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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창헌 羅昌憲 (1894~1936) 】
"1919년 2.8 독립선언, 의친왕 망명사건 주도, 민족유일당 운동 참여"
1896년 1월 29일 평안북도 희천군(熙川郡) 동면(東面) 갈현동(葛峴洞)에서 아버지 나지홍(羅祉洪)과 어머니 왕(王)씨 사이에서 5남 1녀 중 3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 나지홍이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한 바 있고, 서울과 일본에 유학했던 점으로 미루어 비교적 넉넉한 향반(鄕班)의 집안에서 성장한 것으로 보인다.
어려서 부친에게 전통 학문을 배우다가 10세 무렵인 1905년 희천의 일신학교(日新學校)에 입학하면서 신학문을 접하였다. 1908년 일신학교 졸업 후 이웃의 영변보통학교(寧邊普通學校)를 거쳐, 1909년에는 관립 평양고등학교(平壤高等學校)로 진학하였다. 평양고등학교는 1909년 4월 칙령 제56호에 의거해 평양 일어학교가 3년제 고등학교로 개편된 것이었다. 이곳에서 1학년을 마치고, 1910년 서울로 올라와 한성고등학교(漢城高等學校)를 졸업하였으며, 1913년 경성교원양성소(京城敎員養成所)를 수료하였다. 경성교원양성소는 교원을 속성으로 양성하기 위해 경성고등학교 부설로 1년제 수업을 하던 교사 양성기관이었다.
경성교원양성소를 졸업한 후 고향에 내려가 모교인 일신학교에서 1년 정도 교사로 지내고, 1914년 영변의 창의학교(彰義學校) 교원으로 자리를 옮겼다가, 상급학교 진학을 위해 일본으로 건너갔다. 의학과 관련한 정신치료법에 관심을 가져 도쿄최면학회(東京催眠學會)와 일본정신연구회 등에 출입하는 한편 나카무라(中村)연구소와 실등기합술(實等氣合術)연구소를 다니며 정신치료법을 수학하다가 1916년 소기의 과정을 이수하였다. 이 연구소는 대학에 준하는 성격을 지닌 교육기관이었다.
1917년 경성의학전문학교에 다니던 중 1918년 12월 20일 경 일본으로 건너가 1919년 2월 초까지 도쿄에서 머물며 2·8독립운동에 참가하였다. 도쿄 유학생들은 1918년 12월 29일 유학생향우회 송년회와 12월 30일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서 열린 동서연합웅변대회에서 독립 문제를 의제로 채택하고 격렬한 토론을 벌인 뒤 독립을 위한 실천운동을 전개할 것을 결의하였다. 1919년 1월 6일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 다시 모여 구체적인 독립운동을 전개하기로 다짐하였다. 다음 날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서 200명의 유학생들이 참가한 가운데 실행위원의 결정 사항을 만장일치로 통과시키고 2·8독립운동을 추진해 갔다.
2·8독립운동의 준비 과정에 참가한 뒤, 국내로 돌아와 동교생 한위건(韓偉健)·김형기(金炯璣) 등에게 도쿄 유학생의 움직임을 구체적으로 전달하면서 학생계의 만세운동을 추진해 갔다. 이때 학생단은 학생 중심의 만세시위를 계획하면서 학생들의 동원과 방법을 진행시켜 나갔다. 1919년 2월 20일 경성의학전문학교 강당에서 2학년생들을 모아놓고 파리강화회의와 민족자결주의 등에 의해 각국이 독립을 선언하는 국제정세와, 일본 유학생들의 독립선언을 알리면서 만세운동의 필요성을 주장하였다. 별도로 계획을 추진하던 학생단은 2월 20일경 기성 인사들과 연대하는 방향으로 전환하여 기독교계 인사들과 연합전선을 이루어 나갔다. 당시 국내에서 만세운동을 계획하던 중심 세력은 학생단과 종교계 세력이었다.
1910년대 일제의 가혹한 식민지 통치 속에서 한국의 사회 조직은 거의 파괴당하고, 종교 조직과 학교가 남아 있을 뿐이었다. 때문에 전 민족적 대규모의 독립운동을 전개하기 위해서는 이들 종교 조직과 학교의 연합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었다. 이 과정에서 학생들은 독립선언서의 사전 배포 특히 서울지역 학교와 시내 배포, 3월 1일 학생 동원 등의 책임을 맡았다. 그리고 학생들은 3월 1일 독립선언식 이후 3월 5일에 제2차 만세시위를 일으켜 만세운동을 지속적으로 전개할 것을 계획하였다.
1919년 2월 26일 정동교회 이필주(李弼柱) 목사 집에서 김문진(金文珍)·이용설(李容卨)·윤자영(尹滋瑛)·김탁원(金鐸遠)·최경하(崔景河)·박윤하(朴潤夏)·김영조(金永祚) 등 전문학교 학생대표들과 함께 모여 학생을 중심으로 한 제2차 만세시위 계획을 세운 뒤, 만세시위 이후에도 계속해서 독립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였다. 즉 학생단이 계획한 독립운동은 만세운동에 국한하지 않고 향후 구체적으로 독립운동에 투신할 것을 결의한 것이었다. 3월 1일 거사일에 탑골공원 독립선언식에 참가하였다가 2차 시위를 준비하던 중 3월 2일 운니동(雲泥洞) 하숙집에서 붙잡혔다.
1919년 7월 옥고를 치르던 중 병보석으로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해 있다가 탈출하여, 비밀단체인 조선민족대동단(이하 대동단(大同團))의 정남용(鄭南用)과 연결되어 여기에 가입하였다. 3·1운동 직후 전협(全協)·최익환(崔益煥) 등이 조직한 대동단은 민족 정신의 통일과 실력 양성을 표방하고 결성한 독립운동단체였다. 이들은 사회 각층을 11개단으로 분류하고 이들을 망라한 범국민적 조직을 구상하는 원대한 계획을 세우고 동지를 규합해 갔다. 그러나 1919년 5월 하순경 군자금 모집이 발각되면서 최익환·권태석(權泰錫) 등 동지 일부가 붙잡히고 조직이 드러났다.
이후 서울을 무대로 활동하던 대한민국청년외교단, 대한독립애국단 등과도 연대를 이루며 폭넓게 활동을 전개하였다. 대한민국청년외교단이 1919년 8월 29일 국치일을 맞이하여 만세시위를 계획할 때, 인쇄물의 배포 책임을 맡아 서울의 각 독립운동단체를 비롯하여 학교와 일반에게 나누어주고, 한편 대한독립애국단 단장 신현구(申鉉九)와 힘을 모아 거사를 추진해 갔다.
상하이에서 파견된 이종욱(李鍾郁)·송세호(宋世浩) 등과 함께 연통제(聯通制) 실행에도 힘을 쏟았다. 1919년 7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안창호(安昌浩)의 주도로 시행된 연통제는 도·군·면의 행정조직에 따라 전국 각도에 감독부를 두고, 군에 총감부, 면에 사감부를 두도록 되어 있었다. 임시정부는 국내에 다수의 특파원을 파견해 연통부 설치에 힘을 기울였으나, 일제의 감시망을 피해 연통부의 조직을 전국적으로 확대시키기에는 어려움이 따랐다. 그 과정에서 서울에 연통부 본부를 두기로 결정하고, 송세호·전필순(全弼淳)·윤종석(尹鍾奭)·신현구 등과 실행에 옮겨 나갔다.
대동단의 청년단 대표를 맡는 한편 의친왕(義親王) 이강공(李堈公)의 상하이(上海) 망명과 함께 제2회 독립만세시위계획에서 주도적 역할을 수행하였다. 대동단은 일제 포위망이 압박되는 상황에서 국외로 거점을 옮기기로 결의하고, 때를 맞추어 두 가지 거사를 계획, 추진하였다. 하나는 의친왕 이강공의 중국 망명이고, 다른 하나는 대대적인 만세시위를 일으키는 것이었다. 즉 의친왕 이강공의 망명을 통하여 민족 사회의 각성을 촉구하는 동시에 거족적인 만세시위를 일으켜 독립운동의 분위기를 고조시킨다는 계획이었다. 제1단계로 1919년 10월 10일 대동단 총재 김가진의 해외 망명을 성공리에 거행한 뒤, 그 해 11월 이강공의 해외망명을 시도하였으나 일제 경찰에 탐지되어 무위로 그치고 말았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한위건·김의한(金毅漢)·정규식(鄭奎植) 등과 함께 제2회 독립선언 계획을 추진해 갔다. ‘제2회 독립만세시위’로 불리는 이 만세운동 계획은 당초 일제의 소위 천장절(天長節)을 기해 1919년 만세운동과 같은 방식으로 거행하려던 것이었다. 이 만세시위는 대동단을 비롯하여 서울의 각 단체들과 상하이에서 파견된 이종욱과 천진불변단(天津不變團)의 인사들이 대거 특파되면서 연합시위 형태로 추진되었다. 이들은 1919년 만세운동 때처럼 대한독립선언서를 작성하고 민족대표를 구성하였는데, 이때 독립선언서의 집필과 함께 대동단을 대표해 민족대표의 인선을 맡았다. 이강공 해외망명이 탄로 나면서 11월 17일 전협이 체포되고 대동단 조직이 파괴당하는 상황에서도 만세시위 계획은 그대로 추진해 11월 28일 종로경찰서 앞에서 이신애(李信愛)·정규식·박원식(朴源植)·안교일(安敎一)·정희종(鄭喜鍾)·김종진(金鍾振)·변화((卞和), 전협의 아내) 등과 함께 독립선언서를 배포하며 만세시위를 거행하였다.
만세시위 직후 중국으로 망명해, 1920년 1월 신의주와 안동현 일대에 대동단의 지단을 설치하였고, 이를 통해 상하이 대동단 본부와 국내를 잇는 교통·연락망의 중요한 근거를 마련하였다.
상하이로 건너가 처음에는 안창호(安昌浩)가 주도하는 지방선전부 설치에 적극적으로 참가하였으나, 임시정부의 분파와 불통일에 실망하고 ‘재건 대동단’과 철혈단(鐵血團)을 중심으로 활동을 전개해 갔다. 재건 대동단이란 앞서 망명한 대동단 총재 김가진(金嘉鎭)을 앞세워 1920년 3월 상하이에서 재건한 대동단 본부였다. 대동단은 통고문과 포고문 등을 통해 독립전쟁을 선포하면서 무장투쟁노선을 천명하였다.
대동단 재건 이후에도 김가진과 함께 안창호가 구상하는 혁명당 조직에 적극 찬동하면서 긴밀한 관계를 유지해 나갔다. 대동단 재건 활동에는 형 나성헌(羅晟憲)과 동생 나동헌(羅東憲)도 동참하였으며, 국내에 남아 있던 형 나장헌(羅章憲)도 운산군청(雲山郡廳) 서기로 근무하면서 군자금 모집에 힘을 보태었다.
그런데 1920년 4월 하순 임득산(林得山)·김홍식(金鴻植)·김성근(金聲根) 등과 함께 폭탄을 실험, 제조하던 중 폭발 사고가 일어나, 임득산이 크게 다치고 프랑스 경찰이 다리를 절단하는 중상을 입으면서 곤경에 빠지고 말았다. 이 일은 상하이지역 독립운동계에 적지 않은 파문을 일으켰고, 독자 노선을 추구하던 대동단에게 불리한 여론이 조성되었다. 또 대동단원 김기만(金基萬)이 임시정부의 손정도(孫貞道)가 군자금을 유용하였다고 강력하게 문제를 제기하면서 임시정부와 불편한 관계에 놓이게 되었다. 여기에 일제 밀정 황학선(黃鶴善)의 농간으로 상호 대립이 극심해지면서 무력 충돌로 치달았다. 그 같은 상황에서 조직한 것이 철혈단이었고, 혈기 왕성한 청년들로 구성된 철혈단은 급기야 임시정부를 공박하는 성토문을 발포하고, 1920년 6월 임시정부 내무부를 공격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 일이 황학선의 계략에 의한 것으로 밝혀지면서, 안창호·김구(金九), 그리고 임시정부와의 관계를 회복하고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한 독립운동을 전개해 갔다.
1922년 11월 김구·여운형(呂運亨)·조동호(趙東浩)·최석순(崔錫淳)·이유필(李裕弼)·조상섭(趙尙燮) 등 20여 명과 함께 한국노병회(韓國勞兵會) 결성에 참가하였다. 한국노병회는 독립운동의 장기적 전망아래 10년 동안에 1만 명 이상의 노병(勞兵)을 양성하고, 1백만 원 이상의 전비를 만들어 한국 독립을 도모한다는 목표를 세우고 있었다. 노병회의 교육부원, 노공부원(勞工部員)으로 활약하는 한편 1923년 1월에 개최된 국민대표회의에는 대한광복단의 대표 자격으로 참가하였다. 안창호가 제기한 개조파의 입장에서 활동하였으며, 1924년 흥사단(興士團)에 가입하기도 하였다. 의학 전문 지식을 살려 상하이에서 세웅의원을 직접 경영하는 한편 1924년 상하이 교민 사회에도 깊은 관심을 보이며 인성학교 교사, 교민단의사회 학무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24년 12월 임시정부는 박은식(朴殷植)을 임시대통령 대리로 선출하는 등 체제 정비에 안간힘을 썼으나, 계파 간 갈등의 골은 깊어져 갔다. 당시 이승만(李承晩) 탄핵문제는 임시정부가 넘어야 할 최대의 과제였다. 1925년 3월 대한민국 임시의정원에서 최석순·문일민(文逸民)·임득산·강경선(姜景善)·강창제(姜昌濟)·김현구(金鉉九)·고준택(高埈澤)·곽헌(郭憲) 등과 함께 대통령 이승만에 대한 탄핵안을 제출하였고, 곽헌·채원개·김현구·최석순 등과 함께 탄핵심판위원으로 선정되었으며, 이때 탄핵심판위원장을 맡았다. 그리고 임시의정원은 심판위원회의 결정에 따라 3월 23일 탄핵을 선포하였으며, 만장일치로 국무총리 박은식을 후임 대통령으로 선출하였다. 이승만 탄핵안 통과 후 임시정부는 찬반 세력의 대립으로 혼란을 거듭해야 하였다. 여기에 독립운동 세력을 분열·이간하는 일제의 책동 또한 극심해져 갔다. 일제는 끊임없이 밀정을 보내 독립운동 세력을 이간하고 또 정보를 채집하고자 혈안이 되었으며, 임시정부는 일제의 암약(暗躍)을 차단하는데 부심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김구의 후임으로 임시정부 내무차장 겸 경무국장의 일을 맡아 임시정부 세력을 보호하는데 힘을 쏟았다. 경무국에는 20여 명의 요원이 활동하였는데 이들 만으로는 임시정부와 한인사회를 지켜내기에는 부족한 상황에서 1925년 6월 경무국 응원단의 성격을 띠는 정위단(正衛團)을 조직하고 단장을 맡았다. 정위단의 주요 구성원은 심판원 강창제·고준택, 수사원 박창세(朴昌世)·유창준(劉昌俊)·김정근(金貞根)·박규명(朴奎明)·김예진(金禮鎭) 등이었다. 그런데 1925년 12월 임시의정원 부의장 여운형이 정위단원 박희곤(朴熙坤) 등에게 구타당한 일이 벌어지고, 이에 정치적 해결을 주장한 국무령 이상룡(李相龍)과 달리 강력한 법적 대응을 주장하면서 임시정부는 다시 대립 양상으로 치달았다. 결국 국무령 이상룡이 만주로 돌아가고, 균열된 정위단을 개편한 것이 1926년 1월에 설립한 병인의용대(丙寅義勇隊)였다.
병인의용대는 임시정부의 권위 수호를 비롯하여 일제 밀정이나 주구 처단, 일제 관공서 등 일제 기관의 파괴를 목적으로 결성한 임시정부 직속 의열단체였다. 병인의용대 대장을 맡았으며, 1926년 2월 1일 최병선(崔炳善)·장진원(張鎭元)·김광선(金光善)·박인(朴仁) 등 4명의 결사대를 구성해 조선총독부 밀정 박제건(朴濟乾)을 상하이 북강서로에서 처단하는 의거를 실행하였다. 1926년 2월과 3월에 염익지(廉益知) 등 4명의 일제 밀정을 처단하였으며, 대원 이영선(李永善)·(李德三)이 뜻을 이루지는 못하였으나 일본영사관의 관리인 우치보리(內堀)의 처단을 시도하였다. 1926년 4월 8일 김광선·김창근(金昌根)·이수봉(李秀峰) 등 3명이 상하이 일본총영사관 건물에 폭탄 2개를 투척하는 등 대담한 의열투쟁을 감행하였다.
1926년 4월 25일 융희황제(순종)가 승하하자, 1919년 만세운동 때와 같이 전민족적 만세운동을 일으키기 위한 계획을 추진해 갔다. 5월 9일 병인의용대 최고간부회의는 융희황제 국장을 기해 총독을 비롯한 일본의 고위 관리를 처단하기로 결의하였다. 그리고 만주에서 파견된 독립군 요원, 국내의 천도교 세력과 힘을 합쳐 만세운동을 진작시키기 위한 방법을 모색해 나갔다. 그 중의 하나가 국내에서 의열투쟁을 벌여 민족적 관심을 제고시키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김광선·이덕삼(李德三)·고준택·김석룡(金碩龍) 등 대원 4명이 6월 1일 중국인으로 변장해 권총 2정과 빵 속에 숨긴 폭탄 2개, 다수의 격문을 지니고 중국 상선 순천호에 승선하였으나, 사전 정보를 탐지한 일제 수상경찰에 붙잡히면서 거사 계획이 좌절되었다.
1926년 9월 15일 자신이 직접 제작한 시한폭탄을 중국인 서륜쌍(徐倫雙)에게 건네 일본총영사관 폭파 계획을 추진해 나갔고, 대원 최병선과 장진원이 일본영사관에 끌려가자 구출 계획을 추진하는 한편 총영사관에 폭탄을 투척하는 등 강력한 투쟁을 전개하였다. 이 일로 형과 동생이 붙잡혔고, 일본영사관과 프랑스 조계 당국이 포위망을 좁혀오자 1926년 말 결국 상하이를 떠나지 않을 수 없었다. 항저우(杭州)로 거처를 옮긴 뒤에는 그곳에서 폐요양원을 운영하면서 독립운동의 재기를 모색해 나갔다.
1926년 7월 안창호가 제창한 민족유일당운동의 일환으로 1927년 4월 11일 상하이 삼일당에서 한국유일독립당상해촉성회가 성립할 때 집행위원으로 참가하였으며, 흥사단 활동을 이어 나갔다. 1932년 4월 윤봉길의거 직후 안창호가 일제에 붙잡히자, 1933년 1월 초 상하이로 잠입해 흥사단 원동대회에 참가하는 등 흥사단 활동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1933년 여름 박창세·강창제·이수봉 등이 병인의용대를 재건할 때, 다시 상하이를 찾아 1개월간 체재하며 병인의용대의 부흥에 동참하기도 하였다. 이무렵 거처를 쓰촨(泗川)으로 옮겨 만현의원(萬縣醫院)을 경영하였는데, 병을 얻어 투병하다가 1936년 6월 독립을 보지 못하고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1924년 임시대통령 이승만의 탄핵을 알리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공보 제42호, 탄핵심판위원으로 이름을 올린 나창헌 [판형1] |
병인의용대 일본총영사관 폭파 보도 기사(『동아일보』 1926. 9. 24) [판형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