 의미한다는 결론을 뒷받침하기 위해 몇 가지 주장을 제기하고 있다. 즉 , 다니엘서에 두드러지게 등장하는 '때'라는 요소; b) 나무의 그루터기 환상이 주어진 시기; c) 그 환상이 주어진 사람, 그리고 d) 그 환상의 주제라는 점을 들고 있다. 이 주장들에 대해 좀 더 자세히 하나씩 살펴보도록 하자. |
a) The element of time in the book of Daniel
a) 다니엘서에 등장하는 '때'라는 요소
To prove that the “seven times” of Daniel 4 are related to the “times of the Gentiles,” the Watch Tower Society argues that “an examination of the entire book of Daniel reveals that the element of time is everywhere prominent in the visions and prophecies it presents,” and that “the book repeatedly points toward the conclusion that forms the theme of its prophecies: the establishment of a universal and eternal Kingdom of God exercised through the rulership of the ‘son of man’.’’21 Although this is true of some of the visions in the book of Daniel, it is not true of all of them. And as far as can be seen, no other vision or prophecy therein has more than one fulfillment.22 There is nothing to indicate, either in the book of Daniel or elsewhere in the Bible, that Nebuchadnezzar’s dream of the chopped-down tree in Daniel 4 has more than one fulfillment. Daniel clearly says that the prophecy was fulfilled upon Nebuchadnezzar: “All this befell Nebuchadnezzar the king” (Daniel 4:28, NW). And further, in verse 33: “At that moment the word itself was fulfilled upon Nebuchadnezzar.” (NW) Dr. Edward J. Young comments: lit., was ended, i.e., it came to an end in that it was completed or fulfilled with respect to Neb.”23 '다니엘 4장'의 '일곱 때'가 '이방인의 때'와 관련이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워치타워 협회는 "다니엘서 전체를 살펴 보면 다니엘이 제시하는 환상과 예언에서 시간적 요소가 다니엘서 모든 곳에 두드러지게 나타난다는 것을 알 수 있다"며 "이 다니엘서는 '사람의 아들'의 통치를 통해 행해지는, 우주적이고 영원한 하나님의 왕국을 건설하는 것'이라는 예언의 주제와 관련된 결론을 반복적으로 가리키고 있다"고 주장한다.21 이러한 주장이 다니엘서의 몇 가지 환상에 사실이라 하더라도, 모든 환상이나 예언이 그렇게 적용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이미 살펴 본 바와 같이, 다니엘서 내의 어떤 환상이나 예언도 그것에 해당되는 하나의 성취 이상으로 확대된 적용이나 해석은 전혀 없다는 사실이다.22 다니엘은 "이 모든 일이 느부갓네살 왕에게 일어났다." (다니엘 4장 28절, NW)라고 함으로써 예언이 느부갓네살에게 적용되었다고 분명히 말한다. 그리고 33절에서 "바로 그 순간 이 말이 느부갓네살에게 성취되었다." (NW) 에드워드 J. 영 박사의 주석은: 말 그대로 끝났다. 즉, 느부갓네살과 관련하여 그 환상의 의미가 완성되거나 이행되었다는 점에서 끝이 났다.23 Actually, most of the chapters in the book of Daniel do not contain material that could be said to point forward toward “the establishment of a universal eternal kingdom of God through the rulership of the ‘son of man’ “: chapter 1 deals with Daniel and his companions at the court of Babylon; chapter 3 tells the story about the three Hebrews in the fiery furnace; chapter 5 deals with Belshazzar’s feast, which ended with the fall of Babylon; chapter 6 tells the story of Daniel in the den of lions, and chapter 8 contains the vision of the ram and the he-goat, which culminates with the end of the tyrannical rule of Antiochus IV, in the second century before Christ’s coming.24 And although the prophecy of the “seventy weeks” in chapter 9 points forward to the coming of Messiah, it does not say anything about the establishment of his kingdom. Not even the lengthy prophecy in the fina1 chapters, Daniel 10–12, which end with the “great tribulation” and the resurrection of “many of those asleep in the ground” (Daniel 12:1–3), explicitly connects this with the establishment of the kingdom of Christ. The fact is that the only clear and direct references to the establishment of the kingdom of God are found in chapters 2 and 7 (Daniel 2:44–45 and 7:13–14, 18, 22, 27).25 Thus any precedent which would call upon us to give a greater application to Nebuchadnezzar’s “seven times” of madness simply does not exist. 면밀히 살펴 볼 때, 다니엘서에 있는 대부분의 장들의 내용은 "사람의 아들"의 통치를 통해 하나님의 우주적인 영원한 왕국을 건설하는 것을 나타낼 수 있는 자료들을 포함하고 있지 않다: 1장은 바빌로니아 궁정에서 다니엘과 그의 동료들을 다루고 있다; 3장은 그 세 히브리인과 불타는 용광로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 5장은 바빌론의 몰락으로 끝난 벨샤샬의 잔치를 다루고; 6장은 사자의 굴에서 겪는 다니엘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고, 8장은 그리스도께서 태어나기 2세기 전 안티오쿠스 4세의 폭압적인 통치가 끝나면서 절정에 이르는 숫양과 숫염소의 환상을 담고 있다.24 그리고 9장에 나오는 "70주"의 예언이 메시아의 도래에 대해 언급하고 있지만, 그의 왕국의 설립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언급하지 않았다. 마지막 다니엘 10~12장에서도 자세한 예언인 "큰 환난"과 "땅에 잠든 많은 사람들"(다니엘 12:1~3)의 부활로 끝을 맺는데, 이 예언이 그리스도의 왕국의 설립과 명시적으로 연결되고 있다. 사실 하나님의 나라 설립에 대한 유일한 명확하고 직접적인 언급은 2장과 7장(다니엘 2:44–45와 7:13–14, 18, 22, 27)에서 찾아볼 수 있다.25 따라서 느부갓네살 광기의 "일곱 때"에 더 확대된 해석이나 적용을 요구하는 예는 다니엘서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
b) The time of the vision
b) 환상이 적용되는 시기
If, as claimed, the time at which this vision was given should indicate a greater fulfillment, pointing to a 2,520-year break in the royal dynasty of David, it should have been given close to, or preferably in the same year as the dethronement of Zedekiah. Often, when the time a prophecy is given is important and has a connection with its fulfillment, the prophecy is dated. This is, for example, the case of the prophecy of the seventy years. (Jeremiah 25:1)26 The visions and prophecies in the book of Daniel are usually dated: the dream of the image in the second year of Nebuchadnezzar (Daniel 2:1), the vision of the four beasts in the first year of Belshazzar (Daniel 7:1), the vision of the ram and the he-goat in the third year of Belshazzar (Daniel 8:1), the prophecy of the seventy weeks in the first year of Darius the Mede (Daniel 9:1), and the last prophecy in the third year of Cyrus (Daniel 10:1).27 But no such date is given for the vision of the chopped-down tree in Daniel 4, which should logically have been done if this was important. The only information concerning time is given in verse 29, where the fulfillment of the dream is stated to have occurred twelve months later. Although no regnal year is given, it seems probable that Nebuchadnezzar’s “seven times” of madness took place somewhere near the close of his long reign. The reason for this conclusion is the boastful statement that triggered off the fulfillment of his dream: Is not this Babylon the Great, that I myself have built for the royal house with the strength of my might and for the dignity of my majesty? —Daniel 4:30, NW. 워치타워의 주장대로, 이 환상이 적용되는 시기가 다윗 왕조의 2,520년의 공백기를 가리키며 더 큰 성취를 나타내고 있다면, 그것은 시드기야의 퇴위와 거의 비슷하거나 같은 해에 주어졌어야 했다. 예를 들어, 70년 예언의 경우와 같이, 예언에서 때가 중요한 요소로 취급되고 그 실현과 연관성이 있을 때, 예언은 특정 사건이 일어나는 시기와 비슷하게 등장하게 된다. (예레미야 25:1)26 다니엘서에 나오는 환상과 예언은 대개 날짜가 적혀 있다. 느부갓네살 2년(다니엘 2:1)에 나오는 형상 꿈과 벨샤살 1년(다니엘 7:1)에 나오는 네 짐승 그리고 벨샤샬 3년에 나오는 숫양과 숫염소의 환상(다니엘 8:1), 메데 다리우스 1년에 예언한 70주(다니엘 9:1) 그리고 고레스 3년에 한 마지막 예언(다니엘 10:1)이 그러하다.27 그러나 다니엘 4장의 그루터기 나무의 환상에 대해서는 그러한 날짜가 주어지지 않았다. 만약 이 환상에 있어서 날짜가 중요했다면, 그와 관련된 어떤 날짜가 제시되었어야 논리적이다. 시간에 관한 유일한 정보는 꿈의 성취가 12개월 후에 이루어졌다고 기술된 29절에 나와 있다. 비록 이 환상의 성취가 일어난 통치년도는 주어지지는 않았지만, 느부갓네살은 그의 오랜 통치가 끝날 무렵에 "일곱 때의 광기"가 일어났을 가능성이 있어 보인다. 이러한 결론을 내릴 수 있는 이유는 그의 꿈의 성취를 촉발시킨 자랑스러운 발언 때문이다: “이 큰 바빌론은 내가 왕궁을 두고 영광스러운 위엄을 떨치려고 내 힘과 위력으로 세운 곳이 아닌가?”ㅡ다니엘 4: 30 NW. When could Nebuchadnezzar possibly have uttered these words? Throughout most of his long reign he engaged in numerous building projects at Babylon and many other cities in Babylonia. The cuneiform inscriptions demonstrate that Nebuchadnezzar was primarily a builder, not a warrior. He renovated and restored sixteen temples in Babylon including the two temples of Marduk, completed the two great walls of the city, built a network of canals across the city, embellished the streets of Babylon, rebuilt the palace of Nabopolassar, his father, and constructed another palace for his own use that was finished about 570 B.C.E., in addition to many other architectural achievements.28 It was evidently at the close of this building activity that the vision of the chopped-down tree was given, as is indicated by Nebuchadnezzar’s proud words in Daniel 4:30. This points towards the close of his forty-three-year-long reign, and consequently many years after the destruction of Jerusalem in his eighteenth regnal year. A prophecy is, by definition, forward looking. How then could the time at which the vision was given indicate anything about a greater fulfillment, one beginning with the dethronement of Zedekiah many years earlier? Should not the fulfillment of a prophecy start, not before, but subsequent to the time at which the prophecy is given? The time of this particular dream, therefore, does not only seem to be unimportant, as the prophecy is not dated, but can actually be used as an argument against an application to a period starting with the destruction of Jerusalem, as the dream evidently was given many years after that event. 언제 느부갓네살이 이런 말을 했을까? 그의 긴 통치 기간 동안 그는 바빌로니아와 바빌로니아에 속한 많은 다른 도시들에서 수많은 건설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설형 비문을 보면 느부갓네살은 전사(戰士)로서 보다는 건축가로 알려져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마르둨의 두 신전을 포함한 바빌로니아의 16개 신전을 보수 및 복원하고, 도시의 두 개의 거대한 성벽을 완성하고, 도시를 가로지르는 운하망을 건설하고, 바빌로니아의 거리를 장식하고, 그의 아버지인 나보폴라사르 궁전을 재건하고, 기원전 570년경에 또 다른 궁전을 완공하였다.28 다니엘 4:30에 나오는 느부갓네살의 자랑스러운 말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이 건설 활동의 마지막 시기에 잘려진 나무 그루터기의 환상이 주어졌다. 이것은 그의 43년간의 통치가 끝나갈 무렵, 결과적으로 예루살렘이 멸망한 그의 열여덟 번째 통치 해로부터 여러 해가 지난 것을 가리키고 있다. 예언은 용어의 정의상, 앞을 내다보는 말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환상이 주어진 시간이 그보다 과거로 돌아가서, 몇 년 전인 시드기야의 퇴위로부터 시작하여 더 큰 성취를 나타낼 수 있었다고 보아야 하는가? 예언의 실현이 예언이 주어진 시간 후에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서 시작되어야 하는가? 그러므로 이 특별한 꿈에서 시간은 중요한 요소가 아닐 뿐만 아니라, 예언이 날짜와 연관 되어 있지 않고 예루살렘이 멸망한 사건이 일어난 때로부터 여러 해 후에 꿈이 주어졌기 때문에, 예루살렘 멸망으로 시작된 "이방인의 때"에 대한 해석이 오류라는 증거로 사용될 수 있다. |
c) The person to whom the vision was given
c) 환상을 본 사람
Does the person to whom this vision was given, that is Nebuchadnezzar, indicate it has to be applied to a supposed 2,520- year break in the royal dynasty of David? It is true that Nebuchadnezzar was instrumental in causing the break in this dynasty. But is it not improbable that Nebuchadnezzar’s oppressive exercise of sovereignty would be a symbol of Jehovah’s sovereignty expressed through the Davidic dynasty, while contemporaneously during the “seven times” of madness his total powerlessness was a symbol of world dominion exercised by Gentile nations? Or did he play two roles during his “seven times” of madness—(1) his powerlessness, representing the break in the dynasty of David during the 2,520-year period; and (2) his beastlike state, picturing the Gentile rule of the earth? 이 환상을 본 사람, 즉 느부갓네살은 다윗 왕조가 2,520년 기간 동안 중지된다는데에 적용되어야 한다고 말하는가? 느부갓네살이 이 왕조를 무너뜨리는 데 큰 역할을 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느부갓네살의 압제적 주권 행사가 다윗 왕조를 통해 표현된 여호와의 주권의 상징이 되는 동시에, 광기의 일곱 때 동안 그가 완전히 무력해졌다는 사실이 이방 국가들에 의해 이루어지는 세계 지배의 상징이 될 가능성이 높은가? 아니면 그가 광기의 "일곱 때" 동안 두 가지 역할을 동시에 했는가? (1) 그의 무기력해짐이 2,520년 동안 다윗 왕조의 통치가 중지되는 것을 나타내거나, (2) 그가 미쳐 짐승과 같은 상태가 된 것이 이 땅을 이방인들이 통치하는 것을 묘사하는가? As may be seen, the parallels between the literal fulfillment and the claimed greater application are strained, and the greater application, therefore, becomes quite complicated and confusing. Would not this application have been far more probable if the vision had been given to one of the last kings of Judah instead of to Nebuchadnezzar? Would not a king of the royal dynasty of David be a more natural figure of that dynasty, and the “seven times” of loss of power experienced by such a king a more natural figure of the loss of sovereignty in the Davidic line? Evidently, then, the person to whom the vision was given is no clear indication of another application beyond that one given directly through Daniel the prophet. 앞서 살펴 본 것처럼, 문자 그대로의 성취와 더 큰 적용이 있다는 주장 사이의 병행성은 경색되며, 따라서 확대 해석이나 적용은 상당히 복잡하고 혼란스러워진다. 만약 그 환상이 느부갓네살 대신 유다의 마지막 왕들 중 한 명에게 주어졌더라면, 이러한 해석은 훨씬 더 사실일 가능성이 높지 않았겠는가? 다윗 왕조의 왕은 그 왕조의, 보다 자연스러운 인물이 될 수 있지 않았겠는가? 그리고 다윗 왕조가 겪게된 권력 상실의 일곱 때는 다윗 왕조 계열의 주권 상실 기간의, 보다 자연스러운 수치가 될 수 있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환상이 주어진 사람에게, 예언자 다니엘을 통해 직접 주어진 해석 외에 다른 해석을 내릴 명확한 근거는 없는 것이 분명해진다. |
d) The theme of the vision
d) 환상의 주제
The theme of the vision of the chopped-down tree is expressed in Daniel 4:17, namely, “that people living may know that the Most High is Ruler in the kingdom of mankind and that to the one he wants to, he gives it and he sets up over it even the lowliest one of mankind.” Does this stated intent of the vision indicate it pointed forward to the time for the establishment of God’s kingdom by his Christ?29 To draw such a conclusion would be to read more into this statement than it actually says. Jehovah has always been the supreme ruler in the kingdom of mankind, although his supremacy has not always been recognized by everyone. But David did realize this, saying: Jehovah himself has firmly established his throne in the very heavens; and over everything his own kingship has held dominion. — Psalms 103:19, NW. Your kingship is a kingship for all times indefinite, And your dominion is throughout all successive generations.― Psalms 145:13, NW. Thus Jehovah has always exercised control over the history of mankind and maneuvered the events according to his own will: And he is changing times and seasons, removing kings and setting up kings, giving wisdom to the wise ones and knowledge to those knowing discernment. —Daniel 2:21, NW. 그루터기 나무의 환상의 주제는 다니엘 4장 17절에 잘 나타나 있는데, 즉 "살아 있는 사람들에게, 가장 높은 자는 인류 왕국의 통치자이며 그가 원하는 자에게 그 통치권을 주고 가장 낮은 자라도 그 왕국을 통치하도록 세우실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함이다. 이 환상이 나타내는 명시적 의도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왕국을 세울 시간표를 가리킨다는 것을 나타내는가?29 그러한 결론을 도출하는 것은 이 내용에서 실제 말하려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추측하는 것이다. 여호와께서는 항상 인간 왕국의 최고 통치자였지만, 비록 그의 왕권이 항상 모든 사람들에게 인정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다윗은 이것을 깨닫고 이렇게 말했다: 여호와께서 하늘에 왕좌를 굳게 세우셨으니, 그 왕권이 모든 것을 다스린다.ㅡ 시편 103: 19, NW. 당신의 왕권은 영원한 왕권이며 당신의 통치는 대대로 이어집니다.ㅡ 시편 145: 13절, NW. 그러므로 여호와는 항상 인류의 역사에 대한 통치권을 행사하시며, 자신의 뜻에 따라 역사를 이루어 왔다. 그리고 그는 시대와 계절을 바꾸고, 왕을 폐하기도 하고 왕을 세우기도 하시며, 현명한 자에게는 지혜를 주고, 분별력을 아는 자에게는 지식을 주고 있다. —다니엘 2:21, NW. This was a lesson that Nebuchadnezzar―as well as kings before and after him—had to learn. The period that followed upon Nebuchadnezzar’s desolation of Judah and Jerusalem represented no exception or interruption to Jehovah’s supreme rule, in spite of the break in the royal dynasty of David. The Gentile nations during this period did not rule supremely. Jehovah took action against the Babylonian empire by raising up Cyrus to capture Babylon in 539 B.C.E. (Isaiah 45:1), and later Alexander the Great destroyed the Persian empire. Further, the expression “lowliest one of mankind” at Daniel 4:17 is no clear indication that Jesus Christ is intended, as Jehovah in his dealings with mankind many times has overthrown mighty and haughty kings and exalted lowly ones.30 This was stressed centuries later by Mary, the mother of Jesus: He [God] has performed mightily with his arm, he has scattered abroad those who are haughty in the intention of their hearts. He has brought down men of power from thrones and exalted lowly ones. ― Luke 1:51–52, NW. 이것은 느부갓네살은 물론 그의 전후한 왕들도 배워야 했던 교훈이다. 느부갓네살은 유다와 예루살렘을 황폐하게 만들었지만 다윗 왕조가 무너졌음에도 불구하고 여호와의 최고 통치에 예외나 중단이 없었다. 이 기간 동안 이방인들이 지배하지 않았다. 여호와는 기원전 539년(이사야 45:1), 고레스를 일으켜 바빌론을 함락시키는 등 바빌로니아 제국에 대항했고, 이후 알렉산더 대왕은 페르시아 제국을 멸망시켰다. 또한 다니엘 4장 17절에서 "인류 중 가장 낮은 자"라는 표현은, 여호와께서 인류를 대하는 과정에서 강대하고 거만한 왕들을 타도하고 낮은 자들을 높이셨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의도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 명확하다.30 이는 수세기 후에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에 의해 이렇게 강조되었다: "그분은 자신의 팔로 위력 있게 행하셨고, 마음에 품은 의도가 거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 권세 있는 자들을 권좌에서 끌어내리셨고, 낮은 자들을 높이셨습니다." ― 누가 1:51–52, NW. Therefore, when the holy watcher in Nebuchadnezzar’s dream announced that “the Most High is Ruler in the kingdom of mankind and that to the one he wants to, he gives it and he sets up over it the lowliest one of mankind,” he simply seems to be stating a universal principle in Jehovah’s dealing with mankind. There is no indication that he is giving a prophecy concerning the establishment of the Messianic kingdom with Jesus Christ on the throne. The theme of this vision―that the Most High is ruler in the kingdom of mankind―is demonstrated by Jehovah’s dealing with the haughty Nebuchadnezzar who through his experience came to realize this universal principle. (Daniel 4:3, 34–37) By reading about Nebuchadnezzar’s humiliating experience, people living in every generation may come to realize this same truth. 그러므로 느부갓네살의 꿈에 나오는 거룩한 관찰자가 "인간 왕국에서 가장 높은 자는 통치자이며 그가 원하는 자에게 그것을 주며, 그 왕국 위에 가장 낮은 자를 세우신다"고 말씀하셨을 때, 그는 단순히 인류를 다루는 데 있어서 여호와의 보편적인 원칙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왕좌에 앉히고 메시아 왕국을 세우는 것에 대해 예언을 하고 있다는 근거는 전혀 없다. 이 환상의 주제는 인류 왕국에서 가장 높으신 분이 세상을 통치하신다는 것이다. 여호와께서 거만한 느부갓네살을 대하시면서 그의 경험을 통해 이 보편적인 원리를 깨닫게 하셨다. (다니엘 4:3, 34–37) 느부갓네살의 굴욕적인 경험을 읽고 배움으로써, 모든 세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똑같은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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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See the article “Appointed times of the nations,” in Insight on the Scriptures, Vol. 1 (Brooklyn, New York: Watchtower Bible and Tract Society, 1988), pp. 132–135.
18 <성경 통찰> 1권 (뉴욕, 부룩클린: 워치타워 성서 및 책자 협회, 1988년)의 "열국의 지정된 때" 항목을 참조하라. 132–135 면.
19 Ibid., p. 133.
19 같은 책, 133 면.
20 Ibid.
20 같은 책.
21 Ibid., pp. 133–34.
21 같은 책, 133~34면.
22 When Jesus, in his prophecy on the desolation of Jerusalem, twice referred to the prophecies of Daniel (Matthew 24:15, 21), he did not give these prophecies a second and “greater” fulfillment. His first reference was to the “disgusting thing that is causing desolation,” a phrase found in Daniel 9:27; 11:31, and 12:11. The original text is that of Daniel 9:27, which contextually (verse 26) seems to point forward to the crisis culminating with the desolation of Jerusalem in 70 C.E. The same holds true of his reference to the “great tribulation” of Daniel 12:1. Jesus applied, not reapplied, both of these prophecies to the tribulation on the Jewish nation in 67–70 C.E. Phrases and expressions used by earlier prophets are often also used, or alluded to, by later prophets, not because they gave a second and greater application to an earlier, fulfilled prophecy, but because they readily reused the “prophetic language” of earlier prophets, using similar phrases, expressions, ideas, symbols, metaphors, etc. in their prophecies of events to come. Thus, for example, it has often been pointed out that the apostle Paul, in his description of the coming “man of lawlessness” (2 Thessalonians 2:35), borrows some of the expressions used by Daniel in his prophecies about the activities of Antiochus IV Epiphanes (cf. Daniel 8:10–11; 11:36–37).
22 예수께서 예루살렘의 멸망에 대한 예언에서 다니엘의 예언을 두 번 언급할 때, 그는 이 예언들을 두 번째나 더 "큰" 성취가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지 않았다. 그의 첫 언급은 다니엘 9장 27절, 11장 31절, 12장 11절에 나오는 어구인 "멸망의 가증한 것"에 대한 것이었다. 원문은 다니엘 9장 27절인데, 문맥(26절)은 기원전 70년 예루살렘의 멸망으로 절정에 이르는 위기를 예고한 것으로 보인다. 다니엘 12:1의 "큰 환난"에 대한 언급도 마찬가지이다. 예수께서 이 두 예언을 기원전 67-70년에 유대인 국가에 대한 시련에 적용했다. 선지자들이 사용한 구절과 표현은 선지자들에 의해 종종 사용되거나 암시되는데, 이는 선지자들이 선지자들의 예언에 더 큰 적용을 다시 하였기 때문이 아니라, 선지자들이 사용한 유사한 문구, 표현, 사상, 상징, 은유 등을 사용하여 선지자들의 "예언적 언어"를 쉽게 재사용했기 때문이다. 다가올 사건에 대한 예언들 그러므로, 예를 들어, 사도 바울이 다가올 "불법의 사람" (살후 2:35)에 대한 그의 설명에서 안티오쿠스 4세 에피파네스의 활동에 대한 다니엘의 예언에서 사용한 표현 중 일부를 차용한다는 지적이 종종 제기되어 왔다. (다니엘 8:10–11; 11:36–37 비교).
23 Edward J. Young, The Prophecy of Daniel (Grand Rapids: Wm. B. Eerdmans Publ. Co., 1949), p. 110.
23 에드워드 J. 영, 다니엘의 예언 (그랜드 래피즈: Wm. B. Eerdmans Publ. Co., 1949년), 110면.
24 This is how the vision is understood by most commentators. The statements at Daniel 8:17 and 19 that “the vision pertains to the time of the end” should not automatically be understood as a reference to a final, eschatological “End of Time” In the Old Testament words and phrases such as “the day of the Lord,” the “end” (Hebrew qetz) and the “time of the end” (compare Amos 5:18–20, Ezekiel 7:1–6; 21:25, 29; Daniel 11:13, 27,35, 40) “do not refer to an End of Time but rather to a divinely appointed crisis, a turning point in history, i.e., a point within historical time and not a post- or supra-historical date.” (Shemaryahu Talmon, Literaty Studies in the Hebrew Bible, Jerusalem-Leiden: The Magnes Press, 1993, p. 171) The attempt of Antiochus IV to destroy the Jewish religion, as predicted in Daniel 8:9–14, 23–26, was certainly such a “crisis” and has often been described as a “turning point in history” See, for example, the comments by Al Walters in The Catholic Biblical Quarterly, Vol. 55:4, 1993, pp. 688–89.
24 대부분의 주석가들은 이러한 방식으로 환상을 이해한다. 다니엘 8장 17절과 19절에서 "환상이 종말의 때와 관련된다"는 구약성서의 "주의 날", "마지막 때"(히브리어,퀘츠), "종말의 때"(비교 아모스 5:18-20, 겔 7:1–6; 21:25, 29; 단 11:13, 27,35, 40)와 같은 종말론적 "마지막 때"에 대한 언급으로 자동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종말의 시간이 아니라, 섭리적으로 일어날 위기, 즉 역사가 일어난 후나 전이 아닌 역사의 전환점을 가리킨다." (셰마리아후 탈몬, 히브리 성경의 문학 연구, 예루살렘-레이덴: 마그네스 프레스, 1993년, 171면) 다니엘 8:9–14, 23–26에서 예언된 바와 같이, 안티오쿠스 4세가 유대인 종교를 파괴하려는 시도는 확실히 그러한 "위기"였으며, 종종 "역사의 전환점"으로 묘사되어 왔다. 예를 들어, 1993년 성서 계간지, 제554권의 알 월터스의 해설을 보라.
25 Compare the careful study of this question by Dr. Reinhard Gregor Kratz, “Reich Gottes und Gesetz im Danielbuch und im werdenden Judendom,” in A. S. van der Woude (ed.), The Book of Daniel in the Light of New Findings (Leuven, Belgien: Leuven University Press, 1993), pp. 433–479. (See especially pp. 441–442, and 448.)
25 라인하르트 그레고르 크라츠 박사가 <새로운 발견의 빛으로 본 다니엘서(편집자.)>에서 "Reich Gottes und Gesetzim Danielbuch im derdenden Juddom"이라는 질문에 대한 연구를 조심스럽게 비교하고 있다. 로이벤 대학 출판부, 1993년), 433–479면. (특히 441–442, 448면 참조)
26 See chapter 5 above, section A-3.
26 위 5장 섹션 A-3을 참조하라.
27 That at least some dates given for the visions of Daniel are closely related to their contents may be seen from chapters 7 and 8, dated to the 1st and 3rd years of Belshazzar, respectively. According to the “Verse Account of Nabonidus” (B .M. 38299), Nabonidus “entrusted the kingship” to his son Belshazzar “when the third year was about to begin.” (J. B. Pritchard, Ancient Near Eastern Texts Relating to the Old Testament, Princeton, New Jersey: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50, pp. 312–13) As the 1st year of Nabonidus was 555/54 BCE, his 3rd year—and thus the 1st year of Belshazzar—was 553/52 BCE. Now, according to the Sippar Cylinder, it was in this very year, the 3rd year of Nabonidus, that the god Marduk “aroused” Cyrus in a rebellion against his Median overlord, king Astyages. As stated in the Nabonidus Chronicle, Astyages was finally defeated three years later, in the 6th year of Nabonidus, that is, in 550/49 BCE. It can hardly be a coincidence that Daniel shortly before this, in Belshazzar’s 3rd year(Daniel 8:1), that is, in 551/50 BCE, was transferred in a vision to Susa, the future administrative capital of Persia, to be shown the emergence of the Medo-Persian empire in the form of a two-horned ram “making thrusts to the west and to the north and to the south?’ (Daniel 8:1–4, 20) His vision, then, began to be fulfilled probably just a few months after it was given!
27 다니엘의 환상에서 주어진 일부 날짜는 각각 벨샤살 1년과 3년에 있었던 것으로 다니엘 7장과 8장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나보니더스의 이야기'(B.M. 38299)에 따르면, 나보니더스는 "3년째가 되려 할 때" 그의 아들 벨샤살에게 왕위를 위임했다.(J. B. Pritchard, Ancient Near Eastern Texts Relating to the Old Testament, Princeton, New Jersey: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50, pp. 312–13) 벨샤살의 첫해인 그의 3년차는 기원전 553년/52년이었다. 시파르 원통 비문에 따르면, 나보니두스 3년째 되는 바로 이 해에 마르둨이 키루스를 그의 메디아 왕 아스티아게스에 반란하도록 "자극"시켰다고 한다. 나보니더스 연대기에 언급된 바와 같이, 아스티야게스는 3년 후, 즉 나보니더스 통치 6년인 기원전 550/49년에 마침내 패배했다. 다니엘이 기원전 551년/50년 벨샤살 3년(다니엘 8:1), 즉 기원전 551년에 미래의 페르시아의 행정 수도 수사로 옮겨진 것은 우연이 아닐 수 없으며, 이는 두뿔을 가진 숫양이 서쪽, 북쪽 그리고 남쪽으로 들이받는 것으로 상징되는 메도-페르시아 제국의 출현을 보여주는 것이다. (?) (다니엘 8:1–4, 20) 그렇다면 그의 환상은 주어진 지 몇 달 만에 실현되기 시작했다.
28 D. J. Wiseman, Nebuchadrezzar and Babylon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1985), pp. 42–80.
28 D. J. 와이즈먼의 <네부카드네자르와 바빌론>(옥스포드: 옥스퍼드 대학 출판부, 1985년), 42–8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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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느부갓네살이 43년간 바빌론을 치리했으므로 말년에 아마도 그가 노망기가 발동했을 가능성이 컸을 것입니다.
조선조 왕이었던 영조가 장수한 사람이고 탕평책을 써는 등 대체로 정치를 잘 한 왕으로 알려져 있는데 영조 역시 말년에 노망이 작동했다는 사실을 역사기록에서 알 수 있습니다.
느부갓네살의 꿈은 자신의 업적을 자평한 꿈으로 보입니다. 그가 이룩한 업적에 스스로 감동되는 꿈이죠 다니엘이 그 꿈을 듣기 좋은 말로 표현해 준 것입니다. 만일 내가 이에 좀더 확대해석을 한다면 이방인의 때를 예언하는 꿈이 아니라 느부갓네살의 금신상은 세상문명을 상징하며 그 문명이 찬란함을 나타내지만 발 부위가 쇠와 자갈로 되어 있다는 사실은 문명의 기초가 이기주의에 기반을 두었기 때문에 매우 허약하여서, 근원을 알 수 없는(코로나 바이러스와 같은) 작은 힘에 의해서도 완전히 무너져 내릴 수 있다는 의미로 봅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역사를 주관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인간은 주어진 환경에서 최선을 다함으로써 그분의 긍휼을 기대하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