되재성당지 → 천호성지 → 여산 하늘의 문 성당 → 나바위 성지
0.6Km 2.1Km 17Km
15. 천호성지(天呼聖址)
천호산(天壺山, 해발 501m)은 소백산맥에서 갈라져 나온 노령산맥의 대둔산 줄기가
서남쪽 호남평야로 이어지면서 충남과 전북의 경계지역에 위치한다.
천호산은 그 이름처럼 천주께 대한 신앙을 지켜낸 사람들을 품어 안고
신앙을 위해 목숨을 바친 순교자들의 피를 담은 병(壺)의 구실을 하고 있다.
천호성지 일대에는 박해시대에 다리실 교우촌(현재 천호본당)을 비롯하여
주변 일대에 58개소에 달하는 공소가 있었다.
교우촌이 형성되었던 각 지역은 '택리지'의 설명에 의하면
'산세가 험해 사람이 살 수가 없는 곳'이라고 말할 정도로 첩첩산중이다.
이런 곳으로 들어와 땅을 일구고 신앙생활을 하던 교우들의 피와 땀이
지금의 한국 천주교회를 일구었다.
천호성지(天呼聖址)는 한국 천주교회의 대표적 사적지로
1866년 병인박해(丙寅迫害) 시 12월 13일 전주 숲정이에서 순교한 여섯 성인 중
성 이명서(베드로), 성 손선지(베드로), 성 정문호(바르톨로메오), 성 한재권(요셉)과
같은 해 8월 28일 충청도 공주에서 순교한 김영오(아우구스티노),
1868년 여산에서 순교한 열 분의 무명 순교자들과
그 밖에도 많은 순교자들이 이곳 천호산에 종적을 알지 못한 채 묻혀 계신다.
이들은 하느님의 부르심(天呼)을 알아듣고 그 부르심에 응답하여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인간적인 모든 것을 그 어느 것 하나도 남김없이 하느님께 송두리째 바친 것이다.
부활성당(復活聖堂)
천호성지는 한국의 대표적인 순교성지로서
오래전부터 이 성지를 위한 성당의 신축을 염원해 왔다.
이 성지는 천호산 기슭의 아름다운 풍경에 감싸여 있고,
대지는 마치 이 성당을 위해 마련된 것과 같은
독립된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며 성지의 중심이 되었다.
성전은 외부 모형과 내부의 벽면, 천정을 다각형의 입체적인 구성을 통해
박해를 중심으로, 이겨낸 선조들의 신앙을 형상화하고 있으며,
내부는 침묵과 온화함이 공존해 한국 가톨릭 교회 건축의 새로운 지평을 열
기념비적인 작품으로 평가된다.
얼마전 이탈리아에서 소임을 마치고 돌아오신 쟌바울라 수녀님 묘소가
천호성지에 있다는 말을 듣고 찾아가서 참배하고 수녀님께서
건강하게 소임을 잘 하고 있다고 전함.
16. 여산 하늘의 문 성당
전주교구의 제2 성지라고 불리는 여산(礪山)은 천주교 전래가
다른 지역보다 앞섰고 또한 박해의 역사가 어느 지역보다도 길었다.
1868년에 무진년에 여산군의 속읍인 고산, 진산, 금산 등에서 체포되어
수많은 신자들이 감옥과 형장인 숲정이와 장터에서 처형되었다.
여산의 순교 사적지로는 순교자들이 신앙을 증거하던 ‘여산 동헌’,
동헌 옆의 ‘옥터’와 신자들이 백지사 형을 받았다고 전해지는
동헌 앞마당의 ‘백지사터’, ‘배다리’, ‘뒷말 교수형터’,
순교자들이 참수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북서쪽 맞은편에 있는
‘숲정이 형장’ 등이 있는데, 백지사터와 숲정이 형장이 사적지로 조성되어 있다.
동헌 백지사터 성지
동헌은 부사의 행정 집무실이고 백지사 터는 부사의 집터이다.
현재 동헌은 경로당으로 쓰고 있고 백지사 터는
천주교회에서 매입하여 순교 성지로 보존해 오고 있다.
백지사형이란 동헌 마당에 나무 말뚝을 박고 교우를 평좌시킨 다음
말뚝에 묶은 후 교우들의 손을 뒤로 결박하고 상투를 풀어서
결박된 손에 묶어 얼굴을 하늘로 향하게 한 다음 얼굴에 물을 품고
그 위에 백지를 여러 겹 붙여 질식시키는 사형 방법이다.
백지사형은 얼굴에 종이를 여러 겹 바르니
죽고 사는 것이 캄캄하다는 뜻의 도모지 사형(途毛紙死刑)이라고도 불리는데
현대 표기 '도무지'도 여기서 유래한다는 설도 있다.
전하는 목격담에 의하면 교우의 얼굴에 물을 뿜고 백지를 붙이고
또 물을 뿜으니 질식하여 죽는데 아주 편안한 모습이었다고 한다.
병인박해는 신앙 공동체를 형성하고 평화롭게 살았던 교우들을
혹독한 박해의 칼날 아래로 내몰았다.
비록 조그마한 고을이었지만 여산에는 박해 당시 도호부사(都護府使, 종3품)와
진영(鎭營, 營將은 여산 도호부사가 겸임)이 있었기 때문에
천주교 신자들을 마구잡이로 처형시킬 수 있었다.
《치명일기》에 기록된 순교자만도 26명에 이르는 여산은 특히
다른 어느 지역에서도 쉽게 찾아 볼 수 없었던 가혹한 처형 방법으로 유명하다.
여산 동헌에 잡혀 온 신자들은 장살(杖殺, 매맞아 죽음)과
교수(絞首, 목메어 죽음), 백지사(白紙死)에 의해 치명하였다.
이곳 순교의 특징은 공동체적 성격을 지녔다는 점이다.
잡혀 온 교우들은 옥중에서도 항상 쉬지 않고 공동으로 기도를 바치면서
서로를 격려하며, 무수한 고문과 매질의 고통과 굶주림을 견디어 내다
마침내 차례로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 갔다.
그중에서도 동헌은 당시 사법권을 비롯한 막강한 권한을 행사하며
고을을 다스리던 곳으로 지금은 경로당으로 사용되고 있다.
특히 동헌 마당에는 옛 부사들의 선정비(善政碑)나 물망비(勿忘碑)들과 함께
대원군의 척화비(斥和碑)가 서 있다.
여산 동헌은 현재 전라북도 유형 문화재 제93호로 지정돼 있다.
옛날의 동헌 자리인 지금의 경로당 마당에는
신미양요(1871년)를 계기로 만들어 1871년부터 세웠다가
1882년 임오군란이 지나 철거한 천주교 탄압의
척화비가 옛말을 전해 주고 있다.
맞은편 여산초등학교 종합 학습장으로 변해 버린 여산 옥터는
옥에 갇혀 있던 신자들이 굶주림에 못 이겨 옷 속에 있는 솜을 뽑아 먹다가
처형지로 끌려 나오자 풀까지 뜯어 먹었다는 일화가 전해 내려오는 곳이다.
백지사터는 동헌 아래쪽에 있는데 순교비와 백지사 기념비가
대형 십자가 곁에 우뚝 서 있어 그날의 아픔을 조용히 증언해 주고 있다.
일설에는 옥터는 배다리 옆에 있었다고도 한다.
이곳의 구전에 따르면, 장날이 되면 공개 처형장으로 변했던
배다리에서 참수된 시신은 배다리 옆 미나리꽝에 버려졌고
뒷말 치명터에서는 신자들을 정자나무에 목을 매달아 죽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