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m대의 나즈막한 사명산(169.4m) 옆에는 네이버와 다음카카오에 사망산(약 165m)으로 나오는 산이 있다.
이는 사명산의 오기(誤記)로 보이고, 사명산의 정확한 이름은 물론 그 유래는 어느 자료에도 보이지 않는다.
「법구경(法句經)」에 나오는 ‘사명(四明)의 법’이 이 작은 사명산에 그대로 투영되였으리라 보았다.
사명의 법은 아둔한 중생들을 깨우치는 석가의 가르침이다.
사명(四明)의 첫째는 자연의 조화를 밝히고, 둘째는 올바른 몸가짐을 가지며, 셋째는 나라를 바로잡는 일이고, 넷째는 병사(病死)를 밝혀 나라를 안전하게 하는 일이다.
이러한 오묘한 진리를 품고 있으니 ‘사망산’이라는 이름은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이름이다.
비암봉(348.1m) 또한 어디에도 그 정확한 유래가 보이지 않는다.
비문(碑文) 또는 불상(佛像)이 새겨진 바위가 있다면 비암(碑岩), 바위가 날아다닌 전설이라도 있다면 비암(飛岩)이 됐을 것으로, 바위와 관련된 어떤 스토리텔링이 있을 법하다.
설마하니 비암(배암, 뱀, 蛇)이 많아서 생긴 이름은 아닐 터.
나중에 비암봉 동릉을 내려서면서 만난 암벽장 깎아지른 바위가 그 이름을 낳게한 장본(張本)으로 추정해 보았다.
산행 기·종점으로 잡은 ‘도요문화공원(도요생태공원)’은 낙동강변의 생태공원.
김해에는 이를 포함해 7곳의 생태공원이 있으며, 말많은 4대강 공사로 전국에 조성된 230여 곳 중의 하나.
내가 이 곳을 택한 건 발이 불편한 아내가 굳이 쑥을 캐겠다는 뜻을 따랐던 것.
낙동강변을 따라 연두색 수양버들이 휘늘어졌고, 마른 갈대가 바람에 하늘거리는 모습이 무척 아름다운 곳이다.
도요마을은 가야와 신라시대부터 있은 마을로 당시부터 낙동강을 따라 배가 드나들었던 곳.
조선시대에는 도요저(都要渚), 도요진(都要津)으로 불렸으며, 강건너 원동면 용당리 사이를 왕래하던 선척(船隻)이 있었다는 기록이 「세조실록」에 실려있다. * 渚(저: 물가,섬)
이곳은 당시 남해와 바로 이어지는 낙동강변 기수역(汽水域)으로 「중종실록」에 ‘도요리에 1,000호 이상이 살았다’는 기록이 있어 그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 1431~1492)은 ‘도요저(都要渚)’라는 글에서 “김해와 밀양이 경계선에 있다.
이곳 주민 수백 호는 대대로 생선 파는 것을 업으로 삼고 농사를 짓지 않았다.”고 설명하며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동쪽 이웃에 딸 있어 서쪽 이웃에 시집가고/ 남쪽 배에 고기 오면 북쪽 배에 나눠준다./
한 조각 강가 땅에 사는 일 어려워도/ 자손들 끝내 밭 갈고 김 맬 생각 않더라.'
도요마을은 어업으로 대규모 취락이 형성되었고, 해운과 낙동강 수운을 연결하는 교통의 요지였다.
지금은 삼각주가 생기면서 바다와 단절되었으며 대도시 인근의 지역적 특성을 살린 농촌으로 발달하였다.
기수역의 변화로 낙동강변 마을들은 어업에서 농업으로, 다시 도시형 기능이 들어서면서 강변에서 고기 잡던 옛모습은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도요'라는 지명은 ‘도요새가 강가에 많이 날아와서’라기도하고, ‘중심이 되는 삼각주’라는 말을 한문화 하였다고도 한다.
산행궤적.
확대한 트랙.
약 7km를 3시간 조금 더 걸린 셈.
고도표.
<산길샘>
<참고 국제신문> 용산마을에서 테마임도를 따라 도요마을로 원점회귀하면 좋겠다.
나는 오래전 용산마을을 기·종점으로 무척산을 다녀왔다.
미리 준비한 표지기에 네이버와 다음카카오에 나오는 사망산을 적어 넣었다.
도요생태공원 어느 곳에 차를 대도 원점회귀이므로 무방할 것.
나는 아내가 쑥을 캘 만한 곳에 차를 댔다. 그 뚝방 넘어 생태공원에 주차장과 체육시설이 구비되어 있었다.<경남 김해시 생림면 도요리 5번지>
낙동강 건너 열차가 가고있어...
줌인하여 보았다. 철로는 경부선으로 밀양 삼랑진으로 가는 열차.
강변 낮은 마루금을 한 화면에 담을 수 없어 동영상을 찍다...
파노라마. <클릭>
강건너 '바위손봉'과 '시루봉(239m)'이 건너다 보이고...
내가 들머리로 삼은 저 낮게 내려앉은 능선 끝자락으로 이동을 한다.
대개 금국사를 들머리로 사명재로 오르지만 코스가 너무 어중간해서 155m봉을 거치게 하여 조금 길게 잡은 것.
내가 걷는 길은 뚝방길. 우측 낙동강변엔 대부분의 하천변 생태숲처럼 억새와 갈대가 뒤섞여 자라고 있다.
그런 뒤 다시 한 번 내가 타고 갈 낮은 산자락을 올려다 본다.
산 밑 금국사인 듯해서 당겨본 팔작지붕. 금국사(鑫國寺)의 '금'자는 실제론 '흠(鑫)'자로 기쁘다라는 뜻.
'金'자가 세 개가 겹쳐지니 돈방석에 앉는 형국이라 기쁠 수밖에.
'도요보건진료소' 앞 '농림수산 김해검역소'를 지나 저 쪽 낮은 산자락이 들머리.
평생 세수도 하지 않았을 인형 캐릭터에 '무척사랑 김해생철권역 모래아리'라고 적혀있다.
모래가 많은 낙동강이라 그렇게 이름을 지었을까?
낮은 산자락 좌측 길은...
사찰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기와집이 몇 채 보이고...
가파른 언덕에 돌담으로 높은 석축을 쌓았다.
높은 석축 우측으로 난 산길은...
바로 대숲.
대숲을 빠져 나오면 화살표 방향으로 비스듬히 올라 우측 작은 능선에 붙어야 하는데 그곳에 무덤이 있어...
우측으로 올랐더니 '사유지이므로 출입하지 말라'는 종이가 붙어있다.
어느 방향으로 가더라도 금세 작은 능선에 올라 붙는다.
능선엔 반듯한 산길이 나있고, 때마침 개화기를 맞은 진달래가 지천을 이루고 있다.
사명산과 비암산은 진달래 산이었다.
룰루랄라하였더니...
잡목사이로 낙동강이 펼쳐진다.
그렇게 금세 155m봉에 올라...
표지기를 급조하여...
나무에 매달았다. <국제신문은 금국사에서 올라 이 봉우리를 찍고 돌아갔다.>
무덤을 지나고...
네이버와 다음카카오에 '사망산'으로 기재된 작은 사명산(약 165m)에 닿아 준비해온 표지기를 걸었다.
잡목 사이로 진로가 드러나 보인다.
그렇게 사명산에 올라 사명(四明)의 뜻을 새기면서 '四明山'이라는 표지기를 걸었다.
무덤이 있는 고개는 금국사에서 올라오는 사거리 갈림길.
분성허씨 할머니와 창녕조씨.
이후 반듯한 산길.
다음 고개가 사명재(해발 약 140m).
진달래 어깨동무한 산길에...
잇달아 무덤이 나오고...
'준·희'님의 표지기가 길안내를 돕는다.
내내 진달래 산길.
잡목 사이로 낙동강.
산길 내내 진달래가 길을 밝힌다.
꽃길.
끝없는 꽃길.
그렇게 오른 비암산.
비암산은 무척산의 전위봉인 것.
감히 비암봉(碑岩峰)이라 쓴 표지기를 걸었다.
그런 뒤 아내와 반반 나눈 먹을꺼리를 끄집어 낸 뒤 정상주를 곁들인 요기를 한다.술은 '하수오' 담금주로 예전 이형규 회장으로부터 선물 받은 것. "카~ 그놈 도가다."
원점회귀를 위하여 동릉으로 내려오는 길은 비암봉에서 약 200m를 U턴하여 용도불명한 웅덩이가 있는 지점에서...
동쪽 방향 내리막으로 내려선다.
진달래 산길은 이어지더니...
등로 좌측 돌출된 지점으로...
전망대가 나타난다. 강건너 산은 밀양의 만어산과 구천산.
당겨보니 차를 대놓은 지점에 초소와 화장실도 보인다.
한 화면에 담기 위해 동영상을 찍었다.
가까이 바위손봉과 그 뒤로 천태산 능선이 펼쳐지고, 우측 멀리 토곡산인 듯 잡목에 가렸다.
한 화면에 담기 위해 파노라마 촬영. <클릭>
포토 포인터를 담았다.
시야의 좌측은 밀양, 우측은 양산.
고성 장군산에서 베어진 나무에 달린 표지기를 새로 달아 주었던 여영모임 표지기가 반긴다.
꽃길.
파묘한 듯한 묘지.
다시 꽃길.
다시 전망대에서 배낭 위에 카메라를 올려놓고 셀프 촬영.
낙동강 700리 구비구비 흘러 기수역(汽水域)까지 왔으나 지금은 낙동강 수문이 생겨 기수지역은 넓지 않을 것.
강건너 토곡산과 그 우측 뒤로 희미한 오봉산(?).
강 우측으로 지난 무척산 산행때 용산초교에서 올랐던 능선이 꿈틀거린다.
산행기 ☞ blog.daum.net/bok-hyun/578 그 좌측 강변으로 테마임도가 있다길래...
살짝 당겨보았더니 토끼비리처럼 절벽에 매달려 조망이 좋을 듯.
강건너 가까이 바위손봉 능선과 그 뒤로 천태산 능선, 그리고 멀리 토곡산.
묘지를 지나고...
너럭바위를 지나자...
거대한 바위가 나타난다.
데크가 마련되어 클라이머들의 편의를 제공한 암벽장이다. 이 지점은 어느 지도에도 나오지 않는 곳.
고개를 드니 깎아지른 암벽.
그 좌측 옆으론 내가 내려온 길.
데크계단을 따라 내려오다...
돌아보는 암벽장. 비암봉(碑岩峰)은 이 바위에서 이름이 유래되었을 것.
내려오면 비포장 임도에 이정표가 있다.
암벽등반코스와 도요등산로가 있고 그 위로는 선로사.
내려가면 원점회귀하는 도요리로 가는 길.
금세 임도삼거리를 만나고...
지도에 나오지 않는 임도(생림면 도요리~ 상동면 여차리)의 이름은 테마임도로서 차량통행은 금지된다.
테마임도란 문화/ 휴양/ 자전거 등 레포츠 활동만 할 수 있는 임도.
임도를 빠져 나오면 '도요생태공원'
입구에 '신선들의 이슬'이라는 선로사(仙露寺) 간판이 있으나 길이 나빠 차량진입은 힘들 것.
도요등산로 6.8km는 무척산을 말하는 듯.
강변쪽으로 돌아...
정자를 지나...
수양버들 늘어진 강변길을 걸었다.
매일매일 보지만 그새 월씬 진한 색으로 변한 버들.
강건너 바위손봉(388.4m)이 보이고, 가까이 우뚝 솟은 암봉은 시루봉(239m)으로 최근 국제신문 가이드가 올라와 있다.
◇ 국제신문 ☞ 근교산 : 근교산&그너머 <1218> 양산 시루봉~작원잔도 : 국제신문 (kookje.co.kr)
시루봉은 밀양과 양산의 시계(市界)로서 좌측은 삼랑진이고 우측은 원동.
마침 그때 지나가는 열차를 당겨 보았다. 예전 저 열차를 이용, 원동 방면 산들을 두루 섭렵하고 다녔는데...
열차 아래 강변으로 이어진 길은 자전거길로 4대강 사업때 개설된 길.
생태공원은 이래서 생태공원인 것. 되도록 자연 그대로를 보존하자는 의미.
차량은 여기에서 사양하고 운동기구와 제법 널따란 운동장이 있어....
그야말로 바람을 쐴 수 있는 곳. 주차장은 완벽하게 마련되어 있다.
정식명칭은 '도요문화공원'이지만 네이버지도에 검색이 되지 않는다.
주소를 입력하거나 '도요보건진료소'를 입력할 수밖에 없겠다.
아내가 캔 쑥으로 찹쌀떡을 만들어 보자. 쌉쌀하고 진한 쑥 향이 봄 미각을 돋울 것이니...
밭을 둘러 동생이 심어놓은 상추와 생마늘, 그리고 봄부추(정구지)초무침에다 삼겹살을 구웠다.
- - - - 사명의 법 - - -
어느 마을에 똑똑한 사람이 살고 있었다.
그는 자기만큼 지식이 많은 사람은 없다고 자부하면서 오만하게 살았다.
그 사람이 살고 있는 마을에서는 지식에 있어서는 누구도 감히 그와 겨눌 수 없기 때문에 그의 말을 거역할 수 없었다.
어느 날 그는 갑자기 대낮에 횃불을 들고 동네를 다니면서 외쳐댔다.
“이 어리석은 중생들아, 눈이 있어도 앞을 보지 못하는 중생들아, 나는 자네들이 불쌍해 횃불을 켜들고 다닌다.
이 불빛에 힘입어 세상을 좀 더 잘 보라고 말이야.”
이렇게 잘난 체 하니까 동네사람들이 그를 외면하기 시작했으나 마을사람 누구도 대놓고 항의하거나 면박을 주는 사람은 없었다.
이 소문이 석가모니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석가모니는 그가 천성이 착하다는 것을 미리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오만을 고쳐주려고 변신을 하고 길모퉁이에 숨어 있었다.
그때 횃불을 든 그가 나타났다.
석가는 그에게 다가가 공손하게 물었다.
잘난 체 하는 그는 귀찮다는 듯 “이 동네 사람들은 너무 어리석어 낮과 밤의 구별조차 못하기 때문에 그들을 위해 횃불을 밝힌다.”고 말하였다.
석가가 되묻기를 “그러면 횃불을 밝힌다고 이 세상이 얼마나 밝겠는가, 당신은 사명(四明)을 아는가?”
이렇게 묻자 그는 모른다고 대답했다.
“사명(四明)의 첫째는 자연의 조화를 밝히는 일이다.
이 세상이 자연 아닌 게 없다. 그 숱한 자연이 서로 조화하면서 슬기롭게 살아가는 것을 밝히는 일이다.
둘째는 올바른 몸가짐을 밝히는 것이다.
중생들은 각기 제 몫의 삶을 가지고 이 세상에 태어나 살 만큼 살고 세상을 떠난다.
이 세상을 살면서 몸가짐을 조신(操身)하게 가지면서 옳고 바르게 살아가기를 바란다.
셋째는 나라를 바로잡는 일이다.
많은 사람들이 모듬살이를 하려면 나라가 있어야 한다.
나라는 여러 사람의 모임이기 때문에 질서가 있고, 법률이 있다.
권력과 다스림이 있는 곳에는 억울한 일, 황당한 일이 생기게 마련이다.
사람이 억울한 일을 당하면 제 목숨까지도 끊는 비극이 생긴다.
억울한 일은 누구나 멀리하고, 행복하게 살아가기를 바라게 된다.
나라가 바로 서지 않으면 많은 사람이 잘못 살게 된다.
이를 바로잡아 만인을 편안케 하는 일이다.
넷째는 병사(病死)를 밝혀 나라를 안전하게 하는 일이다.
바로 이것이 사명(四明)이다.
아는 것이 적고, 듣는 것이 적으면 사람은 누구나 오만해진다.
앞 못 보는 사람이 횃불을 보면 좀 밝아지는 것 같아도 속은 여전히 어둡다는 것을 왜 모르는가?”
이렇게 따져 묻자 그는 대답을 못했다고 한다.
천하의 이치를 모두 안다고 떠드는 사람도 전부를 알 수는 없다.
석가의 지혜로운 타이름에 얼굴을 붉히고 대답을 못한 오만한 자의 몸가짐은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그러나 세상은 빈 수레가 더 요란한 소리가 나는 법으로 그런 사람들이 너무 많다.
그들이 세상을 온통 시끄럽게 만든다.
어떤 일을 당해도 놀라지 않고 차분히 일을 풀어나가는 지혜로운 사람이 있는가 하면 시끄럽게 떠들면서 되레 일이 해결될 수 없게 복잡하게 얽어매는 사람이 있다.
그들은 자신들만이 세상을 살아본 것처럼 말하지만 사실은 횃불을 든 오만한 사람과 다를 게 없다.
석가의 사명(四明)의 지혜가 밤하늘의 별처럼 우리에게 밝음을 주는 까닭을 생각해 보아야 한다.
참 지혜는 먼 속에 있지 않고 우리 주변에 있음도 함께 깨우쳐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