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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세의 결단
사도행전 7:23~29
“나이가 사십이 되매 그 형제 이스라엘 자손을 돌볼 생각이 나더니”(사도행전 7:23)
오늘 우리가 읽은 부분에서 스데반 집사는 산헤드린 공회 앞에서 이스라엘의 율법의 전달자 모세가 애굽 왕궁에서 자라나 장성하였을 때에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동족 이스라엘을 구출하고자 나섰다가 실패하여 미다안 광야로 도망가게 되었는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본문 말씀을 통하여 우리는 모세의 동족 구원을 위한 신앙의 위대한 결단 속에 어떠한 희생이 있었는가를 살펴보고 또 우리 삶에서도 이러한 신앙적 결단이 필요할진대 그러한 복된 결단을 실천하는 믿음을 가지기를 소망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하여 모세가 나이 사십 세에 자기 동족 이스라엘을 구원할 결심을 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23절로부터 25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나이가 사십이 되매 그 형제 이스라엘 자손을 돌볼 생각이 나더니 한 사람이 원통한 일 당함을 보고 보호하여 압제 받는 자를 위하여 원수를 갚아 애굽 사람을 쳐 죽이니라 그는 그의 형제들이 하나님께서 자기의 손을 통하여 구원해주시는 것을 깨달으리라고 생각하였으나 그들이 깨닫지 못하였더라”
이 내용을 보면 모세 나이 사십 세가 되어 그냥 자기 동족 이스라엘 백성들의 고생하는 노동 현장에 유람하듯 구경차 간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왕자로서 자기 곁에서 보좌하는 보좌관들을 대동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의 노역 현장의 문제점들이나 공사 현황이 얼마나 잘 진척되는가 그 정도를 알아보려고 간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는 자기의 보좌진들이나 자기의 궁중의 측근들을 전혀 대동하지 않은 채 자기의 동족의 고난당하는 현장에 와서 그들이 겪는 눈물겨운 고생을 가슴아파하며 그들을 어떻게 해서든지 속히 이 곤경에서 건져내고자 하는 구원의 열정을 가지고 그 사역 현장에 방문한 것입니다. 그래서 원문에 ‘돌볼 생각이 나더니’라는 말에 ‘돌보다’라는 말은 헬라어 에피스깊토마이’라는 단어로 긍휼과 자비의 마음으로 방문하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돕고자 하는 마음으로 찾아와 은혜를 베푸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 주님께서 예루살렘을 마지막으로 방문하실 때에 그 성을 보시며 우실 때 하신 말씀에,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네가 보살핌받는 날을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고 하실 때에, ‘보살핌받는 날’이라고 한 날은 ‘주의 긍휼어린 방문의 날’을 가리킵니다. 우리 주님이 친히 예루살렘과 유다를 방문하여 그들을 돌아보고 권면하고 회개를 요청하여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심판을 면하도록 설득하였으나 그들이 그러한 긍휼과 자비의 방문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예수님을 박해하여 십자가에 못박혀 죽임으로써 결국 예루살렘 성이 무너지고 그 백성과 자녀들이 로마 군병에 의하여 다 죽임을 당하고 성의 돌이 하나도 겹쳐 쌓이지 않을 만큼 철저히 파괴되는 일을 만날 것이라고 예고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말씀은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말씀 23절 말씀에서 모세가 나이 사십이 되어 자기 형제 이스라엘 자손을 돌볼 생각이 나더니 가서 자기 형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 공사 감독자가 불의하게 괴롭히고 학대한 현장을 보고 분노하여 압제당한 형제를 위하여 그 애굽 사람을 쳐 죽인 것은 단순한 갑작스런 정의감 때문에 한 일이 아니라 자기 동족 이스라엘을 구원하려고 굳게 결심하고 오랫동안 마음에 품은 것을 결행하고자 한 것입니다. 그는 동족을 구원하기 위한 사명감으로 그렇게 동족의 고난의 현장을 방문했다가 그 현장을 보고 구원자의 사명감으로 애굽 사람을 쳐 죽이고 자기 동족을 구원한 것입니다. 단지 갑작스럽게 살인한 것이 아니요 민족의 구원자로서의 사명감을 가지고 그 일을 거룩한 성령의 능력으로 행한 것입니다. 25절에서 동족 이스라엘이 자기의 행동을 보고 자기를 통하여 구원해주시는 것을 깨닫기를 기대했는데, 그들이 깨닫지 못했다는 말을 첨부한 것을 보면, 모세의 그런 과감한 행동이 바로 구원자로서의 사명감에서 비롯된 것임을 확고하게 해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다음날도 그가 다시 동족을 돌아보고자 나섰던 것인데, 이것은 그가 굳건한 사명감을 가지고 자기 동족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건져내고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그들을 인도해나가려는 사명감으로 행동했음을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결국 그의 이러한 계획이 발각됨으로써 애굽 왕으로부터 체포되어 죽임당할 위기가 발생하여 애굽의 변방 시내 반도 광야로 도망하여 거기서 사십년을 나그네로 살면서 두 명의 아들을 낳으면서 나이 80세까지 지내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세가 나이 사십 세에 동족 이스라엘을 구원하려고 하는 사명감을 갖게 되었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인정할 수 있습니다. 모세가 나이 사십 세에 어떻게 민족 구원의 큰 사명감을 확고하게 갖게 되었는지, 어떻게 그 마음에 굳은 결심을 갖게 되었는지 그 과정은 잘 알 수 없습니다.
역사가 요세푸스가 쓴 유다 고대사에 보면 모세가 그 어머니 요게벳에게 잉태되었을 때에 그 아버지 아므람이 몹시 두려워하며 걱정할 때에 하나님께서 꿈과 환상을 통하여 나타나셔서 태어날 아이를 인하여 염려하거나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면서, 그 아이가 장차 자라나서 애굽의 지배로부터 히브리 민족을 구원해낼 것이요 그 아이는 히브리 민족만 아니라 온 세상의 외국인들에게도 유명해질 것이라는 약속을 해주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모세는 난 지 석달만에 나일 강변에 갈대 상자에 담겨 흘려보내졌다가 애굽 공주에게 발견되어 애굽의 왕궁 내에서 길러지고 애굽 공주의 양자로 컸지만 어렸을 때부터 그의 출생의 비밀이 다 드러났기 때문에 본인도 자기가 애굽인이 아니요 당시 노예로서 온갖 천대를 받고 있는 히브리 사람, 이스라엘 백성인 줄을 모르는 바 아니었을 것입니다. 성경과 요세푸스의 역사서의 기록을 보면, 모세는 애굽 왕의 딸 공주의 양자로서 분명 최고급 교육을 받고 놀라운 지혜와 달변의 말쏨씨와 탁월한 지도력을 통하여 애굽의 지도자들 가운데서 점점 신망이 높아져갔습니다. 그리고 애굽에 큰 위기였던 에디오피아와의 전쟁이 터졌을 때에 모세가 애굽의 군대를 지휘하여 대 승리를 거두는 놀라운 업적도 쌓았습니다. 그래서 모세의 앞길은 그를 시기하고 죽이려는 반대자들도 있었지만 모세가 마음을 확고하게 애굽 편에 서고 애굽의 왕자로서 애굽 왕 바로에게 충성하기만 하면 그의 앞길에는 탄탄대로가 열려 있었음은 분명한 사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나이 사십 세에 어떤 일이 계기가 되었는지 그는 이렇게 자기와 같은 혈통인 이스라엘 백성을 구출하려고 하는 굳은 결심을 하고 이렇게 동족 구원의 행동에 직접 나서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가 어떤 계기가 되어 자기의 친 아버지 아므람과 친 어머니 요게벳, 누나와 형인 미리암과 아론을 접촉하였고, 모세의 출생 전에 하나님께서 모세에 대한 예언의 말씀을 아므람이 받았던 것을 모세에게 들려주었는지 모릅니다. 아니면 모세가 궁중의 권력 암투 가운데 인간적인 실망을 하는 중에 하나님께서 친히 꿈으로나 환상으로나 그에게 나타나셔서 동족 이스라엘을 구원하라는 말씀을 주셨는지도 모릅니다.
분명한 것은 그가 나이 사십 세에 이러한 동족 이스라엘을 구원하여야 한다는 하나님의 소명을 받았고 중대한 고민과 갈등 속에서 굳게 결심을 하고 자기 동족 이스라엘을 애굽의 학정에서 구출하여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이끌고 가야하겠다는 사명감을 가지고 결단했다는 것입니다. 그의 결단이 하나님의 때가 아닌데 인간적으로 너무 서두른 것은 아닌가 하는 면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의 결단은 하나님이 부르시지도 않았고, 그러한 사명을 주시지도 않았는데, 스스로 교만해져서 나선 것은 결코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부르심이 있었고 모세는 그 부르심에 응답하기로 결단함으로써 하나님의 작정하신 일에 동참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의 결단은 분명 귀한 것이요 믿음의 세계에서 영웅적인 결단이었고 찬사를 받을 만한 것이 분명하고 귀한 상을 받기에 합당한 결단인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히브리서 11장 23절 이하에 이르기를
“믿음으로 모세가 났을 때에 그 부모가 아름다운 아이임을 보고 석달 동안 숨겨 왕의 명령을 무서워하지 아니하였으며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받기를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히브리서 11:23~27)
고 하였습니다. 히브리서 기록자인 사도는 모세가 나이 사십 세에 이스라엘을 구원하고자 나선 것은 믿음의 결단이라고 확실하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섣불리 나선 설익은 기회주의자의 육신적인 시도가 아니었고 깊은 마음의 생각 속에서 굳건하게 마음을 작정하여 나선 행동이었노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록자인 사도가 언급한 것은 모세가 자기 동족 이스라엘을 구원하고자 나설 때에 그가 그 결단을 할 때 자기가 가진 것들 중에서 얼마나 많은 희생을 치러야 할 것을 모르지 않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잠시 모세가 당시 갖고 있었던 세상의 것들이 얼마나 많은가를 생각해봅시다. 먼저 모세는 는 히브리서 11장 23절 이하에 보면, 모세는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는 특별한 세상 영광의 자리에 있었습니다. 그는 바로 왕의 권력을 이어받을 수도 있는 엄청난 권력을 갖고 있었고, 그의 양모인 애굽 왕 바로의 딸 공주는 모세의 절대적 보호자 역할을 하고 있어서 누구도 모세를 함부로 할 수 없는 자였습니다. 모세에게 주신 하나님의 놀라운 지혜와 언변은 애굽의 정치적, 경제적, 군사적 위기 때에 문제들을 깔끔하게 해결해주곤 하여서 사람들이 놀랍게 하곤 했습니다. 그의 지도력은 아무리 숨기려 해도 드러날 수밖에 없었고 모세에게는 그의 대적자들도 찬탄할 수밖에 없는 탁월함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당시 세계 최강의 국가 애굽에서 그 정치적 위상은 대단한 지위에 있었습니다.
또한 애굽의 궁정 생활은 최상의 볼거리와 먹을 거리와 종교적인 마술쇼와 같은 것들이 가득찬 곳이었습니다. 모세는 그 속에서 살아가면서 그가 원하면 애굽의 공주의 아들로서 날마다 연회를 즐기면서 세상 쾌락을 다 누릴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의 아름다운 얼굴과 준수하고 건장한 몸과 탁월한 지혜와 언변은 그 모든 사람들 중에서 가장 탁월하여 인기와 사랑을 한몸에 받았을 것은 불을 보듯 뻔합니다. 모든 애굽의 처녀들은 그를 향하여 마음을 쏟았을 것이며 모든 남자들은 그와 가까이 교제하며 사귀기를 원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는 참으로 날마다 애굽 궁정의 모든 연회와 축제의 주인공과 같은 존재였을 것이 분명합니다.
또한 애굽 궁중에서의 모세 주변에는 세상에서 가장 진귀한 보물과 보배와 보석들이 널려 있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양모인 애굽 공주는 자기의 양아들인 모세를 위하여 최고급 옷과 최고의 마차와 최고의 병거와 호위병들과 최고의 시녀들을 붙여 주어 그를 빛나게 해주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세는 세계 최고로 세련되고 부유하고 빛나는 부와 권력과 명예와 세상 즐거움을 한몸에 다 누리며 살고 있었다 해도 과장이 전혀 아닌 상태에 있었습니다. 만일 모세가 원한다면 그와 같은 세상적인 모든 일락과 영광과 즐거움과 부요함과 막강한 권력은 그의 남은 생애에도 계속될 수 있음은 확실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나이 사십 세에 어느날 그에게 찾아온 하나님의 부르심은 이 모든 평온한 삶을 뒤흔드는 거대한 충격으로 그에게 다가왔습니다. 모세는 지금까지 자기가 그 동안 누리던 이 모든 화려하고 안락하고 부요하고 멋진 것들을 계속 누릴 것인가, 아니면 이 모든 것을 포기하고 고난받는 동족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수치와 고난을 당하고 미래의 불확실함과 위험 속에 자기를 던질 것인가 하는 양단간에 확고한 결단을 내려야 하는 위기가 찾아온 것입니다.
민족 이스라엘을 돕고 그들을 학대받고 천대받고 죽어가야 하는 위기에서 구원하려고 덤빈다면 더 이상 애굽 사람이 되어서는 안되고, 이제 철저하게 이스라엘 백성의 지도자로서 자기 정체성을 정립해야 하는 것이고, 이스라엘도 돕고 애굽 왕에게도 충성을 겸하여 할 수 있는 길은 전혀 없음을 모세도 알고 있었습니다. 모세는 고민했을 것입니다. 갈등했을 것입니다. 그 동안 자기를 길러준 양모인 바로의 딸 공주인 어머니의 사랑도 생각 안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자기를 향한 그 사랑과 헌신과 기대를 저버릴 때 얼마나 큰 아픔이 있을 것인가를 모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동족 이스라엘을 구원하라는 하나님의 부르심이 도저히 떨쳐낼 수 없는 확고한 부담으로 느꼈습니다. 이스라엘의 구원은 자기에게 맡겨진 거부할 수 없는 확고한 소명으로 그의 심령을 사로잡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모세는 마침내 하나님의 요청에 굴복하고 굳게 결단하고 일어나 동족 이스라엘을 구원하려고 그들의 일터로 찾아가서 자기 형제 이스라엘을 괴롭히던 애굽 관리자를 쳐서 죽여 모래에 파묻어버렸고 다음날에도 또 자기 동족을 찾아가 서로 싸우는 자들을 화해시키려고 나섰다가 악한 자였던 동족에게 밀침을 당하고 “누가 너를 재판장과 관리로 세웠느냐면서 어제는 애굽 사람을 죽이더니 오늘은 나를 죽이려 하느냐”고 따지면서 고발하러 달려감으로써 모세는 그 말을 듣고 발각된 것을 알고 급하게 도주하여 그 길로 미디안 광야로 가서 사십 년 동안을 무명 생활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모세가 동족 이스라엘을 구원하려고 결단한 이 일은 모든 하나님 백성들에게 반드시 찾아오게 되는 영적인 요청이기도 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을 믿고 섬길 것인가, 아니면 우상과 잡신을 섬길 것인가를 선택해야 하는 순간이 찾아옵니다. 성령께 순종할 것인가 아니면 육신의 요구를 순종할 것인가를 결정해야 하는 순간이 찾아옵니다.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일할 것인가, 아니면 세상에서의 영광을 추구하며 자기의 행복을 위하여 살 것인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결정적인 순간이 찾아오는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신앙은 이렇게 두 가지 길에서 한 가지를 결단하라는 요청 앞에서 하나님과 그의 뜻과 그의 부르심을 선택하는 것임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첫 사람 아담과 하와에게 사탄이 뱀을 빌어 찾아와서 선악을 알게 하는 실과를 보여주면서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더냐”고 물어보았습니다. 하와가 “동산 나무의 열매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동산 중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러자 뱀은 하와에게 이렇게 도전하기를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이 말을 듣고 하와와 그 남편 아담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를 것인가, 마귀의 말을 따를 것인가 결단해야 하는 도전에 직면한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 대신에 마귀의 말을 따름으로써 온 세상에 죄와 저주와 사망과 멸망을 가져오고 말았습니다.
아브라함도 나이 칠십 오 세의 늘그막에 하나님께서 그에게 나타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게 네게 보여줄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니라”(창세기 12:1~3)
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이 말씀을 들었을 때에 어디로 갈 지도 잘 모르지만 하나님의 이 약속의 말씀만 붙들고 정처 없이 떠날 것인가 아니면 그 동안 정들고 살았던 일가 친척과 친구들, 고향 산천과 자기의 생계를 유지하던 그 동안 삶의 터전인 갈대아 우르에 그냥 눌러 앉아서 남은 생애를 평안히 살 것인가를 양단간에 결단해야 했습니다.
모세의 후계자 여호수아도 훗날 임종을 앞두고 세겜 상수리 나무 아래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신앙적 결단을 엄숙하게 요청하였습니다.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조상들이 강 저쪽에서 섬기던 신들이든지 또는 너희가 거주하는 땅에 있는 아모리 족속의 신들이든지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여호수아 24:15)
엘리야 선지자 역시 갈멜산에 올라서 바알 선지자들 450명과 맞대결하기 위하여 모였을 때 구경하러 몰려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까이 나아가서 이렇게 양단간에 결단하도록 강력하게 요청한 바 있습니다.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둘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르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를지니라”
여호와 하나님과 바울 신 사이에서 이리 저리 머리를 쓰면서 궁리를 하면서 왔다 갔다 하는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면서, 엘리야 선지자가 단호하게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압박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침내 세상에 구주로 오신 우리 주님께서도 사람들에게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압박하는 말씀을 종종 하셨습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그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마태복음 7:13,14)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누가복음 16:13)
그러므로 우리도 신앙이란 바로 이렇게 둘 사이에서 선택하는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인식해야 할 것입니다.
모세는 그의 동족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선택하고 애굽의 우상과 잡신 숭배를 버렸습니다. 애굽의 궁중 생활의 안락함과 화려함과 평안함과 장래가 보장된 안정된 삶을 버리고, 비천하고 불안정하고 장래가 불안하고 도리어 고통스러운 하나님 백성과 함께 고난받는 삶을 택하였습니다. 모세는 애굽의 왕자로서 자기가 노력을 조금만 하면 얼마든지 얻을 수 있는 애굽의 최고의 권력의 자리까지 포기하고, 고난과 수치와 멸망의 길로 가는 자기 동족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건져내어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인도해들이는 사명을 떠안는 길을 선택했습니다. 그러한 결단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분명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히브리서 기록자인 사도는 성령으로 말씀하고 있었습니다. 그 누구라도 하나님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없이는 이런 결단을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도 오늘날 주 예수를 영접하는 결단을 하고 하나님 백성이 되겠다는 것에도 모세와 같은 결단이 분명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 중에 한 사람도 그냥 슬그머니 하나님 백성이 된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겠다는 확고한 결단의 순간 없이, 그냥 슬그머니 어느 틈엔가 하나님 백성이 되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우리 중에 있다면 그 사람은 한번쯤 자기의 구원이 진실한 것인가, 거듭난 하나님 백성인가 아닌가를 점검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비록 조용히 진리에 접하면서 이슬비처럼 주 예수를 믿게 되었든지, 아니면 어느날 천둥번개처럼 마음속에 놀라운 충격을 받고 180도 완전히 돌아서서 예수님을 전격적으로 영접하여 하나님 백성이 되었든지 둘 다 동일하게 자기가 예수님을 진심으로 자기 구주로 믿고 하나님 백성이 되겠다는 분명한 각오와 결단이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한 믿음에의 결단과 옛 사람과의 확고한 결별의 결단이 없다면 그 사람은 구원받은 사람이 아닐 수 있습니다. 단지 교회 다니는 종교인일 뿐, 하나님의 참 백성이 아직 아닐 수 있습니다.
우리가 진실한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순간에 우리가 작별을 고하게 되는 것들이 우리 삶 속에서 반드시 생겨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확실하게 하나님 백성이 되는 순간 모세가 자기의 옛 사람의 삶과 작별을 고한 것처럼, 우리도 분명히 대가를 지불합니다.
반드시 집안의 믿지 않는 사람들로부터 박해가 찾아옵니다. 거의 반드시 가족의 박해를 받게 되어 있습니다. 다정했던 세상 친구들로부터 따돌림과 비난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사람들과 고립되는 일을 겪게 되어 있습니다. 술과 담배와 춤추는 클럽 등 세상 즐거움을 버려야 하는 도전과 부딪히게 됩니다. 때로는 직장에서 불이익을 당하거나 상사의 공연한 미움을 당하기도 합니다. 경제적 어려움, 인간 관계의 장애를 만나게 되고, 사람들로부터 조용한 냉대를 받고 마음에 고립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뿐 아닙니다. 우리가 진실한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기고 불러주신 사명에 뜨겁게 헌신하는 가운데 도리어 믿음의 형제 자매들이라고 생각했던 이들로부터 시험드는 일을 만나기도 합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부르심에 헌신하여 목숨을 내놓고 동족 구원을 위하여 나섰을 때에 자기 동족들이 자기의 나서는 것을 보고 환영하며 드디어 자기들의 구원의 날이 왔고 그 일에 모세가 적임자라고 믿고 따라줄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도리어 그가 적극적으로 나섰을 때에 자기 동족 중에 한 사람이 도리어 그를 향하여 “누가 너를 우리의 관리와 재판관으로 세웠느냐? 네가 어제는 애굽 사람을 쳐죽인 것처럼 오늘은 또 나를 죽이려 하느냐?”면서 애굽 관리에게 밀고하여 그를 잡아 죽이려고 하는 배신을 당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진실하게 예수님을 믿고 세상 것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부르심에 헌신하며 뜨겁게 신앙 생활하면, 같은 예수님을 믿는다고 생각했던 사람들 중에 때로 “미쳤다”라는 말을 듣기도 하고, 모함하기도 하고, 너무 나댄다고 비아냥거리기도 하는 일을 겪기도 합니다. 육신의 사람들로부터 성령의 사람이 당하는 핍박을 교회 안에서도 당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어려움과 시련과 손해만 당하는 것은 아닙니다. 세상을 버리고 하나님을 택한 결단을 한 사람에게는 새롭게 얻어지는 것도 많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세상 것들의 하찮은 것들을 느끼고 자유함을 느낍니다. 사람들이 그토록 맹목적으로 추구하는 세상의 명예와 재물과 찬사들, 권력들이 얼마나 하찮은 것이며 잠시 잠깐의 것이며 꽃과 같이 속히 떨어지고 마는 것임을 절감합니다. 그리하여 그런 세상 사람들의 찬사와 맹목적인 우러름을 더 이상 연연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평온하며 하나님이 알아주는 것만으로 만족합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진실하게 만난 사람은 세상 것들이 다 허무함을 깊이 인식하고 하나님으로 만족합니다. 진리 안에서 자유함과 평온함이 있는 것입니다. 세상으로부터 자유롭고 권력으로부터 자유롭고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행복하고 만족함이 있습니다. 이것이 세상을 버리고 하나님을 믿고 거짓을 버리고 진리를 찾은 자의 행복입니다. 세상이 더 이상 아무런 매력이 없고 도리어 하나님의 말씀을 날마다 가까이 하며 그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과 즐거운 교제를 하루 하루 나누는 것이 가장 행복합니다.
물론 모세가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여 세상을 버리고 사명에 헌신하고자 결단하여 행동했을 때 그에게 대단한 하나님의 역사가 곧장 나타난 것은 아니었음을 우리가 주목합시다. 모세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이스라엘을 구원하려고 나섰으나 자기 백성이 깨닫지 못하여 오히려 그를 박해했습니다. 바로에게 모세가 애굽 관리인을 죽인 것을 고발해버렸습니다. 믿었던 동족에게 배신을 당하고 아무런 보호를 받지 못한 모세는 급하게 도망쳐서 미디안 광야로 숨어 사십 년 동안 아무도 모르는 변방에서 한낱 목자로, 나그네로 살아야 했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부르심에 헌신할 것을 결단할지라도 아무런 역사도 일어나지 않고 사명을 제대로 시작도 못하고 조용히 숨어 지내고 조용히 하나님을 믿고 숨어 지내는 은둔의 생활을 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전 단군교 교주였던 김해경 목사님은 한 때 도사 중에 우두머리로서 단군교를 창시하여 몇 천 명이 따르던 큰 무당이었습니다. 그는 기독교를 우리나라를 망하게 하는 서양 종교라고 생각하고 기독교를 박멸하는 데 앞장섰던 사람입니다. 그런 그에게 하나님의 영이 찾아와서 그가 섬기던 뱀신을 불태워 죽이고 하나님을 믿도록 강권적으로 역사해주셨습니다. 그래서 그가 변화되어 교회를 다니고 자기 신도들을 교회로 인도하여 예수님을 많이 믿게 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신학교를 다니고 목사가 되었을 때 그에게 옛날 충만했던 신통력과 각종 족집게 예언의 능력은 사라졌습니다. 그런데 그 마음에는 평온함과 고요함과 만족감이 찾아왔습니다. 자기에게 속하였고 열렬하게 따르던 수천 수백의 신도들을 다 떠나보내고 그냥 한 명의 신자로서 고요하게 하나님을 믿고 전도한 몇 명의 교우들과 더불어 교회를 다니는 것으로 만족하였던 것입니다.
이처럼 사도 바울도 부활의 주님을 만난 후 바로 활동을 시작했지만 예루살렘에 가서 사도들과 성도들에게 자기의 진심을 알렸지만 의심을 여전히 갖고 있고 예루살렘 사람들의 반대가 극심해서 그가 거의 몇 년 동안 고향 다소로 가서 은둔 생활을 하며 조용히 기다리는 시간을 가졌던 바 있습니다. 모세도 무려 40년 동안을 미디안 광야에서 아무도 모르는 무명의 사람으로 양이나 치면서 그렇게 세월을 보내 80세 노인이 되어서 하나님께서 다시 그를 불러서 40세 때에 주셨던 동족 구원의 사명을 다시 감당하도록 하셨습니다. 그 미디안 광야에서 지내던 40년 동안에 그는 하나님의 연단의 신학교에서 옛 사람의 모든 본성을 다 내려놓게 되는 훈련을 하며, 세속의 것들을 하나 둘씩 버려나가는 훈련을 했던 것입니다. 세상 영광이 꿈결과 같고 뜬 구름과 같은 것을 실감하면서, 자아를 하나씩 내려놓게 되었고, 하나님의 영과 교제하면서 하나님께서 아무런 불편함 없이 쓰실 수 있는 귀한 그릇으로 빚어져갔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을 믿는 결단을 내리고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결단을 내렸을 때에 반드시 큰 대가를 지불하는 것은 확실한 사실입니다. 그러나 큰 것들을 잃은 만큼 그만큼 하나님은 우리 안에 더 소중하고 영원하고 참된 것을 채워주십니다. 그리고 우리 속에 잠시 있다가 없어질 것에 대한 집착으로부터 자유로와지고 영원한 것들을 사모하며 맡겨주신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그릇으로 점점 빚어져가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삶에 하나님과 마귀 사이에, 세상과 하나님의 나라 사이에, 내 영광과 하나님 영광 사이에서 양간간에 결단해야 할 순간이 올진대, 우리는 기꺼이 내 편에서 손해보고 하나님과 하나님의 나라와 다른 사람들이 유익이 되는 편을 선택합시다. 내 행복이 좀 손해를 보고 다른 사람들이 더 행복하고 우리 주님이 더 기쁘신다면 기꺼이 모세처럼 자기를 포기하는 편을 택합시다. 그러할진대 하나님께서는 더 크고 더 소중하고 더 영원하고 더 참된 것으로 우리에게 도로 갚아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 귀한 결단 후에 찾아오는 침묵과 무명의 기다림 속에서도 끝까지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신앙과 겸손과 인내와 순종과 경건의 훈련을 계속해가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신앙의 결단과 인내는 반드시 장차 주님의 앞에서와 이 땅에서 우리 앞날에 반드시 복된 상으로 돌아올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