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산서원. 회재 이언적의 위패를 모신 서원입니다. 이언적은 조선 중기에 대표적인 주리학자로, 이황의 선배격에 해당되는 인물입니다. 영남사림의 종주격에 해당되는 인물로 광해군때에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그리고 이황과 함께 문묘에 배향되는 영예를 받은 대단한 인물입니다. 따라서 경주가 연고인 그를 모시는 사원이 번창한 것은 당연지사입니다.
옥산서원은 영남사림의 중심지 역할을 담당했으며,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도 훼손되지 않아 과거의 모습을 잘 보존하고 있습니다. 특히 옥산서원은 현존 서원 가운데 가장 많은 서책을 갖고 있는 것으로 유명한데, 장판각의 문을 통해 살짝 안을 들여다보니 조선시대 목판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이 서원에서 삼국사기 등이 나와 보물로 지정되었다고 들었던 기억이 있는데, 혹시 다시 조사하면 뭐 좋은 것이 안나오려나 하는 생각이 잠시 들기도 했습니다. 서원 관리인도 있고 하여 건물은 비교적 깨끗하였습니다. 서원의 누각인 무변루에 올라 아래에 바로 아래의 계곡을 보니 참 경관이 뛰어났습니다. 그래서 옥산서원 계곡에는 많은 이들이 놀러 온다고 합니다.
옥산서원을 나와 간 곳은 독락당입니다. 독락당은 회재 이언적이 말년에 은거하던 곳인데, 옥산서원보다 계곡을 따라 조금 더 안으로 들어간 곳에 위치해 있습니다. 독락당에는 그의 후손이 살고 있어서 자세히 내부를 보기는 어려웠는데, 개울가에 기둥을 세우고 누각처럼 만든 집은 참 그림 같았습니다. 여름에 마루에서 바로 개울을 내려다 볼 수 있는 구조인데, 개울 쪽에서 방에 불을 떼기 위한 아궁이가 있었습니다. 아궁이를 보니 위에 시를 짓고 있는 양반네와 그를 봉양하기 위해 나무를 아궁이에 넣으며 따가운 눈을 비비는 노비의 모습이 드라마의 한 장면처럼 스쳐 지나갔습니다. 그리 유쾌한 장면이 아니었지요.
하지만 그 집에서 내려다본 개울은 정말 피서지로 최고의 장소였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독락당 바로 뒤쪽에는 캠프장이 있어서 아주 많은 사람들이 텐트를 쳐놓고 쉬고 있었습니다. 독락당이 보물로 지정된 옛 고택인데, 그러다가 화재가 나면 어쩌지 하는 약간의 우려를 하기도 했습니다.
독락당에서 조금 더 계곡 안으로 들어가니 정혜사지 13층석탑이 보였습니다. 매우 독특한 양식의 신라말의 탑으로 국보 40호로 지정될 만큼 멋있는 탑이었습니다. 2층 옥신 4면에 감실 모양의 공간을 설치한 것이 매우 독특한데, 다보탑, 화엄사 4사자 삼층탑과 함께 대표적인 이형 석탑의 걸작이라고 평가되고 있다고 합니다.
이 탑을 보고 부랴부랴 경주 시내로 갔습니다. 차로 가는 중간에 조선시대 대표적 민속마을인 양동마을이 있는데, 이번 답사가 신라를 보는 것이 주목적이고, 또 제베님이 혹 먼저 와서 기다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냥 지나치기로 했습니다. 안동 하회마을보다 더 잘 보존된 민속마을인 양동마을을 다음에 와서 꼭 보겠다고 생각하고, 급히 신라역사과학관으로 갔습니다.
신라역사과학관은 개인이 운영하는 것이라고 들었지만, 그 수준이 정말 대단하더군요. 1층에 들어가자 물 시계 모형과 경주 시가지 지도 재현, 첨성대의 재현, 또 천정에 별자리도 재현해놓았고, 고구려 천문도로 알려진 천상열차분야지도도 크게 붙여놓은 것을 보았습니다. 그곳에서 설명하시는 분도 있어서 첨성대에 대한 설명도 자세히 들을 수가 있었습니다. 두 번째 전시실인 지하로 내려가니 이곳의 자랑인 석굴암을 여러 각도로 복원해놓은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정말 대단하더군요. 화장실에 갔다 오느라고, 설명을 제대로 듣지 못해 아쉬웠기는 했지만, 정말 다양한 각도에서 석굴암을 분해하고 다시 볼 수 있게 했습니다.
예전에 석굴암에 갔을 때 일이 생각납니다. 석굴암의 부처님은 앞에 유리문이 꽉 막혀 숨도 못 쉬고 계기고, 어디서 근거했는지로 모르는 전각이 석굴암의 앞을 가로막고 있는데다가, 그 앞에서 불공드리는 스님은 100일 기도를 해줄테니 돈이나 달라고 하더군요. 그런데 석굴암에 올라가는 길에 만나 석굴암 주지 스님은 그랜져를 타고 올라가고요. 나 원참. 그래서 내가 그때 석굴암 전각 안에 있던 스님에게 말했지요. 저 부처님 숨좀 쉬게 해주시죠. 그리고 나는 그랜져 주지스님에게는 공양하기 싫소이다고 말이지요. 괜한 젊은 날의 객기였나 생각도 들기는 하지만, 어쨌든 과거에 석굴암에 갔을 때 기억은 그리 유쾌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곳에서 석굴암을 이리 저리 살펴보니 왜 석굴암이 세계적인 보물인지 감이 오더군요. 박홍국 박사님이 석굴암이 규모만 조금 더 컸다면 정말 세계 제일이라고 추켜세울텐데라고 말했던 것이 기억납니다. 하긴 석굴암이 운강석굴이나 돈황석굴 만큼 크지는 않지요. 하지만 그 쪽 사원석굴은 돌의 재질이 워낙 연한 돌이기 때문에 조각을 하기 쉬워 크게 만든 것이지만, 우리쪽 산은 온통 단단한 화강암이라 석굴암과 같이 예술품은 만든 것은 사실 기적이라고 할 정도입니다. 석굴암 내부에 온도와 습도 등을 고려한 과학 기술도 조각가의 예술혼 만큼이나 대단합니다.
경주 답사를 가기 전에 대학 후배인 박찬흥 박사의 ‘석굴암의 신연구’(신라문화재학술발표회논문집 21집, 2000년)의 논문을 읽어보았는데, 석굴암 앞에 광창이 있었다는 문제를 비롯해 여전히 해결이 안된 체 논란이 일고 있는 문제가 한 둘이 아니더군요. 그래서 아직도 원형이 무엇인지 잘 모른다고 하는데, 자꾸 연구하다보면 언젠가는 좋은 결과가 있겠지요.
그런데 복원한 석굴암 모형 가운데 본존불 뒤에 광배 위쪽 뒷면에 무슨 창처럼 뚫어진 구멍을 본 적이 있는데, 이게 무엇인지 처음 보았습니다. 윤영희님도 이것은 처음 보았다면 신기해 했는데, 그곳 담담자분에게 묻지 못한 것이 실수였습니다. 그냥 의문만을 안고 2층으로 올라갔습니다. 백제금동향로 모형, 성덕대왕신종 모형, 그리고 무구정광다라니경 모조품 등이 전시되어 있었는데, 나의 눈길을 확 끌은 것은 신라시대 장보고 선단의 배였습니다. 배를 복원해 놓은 것을 보고 참 대단 하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밖에 측우기, 혼천의, 계미자를 비롯한 활자 등 세종시대 과학 기술을 알 수 있는 물건들이 많았습니다. 실내 전시장을 다 본 후, 옥상에 올라가니 첨성대 위쪽이 어떻게 되어 있는가를 복원한 것이 있었습니다. 겨우 사람 4명이 앉으면 끝일 공간에서 과연 천문관측을 했을지 여전히 의문이 들었습니다. 옥탑에는 감은사지를 재현한 것도 있었습니다만, 그리 잘 해놓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역시 신라역사과학관은 첨성대와 석굴암이 가장 볼 만 했습니다.
신라역사과학관을 나와 제베님과 만나기로 한 괘릉으로 달려갔습니다. 괘릉. 이 릉은 신라시대 무덤 가운데 가장 잘 능역이 조성된 곳으로 유명합니다. 12지 호석을 두른 신라 후기의 무덤인 이 무덤이 주목받는 것은 무엇보다도 무덤을 호위하는 석상에서 보이는 서역인의 모습 때문일 것입니다. 터키사 연구의 권위자인 이희수 한양대 교수는 괘릉의 문인석상을 중앙아시아 위구르인의 모습으로, 무인석상을 페르시아 군인의 모습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또 신라시대에 만들어진 토용의 모습에서도 아리아 인이나, 투르크계 서역인의 모습이 여러 보인다고 말하고 잇습니다. (신라와 서역의 교류에 대해서는 무하마드 칸슈(정수일) 의 역작인 <신라-서역 교류사> 라는 책이 있고, 최근에 나온 이희수 외 저 <바다의 실크로드>, 청아출판사, 2003년. 도 좋은 참고 자료가 됩니다.)
마침 제베님이 오셨고, 주위에 학생들도 구경을 와서 나는 석인상 앞에서 신라와 서역간의 교류에 대해서 약간의 설명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석인상 만큼이나 괘릉에서 주목할 것이 돌사자입니다. 4마리의 돌사자와 4명의 서역인. 참 재미있는 석물이 놓여진 괘릉. 여기서 4마리의 돌사자는 모두 표정이 틀린데, 특히 한 마리는 아주 그 웃는 모습이 매력적입니다. 유홍준이 그 사자의 웃음을 아주 넉넉한 신라인의 것이라고 했던 적이 있었던가요. 나는 사자상을 하나 하나 재미있게 보았습니다. 특히 사자의 꼬리모양이 전부 다른 것을 보고 참 대단한 조각작품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괘릉을 나와 불국사로 가는 길과 7번 국도가 만나는 지점에 있는 구정동 방형탑을 보러 갔습니다.
구정동 방형탑은 신라의 묘제 가운데는 매우 특이한 것으로, 고구려의 횡열식석실분의 영향을 크게 받은 무덤입니다. 사방에 12지신상을 둘러 신라 후기의 무덤임에는 분명합니다. 좁고 낮은 입구를 지나 석실로 들어갈 수가 있었습니다. 제제님, 윤영희님과 함께 석실 내부로 들어갔습니다. 석실의 천정은 고구려식의 높은 천장이 아니라, 그저 밋밋하게 돌도 마감한 형식이 조금 달랐을 뿐, 내부는 고구려 벽화무덤의 형식과 같았습니다. 천정이 낮아서 그런지 석관을 두 개나 놓았음에 불구하고, 석실 내부는 좁아 보였습니다. 신라의 초기 무덤이 적석목곽분에서 횡열식석실분으로 바뀐 가장 큰 이유는 부부합장을 할 수 있다는 이유 때문입니다. 이 무덤은 분명 부부합장묘입니다.
그런데 4벽에 보니까 약간의 회칠한 부분은 중간에 붉은 색이 나는 곳이 있었습니다. 돌의 표면이 대부분 드러나 있어서 고구려 무덤처럼 내부에 회칠을 전면적으로 한 것 같지는 않지만, 분명 회벽의 존재는 있었습니다. 박홍국 박사님은 이 무덤을 벽화무덤으로 봐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물론 내부에 벽화가 그려졌을 가능성은 아주 높습니다. 하지만 워낙 회벽이 다 떨어져 나가서 벽화로 인정할 만한 확실한 부분이 없는 만큼, 경주 시내에 있는 벽화무덤으로 표기하기는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이럴 때는 내가 좀 엄격한 잣대를 갖고 있군요. 물론 이 무덤은 분명 건축 당시에는 벽화묘로 만들었을 것입니다. 혹 고구려 유민(예를 들면 안승이나 그 후손)의 무덤일 가능성도 있습니다.
하지만 쉽게 도굴되는 단점을 가진 무덤이기 때문에 오래전에 도굴이 되었고, 그 때문에 무덤 석실문이 진작에 열려 내부의 회벽이 모두 습기로 인해 탈락되었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이 무덤에 벽화가 그대로 좀 남았다면 좋았을 것을, 혹시 새로운 과학기술로 없어진 벽면을 다시 복원할 수 있다면 이 무덤에 한번 적용시켰으면 하는 바램이 듭니다.
이 무덤 구경을 한 후, 다시 경주 시내 낭산을 향해 갔습니다. 중간에 콩국수로 식사를 하고, 신문왕릉에 들려 잠시 구경을 했습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