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을수록 더 진한 빛으로 푸른색을 토해내는 ‘쪽빛의 진실’을 찾아 나선 것이 30대, 이제 60대가 된 그에게 세월은 명장이라는 칭호를 붙여줬다. 대한민국 명장 512호 최옥자(66). 천연염색 분야에서는 유일한 명장이다. 그는 천연염색뿐만 아니라 쪽 염색을 이용해 천년을 견딘다는 신비의 종이 감지(紺紙) 제작을 재현해냈다.
‘쪽빛’은 인간과 자연의 합작품이다. 공기, 물, 햇빛, 정성은 물론이고 세월을 숙성시켜야 한다. 19세기 중반 화학염료가 나온 이후 쪽 염색을 비롯한 천연염색은 맥이 끊겼다. 화학염료가 마술처럼 직물에 색을 입히는 세상에서 쪽을 키우고, 그 잎에서 염료를 뽑아내고, 몇 달에서 몇 년씩 발효·숙성을 시키고, 산화와 환원의 과정을 거쳐야 하는 쪽 염색이 살아남기는 힘들었다. 설사 쪽잎을 사용한다고 해도 발효과정에서 천연 잿물이 아닌 양잿물(수산화나트륨·가성소다)을 사용하면 진짜 천연염색이 아니다. 우리가 ‘천염염색’이라고 알고 있는 것들 대부분이 화학물질인 양잿물을 사용하고 있다. 1년 이상 공을 들여야 하는 쪽 염색은 한 공정만 잘못돼도 제대로 된 쪽빛을 내지 못한다. 화학물질이 들어간 염색은 빨수록 색이 날아가는 반면 천연염색은 갈수록 색이 살아난다. 그는 무엇보다 화학염색으로 인한 환경오염을 걱정한다. 스승도 없고 자세한 문헌도 남아있지 않은 상황에서 그의 스승은 ‘실패’였다. 쪽물을 담은 독을 끌어안고 처음 10년 동안 실패에 실패를 거듭하면서 ‘쪽빛의 진실’에 닿을 수 있었다. 진실은 자연의 질서에 순응하는 것이었다.
200년 고택에서 쪽빛을 일구다
그를 만나기 위해 경북 안동시 안동민속박물관 옆 민속촌을 찾았다. 그의 집은 민속촌 내에 있다. 낙동강 700리가 시작되는 곳, 안동댐 아래 진모래골 산비탈에 있는 200년 가까운 고택이다. 그는 조선 후기 홍문관 교리를 지낸 이만형(李晩瀅·1825~?)의 4대 종부이다. 집 앞에는 ‘이필구 와가(李必久 瓦家)’라는 안내판이 서 있다. 이필구(66)씨는 그의 남편이다. 이만형의 4대손으로 2대 독자이다. 이만형이 퇴계 이황의 11대손이니 남편은 퇴계의 15대 가손이다. 고택은 원래 진성 이씨 집성촌인 도산서원 옆에 있었다. 안동댐 건설로 수몰지역이 되면서 1976년 안동시가 고택을 이곳으로 옮겨줬다. 원래는 안채·사랑채·행랑채가 있었는데 터가 마땅치 않아 ㅁ자형의 안채만 이곳으로 오고 나머지는 용인민속촌으로 옮겨졌다. 민속촌 내에는 그의 집과 함께 여러 채의 초가집, 조선시대 석빙고(보물 제305호) 등이 옮겨져 왔다.
고택은 한동안 빈집으로 있었다. 최씨는 부산에서 살다가 25년 전 이곳에 정착했다. ‘쪽빛’을 찾기 위해서는 맑은 공기와 물이 필요한 데다 쪽을 직접 재배해야 하니 이만한 환경이 없었다. 3녀1남인 아이들에게 조상의 뿌리가 있는 곳에서 교육을 시키고 싶다는 생각도 안동행을 거들었다.
고택은 달그림자가 비춘다는 월영교(月映橋)가 내려다보이는 곳에 있다. 양반가에 어울리지 않는 초가대문이 눈에 띈다. “검소하게 살라”는 퇴계 선생의 뜻에 따른 것이라고 했다. 한 번 수리를 거친 지붕을 제외하고는 빛 바랜 나무마다 세월이 삐걱이고 있었다. 마루 위에는 제사 때 각상으로 쓰는 소반 10여개가 줄줄이 걸려 있다. 종부인 그는 일 년이면 제사를 열 번을 지냈다. 마당 한편에는 옛날 화장실, 마른 음식을 보관해두던 곳간이 초가를 얹은 채 과거를 보여주고 있다. 염색일로 붐비던 고택의 마당은 이제 조용해졌다. 3년 전 집 근처 호숫가에 경상북도 지원으로 천연염색 전시관과 작업장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고택을 옮기면서 난방은 보일러로 바꿨지만 문간방 한 곳에는 황토방에 구들장을 놓고 나무를 때는 아궁이를 만들었다. 그를 찾아온 외국인 친구들은 이 방에 미친다. “영국에서 천연염색 전시를 할 때 쪽빛에 반한 영국인 큐레이터들을 사귀게 됐어요. 영국인 큐레이터 세 명이 놀러 와서 며칠간 이 방에 묵었는데, 뜨끈뜨끈 구들장이 신기해서 어쩔 줄 모르더라고요. 그 친구들이 떠나고 나서 방을 보니 벽에 종이가 붙어 있어요. 뭔가 봤더니 글쎄 ‘This room is paradise’라고 써놨더라니까요.” 이 방에 반해 매년 집 앞 호숫가에 벚꽃이 흐드러질 때면 열흘씩 한 달씩 묵고 가는 일본인 친구도 있다.
다도에서 천연염색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