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09. 27
그건 좀 곤란해
<유목민들>
보라
얼마 전, 코로나에 걸렸다. 코로나가 3년이 되어가는 동안 한 번도 안 걸렸었기 때문에 속으로 은근, ‘아 나 코로나 슈퍼항체인가’ 생각하며 살았었다. 그러자 걸렸다. 역시 슈퍼항체라고 생각하면 걸리는 건지. 다행히 아프지 않게 지나갔다. 거의 24시간 동안 누워있었다. 딱히 누워있지 않고 할 수 있는 것도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가격리 일주일 동안 마음 편히 쉴 수 있었다. 굳이 코로나에 장점을 뽑자면 사람들을 한 템포 쉴 수 있게 만들어주는 점인 것 같다. 다행히도 같이 사는 가족들은 걸리지 않았다. 나만 다른 방에서 밥 먹고, 자고, 활동했다. 밥시간대가 되면 밥을 받아서 먹었다. 이런 상황에서 가족과 분리할 수 있는 공간이 있다는 건 굉장히 감사한 거였다. 만일 격리할 수 있는 방이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유튜브 알고리즘이 내게 재테크 영상을 띄워줬다. ‘20대에 몇 천 모으기’, ‘30살에 집 사는 법’ 등 말이다. 한 영상에 주인공은 30대도 되지 않았지만 집 투기하는 것에 성공해서 큰돈을 벌었다고 했다. 큰돈을 벌려면 작은 것보단 큰 거에 투자하는 게 중요하다고 했다. 예를 들면 명품 가방을 생각하지 말고 돈을 아껴서 집을 살 생각을 하라는 거다. 아빠한테 이 이야기를 했더니, “너는 그런 거에 관심 갖지 마. 인생 망하는 지름길이야"라고 말한다. 결국 몇 천을 모으자는 사람도 그 사람의 목표는 집을 사는 것이었다. 이미 집 투기에 성공한 사람도 그 투기한 집들을 모아 더 비싼 집을 사는 게 목표란다. 도대체 집이란 뭘까. 나는 지금까지 내가 쉴 수 있고, 안전하고, 잠잘 수 있는 공간이라 생각했는데 아닌가 보다. 지금 사람들에게는 쉬는 공간을 넘어서 돈을 버는 수단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것도 그저 시대 흐름이라고 넘겨야 하는지 고민이 된다. 불과 몇 년 전까지 나는 내 방이 없었다. 중학생이 되어서야 방이 생겼다. 난 우리 가족이 가난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지만 다른 친구들과 비교해 보면 가난했다. 왜냐하면 우리 집은 좁았으니까. 내가 우리 집이 가난하다고 인정하지 않은 이유 중 하나는 내 머릿속 가난은 굉장히 비참해 보였다. 밥을 먹지 못해 굶고, 옷은 너덜거리고, 항상 우울해 보이는 사람들. 그에 비해 나는 밥을 굶어본 적도 없고, 당연히 옷도 너덜거린 적 없다. 결코 싸지 않은 대안학교를 꾸준히 다녔고, 적당히 사고 싶은 건 살 수 있었다.(적당히라는 것도 애매한 기준이다. 내 기준 적당히는 5만 원을 넘지 않는 것. 적어도 10만 원이 최대) 우리 가족은 우울해있지도 않았다. 좁은 집에서도 음악이 흘러나오면 서로 우스꽝스러운 춤을 추며 깔깔거렸다. 물론 다른 가정들처럼 불화가 있는 날도 있었다.
내가 가난하다는 걸 인정한 순간은 가난이 고정된 이미지가 아니란 걸 깨달았을 때다. 어떤 사람이 보면 내가 가난해 보이지 않을 수도 있다. 누구나 기준은 다르니까. 그러나 가난이란 건 절대적이지 않고, 티비에 보이는 가난들이 전부가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을 때 난 인정했다. 우리 집은 가난하다고. 티비에 보이는 후원 광고들은 마음을 움직이게 만든다. 어린 아기가 치료를 받지 못해 엄마가 우는 모습, 소년 소녀 가장들이 집을 책임지고 나이 든 할머니는 몸이 아픈 상황들. 아프리카 아이들이 깨끗한 물을 못 먹어 흙탕물을 먹는 장면들. 물론 그런 장면들은 사람들이 돈을 선뜻 낼 수 있게 만드는 힘이지만 자칫하면 그들의 삶을 가난이라는 고정적인 틀에 넣어버리는 것 같다. 나의 가족은 돈이 크게 나갈 일이 생기면 걱정한다. 우리는 몇 억짜리 집을 살 수 없다. 그렇기에 큰 돈을 벌게 되는 기회가 생기지 않는다면 꾸준히 이사를 다녀야할 것이다. 배우고 싶은 걸 마음껏 배울 수 없다. 이러한 사실들은 때때로 나를 속상하게 만들지만 그렇다고 내 삶이 불행하지는 않다.
9월 24일 기후정의 집회에 나갔었다. 시위에 열기를 보고 싶어 나갔다. 그곳에는 기후 위기로 인해 불평등을 겪은 다양한 사람들이 모였다. 여러 사람들이 무대에서 발언을 했다. 나는 그중에서 빈곤사회연대 위원장이 말했던 내용이 기억에 남는다. 얼마 전 태풍으로 인해 피해 입은 사람들을 이야기했다. 피해 입은 사람들 중 반지하에 살던 사람들이 안타깝게 사망한 이야기를 이어가며 기후 위기가 심해질수록 빈곤층부터 피해를 입을 거라고 했다. 나도 태풍으로 인해 사망한 사람들을 함께 떠올려보았다. 이미 벌어진 상태에서 만약이라는 건 의미 없다. 하지만 그 사람들이 만약 반지하에 살지 않았더라면 지금도 삶을 이어나가고 있지 않았을까. 아까 말했듯 몇 년 전까지 내 방은 없었다. 다행히 그때는 코로나가 없었다. 코로나가 생긴 현재 내 방이 없었다면 코로나에 걸렸을 때 우리 가족은 재난이었을 것이다. 가족과 나를 분리시킬 공간이 없었을 것이고 모두가 걸렸을 것이다. 아빠는 회사에 나가지 못해 며칠간 급한 돈들을 어떻게 매울지 고민하며 스트레스를 받았을 것이다. 다행히도 우리 집에서 무사히 코로나가 지나갔다.
넷플릭스에 <작은 아씨들>이라는 드라마가 방영되고 있다. 나는 주변 사람들이 좋아하길래 보기 시작했다. 보자마자 본 걸 후회했다. 이 드라마에 주 키워드도 가난, 부, 비리를 다루고 있다. 루이자 메이 올컷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긴 하지만 느낌은 완전히 달랐다. 보는 내내 가난을 전시한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첫째 언니 김고은이 동생 수술비 1억을 위해 뺨과 배를 강타 당하는 장면, 그림을 잘 그리는 막내동생은 부잣집 친구와 유학을 가고 싶어서 부잣집 아이 대신에 그림을 그려서 대회에 나가는 장면. 돈 없는 사람들을 이용하는 돈 많은 사람들. 가난은 막장이 아니다. 일상적이다. 도대체 드라마와 영화는 막장 요소를 넣지 않고는 가난을 다룰 수 없는 건지 궁금해진다.
나는 집을 가지고 싶다. 재테크를 위한 집이 아닌 마음 편히 쉴 수 있는 집 말이다. 햇빛이 들어오고 넓지 않아도 친한 사람 몇 명 함께 잘 수 있는 정도 크기의 집. 식물을 데려와 죽이지 않고 함께 지내고 싶다. 방에는 은은한 조명과 마음에 드는 그림을 걸어두고 두껍지 않은 이불을 덮고 자고 싶다. 돈이 목적이 아닌 집을 가지고 싶다고 말하긴 했지만 이 마음이 영원할지는 장담할 수 없다. 사람의 마음은 매번 바뀌고 욕망은 끝없이 나온다는 걸 너무나 잘 아니까. 수없이 많은 아파트들 중 비어있는 집들은 많다. 그럼에도 나와 우리 가족이 가진 집은 없고, 살면서 내가 보지도 못할 금액에 집을 샀다는 연예인의 소식은 들려온다.
태풍이와도 안전한 집, 누울 수 있는 집, 추위와 더위를 막을 수 있는 '집'이 모두에게 있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