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동(遼東)의 모래땅(厥土惟沙)과 백양나무(厥木白楊 : 胡楊)
2020년 08월 13일
[오늘의 주제(主題)는, 2020년 08월 06일에 게재(揭載)된 〈‘용퇴(龍堆)+대만(大灣)’의 ‘용만(龍彎)’〉과 직접적(直接的)으로 연결(連結)된다.
○ 「심양(瀋陽)」은, 오늘날의 요녕성(遼寧省) ‘요수(遼水)=요하(遼河)’ 동안(東岸)에 있는 도시(都市)이자, 지명(地名)’이다. 심양(瀋陽)이란 땅 이름은, 심수(瀋水)의 북안(北岸)에 있기 때문에 ‘심수지양(瀋水之陽)’에서 유래(由來)된 것으로 조선사(朝鮮史)나 대륙사(大陸史)에서 오래된 지명(地名)이 아니다.
그런데 이곳은 본래(本來) “건주(建州)”라고 하였는데, 그 유래(由來)는 알 수 없다. 건주위(建州衛)를 설치하는 바람에 “건주(建州)”라는 지명이 탄생(誕生)될 걸까?
조선사(朝鮮史) 연행기록(燕行記錄)속의 내용(內容)는, 압록강(鴨綠江)을 건너 후(後), “서(西)쪽으로 향한다.”는 것이 대부분(大部分)이다.
또 하나 이해(理解) 불가(不可)한 것은, 대명일통지(大明一統志)나 대청일통지(大淸一統志)속에서는, “건주(建州)에서, 조선(朝鮮)의 왕성(王城)을 가려면 동(東)쪽으로 가야한다.”고 기록(記錄)해 놓고 있어, 지형지세(地形地勢)로 봐도 남(南)쪽의 반도(半島) 왕성(王城)과는 전혀 딴 곳이다.
조선왕조(朝鮮王朝)의 연행기(燕行記)를 보면 : 압록강(鴨綠江)을 건너 후(後), 봉황성(鳳凰城) 이후(以後)는, 「이곳 땅은 모래(沙)로 이루어진 척박(瘠薄)한 곳으로, 사막지대(沙漠地帶)였다.」는 이야기뿐이다.
특히 ‘심양(瀋陽) 땅’에 대해 말하기를 : “이곳 모래(沙) 땅에 자라는 나무는 오직 백양(白楊)나무뿐이었다.”고 서력(西曆) 1,848년의 동지정사(冬至正使) 사절단(使節團)의 일원(一員)으로 연경(燕京)을 다녀온 이유준(李有駿)의 “몽유연행록(夢遊燕行錄)”에서 이를 알려주고 있다.
이 연행기(燕行記) 하나를 보더라도 「오늘날의 압록강(鴨綠江) 서(西)쪽으로부터 심양(瀋陽)을 거쳐 산해관(山海關), 연경(燕京)에 이르는 땅은 대부분 사막지대(沙漠地帶)였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어,
► 〈조선왕조(朝鮮王朝)는, 반도(半島) 땅에 없었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는 것이다. 더더구나 이곳 척박(瘠薄)한 모래(沙) 땅에서 자라고 있는 것은, “백양(白楊)나무뿐이었다.”는 이야기는, 이걸 기준(基準)으로 당시(當時)의 요동요서(遼東遼西) 땅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하는 바램이다.
백양(白楊)나무는, 호양(胡楊)나무?
○ 몽유연행록(夢遊燕行錄) 上 / 무신년(1848, 헌종14, 도광28) / 12월 초1일 맑음
《行四十里,至白塔堡中火,又二十里,至瀋陽止宿.詰朝登程,大野茫茫,不見涯岸,厥土惟沙,厥木白楊. : 40리를 가서 백탑보(白塔堡)에 이르러 점심을 먹고, 또 20 리를 가서 심양(瀋陽)에 도착하여 유숙하였다. 날이 밝아 노정에 오르니, 큰 들판은 아득하여 끝이 보이지 않는데, 흙은 모래뿐이고, 나무는 백양(白楊)나무뿐이었다.》
► 몽유연행록(夢遊燕行錄)은, 1,848년【헌종14년】, 동지정사(冬至正使) 사절단(使節團)의 개인수행원(個人隨行員)이라 할 수 있는 반당(伴倘)의 직책(職責)으로 참여(參與)한 이유준(李有駿)의 연행기록(燕行記錄)인데, 이유준(李有駿)은, 당시 서장관(書狀官) 윤철구(尹哲求)의 외숙(外叔)이었다고 한다.
➊ 위 글 중에서 관심(關心)을 끄는 대목은 : 〈大 野 茫 茫, 不 見 涯 岸, 厥 土 惟 沙, 厥 木 白 楊. : 큰 들판은 아득하여 끝이 보이지 않는데, 흙은 모래뿐이고, 나무는 백양(白楊)나무뿐이었다.〉고 한 구절(句節)이다.
곧 ‘심양(瀋陽)’ 땅을 말하고 있는데,「땅은 오직 모래(沙)뿐이고, 나무는 백양(白楊)나무뿐이었다.」는 사실(事實)이다.
➋ 사막지대(沙漠地帶)에서 무성(茂盛)하게 자란다는 백양(白楊)나무는, “호양(胡楊)나무”를 일컫는 거라고 본다. 왜냐하면 현재(現在)까지도 사막지대(沙漠地帶)에서 성장(成長)하고 있는 나무는 “호양(胡楊)”나무뿐이기 때문이다.
사막지대(沙漠地帶)에서 자라는 호양(胡楊)나무는, 「胡楊生而千年不死,死而千年不倒,倒而千年不爛 : 호양(胡楊)나무는 천년(千年)을 죽지 않고 살며, 죽어 천년(千年)동안 쓰러지지 않으며, 쓰러져도 천년(千年)동안 썩지 않는다.」고 하였다.
► “일천(一千)년을 산다.”는 호양(胡楊)나무가 오늘날까지도 무성(茂盛)하게 자라고 있는 곳은, 〈하서회랑(河西回廊)의 아랍선기(阿拉善旗)·액제납기(額濟納旗)지방(地方)【거연해(居延海)=흑수(黑水)=장액하(張掖河)가 있는 곳이다.】으로부터 돈황(燉煌)과 탑리목분지(塔里木盆地)【타림분지(盆地)=타클라마칸(Takla-Makan)사막지대(沙漠地帶)】의 사막지대(沙漠地帶)로, 이곳에는 수백(數百)년, 또는 그 이상(以上)을 성장(成長)해 온 ‘호양(胡楊)’나무 군락(群落)들이 지금도 그 위용(威容)을 뽐내고 있어, 관광객(觀光客)들을 유혹(誘惑)하고 있다고 전해진다.〉
► 과거(過去) 1,848년【헌종14년】에 동지정사(冬至正使) 사절단(使節團)의 개인수행원(個人隨行員)이라 할 수 있는 반당(伴倘)의 직책(職責)으로 연경(燕京)길에 올랐던 이유준(李有駿)이란 분이 당시(當時)에 보았던 ‘백양(白楊)나무=호양(胡楊)나무’는, 2,020년 오늘도 그 자리에 굳건하게 서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온 몸이 떨리는 충격(衝擊)을 받는다.
➌ 오늘날의 「산서성(山西省)·하북성(河北省)·요녕성(遼寧省)등지에도 백양(白楊)나무가 자라고 있다.」고 전하고 있는데, 특히 “하북성(河北省)과 요녕성(遼寧省)등지(等地)의 백양(白楊)나무는 호양(胡楊)나무가 될 수 없다.” 왜냐하면 호양(胡楊)나무는 사막지대(沙漠地帶)의 모래(沙)땅에 뿌리를 내리고 살고 있기 때문이다.
즉(卽) 오늘날의 ‘하북성(河北省)이나, 요녕성(遼寧省)’등지는, 사막지대(沙漠地帶)가 아니기 때문이다. 사막지대(沙漠地帶)는, 「하(河)의 서(西)쪽, 하란산맥(賀蘭山脈) 서(西)쪽 지방(地方)으로부터 시작(始作)되기 때문이다.」
더불어 「오늘날의 하북성(河北省)과 요녕성(遼寧省) 땅이, 역사서(歷史書)에 기록(記錄)된 “요동(遼東)·요서(遼西)”땅이 아니었다.」는 것을 증거(證據)해 주는 것이기도 하다.
➍ 위의 조건(條件)을 찾아 가노라면 「‘요동(遼東)’지방은 장안(長安)의 서(西)쪽과 서북방(西北方)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미 조선사(朝鮮史)의 ‘요동요서(遼東遼西)’는 밝혀졌지 않았는가? 하는 분도 계시겠지만, 그럼에도 이해(理解)하기 어려운 많은 문제점(問題點)이 있다. 시대적(時代的)으로 ‘요동요서(遼東遼西)’가 이동(移動)된 것이 아닐까하는 의견(意見)도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보아야 한다. 특히 청(淸)과 조선(朝鮮)의 접경지대(接境地帶)는, 그 이전(以前)의 접경지대(接境地帶)와 다를 수 있다는 견해(見解)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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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호양림(胡楊林)의 아름다움 / 김종세 작품 : 경기신문
(2) 거연택(居延澤)의 호양림(胡楊林) / 출처 : 네이버 이미지
(3) 거연택(居延澤)의 호양림(胡楊林) / 출처 : 현조
(4) 흑수성 유적
(5) 윤대(輪臺)의 호양림(胡楊林)
► 사진 출처 : 네이버 및 다음 이미지, 블로그 현조, 위키백과, 중국 국제방송 한국어판 등
○ 많은 자료(資料)들이란 것이 곧 고전(古典) 원전(原典)이며, 조선(朝鮮)을 다녀갔던 옛 선인(先人)들이 기록(記錄)해 놓은 것들이다. 고전(古典) 원전(原典)도 왜곡(歪曲)시키고, 심지어는 조작(造作)도 서슴없이 저지르는 판국에. 발굴(發掘)되는 유물유적(遺物遺蹟)을 왜곡(歪曲)하고 조작(造作)하는 것은 기본적(基本的)인 일이 되어버렸고, 상습적(常習的)이 되어버렸다.
대륙(大陸)에서도, 반도(半島) 땅에서도, 열도(列島) 땅에서도, 서세(西勢)들도 자신(自身)들에게 유리(有利)한 주장(主張)에 알맞게 각색(脚色)해 만들어 낸다.
‘패자(敗者)는, 말할 수 없는 숙명(宿命)을 안고 있다.’ ‘조선사(朝鮮史)의 진실(眞實)’은 “거짓역사”에 밀려 무대(舞臺)뒤로 사라지고 말 운명(運命)이다. 무엇을, 어떻게 할 수 있겠나?
2020년 08월 13일 [글쓴이 : 문무(文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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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행사신의 기록물을 읽어보니 西쪽으로 떠났는데 중간에 東쪽을 바라보나 太恒山이 바라보인다는 내용이 있더군요. 확실히 연행사신은 西행을 한것이 확실합니다.
조선(朝鮮)왕조(王朝) 사신단의 여정기인 "연행기록"을 보면,
구절, 구절마다 '왜곡과 조작된 것이다'라는 의심과 '사실에 부합된다'라고 하는 두 가지 서로 배치(또는 모순)되는 점이 발견됩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연행기록의 공통점은,
"압록강을 도강한 이후 서(西)쪽으로 향한다는 것이고, 봉황성 이후의 여행은 사막지대(沙漠地帶)이고, 산해관이나 연경 또한 같은 지형지세를 갖고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여행기에서 대표되는 역참마다 아름드리 '느릅나무'가 심어져 있다고 하였고,
또 하나는 '백양나무(호양나무로 판단됨)'가 심어져 있었다는 두 가지가 보입니다.
그때 당시를 지접 살아보지 못한 오늘날의 우리가 판단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기록(記錄)과 대비되는 지형지세라고 봅니다. 사막지대(沙漠地帶)에서 느릅나무가 자랄 수 있을까?
물론 호양나무(백양나무)는 오늘날의 사막지대에서도 자라며, 그 수명은 수백년 또는 6백년, 그 이상되는 수령의 나무도 존재하고 있다합니다. 특히 하서회랑의 '흑하=흑수=장액하=액제납하'가 들어가는 거연해(居延海)주변엔 옛 적부터 호양나무 숲이 장관을 이뤘다고 전해오기도 합니다.
과연 무엇이 진실일까요?
또 하나는 "요동"은,
<옥(玉)과 비단(緋緞)이 끊임없이 오고 가는 곳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역사서에서 "옥과 비단이 끊임없이 오고가는 곳은 옥문관으로 대표되는 비단길 즉 실크로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옛 적부터 불린것이 아니라, 19-20세기에 서구인들에 의해 명명된 것이죠.
그러나 그 이전의 기록인 연행기록에서는,
<요동(遼東은 옥(玉)과 비단(緋緞)이 끊임없이 오고가는 곳이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요동(遼東)이란 조선을 말하는 것이고, 요서(遼西)란 중국을 말하는 것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데, 이러한 "요동"을 통해서 "옥과 비단"이 오고 갔다면,
요동에서 요서로 간 것인가?
요서에서 요동으로 온 것인가?
역사서에서는 서역(西域) 땅에서 산출되는 옥(玉)이 중국으로 들어오니, 그 길목에 관문을 설치하고 '옥문관'이라 명명했다고 전하는데, 요동 땅엔? 요서 땅엔? 왜 없지?
이렇게 원전기록과 해설서가 따로 따로 놀고 있어, 어떤 것을 믿을 수 있는가? 이게 문제라고 봅니다.
건강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