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09월 24일 “오늘의 말씀 묵상 편지”
“비록 부지 중이라도”
“만일 또 어떤 사람이 주의 명령들에 의해 행하는 것이 금지된 이런 것들 중에 어떤 것을 범하여 죄를 지으면 비록 부지중이라도 죄가 되나니 그는 자기의 불법을 담당할지니라. 그는 네가 정한 값대로 양 떼에서 흠 없는 숫양을 취해 속건제물로 제사장에게 가져올 것이요, 그가 부지 중에 잘못하고 깨닫지 못한 것에 대해 제사장이 그를 위하여 속죄한즉 그가 용서함을 받으리라. 이는 속건제이니 그가 참으로 주를 대적하고 범법하였느니라." 하시니라.(레위기 5:17-19)
("If a person sins, and commits any of these things which are forbidden to be done by the commandments of the LORD, though he does not know it, yet he is guilty and shall bear his iniquity. "And he shall bring to the priest a ram without blemish from the flock, with your valuation, as a trespass offering. So the priest shall make atonement for him regarding his ignorance in which he erred and did not know it, and it shall be forgiven him. "It is a trespass offering; he has certainly trespassed against the LORD.")”
임마누엘!!
우리는 레위기를 만나면서 자칫하면 오해할 수 았는 것이 있습니다. 구구절절이 정죄하는 말씀으로 가득하여 율법이 바로 이런 정죄하는 것이구나 하는 것으로 이해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어떤 것이 죄악인지를 알지 못합나다. 그래서 죄악을 범하면서도 그것이 얼마나 흉악한 좌악인지를 알지못하여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고 제 뜻대로 판단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율법을 주신 것은 죄악아 무엇인가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르쳐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사람의 생각으로는 이런 것이 무슨 죄일까? 생각할 수 있는 것도 율법은 분명하게 죄악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왜 그렇게까지 하실까요? 그것은 어떤 행위만을 지적하는 것이 아니라 그 심령의 뿌리를 미리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좋은 예가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만일 또 어떤 사람이 주의 명령들에 의해 행하는 것이 금지된 이런 것들 중에 어떤 것을 범하여 죄를 지으면 비록 부지중이라도 죄가 되나니 그는 자기의 불법을 담당할지니라.”
비록 부지중에 범한 것이라고 할지라도 그 죄악에 대하여는 자신이 담당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여기 ‘부지 중에’는 히브리어 두 단어가ㅡ합성되어있습니다.
부(不)는 히브리어 'lo'(로).‘아니다(not’, ‘부정’, ‘거절(no)’을 의미합니다..
'
로'는 전형적으로 잠재적인 부정을 나타내는 알('al)과는 대조적으로 실재상의 부정을 나타내는 기본적인 히브리어입니다. 다른 부정어들은 실제적인 부정의 의미로보다 덜 자주 기능합니다(예, '아인', '발'과 '벨리').
이 ‘로’는 원천적인 부정을 의미하는 단이업니다.
그 다음 ‘지(知)’ 히브리어 'yada'(야다)'. 알다 know(RSV와 ASV는 비슷하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야다(동사)는 기본어근이며, '알다(know)‘, ’이해하다(understand)'를 의미합니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약 944회 나오며, 모든 어간에서 사물이나 사람 또는 상황등을 감각 기관으로 얻은 약간씩 차이 나는 여러 가지 지식을 나타냅니다. 이미 알려진 것은 감각으로 나타나야 하며 그 자체는 그렇게 알려지게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듣는 것(듣다)과 보는 것(보다)에 관한 동사가 아는 것에 관한 동사와 병행되어 나오는 것을 보게 됩니다(예: 출 16:6 이하, 신 33:9, 삼상 14:38, 사 41:20).
야다는 인간(창 18:19, 신 34:10)과 그의 길(사 48:8, 시 1:6, 시 37:18)에 대한 하나님의 지식에 사용되었으며, 여기에서 지식은 심지어 탄생 이전에 시작된다고 하셨습니다.(렘 1:5). 하나님은 또한 들새도 아십니다(시 50:11).
야다는 또한 인간의 지식과 짐승의 지식에도 사용되었습니다(시 1:3).
야다는 구약성경에서 다음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1) 야다는 '알아채다, 인지하다, 경험하다, 관찰하다'를 의미합니다(예: 창 3:7, 창 41:31, 삿 16:20, 전 8:5, 사 47:8, 호 5:3).
2) 야다는 '구별하다(distinguish)를 의미합니다. '선악을 아는 것'(창 3:5, 창 3:22)은 하나님께 불순종한 결과입니다. 좋고 흉한 것을 구별하는 것은 필요합니다(삼상 19:36). 어린 아이는 왼손과 오른손을 구별하지 못하며(욘 4:11) 또 선과 악도 구별하지 못합니다(사 7:15). 후자의 구절의 문맥과 사 8:4에 나오는 이와 비슷한 언명은 이 언급이, 어린 아이는 유익한 것과 해로운 것을 구별할 줄 모른다는 것에 관한 것이라는 점을 시사해 주는 것 같습니다.
좋고 흉한 것, 좌우와 같은 것에 대해 관찰하는 것은 결국 그것들을 구별하는 것이 됩니다.
3) 야다는 '배워서 알다(know by learning)‘라는 의미를 지닙니다(잠 30:3).
4) 이 분사는 사냥(창 25:27), 학문(사 29:11-13), 애곡(암 5:16), 바다를 항해하는 일(대하 8:18), 그리고 악기를 연주하는 일(삼상 16:16)에 능함을 묘사하는 어구에 나옵니다.
5) 야다는 어떤 사람을 '아는 것'을 표현합니다. 어떤 사람을 아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되었습니다(창 29:5, 출 1:8, 삼하 3:25). 강조 수동형(푸알 분사형)’은 '친척'(왕하 10:11 등)과 '아는 사람'(욥 19:14, 룻 2:1 등)을 지칭하고 있습니다.
6) 야다는 '관계하다, 관심을 가지다'(시 1:6, 시 37:18, 시 119:79), '~와 관계를 맺고 싶다'(예: 신 33:9). 신학적인 문맥에서 자주 이 단어가 적절한 지식을 얻지 못해서 결국 관심의 결여를 초래하고 마는 것에 대한 문제로 나옵니다(예: 렘 8:7, 시 95:10).
7) 야다는 '성적 관계를 가지다'라는 의미를 나타냅니다.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를 알았다"고 하는 유명한 완곡 어법과 그 병행구들(창 4:1, 창 19:8, 민 31:17, 민 31:35, 삿 11:39, 삿 21:11, 왕상 1:4, 삼상 1:19)에서 남녀 쌍방의 성적인 관계를 뜻하는 말로 사용되었습니다. 이 단어는 남색(창 19:5, 삿 19:22)이나 강간(삿 19:25)과 같은 성적 도착을 묘사하기 위해 사용되었습니다.
8) 야다는 '다른 사람과 인격적이며 친숙한 관계를 맺다'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이름으로, 대면하여 모세를 아십니다(출 33:17, 신 34:10). 하나님께서 어떤 개인이나(렘 1:5) 어떤 민족을(암 3:2) 아실 때 하나님께서 그를 선정하시거나 선택하십니다(참조: 민 16:5 70인역본). 선택으로 이해되는 이 지식은 은혜롭고 자애로운 것이지만 이것은 인격적인 응답을 요구합니다.
9) 야다는 일반적인 문제에 대한 지식 외에도, 다른 신들을 아는 것이든(신 13:3, 신 13:7, 신 13:14) 여호와를 아는 것이든(삼상 2:12, 삼상 3:7) 간에, 신에 대한 인간의 관계에 대해 사용되었습니다. 이방인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며(렘 10:25) 선지자들에 의하면, 이스라엘도 하나님을 알지 못합니다(렘 4:22). 애굽의 재앙은 여호와가 하나님이심을 애굽인들이 알도록 하기 위해 보내졌습니다(출 10:2 등). 그는 그가 하나님이심을 이스라엘인들이 알도록 하기 위해(사 60:16) 그들을 파멸시키시고(겔 6:7) 회복시키실 것입니다. 특히 선지자 에스겔은 위협할 때, "너희로 알게 하려 함이라"는 어구를 사용합니다(겔 6:7, 겔 6:10, 겔 6:13, 겔 6:14, 겔 7:4, 겔 7:9, 겔 7:27 등).
10) 요약하면 희랍인들이 초연한 지식을 갖고 있으며 또한 사물의 형이상학적 본질에 사변적인 관심을 갖고 있었는데 반해, 구약성경은 지식을 끊임없이 인격적인 만남에서 생겨나는 것으로 간주하고 있습니다.
구약성경이 하나님과 창조에 관해서 언급한 것을 보고서, 우리가 이 언급들을 존재론적 추론으로 여겨서는 안되고 하나님의 계시에 응답하는 믿음의 선포로 간주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역사적 과거와 약속된 미래 즉 하나님의 피조물들이 존재하고 있는 이 지상의 영역 속에서의 하나님의 계시와 관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이 끊임없이 과거와 현재와 미래 속에서의 하나님의 계시를 찾았기 때문에, 이스라엘이 예배와 행동 가운데서 하나님의 목적과 요구를 식별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서울에서
이 우복 목사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