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반도는 그리 너르지 않지만 삼면이 바다인 축복 받은 땅덩어리다. 덕분에 우리는 바다에 익숙하다. 서해와 남해에겐 조금 미안한 말이지만, 적지 않은 사람들은 ‘바다’라고 하면 반사적으로 동해를 떠올린다. 눈길 닿는 데까지 끝없이 뻗어나간 아련한 수평선, 깊이가 가늠되지 않는 검푸른 바다, 쉬지 않고 달려와 포말로 새하얗게 부서지는 거센 파도, 그리고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장엄한 일출…. 게다가 동해는 서해나 남해와 달리 백두대간이란 높다란 산줄기를 넘어서야 다다를 수 있다는 극적인 긴장감도 있다.
당연히 양양으로 가는 길엔 영동고속도로를 타고 대관령을 지나 강릉을 경유하거나, 44번 국도를 타고 한계령을 넘거나, 56번 국도로 구룡령을 넘는 재미도 빼놓을 수 없다. 국도로 연결되는 한계령과 구룡령은 인제와 홍천에서 각각 양양으로 직접 들어서는 2대 관문이다. 둘 중 어느 고개로 넘어도 좋으리라.
▲ 인제에서 양양으로 넘어가는 관문인 한계령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고갯길로 손꼽힌다.
짙은 녹음 드리운 한계령(寒溪嶺)-.
백두대간을 넘는 수많은 고개 가운데 역사성에선 하늘재와 새재를 못 따르고, 통행량으론 추풍령과 대관령을 따라잡을 수 없지만, 미모만큼은 으뜸인 고개다. 조물주가 온갖 기묘한 바위들로 빚어낸 한계령의 미학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고갯길을 굽이돌 때마다 펼쳐지는 절경에 누가 마음을 빼앗기지 않을 수 있으랴.
그러나 한계령은 미모는 빼어나되 성깔 있는 여인을 닮아 제법 험하다. 그래도 고갯길은 제법 오래 전부터 뚫려 있었던 듯하다. 한계령을 통해 한양을 넘나들던 조선시대 전기엔 양양쪽에 오색역(五色驛)이 있었고, 당시엔 고개 이름도 오색령(五色嶺)이었다. 그래서인지 양양 주민들은 한계령을 아직도 오색령이라 부르길 고집한다.
오색령은 조선 중기인 1530년(중종 25) 새로 증보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지금은 없어졌다’는 간략한 기록으로만 남았다. 그래도 1751년(영조 27)에 이중환이 저술한 택리지엔 오색령이란 지명이 여전히 등장한다. 조선 후기인 1861년(철종 12)에 김정호가 제작한 대동여지도를 보면 오색령 넘는 길은 선으로 그려져 있으나, 10리마다 하는 거리 표시인 방표(傍標)가 보이지 않는다. 이는 거리를 정확히 파악할 수 있는 자료가 충분치 않거나 주민들만 이용하는 ‘작은 길’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한계령은 이미 조선 중기 이전에 한양 가는 길의 기능을 잃고, 단지 인제군 북면 주민들만 양양에서 소금이나 해산물 등을 구해 넘나들 때 이용했을 것으로 짐작해본다.
설악산(1,708m)은 남한 최고의 골산(骨山)이다.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이 부근을 일컬어 ‘산과 바다 사이에 기이하고 훌륭한 경치가 많다’고 찬탄했다. 지명을 살펴보면 산경표에는 설악산을 ‘雪岳’이라 적고, ‘일명 한계산(寒溪山)이라 한다’고 덧붙이고 있다. 대동여지도나 택리지 등을 들춰보면 현재의 외설악을 설악산이라 하고, 내설악을 한계산으로 구분해서 표기하고 있다. 즉 한계산은 설악산의 다른 이름이 아니라 내설악을 일컫던 명칭인 것이다. 지금의 한계령이라는 명칭은 바로 한계산에서 유래했다.
▲ 하조대 무인 등대에서 바라본 바다. 오른쪽으로 하조대가 보인다.
한계령 고갯길은 늑장 부릴수록 좋다.
길손도 그랬다. 흘림골로 들어가선 여심폭포도 슬쩍 훔쳐보았고, 등선대에선 만물상을 감상하며 신선의 기분이 되었다가, 주전골에선 일확천금을 위해 몰래 숨어들어 엽전 만들던 도적놈처럼 긴장감을 놓지 못했다. 또 하늘나라 선녀들이 내려와 목욕하였다는 선녀탕의 투명한 물빛을 보곤 두근거리는 심장이 부끄러워 괜히 오색약수를 벌컥벌컥 마시기도 했다. 바로 여기서만 누릴 수 있는 행복이요, 즐거움이 아니겠는가.
▲ 하늘나라 선녀들이 내려와 목욕을 즐겼다는 주전골의 선녀탕.
오색약수터엔 모두 세 개의 약수공(藥水孔)이 있다.
아래쪽 물가에 두 개가 가까이 붙어 있고, 거기서 상류로 10m 정도 떨어진 지점에 나머지 하나가 있다. 어떤 이들은 아래쪽은 남성들이 마시는 양(陽)약수요, 위쪽은 여성들이 마시는 음(陰)약수라 구분하기도 한다. 예전엔 양약수의 물맛이 더 강했으나 요즘엔 음약수 물맛이 더 진해졌다는 말은 변한 세태를 넌지시 암시하는 듯하다.
오색약수는 조선시대인 1500년 무렵에 오색석사(五色石寺)의 승려가 처음 발견한 이후 많은 사람들의 목젖을 적셔주었다. 원래 약수란 민감한 생물과 같아 명성이 높아져 찾는 사람들이 많아지면 오염되기 쉽다. 그러나 오색약수는 청정한 자연의 상징인 설악의 지하암반에서 갈라진 바위틈을 따라 솟아오르기 때문에 수객(水客)이 많아도 오염될 위험성이 거의 없었다.
안타까운 일은 오색약수의 용출량이 눈에 띄게 줄었다는 사실이다. 길손이 처음 오색약수를 마셨던 1980년대 초반만 해도 수량은 아주 넉넉했다. 70년대 중반의 조사 기록에 따르면 당시 3개의 약수구멍에서 하루에 나오는 용출량이 무려 4,852ℓ로 거의 5,000ℓ나 되었다.
이 정도면 오색의 식당 주인들이 약수를 길어다 푸르스름한 밥을 짓거나 졸깃졸깃한 닭고기 맛이 일품인 약수백숙을 삶아 관광객들에게 제공하기에 충분한 양이었다. 일반인들도 오래 기다리지 않고도 한 통은 거뜬히 받을 수 있었다.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삼척동자도 오색약수를 모르면 간첩이라 할 정도로 오색약수는 탄산수의 대표로 인정을 받았다. 오색약수의 전성기였다.
1990년대 중반에 위기가 찾아왔다.
이전엔 20ℓ 들이 물통에 약수를 받는 데 20~30분이면 충분했으나 그 시간이 점점 길어졌다. 결국 최근엔 약수 길어다 밥이나 백숙을 하기는커녕, 약수 한 모금을 마시기 위해선 30분 이상을 서서 기다려야하는 지경이 되었다. 그럼에도 “적게 나오니 약수지, 많으면 그게 어디 약수야!” 하면서 기다리는 사람들이 적지 않은 걸 보면 오색약수의 명성이 여전함을 알 수 있다.
▲ 슬픈 사랑에 얽힌 전설을 간직하고 있는 하조대 해당화.
오색약수의 대안으로 등장한 게 바로 주전골에 있는 제2오색약수다. ‘원조’ 약수라 할 수 있는 제1오색약수터에서 계류를 따라 상류로 1km 정도 거슬러 오르면 제2오색약수의 물맛을 볼 수 있다. 깊고 험한 주전골은 기묘한 암봉과 폭포가 연이어 나타나는 별천지다. 계류 또한 맑고 깨끗해 계곡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행복감에 젖어들게 된다. 그래서 꼭 약수 때문만이 아니라도 기왕에 오색에 들렀다면 제2오색약수까지 그냥 걷는 일만으로도 참 행복하다. 물맛은 물론 오색약수보다 약하지만, 설악의 속살을 거닐며 시각·청각·후각·미각·촉각의 오감(五感)으로 즐거움을 누릴 수 있으니, 이게 바로 오색약수가 지니고 있는 다섯 가지 덕이 아니겠는가.
도중에 만나는 성국사는 옛날 오색석사터에 새로 지은 절집이다. 전설에 의하면 이 절집의 후원에 다섯 가지 색의 꽃이 피는 나무가 있어 오색사라 하였다고 한다. 현실적으로 한 나무에서 다섯 가지 색깔의 꽃을 피우는 나무는 없다. 따라서 이는 불교에서 청·황·적·백·흑색을 5정색(正色)으로 삼고 있는 데서 절 이름이 유래한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경내엔 통일신라시대에 쌓은 두 개의 탑이 있었으나 동탑은 허물어져 파편들만 남아있고, 오색리 삼층석탑이라 불리는 서탑은 1968년 복원되어 보물 제497호로 지정되었다.
양양의 관문 역할을 하는 오색을 벗어나면 비로소 양양의 모습을 제대로 볼 수 있다. 지명은 한자로는 양양(襄陽)이라 쓰고, 이를 ‘해가 뜨는 고을’ 정도로 해석한다. 발음은 약간 다르다. 토박이 노인들은 ‘야양’이라고 하는데, 앞 글자에서 이응 받침을 탈락시킨 이 발음은 제법 정겹게 들린다. 물론 토박이라 해도 젊은 사람들은 입에 잔뜩 힘을 주고 강하게 양양이라고 발음하기 때문에 이젠 점점 ‘야양’이란 말을 듣기가 쉽지 않은 게 아쉽지만-.
카페 게시글
게시글 본문내용
|
다음검색
댓글
검색 옵션 선택상자
댓글내용선택됨
옵션 더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