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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모데후서 2장 21-22절 깨끗한 마음으로 부름
오늘날의 기독교가 하나님의 존전(存前)에 나아가면서 아주 경솔한 일들을 자행하고 있는 사실에 대하여 우려하고 있다.
우리의 사고(思考)에 있어서 하나님은 대수롭지 않게 여겨지고 있으며,
또한 인간의 수준 정도로, 또는 막역한 사이로 여겨지고 있다.
하나님께서 지극히 거룩한 분이시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또 하나님께서는 소멸하는 분이시라는 사실과
그분이 죄에 대해서는 아주 극심한 의분을 갖고 계신다는 사실도 모르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회개와 고백과 성령의 정결케 하심을 받지 못한 생활 그대로를 가지고 경솔하게 하나님의 존전(存前)에 나아간다면
그분의 거룩하신 응징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심각하게 고려해 보아야 한다. 우리는 그분의 자비로 말미암아 매 순간마다 호흡을 하며 살아 가고 있다. 그분에게는 우리의 생명을 취하실 모든 권리가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죄의 삯은 사망"(롬 6:23)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사야는 참된 예배자가 보일 수 있는 유일한 반응 - 겸비하고, 상한 심령 - 을 보였다. 이사야는 자기가 죄인임을 깨달았다. 따라서 그가 회개와 고백을 하고 있을 때, 한 천사가 제단의 숯불을 가지고 와서 이사야의 죄를 깨끗케 해 주었다(6-7절). 그런 다음에야 하나님께서는 원하시는 장소로 이사야를 보내겠다고 말씀하셨다(8절).이러한 사실들은 하나님과 참된 예배자 사이에는 죄를 고백함으로 말미암아 놀라운 교제와 친교와 연합이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보여 주고 있다.
이것이 바로 참된 예배의 정신이다.
즉,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뵈옵고, 또 자기 자신의 죄를 발견하고는 그 앞에 완전히 굴복하는 것이 참된 예배의 정신인 것이다.-
디모데후서 2장 22절 바울은 디모데에게 편지를 쓰면서 경건한 사람이 되는 것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충성된 종이 되는 것에 대하여 교훈하고 있다.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예비함이 되리라"(2:21)고 말한 다음,
22절에서는 "청년의 정욕을 피하고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는 자들과 함께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좇으라"고 권한다.
즉 「예배」란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부름"을 뜻한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접하게 될 때 어떤 일이 발생하는가?
구약에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언제든지 하나님과 만나게 되면 두려워하며 떨었다.그들은 두려움과 공포로 떨면서 자기들의 생명이 위험하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아브라함 / 창세기 18장 27절에서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존전(存前)에 설 때 자기는 겨우 "티끌"과 같을 뿐임을 고백했다.-
욥 / 욥이 엄청난 고난의 길을 통과한 다음에, 거룩하신 여호와이심을 깨닫고는 "그러므로 내가 한하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나이다"(욥 42:6)라고 말했다.-
마노아 / 삼손의 아버지인 마노아는 여호와의 사자(使者)를 목격하고는 자기의 아내에게 "우리가 하나님을 보았으니 반드시 죽으리로다"(삿 13:22)라고 말했다.-
에스라 / 에스라서 9장에서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끄러워 낯이 뜨뜻하여 감히 나의 하나님을 향하여 얼굴을 들지 못하오니 이는 우리의 죄악이 많아 정수리에 넘치고 우리 허물이 커서 하늘에 미침이니이다"(6절)라고 말한 다음에, "주에 범죄하였사오니 이로 인하여 주 앞에 한 사람도 감히 서지 못하겠나이다"(15절)라고 고백하였다.
참된 예배자는 두려움으로 하나님의 존전(存前)에 나아간다.
왜냐하면 거룩하신 하나님께는 자기의 생명을 취하실 권리가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救贖)함을 입었지만, 하나님께서는 아직도 우리의 죄를 징벌할 권리를 갖고 계신다.
히브리서 12장 6절은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신다"고 말한다.
신약에서도 베드로 / 누가복음 5장에서 예수께서는 밤이 새도록 고기를 잡으려했지만 한 마리도 못 잡은 베드로에게 오셔서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4절)고 말씀하셨다. 베드로는 억지로였기는 하지만 그 말씀에 순종했다. 그 결과 고기가 아주 많아 잡혀서 그물이 찢어지자,
8절에서 베드로는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 엎드려 가로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했다. 베드로가 거룩하신 하나님의 실체를 접했을 때 볼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자신의 죄성(罪性)뿐이었다.- 바리새인들 / 나는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죽이고자 했던 이유 중의 하나는 그들이 예수를 아주 두려워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예수께서 가르치시는 것과 행하시는 것을 보고 놀랐으며, 예수의 능력을 보고 지혜를 들었을 때는 크게 당황했다.
예수께서는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셨다.
왜냐하면 그들 가운데 하나님께서 거하신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즉각적으로 그들 마음의 죄악에 직면했기 때문이다.
참된 예배의 삶은 죄를 발견하고 항상 그것을 고백하는 상한 심령의 뉘우치는 삶이다.
일 주일간 내내 죄짓는 생활을 하다가 주일날 하루 교회당에, 가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큰 잘못이다. 또한 하나님이 거룩하신 분이라면 마땅히 우리는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그분께 예배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분은 우리의 부정함을 징계하실 권한이 있기 때문이다.
또 다른 한편으로, 당신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어떻게 우리로 하여금 감사의 삶을 살도록 해 주는가?"라고 질문할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마땅히 받아야 할 징벌을 시행치 않으시기 때문이다. 즉, 그분은 우리가 행한 죄대로 갚지 않으셨다.
로마서 2장 4절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케 하셨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는 죄를 짓고도 벌받음이 없이 넘어가는 데에 아주 익숙해져서 계속하여 죄를 짓고만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와 용서하심에 너무 익숙해져서 그것을 남용하고 있다.- 연장된 하나님의 자비하나님은 거룩한 하나님이시다.
만약 하나님께서 그분의 거룩하심대로 처결하고자 하신다면 우리 모두는 죽게 된 것이다.
왜냐하면 로마서 6장 23절은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태초에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거역하면 죽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창 2:17).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에게 한 가지만 금하셨는데, 만일 그들이 그것을 어기면 그들은 죽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거역했을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자비로우셔서 그들을 살려 주셨다.처음에는 어떤 죄라도 범한다면 그것은 사형에 해당되는 것이었으며, 모세의 언약 시대에는 35가지 죄들만이 사형에 해당되었다
그러나, 많은 경우에 있어서 그러한 죄를 범한 자들에게도 하나님께서는 자비를 베푸셨다.
예(例)를 들면, 다윗도 이전 같으면 사형에 해당되는 죄를 범했지만, 하나님께서는 자비와 긍휼을 베푸사 다윗을 용서해 주셨다. 물론 죄에 대한 후속 조치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죽음은 아니었던 것이다.또 다른 예(例)는 간음죄이다.
모세 율법에 따르면 결혼 생활 중에 간음을 행하면 그 벌은 사형이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자비하셔서 사람들의 마음의 완악함 때문에 목숨을 살려두는 대신 이혼을 허락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자비하심을 보이셨지만, 그것이 우리의 죄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개의치 않으신다는 뜻은 아니다. 또 하나님께서 자비하시다는 사실이 우리가 생활 중에 범죄하고서도 그 죄를 그대로 가지고 하나님의 존전(存前)에 나아갈 수 있다거나, 또 우리가 그분의 자비를 남용해도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생활 중의 죄에 대해 의분으로 처결하실 날이 이를지도 오른다. 그렇게 하려고 하신다면 그분에게는 그렇게 하실 권한이 있는 것이다. 우리는 그분의 긍휼하심에 너무 젖어 있어서 그분이 죄에 대해 공의롭게 처결하실 때, 우리는 그분이 불공평하게 행하신다고 여길 정도까지 되어 버렸다.-
예증(例證)된 하나님의 공의 어떤 사람이 젊은 나이에 죽게 되면,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러한 일을 허락하신단 말인가?"라고 말한다.
세상 살아갈 때에 문제가 생기고 생활이 어려워져도 역시 그러한 말들을 한다. 그러나, 문제는 "하나님께서 왜 그런 일들을 허락하셨는가"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이러한 죄인인데도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런 일들이 우리에게 닥치는 것을 허락치 않으셨는가"이다.
우리는 문제를 거꾸로 보고 있는 것이다.많은 사람들은 성경을 읽고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한다.
"하나님은 도대체 어떤 분이시기에 어린 아이들이 엘리사에게 「대머리여 대머리여」했다는 이유만으로 곰을 두 마리씩이나 보내 그 아이들 42명을 모두 찢어 죽이도록 하신다는 말인가?(왕하 2:23-24)
하나님은 어떤 분이시기에 약간 교만했다고 52년간 충직했던 왕에게 문둥병을 내리신다는 말인가?
(왕하 15:1-5), 왜 하나님께서는 어떤 사람은 벌하시고 어떤 사람은 그냥 넘기시는가?
왜 아나니아와 삽비라를 죽이셨는가?(행 5:1-10),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그들이 드리겠다고 말한 전부는 아니었지만, 어쨌든 하나님께 헌금을 드린 사람들이 아니었던가?
그것 때문에 그들은 죽어야 하는가?"
그러나, 문제는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왜 죽었는가가 아니라, 당신 역시 하나님께 무엇을 약속하고도 드리지 않았는데도 어떻게 당신은 지금까지 살아있는가가 문제이다. 또 어떤 사람이 간음하였는데 왜 그 사람만 죽어야 하는가가 문제가 아니라, 어째서 간음을 행한 모든 사람들이 죽지 않는가가 문제이다.
즉, 하나님께서 공평하지 않으시다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오로지 하나님께서 자비하시다는 것이 문제이다.
때때로 하나님께서 공의를 행하실 때가 있는데, 그것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일깨워 주고, 또 죄에 대한 심판을 그들에게 경고하시기 위한 예증(例證)으로 행하시는 것이다(고전 10:5-12).
이와 같이 우리가 성경 전체를 살펴보고 하나님에서 거룩치 못한 것들에 대해 거룩한 방식(공의)을 행하신 경우를 살펴보면,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실 모든 권한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여기서 문제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렇게 불공평하실 수가 있는가가 아니라, 그분의 거룩성이 그처럼 침해를 당하셨는데도 어떻게 그러한 자비를 보이실 수가 있는가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문제인 것이다.
나는 사람들이 "고린도 교인들 중의 어떤 사람들이 죄된 생활 가운데 성찬에 참여했다는 것 때문에 죽임을 당했다는 것은 끔찍한 일이 아닌가?"(고전 11:27-32)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그러나, 사실은 그것이 문제가 아니라, 우리도 그렇게 많이 범죄한 생활을 하면서 성찬에 참여했는데도 어떻게 우리는 아직까지도 살아 있는가 하는 것이 문제이다.
그 대답은 오직 주님의 자비 때문인 것이다.
사람들은 "왜 하나님께서 롯의 아내를 소금 기둥으로 변하게 하셨는가?"라고 말하지만, 그것이 문제가 아니라, "우리도 비슷한 세상적 습관을 행하고 육체의 일을 그렇게도 간절히 추구하는데도 하나님께서 우리는 왜 소금 기둥으로 만들어 버리시지 않는가?"가 문제이다. 당신은 또 "왜 하나님께서 고라와 다단과 아비람을 거역했다는 이유만으로 땅으로 입을 벌려 그들을 삼키게 하셨는가?"(민 16:23-33)라고 질문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문제가 아닌 것이다.
문제는 우리도 역시 거역하는데 하나님께서는 왜 우리를 땅 속으로 삼켜 버리지 않으시는가 하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성의 측면에서 사건들을 보아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자비로우시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비로우심 때문에 거룩하심을 값싸게 넘겨 버리는 일이 없도록 하자.
누가복음 13장 1-5절에서는 어떤 사람들이 예수께 나아와서 희생 제사를 드리러 성전에 들어갔던 어떤 갈릴리 사람들에 대하여 말씀드리고 있다. 갈릴리 사람들이 성전에서 희생 제사를 드리고 있을 때, 빌라도의 군대가 성전에 들어와서 갈릴리 사람들을 다 죽이고 희생 제물의 피에다 그들이 죽인 갈릴리 사람들의 피를 섞어 버렸다. 사람들이 이 일에 대하여 "하나님이 계신다면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가 있습니까?
이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 악한 죄인들이었습니까?"라고 질문하자,
예수께서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5절)고 대답하셨다.
이제는 분명히 드러났듯이, "왜 이 갈릴리 사람들이 죽임을 당했는가?"
또는 "왜 망대가 무너져 열 여덟 사람이 깔려 죽었는가?"가 문제가 아니다.
예수께서는 실상 문제가 되는 것을 보여 주시면서 말씀하시기를, "너도 똑바로 생활하지 않으면 너에게도 그와 같은 일이 임할 것이다"라고 하셨다.
이 사실은 히브리서 12장 28-29절에 모두 요약되어 있다.
이 구절은 "우리가 ...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지니(예배할지니)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심이니라"고 말한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을 뜻한다.
또한 우리는 고백하며 회개하는 삶을 살아서 우리의 예배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또 그분이 받으시는 예배가 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하여 감사하며 그분의 사랑을 이해하고는 있지만,
기독교에 몸 담고 있는 우리는 예배의 핵심인 하나님의 거룩성에 대해서는 다소 망각하고 살아 왔다.
우리는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러 나아갈 때, 하나님의 완전한 거룩하심에 비추어 보아, 뉘우침과 겸손한 마음으로 자기 자신을 직시하는 죄인의 상한 심령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