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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명석목사님 스크랩 정명석 목사 프로필 이젠 밝혀져야 할 가려진 과거 월남전 근황은 과연?
사연만들기 추천 0 조회 207 18.08.08 16:18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정명석 목사 프로필 이젠 밝혀져야 할 가려진 과거 월남전 근황은 과연?



안녕하세요? jms 진리와 사랑 인사드립니다.

기록적인 더위에 어떻게 지내고 계신지요?

오늘은 기독교복음선교회 정명석 총재 프로필 즉 약력을 소개해드립니다. 

일부 악평자들과 함부로 말하는 자들은 정명석 목사님에 대해 아직도 모함하고 악평을 일삼고 있어서 정명석 목사님에 대해 오해를 하고 계신 분들을 위해 전해드립니다.


나무는 열매를 통해서 무슨 나무인지 알수 있듯이 사람도 그 사람이 무엇을 행해왔는지 알면 알수록 

진짜 모습을 알수 있듯이 정명석 목사님에 대해서도 프로플을 보시고 정확하게 오해없이 알아주시길 바랍니다. 



* 정명석 목사 약력(프로필)

1945년 2월 전라북도 금산군(현재는 충청남도 관할) 진산면 석막리 월명동에서 출생

1966년 8월 베트남 전쟁 1차 참전(백마 9사단 : 현 대한민국 9보병사단)

1967년 10월 베트남 전쟁 2차 참전(백마 9사단)

1969년 9월 화랑무공 훈장, 인헌 훈장 등 4개 훈장 수여

1970년 4월 청소년 선도활동 및 구호사업, 노방전도활동 시작



1981년 3월 MS선교회 창설(대표 취임), 애천교회 창립

1983년 지방 8개 지역 교회 개척 및 지방순회 강연

1983년 11월 웨슬레 신학원 졸업, 전국 8개 도시 교회 설립

1985년 해외지부 개척 (미국, 일본, 대만)

1986년 9월 예수교 대한 감리회(진리) 창립

1991년 3월 자연수련원 월명동 개발 착공

1991년 8월 아시아 세계 전도순회

1993년 3월 섭리 신학교 총장



1995년 월간 <문예사조> 신인상 당선, 시인 등단

1998년 충남대학교 행정대학원 최고경영자 과정 수료

1999년 8월 국제문화예술평화협회 세계문화교류 GACP 창설, 제 1회 프랑스 파리 대회 개최

2001년 11월 스리랑카 유네스코 산하 오픈인터네셔날 대학교(The Open International University for Complementary Medicines) 철학박사 학위 취득

2002년 8월 제6회 국제문화예술평화협회(GACP) 컨퍼런스 개최, 한국 대전

2008년 현 기독교복음선교회 총재

2011년 <한국시 대사전>에 시 10편 등재2011년 UWA퍼스국제아트페스티벌(UWA Perth International Arts Festival) 그림 <운명> 대표작 선정


* 정명석 목사 저서는 아래와 같습니다. 

《영감의 시 1》 (1989)

《잠언집 하늘말 내말 1》(1990)

《비유론》(1991)

《영감의 시 2》 (1996)

《생명의 말씀 1》(1997)

《생명의 말씀 2》(2003)

《생명의 말씀 3》(2003)

《잠언집 하늘말 내말 2》(2004)

《잠언집 하늘말 내말 3》(2004)

《잠언집 하늘말 내말 4》(2004)



《구원의 말씀 1》(2005)

《구원의 말씀 2》(2005)

《구원의 말씀 3》(2005)

《잠언집 하늘말 내말 5》(2005)

《잠언집 하늘말 내말 6》(2005)

《잠언집 하늘말 내말 7》(2012)

《잠언집 하늘말 내말 8》(2012)

《잠언집 하늘말 내말 9》(2012)

《잠언집 하늘말 내말 9》(2012)



《영감의 시 3 - 시의 여인》(2013)

《영감의 시 4 - 시로 말한다》(2013)《영감의 시 5 - 행복은 온다》(2016)


작품을 통해 작가의 사상과 정신과 삶을 알수 있지않겠습니까?

정명석 목사님은 진정 이 시대  하나님을 최고 사랑하며 삼위일체 하나님을 모시고 섬기며 그 말씀에 절대 순종하며

살아온 삶입니다.

여기서 가려진 jms 정명석 목사님의 과거 근황 jms 이제는 말할 수 있다 동영상도 함께 보시고 다음으로 넘어갈께요~




그럼 이제는 밝혀져야할 정명석 목사님의 과거 근황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읽고 보시면 정명석 목사님의 과거 행적과 함께 인물의 됨됨이를 알 수 있겠습니다. 

무엇때문에 하나님,성령님,성자주님께서 정명석 목사님을 통해 강력하게 역사하시는 지 갸름할 수 있겠습니다.  함께 보시죠!



 생명의 존엄성을 깊이 깨닫던 어느 날 

정명석 목사는 고개를 뒤로 젖히고 하늘을 쳐다보았습니다. 아무도 없는 푸른 하늘에는 흰 구름만 말없이 떠갔다. 푸른 하늘 흰 구름조차도 모두 낯설고 물 설은 이국땅이었습니다. 열대의 작열(灼熱)하는 태양 역시 이곳이 이국 땅 월남(베트남)임을 부인할 수가 없게 했습니다.


곳곳에 폭음 소리가 들려오고 귀청이 찢어질 듯 들리는 소총 소리에 마음은 섬뜩하고 머리털은 하늘로 올라갈 듯 곤두섰습니다. 나는 적을 노리고 적은 나를 노리는 긴장과 심정 애태우는 전선의 낯선 월남 땅 나트랑에 정명석 목사는 서 있었습니다.  


벌써 월남 파월 20일이 다 되어갔습니다. 정명석 목사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우러러 바라보며 자신의 생명을 두고 생각이 깊었습니다. 자기 생명이라 해도 참 자신이 없었습니다. 누구는 호언장담으로 “또다시 돌아가마, 고향 하늘아!”하며 그저 가벼이 말했지만, 앞날의 상황이 훤히 보이는 입장에서 정명석 목사는 자신이 없었습니다. 그는 기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 부귀영화도 좋지만 그런 것은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은 것들이 아니겠습니까? 주님의 말씀대로 정말 천하를 주고도 바꿀 수 없는 것이 생명입니다. 오직 생명만이라도 살아서 고국에 돌아가게 해주십시오.”


기도 중, 옆 전우들의 이야기들이 귀에 들려왔습니다. “고국에 돌아갈 때 컬러 TV도 사고, 녹음기도 사고, 냉장고도 사서 돌아가야지.” “난 월남 아가씨나 하나 데리고 돌아가야겠다.”하며 그들은 모두 물질과 사랑에 대한 마음으로 부풀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정명석 목사는 기도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오. 주여! 내 소원은 저런 것이 아닙니다. 빈손으로 헌 누더기를 입고 가도 좋으니 이 목숨만 살아서 내 고향 월명동으로 가게 하옵소서. 월남 땅에 있는 한 나의 소원은 오직 내 목숨이 살아 부모 형제가 기다리고 있는 고국 땅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살아서 돌아간다면 그 얼마나 좋을까!’ 하며 생명에 대한 애착심을 그렇게도 깊이 느낀 것은 정명석 목사 생애의 처음이었습니다. 정명석 목사는 생명이 얼마나 귀하고 가치 있는가를 뼈저리게 느끼며 하늘을 쳐다보고 심정이 뜨겁도록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런 대답도, 마음에 응답도 없었습니다. 순간 정명석 목사의 눈에는 눈물이 줄줄 작은 강처럼 흘러내렸습니다. ‘내가 살아서 돌아가기가 힘든 것이 아닌가...’ 그렇게 하늘 앞에 운명을 내맡기고 있는데, 그 순간 하나님께서 자신을 쳐다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러자 정명석 목사는 또 기도했습니다. 제발 이 전쟁에서 임무를 다하고 살아서 돌아가게 해달라고 간절히 심정을 다해 기도했습니다. 그때 그의 가슴에 소리 없는 음성이 들렸습니다.


 “네가 천하를 주고도 바꿀 수 없는 생명의 가치성을 진정으로 깨닫고 귀히 여기니, 내가 너를 정녕코 살아서 돌아가게 하리라. 나는 천하의 모든 생명을 주관하는 여호와니라.”


이것은 모든 사람이 귀로 들을 수 없는, 소리 없는 깨달음의 응답이었습니다. 정명석 목사의 두 눈에서 다시 큰 강물 줄기 같은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그 기쁨은 천하를 주고도 바꿀 수 없는 기쁨이었습니다.


결국, 정명석 목사는 재차 파월까지, 66년에서 69년까지 전쟁이라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수십 번의 죽을 고비를 넘기고 부모 형제가 기다리는 월명동 고향으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귀국을 앞두고 15일 동안은 정명석 목사의 마음이 참으로 설레었습니다. 다른 전우들도 TV와 녹음기, 전축, 냉장고를 챙기며 귀국 준비를 하고 고국의 품에 안기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때 정명석 목사는 휴대용 녹음기 한 대도 사지 못했습니다. 사기도 힘들었고 작전하고 전투를 하다 보니 귀국 날짜가 다 되어 버렸습니다. 더구나 파월 직후 나트랑에서 하늘을 쳐다보며 ‘나의 소원은 오직 살아만 가면 좋겠다.’고 할 정도로 전자제품에는 욕심이 없었습니다.


귀국이 가까워져 오니 정명석 목사의 마음 한 부분이 약간은 허전했습니다. ‘저것도 사서 가면 좋기는 좋지. 내 고향 두메산골에 전축 소리가 나고 TV 화면이 나오면 온 동네 사람이 다 모여들겠지.’라는 생각도 종종 들었습니다. 전쟁터에서 살아서 돌아가게 되니 나트랑에서 기도할 때 이왕이면 생명도 구하고 물질도 구할 것을 그랬구나 하는 아쉬움이 조금씩 떠올랐습니다.


그러나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정명석 목사는 계급의 위치상 큰 물건을 사서 갈 수도 없었고 거저 주어도 못 가져가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의 손에는 작은 물건이라도 하나 사서 가려고 달마다 모은 돈 300불이 있었다. 그런데 신기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귀국 날이 가까워지자 돈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환불하여 모두 고향으로 부치라는 공문이 내려왔습니다. 그런데 이틀 후 공문이 또 내려오기를 유공자 즉 훈장이 있는 사람만 큰 물건을 가지고 갈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공적을 세우는 데는 무관심하고 물건만 욕심내어 사 나르던 사람들은 난리가 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은 할 수 없이 자기가 애써 사놓은 대형 전자제품들을 유공자들에게 다 판매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유공자들의 숫자가 적으니 결국 그 비싼 물건들을 고물 팔 듯이 헐값에 팔 수밖에 없었습니다.


정명석 목사는 사병으로서 훈장이 여섯 개나 되는 유공자였습니다. 그때 같은 부대 소속이었던 모 하사가 사들인 물건들, TV와 녹음기를 싼값에 사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가끔 정명석 목사에게 TV와 녹음기를 보여 주면서 은근히 화를 돋우며 자랑을 하던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정명석 목사를 사랑하사 빈손으로 돌아가지 않게 하셨습니다. 결국, 기도한 대로 생명도 무사히 돌아올 수가 있었고 구하지 않은 것까지도 주신 하나님이었습니다. 이는 정명석 목사에게 정말 고마우신 나의 하나님이라고 간증할 수밖에 없는 잊지 못할 추억이 되었습니다.

귀국 후, 정명석 목사는 그 물건들을 다 팔아서 고향 석막리 교회를 짓는 데 썼습니다. 거기서 천하를 주고도 바꿀 수 없는 생명을 이끄는 은신처로 삼다가 이제는 민족형을 넘어 세계형에 이르도록 오직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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