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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곳을 준비하라
2019년 12월 25일 / 누가복음 2:1-7
본문을 보면,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던 때의 모습을 기록하고 있다.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곳은 베들레헴이다. 그런데 예수님의 육신적인 부모인 요셉과 마리아가 살던 곳은 유대 베들레헴이 아니라 갈릴리 나사렛이다. 마리아는 자신이 사는 마을에서 편하게 출산한 것이 아니라, 90마일 정도 떨어진 베들레헴에 만삭의 몸으로 어렵게 가서 원정 출산을 한다.
이것은 베들레헴에 마리아의 친정이 있기 때문도 아니고, 출산하기 좋은 곳이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도 아니다. 단지 당신의 로마 황제였던 ‘가이사 아구스도’가 모든 사람은 호적을 해야 한다고 명령을 했기 때문이다. 호적을 하게 하는 주된 목적은 효과적으로 세금을 징수하려는데 있다. 세금을 징수하는데 누락된 사람이 생기지 않도록 인구조사를 하였다. 이런 기록은 예수님 탄생의 연대와 역사적 사실임을 밝히는데 중요하기는 하다. 요셉은 다윗의 집 족속이기 때문에 그의 조상 다윗의 고향인 베들레헴에 가서 호적 하기 위해 마리아를 데리고 베들레헴으로 가게 된 것이다.
1. 당시 상황을 성경으로 돌아가 성탄 이야기를 사실대로 보자.
해마다 성탄절이 되면 언제나 등장하는 친숙한 그림이 있다. 아기 예수님이 말구유에 누워 계시고 그 주변에 말을 비롯한 양과 몇 마리 가축들이 마리아, 요셉과 함께 있는 그림이다. 그리고 목자들과 화려한 옷을 입은 동방박사 세 사람이 둘러서 있다. 배경이 되는 온 세상이 흰 눈으로 덮여 있다. 그야말로 화이트 크리스마스, 고요한 밤이다.
‘예수님이 어디서 태어나셨나요?’, ‘베들레헴 말구유요.’ 이것은 정확하게 틀린 대답이다. 예수님은 말구유에 태어나신 적도 없을뿐더러, 우리가 생각하는 구유에 누워계셨던 것도 아니다. 성경 어디에도 예수님이 말구유에 태어났다고 말하지 않는다. ‘맏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 ’(눅 2:7)라고 적고 있을 뿐이다. 오해를 풀기 위하여 다시 팔레스타인으로 여행을 떠나 보자.
예수님 당시 팔레스타인 인구 현황에 관한 다양한 연구에 따르면, 당시 베들레헴 인구는 최대 300명 정도였다. 종교적 중심지 예루살렘은 거주 인구가 최대 3만 명이 되지 않았다. 예루살렘 거주자 가운데 절대다수는 제사장을 포함하여 레위인 등 성전에서 일하던 성전 관계자들이었다.
‘구유’ 이것은 일반 가정이나 숙박업소의 마구간을 의미하지 않는다. 소 외양간도 아니다. 베들레헴에서는 말이나 소를 키우지 않았다. 양이나 염소가 일반적이었다. 드물게는 나귀가, 아주 드물게는 낙타가 있었을지 모른다. 양이나 염소 우리는 울타리만 쳐져 있는 경우가 일반적이었다. 겨울철을 대비하여 종려나무 잎과 흙을 이용한 지붕을 씌운 우리가 존재하기도 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우리에는 천장이 없었다. ‘밖에서 밤에 자기 양떼를 지키던’(눅 2:8) 상황을 떠올리면 예수님의 탄생 시기는 눈 내리는 겨울철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목자들은 주로 들판에서 생활을 한다. 목자라고 모두가 자영 목자라고 생각할 수는 없다. 예수님 탄생을 전후한 시기에는 고용 목자 즉 삯꾼 목자들이 더 많았다. 예루살렘의 돈 있는 이들의 가축을 키우던 이들이 많았다. 겨울철이 아니면 들판에서 꼴을 뜯기면서 양과 염소들과 함께 생활한다. 야외에 머물다가 비라도 지나가거나 추워지는 시간이면 몸을 피하고, 양이나 염소 등을 숨기는 공간들이 있었다. 석회암 산지에 생긴 자연 동굴 등이었다. 예루살렘이나 베들레헴 지역은 석회암으로 구성된 산지가 많다. 이 석회암 지역에는 여러 가지 영향으로 생겨난 자연 동굴이나 웅덩이가 많았다. 이런 곳에 지푸라기와 엉성한 물통과 먹이통을 놓곤 했다. 이런 공간은 때로는 추위를 피하거나 하룻밤을 지새울 수 있는 쉼터가 되기도 했다. 오갈 데 없었던 예수님 일행이 이런 공간이라도 얻을 수 있었다고 볼 수는 없을까? 양의 우리는 들에서 양을 칠 때는 더욱 단순했다. 양의 우리에 지붕이 있는 경우는 제한된 계절에 제한된 용도일 때뿐이었다.
그리고 마리아와 요셉에게 나귀는 없었다. 요셉이 만삭이 다 된 마리아를 나귀에 태우고 베들레헴으로 가는 장면을 쉽게 떠올리곤 한다. 그러나 마리아와 요셉에게는 자가용이 없었다. 오늘날의 자동차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당시의 교통수단으로 나귀와 말, 낙타를 꼽을 수 있다. 여기에 말이나 나귀가 끄는 수레가 더해질 수 있겠다. 당시 나귀는 고급 승용차에 해당했다. 흰 나귀는 아무나 탈 수도 없었고 지체 있는 이들의 소유였다. 화물수송이나 타는 용도로 나귀를 사용하던 이들도 서민이 아니었다. 그 시기에 말은 군수용품이었다. 로마 총독부나 주둔군의 고위직, 특별한 임무를 가진 병사들 외에는 말을 이용할 수 없었다. 낙타는 부자들의 장거리 출장용, 큰 농사를 짓는 이들의 화물수송용이었다. 평범한 서민들의 교통수단은 두 다리였다.
마리아나 요셉 모두 ‘깡촌’ 나사렛 사람들,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다고들 말한다. 깡촌에서 사는 - 최소한 당시 거주지가 나사렛이라는 것을 고려하면 - 사실혼(事實婚) 상황도 아닌 가난한 부부가 나귀를 타고 베들레헴까지 오갔을 가능성은 없다. 마리아와 요셉은 걸어서 일주일 넘는 거리를 움직였을 것이다. 나사렛에서 베들레헴까지 ‘족장로’로 부르는 사마리아 산지 길과 유대 산지 길을 따라 이동했을 경우의 소요 시간이다. 당시 보편적으로 유대인들이 이 길을 사용하지 않았음을 고려한다면 족히 편도 2주는 걸렸을 것 같다. 어쨌든 이들은 걸어서 베들레헴으로 향했을 것이다. 베들레헴으로 가는 길에 세례 요한이 출생한 예루살렘 근교의 사가랴 집(오늘날의 엔케렘)을 찾았을 수도 있다.
예수님은 마리아의 아들 예수 / 예수님 당시 자녀들은 ‘누구의 아들’로 불렸다. 성이 없던 시절이었기에 한 사람 한 사람을 구분하기 위하여 지역 연고나 가족 연고를 이름에 덧붙이곤 했다. 누구의 아들이라고 불릴 때는 당연히 아버지 아무개의 아들로 불렸다. 그런데 예수님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 마리아의 아들 예수로 불렸다. 이것은 아비가 누군지 모르는 마리아의 아들 예수라는 의미였다. ‘아비 없는 자식’ 또는 ‘호래자식’이라는 비아냥거림과 조롱이 섞여 있었다.
▶ 예수님께서 베들레헴까지 가셔서 출생하게 된 것은 보통 사람의 탄생이 아니라 메시아의 탄생임을 분명히 하기 위한 것이다. 미가 5:2에 보면,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태초에니라’라고 했다. 곧 베들레헴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할 메시아가 탄생할 것이라는 예언인데, 이것이 성취되는 과정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이사야 11:1절에는 메시아의 혈통까지 나타나 있다.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이새는 다윗 왕의 아버지이다. 예수님께서 육신적으로 베들레헴에서 다윗의 자손으로 태어나셨음을 통해 성경은 예수님의 탄생이 이 땅을 구원할 메시아의 탄생을 예언한 구약의 말씀이 성취되었음을 말해 주어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특히 유대인들로 하여금 하나님과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을 믿고 영접하여 축복의 통로로 쓰시려 함이었다.
그런데 본문을 보면 예수님을 통해 메시아 예언이 성취된 것 이외에 출산과 관계된 이야기가 나온다. 그것은 아기 예수님을 모실 여관방이 없어서 강보에 쌓아서 구유에 뉘었다는 것이다. 요셉은 만삭이 된 아내를 데리고 간신히 베들레헴에 도착을 했지만 산모와 함께 있을 방 하나 구할 수가 없었다. 요셉은 방을 구하기 위해서 여러 곳을 다녔을 것이다. 그런데 한결같이 들려오는 말은 ‘방이 없으니 다른 곳으로 가 보라!’라는 것뿐이었다. 지금 같으면 상상치도 못할 일이다.
그런데 요셉과 마리아가 도착한 베들레헴은 먼저 온 사람들로 인해서 방이 다 찼기 때문에 요셉으로서는 산모와 곧 태어날 아기를 위해 방을 마련하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육신의 아버지인 요셉에게는 방을 구하는 일이 불가능했겠지만 그렇다고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에게도 불가능했겠는가? 하나님께서는 메시아 탄생을 몇백 년 전부터 예언하고 준비해 오셨다. 메시아의 길을 예비하라고 세례 요한도 미리 준비하셨다. 예수님의 탄생 때에는 동방박사와 목자들을 준비하셨다가 아기 예수님을 보고 경배하게 하시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탄생하실 방을 능력이 없어서 준비해 놓지 못하신 하나님은 아니실 것이다. 하나님께서 하시려면 아기 예수님께서 탄생하실 때를 맞춰 베들레헴에 가장 좋은 여관을 만들게 하시고 그곳의 가장 좋은 VIP 방을 비워두게 하셨다가 요셉과 마리아를 맞게 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구약의 말씀도 성취되고, 예수님도 아름답게 탄생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지 않으셨다. 그것은 하나님의 능력이 없어서가 아닌 그것이 의미하는 메시지가 있기 때문이다.
2. 메시아의 오심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그 당시의 사람들의 모습.
아무리 여관의 방이 없다고 할지라도 곧 출산할 임산부가 방을 찾는데 방이 없다고 다른 곳에 가라는 것은 상식적이지 못하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자신의 방이라도 내어서 임산부에게 주어야 할 상황이다. 하지만 만삭의 마리아를 보았던 여관 주인, 먼저 여관에 투숙했던 손님들도 자신의 방을 대신 쓰라고 양보한 사람은 없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아기 예수님을 거부하고 맞아들이지 못했다. 만일 지금 그러한 일이 우리에게 주어졌다면 우리는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
이렇게 거절하는 모습은 헤롯왕의 모습을 보면 더욱 분명히 알 수 있다. 동방박사로부터 '유다의 왕이 탄생했다'라는 말을 들은 헤롯왕은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을 모아 놓고, ‘그리스도가 어디서 나겠느냐?’라고 묻기까지 했다. 그리고 ‘유대 베들레헴’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헤롯이 한 일은 베들레헴과 그 주변 지역에 있는 두 살 아래의 아이들을 모두 죽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당시의 종교지도자들도 메시아가 탄생했다는 말을 듣고도 찾으려고 한 것이 아니라 헤롯과 함께 메시아를 죽이려는 일에 함께 동조했다. 예수님이 장성하신 이후에도 이러한 일들은 지속하였다. 대제사장과 바리새인과 서기관 및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자기네들을 구원하시는 메시아로 영접하기를 거부하고 끝내는 십자가에 못 받았다.
구유에 누우신 아기 예수님의 모습은 죄인된 사람들을 구하려고 오신 메시아의 찾아오심을 거부하였던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하루 또는 며칠 동안이라도 자신들을 살려주시기 위해서 오신 아기 예수님을 방치하였다. 자기 자신의 안일과 유익을 고집하던 저들은 헤롯처럼 자신들의 편의 즉 육신의 안일을 위해 이런저런 핑계를 하면서 예수님 그것도 아기 예수님께 방을 내어 드리지 않았다. 그들에게는 아기 예수님에게 양보할만한 방 하나가 아니 마음 준비도 없었다.
3. 하나님의 뜻은 이러했을 것이다.
우리가 인간적으로 보면, 예수님이 인간의 모습으로 오더라도 더 좋은 방법으로 오시면 좋았을 텐데…. 이렇게 생각할 수 있다. 사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이요, 전지전능하신 분이시매 원하시면 얼마든지 화려하고 좋은 데를 골라서 태어나실 수 있었다. 예를 들어 당시 세계의 심장부인 로마, 아니면 하다못해 이스라엘의 수도 예루살렘, 왕궁, 아니면 웬만한 저택에서 태어나면 더 좋았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 수 있다. 그런데 예수님이 나신 곳은 어떤 곳은 아주 작은 마을이다. 그것도 호적하러 온 사람들로 인해 사관마다 만원이었다. 결국, 아기 예수는 마구간으로 갔다. 그 누추한 곳에 마땅한 자리가 없으니까 구유를 침대 삼아 아기 예수님을 뉘였을 것이다.
이렇게 된 이유가 무엇일까? 겉으로 보면 사람들이 그렇게 만든 것 같다. 로마 황제 가이사, 요셉과 마리아, 사관 주인과 손님 등이 연출한 것 같다. 그런데 사실은 보이지 않는 가운데 배후에서 역하신 하나님의 섭리라는 사실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다시 말하면, 어쩌다가 그렇게 된 게 아니라 스스로 선택하신 것이다. 많고 많은 장소가 있었지만, 굳이 그런 곳을 골라 탄생하신 것이다. 왜 예수님이 스스로 이런 곳을 택해서 오셨을까?
빌 2:5-8 / 그리스도 예수께서 여러분에게 보여주신 자세를 본받으십시오. 6)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이면서도 하나님으로서의 권리를 요구하거나 거기에 집착하지 않으셨습니다. 7) 오히려 그 큰 능력과 영광을 버리고 종(인간)의 형상을 취하여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셨습니다. 8) 아니, 훨씬 더 자기를 낮추어 죄인처럼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러면 왜 그러셨을까? 만일 예수님이 왕의 모습이나 귀족의 모습으로 오셨다면 웬만한 사람은 감히 접근하지 못할 것이다. 왕궁에서 나셨다면 왕족이나 측근들 일부만 접근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가장 천한 목수의 집안, 작은 마을, 구유에서 나셨으므로 누구나 마음만 있다면 접근이 가능했다. 양을 치던 목자들을 비롯하여 이방인인 동방박사들까지 올 수가 있었다.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 예수님의 모습은 당신을 거부하는 사람들을 위해 방을 만들어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게 한다. 우리는 구유에 누이신 아기 예수님을 보면서 메시아를 거부한 사람들의 모습을 볼 뿐만 아니라, 그 반대로 하나님께서는 저들을 맞이하기 위한 방을 만들어 주셨음을 보게 된다.
마 5:45 / … 그분은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햇빛을 비추어 주시고 옳은 사람에게나 옳지 않은 사람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 주신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 이 땅에 오셨다. 왕(王) 중의 왕이요, 주(主)의 주가 되셨다. 그러기에 세상적으로는 예수님이 탄생하시기에 가장 합당한 곳은 왕궁이었다. 그런데 하나님은 예수님을 왕궁에서 태어나지 않게 하셨다.
동방박사들도 세상 사람들과 같이 생각했다. 위대한 이의 탄생을 알리는 별을 따라오면서 왕궁에서 왕자로 태어났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헤롯왕에 왕궁을 찾아가서 ‘유대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가 경배하러 왔습니다.’라고 했다. 그런데 하나님은 왕 중의 왕인 예수님을 왕궁에서 태어나게 하지 않으셨다. 예수님을 갈릴리 나사렛의 평범한 목수의 약혼녀인 마리아에게 임신케 하셨고, 갖은 어려움을 겪으면서 그리고 호적을 하기 위하여 먼 베들레헴까지 가게 하셔서 원정 출산을 하게 하셨다. 그것도 좋은 곳이 아니라 마구간에서 겨우 출산하게 하셨다.
그러나 그 마구간에는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가 있었다. 그곳은 예수님을 만나고 싶은 사람이면 지위 여하를 막론하고 모두 와서 메시아 예수님을 만나 엎드려 경배할 수 있는 곳이었다. 동방박사들과 같이 이방 사람도 올 수 있고, 높은 지위의 사람들도 올 수 있는 곳이다. 목자들과 같이 그 당시 가장 천대받고 고된 일을 하는 사람들도 올 수 있는 곳이다. 하나님은 그들을 위해 한 방을 예비하셨다. 만약 예수님께서 왕궁에서 태어나셨다면 메시아의 탄생을 제대로 보지 못했을 것이다. 하나님은 평범한 또는 가난한 사람들을 맞이할 자리를 마련해 주신 것이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 모든 것을 다 낮추셨다. 세상 영광을 버리셨다. 세상의 왕궁의 영광이 하늘의 영광에 견줄 만하겠는가? 그런데 우리 모두를 용납하시고 만나기 위해 마구간에 태어나신 것이다(약 2:1-5).
▶ 한 걸음 나아가 예수님은 임마누엘로 각 개인에게 함께 하셨다.
요 14:2-3 / 내 아버지가 계시는 집에는 있을 곳이 많다. 나는 너희를 위하여 있을 곳을 준비하러 간다. 모든 준비가 끝나면 다시 와서 너희를 데려다가 내가 있는 곳에 항상 같이 있도록 하겠다.
요 14:15-18 / [성령의 약속] 너희가 나를 사랑한다면 나의 말을 지키라. 16) 그러면 내가 아버지께 구할 것이며, 아버지께서는 다른 돕는 자를 너희에게 보내 너희와 영원히 같이 계시게 할 것이다. 17) 그분은 진리로 인도하시는 영이다. 세상은 그분을 맞아들일 수 없다. 세상이 그분을 찾지도 않고 알지도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너희는 그분을 알고 있다. 지금은 그분이 너희와 함께 계시고 훗날에는 너희 안에 계실 것이기 때문이다. 18) 나는 너희를 벌판에 버려진 고아처럼 내버려 두지 않고 너희에게 다시 오겠다.
요 15:14-15 / 너희가 내 말을 지키면 너희는 내 친구다. 15) 나는 이제부터 너희를 종이라고 부르지 않겠다. 주인은 종들에게 비밀을 털어놓지 않기 때문이다. 이제 너희는 내 친구다. 아버지께서 내게 하신 모든 말씀을 너희에게 다 말하였다.
마 28:20 / 내가 너희에게 명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내가 세상 끝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겠다.
막 16:20 / 그리고 제자들은 온 세상을 두루 다니며 복음을 전하는데 주께서 늘 그들과 함께 하셔서 그들이 말씀을 전할 때마다 표적이 따르게 하셨다.
행 3:6-7 / 다시 베드로가 말하였다. `우리는 돈이 한 푼도 없소. 그러나 다른 것을 주겠소. 자,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시오!' 7) 그러면서 베드로는 앉은뱅이의 오른손을 잡아 일으켰다. 그러자 그 앉은뱅이는 당장에 다리와 발목에 힘이 생겨 벌떡 일어나 걷기 시작하였다.
히브리서 말씀을 보면서 이제라도 담대히 하늘에 계신 예수님께 담대히 나아가자.
히 4:14-16 / [위대한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러나 하늘로 올라가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는 바로 우리를 도우실 위대한 대제사장이십니다. 그러므로 그분에 대한 신앙을 결코 저버려서는 안 됩니다. 15) 우리의 대제사장은 우리가 당하는 이 시련을 몸소 겪으신 분이기 때문에 우리의 연약함을 잘 알고 계십니다. 그러면서도 그분은 단 한 번도 유혹에 빠져 죄를 범하신 일이 없습니다. 16) 그러니 우리도 용기를 가지고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나아가 그분의 자비를 입고 필요에 따라 주시는 은혜와 도우심을 받읍시다.
4. 지금도 향해 ‘너에게는 내가 거할 방이 있느냐?’ 하시며 문을 두드리신다.
■ 1988년 하덕규 작사, 작곡의 ‘가시나무’라는 노래가 있다. 하덕규는 과거에 ‘시인과 촌장’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한 가수이자, 백석대학교 교수이다. 인간의 존재 의미와 내면 속 혼돈에 대한 하덕규의 종교적 성찰이자 참회다. 그는 가수 활동으로 많은 인기를 얻었다. 그러나 공연 끝에 찾아오는 허탈감과 공허함으로 급기야 무섭게 찾아오는 우울증에 시달리다가 술과 대마초에 빠지고 말았다. 매일 술과 대마초에 빠져 나락으로 떨어져가던 그의 인생에 새로운 소망의 한 줄기 빛이 비쳤다.
어느 날 누나에게 이끌려 간 송구영신 예배를 드리는 가운데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모습을 회개하며 거듭나게 된다. 그는 그 예배에서 가시나무 숲속을 헤매는 수많은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고 한다. 욕심과 욕망이 가득하고, 날카로운 가시로 사랑하는 사람들에게까지 상처를 주고, 어둠과 슬픔과 우울함이 가득한 ‘너무도 많은 내’가 보였다고 한다. 그리고 그때 가시나무 덩굴 가운데 피 흘리는 예수의 형상이 보였다. 그는 무언가에 이끌려 곧장 곡을 쓰기 시작했고 예수님 앞에서 자신의 모습을 되돌아보면서 10분 만에 완성했다.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당신의 쉴 곳 없네. 내 속엔 헛된 바램들~로 당신의 편할 곳 없네. 내 속엔 내가 어쩔 수 없는 어둠, 당신의 쉴 자리를 뺏고 내 속엔 내가 이길 수 없는 슬픔, 무성한 가시나무 숲 같네. 바람만 불면 그 메마른 가지, 서로 부대끼며 울어대고, 쉴 곳을 찾아 지쳐 날아온, 어린 새들도 가시에 찔려 날아가고, 바람만 불면 외롭고 또 괴로워, 슬픈 노래를 부르던 날이 많았는데.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서 당신의 쉴 곳 없네.
‘그분이 내 안에 오셔서 가시나무와 같은 나를 버리지 않으시고 내 가시에 찔리면서 가시를 뽑아주시고 끝까지 품어주셨다.’ 하덕규의 영혼은 사나운 가시나무 숲이요, 예수님은 피 흘리는 가시나무새로 온 것이다. 예수님의 ‘대속(代贖)’이다. 하덕규는 그 후 신앙인, 찬양사역자의 삶을 살게 된다. ‘가시나무’로 삶을 선회한 하덕규는 44세에 암에도 걸렸으나 미국에서 종교학을 공부하고 52세인 2010년 워싱턴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지금은 기독교계 대학인 백석예술대 교회실용음악과 교수로 재직하며 간증과 노래로 복음을 전하고 있다. 참고로 가시나무새는 전설의 새다. 평생 가시나무를 찾아 헤매다 스스로 찔려 단 한 번 소리 높여 가장 아름다운 노래를 부르고 죽는다는 새로 아일랜드 켈트족의 전설에 나온다.
너에게는 내가 거할 방이 있느냐?는 말씀은 예수님을 믿지 않는 불신자들을 향해서 하신 말씀이 아니다. 이것은 소아시아의 있는 일곱 교회 중에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하신 말씀이다. 그들은 이미 예수님을 믿고 살아가는 기독교인이다. 그리고 그들의 자랑은 자신들은 부요하며 부족한 것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들의 모습을 보시면서 책망하시기를 ‘차든지 덥든지 하라’라는 것이다. 그들은 예수님을 모시는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을 했지만, 정작 예수님은 그들의 삶 속에 들어가지 못하시고 문밖에 서서 문 열기를 기다리고 계셨다.
예수님께서 함께 먹고 마실 곳이 없어서 라오디게아 교인들의 문을 두드리시는 것이 아니다. 그들을 긍휼히 여기사 그들의 삶 속에 들어가셔서 인격적으로 그들과 만나며 교제하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그들을 변화시켜 거룩한 그릇으로 만드사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해 주시겠다는 것이다. 그러니 예수님이 들어갈 수 있도록 문을 열어달라고 하시는 것이다. 그런데 라오디게아 사람들은 예수님을 맞아들일 방이 없었다. 아니 있어도 제공하지를 않는다.
계 3:20 / 보라, 내가 문 앞에 서서 계속 문을 두드리고 있다. 만일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에게 들어가 그와 함께 먹고 그도 나와 함께 먹게 될 것이다.
자신들의 삶이 주님으로 인해서 간섭받고, 불편해지는 것이 싫었다. 지금 있는 세상의 부요함을 하나님이 주신 은혜로 알고 누리면 됐지, 굳이 예수님께서 자신들의 삶을 지배하도록 자가네 삶에 모시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니 물 위에 떠도는 기름처럼 ‘예수님 따로 자기 따로’가 되는 것이다. 나쁜 말로 표현하면 예수님을 이용하자는 것이다.
■ 미국 어느 작은 마을에 ‘윌리’라는 9세 소년이 있었다. 4학년에 해당되었지만 지적 능력이 다소 떨어져 2학년에 다니고 있었다. 그해 성탄절에 주일학교에서 성극을 하게 되었는데 윌리가 맡은 역은 여관집 주인역이었다. 예배당에 많은 사람이 모여들었다. 연극이 진행되던 중 요셉과 마리아가 여관으로 다가가 문을 두드렸다. 주인 역할을 하는 윌리가 나와 ‘방이 다 찼으니 다른 곳으로 가라’고 했다. 그러나 요셉과 마리아는 간절히 사정했다. ‘우리는 너무 멀리에서 왔습니다. 아내는 금방 출산할 것 같습니다. 제발 좀 부탁드립니다.’ 그러자 여관 주인으로 분장한 윌리는 말을 잊은 채 마리아를 오래도록 쳐다보았다. 무대 뒤에서 대사를 읽어 주던 선생님은 윌리가 대사를 까먹은 줄 알고 자꾸 읽어 주었다. 한동안 서 있던 윌리는 선생님이 크게 읽어 주는 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대답했다. ‘안돼요. 방이 없다니까요. 가세요!’ 결국, 요셉과 마리아는 슬픈 얼굴로 돌아섰다. 바로 이때였다. 각본대로 이제 방문을 딛고 들어가야 할 윌리가 돌아가는 요셉의 가족을 걱정스러운 듯이 눈물을 흘리며 지켜보다가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 ‘요셉, 마리아! 가지 말아요. 마리아를 데리고 들어와요!’ 물론 각본에 없는 대사였다. ‘내 안방을 쓰세요. 내 방에 어서 들어가란 말이예요!’ 물론 연극은 엉망이 되어버리고 말았지만, 그 장면을 지켜보던 많은 교인은 ‘내 생애에 있어서 이렇게 감동적인 성탄극은 처음 보았소.’라고 말했다고 한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방을 찾으실 때 그 방을 내어 드려야 된다고 생각은 하고 있지만, 막상 예수님께서 방을 찾으실 때는 제사장이나 레위사람처럼 외면한다. 우리 자신 여전히 예수님을 문밖에 세워 놓고, 잠시만 기다려 달라고 할 때가 많이 있다. 지금은 하는 일이 바빠서 안 될 것 같고, 좀 한가해 지면 그때 한번 생각해 보겠다고 미루기도 한다. 예수님을 위해 살아가겠다고 하지만 아직도 나를 위해서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이 부끄럽게 느껴진다.
다음의 성경을 주목하여 보자. 우리의 모습이 어디에 속하여 있는지?
마 21:28-32 / [두 아들의 비유] `이것은 어떻게 생각하느냐? 두 아들을 둔 사람이 있었다. 아버지가 큰아들에게 가서 ‘얘야, 오늘은 포도원에 가서 일을 하거라’ 하고 말하였다. 29) 그러자 큰아들이 ‘싫습니다' 하고 대답하였지만 후에 뉘우치고 일하러 갔다. 30) 아버지는 또 작은아들에게 가서 같은 말을 하였다. 작은아들은 ‘예, 아버지, 가겠습니다.’ 하고 대답하고는 가지 않았다. 31) 두 아들 중에 그의 아버지에게 순종한 아들은 어느 쪽이냐?하고 예수께서 물으셨다. 그들이 ‘물론, 큰아들입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께서 그 말씀하신 뜻을 설명해 주셨다. `내가 진정으로 말한다. 분명히 못된 짓만 일삼는다는 세리들과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것이다. 32) 침례 요한이 너희에게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고 하였을 때 세리들과 창녀들은 그 말을 들었지만 너희는 듣지 않았다. 너희는 그것을 보고도 끝내 회개하지 않고 그를 믿지 않았다.
마 21:33-43 / 이제 이 비유를 들어라. 어떤 지주가 포도원을 만들고 울타리를 둘러쳤다. 그러고는 포도즙을 짤 큰 확을 파고 망대를 세운 뒤 그것을 소작인들에게 도지로 주고 다른 나라로 갔다. 34) 포도를 거두어들일 철이 되자 그는 소출을 받아오라고 종들을 소작인들에게 보냈다. 35) 그런데 소작인들은 종들을 붙잡아 하나는 때려 주고 하나는 죽이고 하나는 돌로 쳤다. 36) 지주는 다시 더 많은 종들을 보냈으나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37) 마지막으로 주인은 그의 아들을 보내며 ‘내 아들이야 함부로 대하지 않겠지.’ 하고 생각하였다. 38) 그러나 소작인들은 그 아들이 오는 것을 보자 서로 말하였다. ‘저기 상속자가 오는구나. 잘됐다. 저놈을 죽여 버리고 이 포도원을 우리가 차지하자.’ 39) 그러고는 그를 잡아 포도원 밖으로 끌어다 죽여 버렸다. 40) 그렇다면 포도원 주인이 돌아왔을 때 ‘그 주인이 소작인들을 어떻게 할 것이라고 생각하느냐?’ 41) 유대인 지도자들이 대답하였다. ‘악한 자들을 모조리 죽여 버리고 그 포도원은 제때에 소출을 바칠 다른 소작인들에게 세줄 것입니다.’ 42) 그러자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너희는 성경에서 이런 말씀을 읽지 못하였느냐? 집 짓는 이 쓸모없다 버린 돌이 이제는 어떤 돌보다도 더욱 소중한 돌이 되었다. 여호와께서 이루신 이 일 그저 놀랍기만 하여라. 엄청나기만 하여라. 43) 잘 들어라. 너희는 하늘나라를 빼앗길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소출을 잘 내는 백성들에게 그 나라를 맡기실 것이다.’
예수님께서 문을 두드리실 때, 우리와 인격적인 만남을 가지기 원하신다. 예수님은 집 밖에서 잠깐 대화하다가 떠나가는 분이 아니다. 잠깐 초대받아서 왔다가 용무 마치고 돌아가는 손님도 아니다.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함께 먹고 살면서 우리의 인생에 함께하기를 원하신다. 우리와 동행하시기를 원하신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의 삶의 꽉 찬 것들을 비워드려야 한다. 내 자신의 시간, 계획들, 하던 일들을 비우지 못하면 주님을 모셔드릴 수가 없는 것이다.
사도 바울의 간증을 들어보자. ‘어떻게, 어느 정도 비우고, 예수님을 모셔 들였나?’를 보자.
빌 3:5-11 / 나는 순수한 유대인 혈통을 이어받아 오랜 전통의 베냐민 가문에 태어났으며, 난 지 여드레 만에 유대인의 표지를 받기 위해 할례의식을 치렀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어디 한군데 흠잡을 데 없는 진짜 유대인입니다. 게다가 유대교의 모든 율법과 관습을 지키기를 가장 엄격하게 요구하는 바리새파 회원이었습니다. 6) 얼마나 그악스러웠던지 교회를 모조리 핍박했고 유대교의 모든 규칙과 규정을 빠짐없이 지키려 온 힘을 쏟았습니다. 7) 그러나 한때 대단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던 이런 것들을 지금에 와서는 모조리 내던졌습니다. 그리스도만을 의지하고 그분에게만 소망을 두기 위해서입니다. 8) 그렇습니다. 나의 주님 그리스도 예수를 알게 된 것이 너무도 존귀해서 이것과 비교하면 다른 것은 다 무가치하게 여겨질 뿐입니다. 나는 그리스도 외에는 다 쓰레기처럼 여기고 모두 내버렸습니다. 그리스도를 얻기 위해 그렇게 한 것입니다. 9) 보다 더 의로운 사람이 되려고 하거나 율법을 지켜서 구원을 얻으려는 생각을 집어치우고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얻고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기 위해서 그렇게 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놓아 주시는 것은 그리스도만을 의지하는 믿음을 가지고 있느냐 없느냐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10) 나는 지금 모든 것을 다 내던졌습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다만 참으로 그리스도를 알고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신 전능한 능력을 체험하고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을 당하고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아는 일입니다. 11)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분이 가지는 신선하고 새로운 생명 가운데서 사는 자가 되기 위해서라면 어떤 일이라도 감수할 것입니다.
바쁜 손길을 잠시 쉬고 예수님께 내 시간을 드리자. 좀 더 기도하며 하나님과 함께 대화할 수 있는 시간을 드리자. 말씀을 읽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시간을 내 드리자. 내 계획보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계획을 주목하자. 내 생각과 뜻을 고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선한 뜻이 무엇인지를 찾으며, 내 생각과 생활 방식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방식으로 조금씩이라도 드리자. 비록 처음에는 많은 빈자리를 마련해 드리지 못하였지만 내 생각과 마음과 생활 속에 들어오셔서 나 자신뿐만 아니라 은혜와 진리로 온 세상을 다 주관하시도록 동조하며 예수님의 한 지체가 되어 드리자.
5. 빈 마음에 찾아오시는 예수님
빈 마음이란 깨끗한 마음이다. 깨끗한 마음을 가지고 준비한 곳에 예수님께서 임하신다. 성경에는 예수님께서 탄생하실 때 마음을 비우고 깨끗하게 한 몇 사람이 등장한다.
❶ 마리아가 마음을 비웠다. 천사 가브리엘이 마리아를 찾아가 메시아의 탄생에 대해 말했다. ‘마리아여 무서워하지 말라 네가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느니라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눅 1:30~31) 또 천사는 마리아에게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어지리라’(눅 1:35)라고 했다. 이때 마리아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눅 1:38) 마리아는 천사의 예언과 성령의 일하심을 믿었다. 자신의 마음을 비워 예수님이 탄생하실 수 있도록 준비하고 기다렸다.
❷ 요셉이 마음을 비웠다. 마태복음 1:19은 요셉에 대해 ‘그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고 표현했다. 요셉은 마리아의 임신이라는 믿을 수 없는 일을 마주하고 있을 때, 이를 드러내지 않고 가만히 끊고자 하였다. 그러나 주의 사자가 꿈에서 나타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하지 말라 그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마 1:20)고 하셨을 때 그 말씀을 받아들였다. 의로운 요셉은 마음을 비우고 탄생하실 예수님을 기다렸다.
❸ 들에서 양을 치는 목자들이 마음을 비웠다. 순수하고 충성스러운 마음으로 양을 지키고 있을 때, 천사들의 노랫소리를 들었다. 예수님의 탄생 소식을 들은 후, ‘이제 베들레헴으로 가서 주께서 우리에게 알리신바 이 이루어진 일을 보자.’(눅 2:15)라고 했다. 예수님의 탄생 소식을 가장 최우선으로 여겼고 빨리 가서 예수님의 탄생을 보고자 하였고 아기 예수님을 본 그들은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찬송하였다.
❹ 동방박사들이 마음을 비웠다. 그들은 먼 나라인 동방에서부터 큰 별을 보고 따라와,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하고, 경배하며 보배합을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렸다. 자신들의 지식과 생각을 버리고 예수님을 만나고자 머나먼 길을 찾아왔다.
혹이라도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 자신의 방을 내어준 사람이 있었더라면 그 사람의 이름이 성경에 실렸을 것이다.
❺ ○○○ 안에 내 이름을 넣어야 보자. 이제 마음의 문을 열고 예수님을 영접하여 평생을 하나님과 동행하는 나와 우리가 되어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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