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살 때였어요.
친구 집에서 바비 영화를 본 기억이 나요.
처음으로 본 바비 영화라서 인상 깊었어요.
그때는 발달 장애인이라는 말을 몰랐어요.
친구였어요.
그 친구가 짝꿍일 때 제게 사인펜을 빌린 적이 있어요.
전 그때 기분이 안 좋았어요.
짜증 내며 사인펜을 빌려줬던 기억이 나요.
그게 늘 마음에 걸려요.
서툴러 보이는 그 친구가 아니었다면
짜증을 안 냈을 것 같거든요.
그 시절 그 친구와의 다른 일은
잘 기억 안 나는데
딱 그 두 장면 기억나요.
같이 영화 본 날과
내가 짜증 낸 날.
짜증을 내고 놀랐어요.
그 친구 옆에는 늘 함께 있는 선생님이 있었는데
그 선생님이랑 눈을 마주치니까 부끄러웠어요.
그제야 부끄러워진 자신에게 놀랐어요.
올해 그 친구를 다시 봤어요.
멀리서 바이올린 연주하는 모습을 봤어요.
잘 살고 있었구나. 반가우면서
어느새 끊긴 관계가 슬프고 부끄러워 마음이 아팠어요.
작년 여름 월평빌라에서 실습했어요.
지원하는 입주자와 마트에 갔어요.
“따로 계산할까요?”
마트 직원이 물었습니다.
입주자가 머뭇거렸어요.
그 순간을 기다리지 못하고 제가 끼어들었습니다.
그 뒤로 마트 직원이 저만 보고 이야기했습니다.
그제야 제 살림, 제 카드도 아니었는데
감히 장 보는 일의 주인 행세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낯 뜨거워졌어요.
월평빌라에서 실습한 이후
장애를 겪는 이들이 전보다 잘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장애인복지 현장에서 일하면 어떨까 종종 상상했습니다.
그리 깊지는 않은 마음이었어요.
장애인복지 지망생 모임 공지를 봤습니다.
궁금했어요.
호기심보다 깊은 뜻이 있어야 할 것 같아 망설여지기도 했지만
무시하기는 어려운 호기심이었습니다.
6월 22일
서울역 회의실에서 첫 모임을 했습니다.
장애인복지 현장은 열심히 공부하는 사람이 가야 할 자리래요.
끊임없이 공부해야 하는 자리래요.
그런데 공부하는 사람들이 잘 오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 어디보다 사람이 절실히 필요한 곳인데
가는 사람이 적은 곳이라고 합니다.
고등학교 강당 뒤에 붙어있던 직업 선택의 십계가 떠올랐어요.
내가 원하는 곳이 아니라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을 택하라.
앞을 다투어 모여드는 곳은 절대 가지 마라.
아무도 가지 않는 곳으로 가라.
모임을 하는 4시간 동안
마음이 주체할 수없이 뜨거워졌다가
제가 그럴만한 사람은 못 되는 것 같기도 해
이내 사그라졌다가 마음이 아주 요동쳤습니다.
집에 돌아오니 울음이 터졌습니다.
어릴 적부터 이웃을 제 자신처럼 사랑하는 삶,
청지기의 삶을 살라는 교육을 받았는데
여전히 나 혼자 잘 살고 싶은 마음이 가득한 저를 발견했어요.
8월 24일
한국장애인시설협회 세미나실에서 두 번째 모임을 했습니다.
사뭇 정리된 마음이었습니다.
신기하게 고작 두 달 사이
장애인복지 현장에서 일하고 싶다는 마음이 커졌습니다.
그 사이에
인턴을 하며 만났던 아이의 어머니께 마음이 따뜻해지는 연락을 받기도 하고,
저와 인사하는 사이인 성도님이 장애가 있다는 이유로 오해받는 상황을 마주하기도 하고,
운동 센터에서 등록을 요청하는 장애인과 아버지가 거절당하는 모습을 보기도 했습니다.
제가 장애와 관련해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자리에 있는 사람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마음을 품으니 제가 이 분야에 대해 모르는 것 투성이라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이 현장에서 일하고 싶다고 했구나 싶었습니다.
부끄러웠습니다.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는데
저를 자꾸 부끄럽게 만드는 이 분야에 마음이 갑니다.
고질적인 자기중심적 사고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날 희망이 있는 길 같거든요.
안녕하세요? 사회복지를 공부하는 학생 김민서입니다.
장애인복지 지망생 모임 회원이기도 합니다.
장애인복지 현장에서 일하고 싶다는 다짐은
왜인지 그런 마음을 갖게 된 그럴듯한 서사가 있어야 할 것 같아요.
남들이 들었을 때
'아, 그래서 그 분야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구나.'
할만한 이야기가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아니면 오래전부터 관심을 가졌다거나.
그런데 저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장애인복지 지망생 모임에 함께하는 자신을 돌아볼 때마다
도대체 제가 언제부터 장애인복지 지망생이었다고
날름 이 모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을까 놀라기도 합니다.
장애인복지 지망생 모임에 기웃거릴 만한 순간들이 삶에 조금 있었을 뿐이에요.
부끄럽고 낯 뜨거워지는 순간들.
장애인복지를 알아가는 일은
제가 모르고 지었던 죄들을 알아가는 일 같아요.
없었다고 생각했는데 여전히 존재하는 편견을 발견합니다.
스스로 쉽게 괜찮은 인간이라고 여기는 저에게
살아온 환경과 타고난 건강하다고 여겨지는 신체를 벗어나면
아무것도 아닌 인간이라는 사실을 직면하게 합니다.
끊임없이 공부해야 한다는 점이 부담돼요.
그 부담이 좋아요.
현장에 나가고 실천을 하다보면
언젠가는 그 부담이 무거워지는 날도 있겠지만...
일단은 현장을 준비하는 학생으로 마음을 다하고 싶습니다.
첫댓글 현장을 준비하는 김민서 님의 마음이 느껴집니다. 이런 마음으로 열심히 준비하는 김민서 님이라면 현장에서도 잘 할겁니다.
김정현 선생님, 응원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런 마음이셨군요...
표현하고 공유해줘서 고마워. 네 글을 읽고 정말 위로 많이 받았어. 사실 나도 너의 고민들에 많이 공감하고 있어. 나도 부족한 부분이 많고, 매번 실수도 많이 하면서 내가 이 모임에 어울리는 사람인지 고민하는 중이야.
부끄럽거나 낯뜨거운 순간도 있을 수 있지만, 그건 너의 진심이 담긴 과정이니까. 애끓고 고민한다는 건 그만큼 진심이라는 거잖아. 모임을 통해 같이 고민하고 성장할 수 있어서 너무 고맙고 감사해. 마지막으로, 나는 너한테 항상 많이 배운다는 것도 꼭 말해주고 싶어!
고마워! 나도 덕분에 배우는 게 많아.. 함께 할 수 있는만큼 마음 다해 공부해보자!
저는 장애인복지에 헌신하겠다는 마음, 생각, 준비가 없었어요. 따를 만한 선배와 선생님의 가르침을 따라가다보니 어느덧 여기까지 왔어요. 김민서 선생님처럼 학창 시절에 분야를 정하고 실무를 경험하며 준비하면 현장에서 더욱 쓰임받는 사람이 될 수 있겠다 싶어요. 그래서 김민서 선생님의 사회사업 인생이 더욱 기대가 됩니다. 응원합니다.
그런가요.. 저도 비슷한 것 같아요. 장애인복지에 큰 관심 없었는데 어쩌다가 월평빌라에서 실습을 했고, 거기서 존경하는 슈퍼바이저 선생님들을 만나서 공부하며 실천하는 일에 감동을 느끼고, 학창 시절에 깊이 공부할 수 있는 장애인복지 지망생 모임이라는 기회를 만났습니다. 응원해주시는 선생님이 계셔서 든든합니다. 즐겁고 행복한 한가위 보내세요~!
“저를 자꾸 부끄럽게 만드는 이 분야에 마음이 갑니다.”
“내가 원하는 곳이 아니라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을 택하라.
앞을 다투어 모여드는 곳은 절대 가지 마라.
아무도 가지 않는 곳으로 가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