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쁘고 복된 성탄절이 우리들 앞으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미국이나 유럽보다 우리나라의 성탄절은 비교적 조용한것 같습니다. 특히 유럽에서는 이맘때쯤 크리스마스 마켓이 열려서 크리스마스 장식품과 전통적으로 크리스마스에 나누어 먹는 쿠키와 케잌 그리고 선물을 파는 마켓이 대도시 중심가에 열려 아름다운 색전등과 함께 크리스마스 캐롤 음악이 온 도시를 들뜨게 만드는 때 입니다. 그리고 성탄절과 연말과 연시를 거치면서 백화점과 레스토랑은 미국과 유럽쪽은 그야말로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 기록된 성탄절은 그리 기쁜날은 아니었습니다. 무엇보다 아기 예수가 태어난 유대땅은 로마의 잔인한 식민지 통치하에 허덕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로마는 국고 재정을 채우기 위해 팔레스타인과 그 인근 전 지역을 통해 식민지 통치하에 있는 사람들에 대한 인구조사를 실시했습니다. 물론, 과거의 인구조사 기록은 있었지만, 세수입을 늘리기 위해서는 그 지역의 update된 인구조사가 다시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래야만 인두세 (성인 남자 머리당 징수되는 세금)를 더 거두어 들일수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인구조사를 명령한 황제가 바로 아우구스투스 황제였고, 때는 주전 2년이라고 (눅 2:1-3) 로마의 역사는 기록이 증명하고 있습니다.
그당시 요셉과 마리아는 북쪽 갈릴리 나사렛 지역에서 살았고 (눅 2:4), 호적 재등록 하기위해 가야할 요셉의 조상(다윗왕)의 고향인 남쪽 베들레헴까지는 160킬로가 넘는 거리였습니다. 만삭된 약혼자를 나귀에 태우고, 걸어서 거의 1주일을 해가 지면 거친 광야에서 야영하면서 베들레헴까지 갔다는 사실은, 오늘날 우리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힘든 여정입니다. 성경의 기록은 이런 자세한 내용은 생략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 당시의 역사적 환경을 이해하지 않으면 예수님의 탄생의 엄청난 고난을 가늠하기 어렵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의 섭리가 아니었으면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북쪽 나사렛 지방에서 살던 요셉과 정혼한 마리아는 약혼자 요셉이 다윗의 후손이라 본적이 베들레헴이었고, 만삭이 된 마리아를 나귀에 태우고 나사렛에서 예루살렘/베들레헴까지 160킬로미터의 장거리를 힘겹게 걸어와서 호적을 재등록하려고 고향에 왔지만, 작은 마을 베들레헴은 호적등록을 하러온 외지 사람들로 초만원이었습니다. 당시 유대인의 관습에 의하면 딸이 초경(대략 여자 나이 만 14세 전후)을 지나고 1-2년 후에는 결혼을 시켰습니다. 물론 당시의 결혼은 양가 부모들의 합의하에 이루어지는 혼사였습니다. 그렇게 보면 만삭이 된 마리아는 나이가 16-18세 정도로 추정되며, 요셉은 20세 전후로 학자들은 추정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과거에는 딸아이 나이가 16-18세가 되면 시집을 보냈으니까, 마리아의 나이가 10대 후반이라고 해서 그리 놀랄일은 아닙니다.
그당시 사람들은 동굴에서 많이 살았는데, 요셉과 마리아가 묵을려고 했던 여관도 동굴 여관이었는에 이미 빈방이 없었습니다. 호적 등록을 위해 유대 각 지방에서 베들레헴으로 몰려든 사람들 때문에 작은 마을 베들레헴은 갑자기 외지 사람들로 붐볐습니다. 출산을 앞둔 산모를 데리고 온 요셉에게는 난감하기 그지없는 일 이었습니다. 동굴 아래에는 주인 가족이 살고, 옆에는 양과 염소를 기르는 마굿간이 있는 형태가 그당시 베들레헴 사람들의 일반 주택의 형태였습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신이 말구유간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여기까지가 우리가 알고있던 크리스마스 스토리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잠시 예수님 탄생 당시 유대의 정치적 상황과 종교적 상황을 들여다 볼 필요가 있습니다. 유대의 왕은 헤롯대왕 이었는데, 이 사람은 출신이 이두메 (에돔)이며 혈통적으로는 아랍인입니다.헤롯에 대한 백성들의 여론은 최악이었습니다. 성격이 괴팍하고, 교활하며, 통풍부터 성병으로 인한 피부병까지 거의 움직이는 종합병원 수준이었습니다. 지독한 통풍 때문에 신발은 커녕, 발까지 끌리는 왕의 도포를 입지 못하고, 도포 자락을 싹뚝 잘라 무릎 중간쯤 오는, 맨발의, 매우 안쓰러운 모습을 한 왕 입니다. 여기에다 성병때문에 생긴 갖가지 피부병으로 인해 유대인 왕으로서의 몰골이 말이 아니었습니다.
헤롯대왕은 13명의 아내로 부터 5명의 아들을 얻었습니다. 그 아들들 이름은 아켈라오, 안디바, 그리고 빌립이었는데, 헤롯 아켈라오, 헤롯 안디바, 헤롯 빌립으로 불리웠습니다. 성경에는 이들을 분봉왕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치 헤롯 왕조와 같은 개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 그 손자는 헤롯 아그립바 1세와 증손자 헤롯 아그립바 2세가 있는데 복음서와 사도행전에서는 이들을 뭉뚱거려 헤롯이라고 기록하고 있어서 매우 혼동하기 쉬운 상황입니다. 국내 정치에서 백성들의 지지가 최악인 상황에서 헤롯대왕은 로마 황제와 거의 굴욕적인 관계와, 유대 지방을 다스리는 로마 총독에게 비굴하리만큼 아첨하면서 자신의 왕좌를 간신히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종교계의 유대교 지도자들은 정계의 귀족들과 결탁하여 상부상조하며 백성들을 억압하며 고혈을 짜내고 있었습니다. 영적으로는 말라기 선지자 이후 400년 동안 하나님으로 부터 계시가 중단되어 신정국가인 이스라엘의 영성이 말할 수 없이 피폐해졌습니다. 신정국가인 이스라엘의 종교는 형식만 유대교를 지향할 뿐, 영적으로는 거의 죽은 종교나 다름 없었습니다.
사도행전 5:36을 보면,”이전에 드다 Thedeus가 일어나 스스로 선전하매 사람이 약 사백 명이나 따르더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같이 곳곳에서 거짓 선지자들이 출몰하고, 여기저기서 자칭 메시아들이 나타나 나라를 로마의 학정으로 부터 구하겠다고 민심을 자극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혈열 애국 청년들은 레지스탕스를 조직하여 심심찮게 로마 군인들에게 반란을 일으키고 있었습니다. 이들 청년들은 ‘시카리’ 라고 하는 반달 형태의 단검을 품에 숨기고 유월절 같은 대형 종교행사에 참석하다가, 민중들의 봉기를 사전에 진압하고자 배치되어 있는 로마 군인들의 가슴을 단검으로 찌르고 재빠르게 군중들 속으로 숨어들어가는 일이 비일비재 했습니다.
또 제사장들은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상인들과 뒷거래 하면서 자신들의 배를 불리고 정치인들에게 정치자금을 제공하면서 상부상조하는 공생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주후 70년에 예루살렘 성전이 로마의 티투스Titus 장군에 의해 초토화 되면서 “돌위에 돌 하나 남지 않는" 완전한 성전 파괴가 예수님의 예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마24:2). 이로 인해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는 지도상에서 완전히 지워졌으며, 유대인들은 이스라엘 인근 나라뿐만 아니라 멀리는 터키나 현재의 동부 유럽까지 고달픈 피난길에 올랐습니다.
그런 유대인들은 유월절, 초막절, 같은 종교적 절기가 되면 전국에서, 그리고 중동 지방을 중심으로 지중해 지방 전역에서 제사를 드리러 예루살렘 성전에 모입니다. 저들은 제사에 바칠 제물, 즉 양이나 염소, 비둘기 같은 동물들을 성전 앞에서 사서 제물로 바쳤습니다. 그러다가보니 자기들이 가져온 자국 화폐를 유대의 화폐인 셰켈로 환전해야만 했습니다. 자연스럽게 환전상 (돈 바꾸는 사람들)이 성전 주변에 문전성시를 이루었지요. 그때 상황은 성전 주변에 환전상을 비롯해서 제물로 바쳐질 양, 염소, 비둘기 등 동물의 울음소리로 시끄러운 소음이 심각할 정도였습니다. 처음에는 상인들은 성전 담벼락 밖에서 환전하고 양과 염소와 비둘기를 팔다가 제사장들에게 뒷돈을 쥐어주면서 성전 바깥 마당까지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의 묵인하게 가능했습니다. 유대인들의 뛰어난 상술이 어디에 가겠습니까? 후일에 예수님께서 분노하신 이유가 여기에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눈에는 “만민이 기도하는 하나님의 집을 강도의 굴혈로 만든것”으로 비춰졌던 것입니다 (마 21:13).
아기 예수의 탄생은 이미 구약성경에서 탄생의 장소까지 정확하게 예고되어 있었지만, 눈먼 소경과 같은 유대교 지도자들은 아기 예수가 베들레헴에서 태어날 때까지 까맣게 모르고 있었습니다. 이 소식은 오히려 동방박사 (지금의 이란지방의 천문학을 전공한 조로아스터교 고위 지도자들로 추정됨)들에 의해 드러납니다. 저들이 별의 움직임을 관찰한 결과, 왕의 탄생을 예고하는 별이라는 확신을 갖고, 이란에서 예루살렘까지 카르파티안 사막을 횡단하여 약 1600킬로미터를 건너와 헤롯대왕을 알현한 자리에서 “유대의 왕으로 태어난 아기를 만나기 위해서 왔소이다"라는 말에 헤롯대왕은 거의 숨이 넘어갈뻔 했습니다.
지금 자신이 유대인 왕으로 이렇게 시퍼렇게 살아있는데, 또 유대의 왕이 될 아기가 태어나다니? 백성들의 지지도가 최악으로 치닫고 있어서 자신의 왕좌가 불안하기만 한데 또 경쟁자가 태어났다는 것은, 악의 화신인 헤롯대왕으로서는 불안하기 그지없는 일 입니다.
그런데 동방박사들의 말을 농담으로 받아들일수 없었던 것은, 그들의 위엄을 나타내는 복장과, 가져온 선물과, 대동한 신하들의 규모를 보고 헤롯대왕은 압도당하지 않을 수 없었고, 저들의 말을 가볍게 들을 수 없었습니다.
불안감을 이기지 못한 헤롯대왕은 서기관들을 불러 메시아가 어디에서 태어날지에 대한 예언을 확인했습니다. 헤롯대왕 앞에 불려간 서기관들은 지체하지 않고, “유대땅 베들레헴" 이라고 미가서 5장 2절 말씀을 인용해서 확인시켜 주었습니다. 이제 더 주저할수 없을 만큼 헤롯대왕은 절박해졌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결론은 하나였습니다. 예루살렘과 베들레헴을 포함한 인근 촌락에서 2살 이하 사내아이들을 모조리 죽이는 방법 외에는 자신을 짓누르는 공포감에서 벗어날 길이 없었습니다. 궁정수비대를 (이들은 기마 용병으로서 시리아에서 차출된 특수부대 출신이었고, 잔인하기가 이를데 없었습니다.) 풀어 전투에서만 사용하는 큰 칼로 무장하여 아기 울음소리가 들리는 민가를 습격하게 했습니다. 서슬 시퍼런 왕궁의 수비대들은 집집마다 수소문하고, 아기 울음소리가 들리는 집을 박차고 들어가서 가차없이 어린 사내아이의 목을 내리쳤습니다. 한마디로 수도 예루살렘과 인근 촌락에서는 피바람이 불었고 통곡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렸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이러한 유아 살해 사건이 대대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살벌한 현장에서 요셉과 마리아는 백주 대낮에 생후 8일된 아기 예수를 안고 나귀를 타고 죽음의 길인 베들레헴에서 예루살렘까지 걸어서 갔다는 사실입니다. 그 거리는 대략 42킬로미터 정도 됩니다. 그리고 예루살렘 성전에서 모세의 율법(창 17:10-12)에 따라 아기 예수 (생후 8일)에게 제사장은 평온한 상태에서 할례를 베풀었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 성전에서 헤롯궁까지는 불과 600미터가 채 되지 않습니다. 한마디로 유대인의 왕으로 태어난 아기를 죽이려고 혈안이 된 헤롯대왕의 코 앞에서 그 아기의 아버지 요셉과 어머니 마리아는 태연히 아기 예수를 제사장에게 맡겨 할례를 받게 하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이 모든 정황을 생각해보면, 하나님의 특별하신 간섭, 섭리 외에는 설명할 길이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추운 겨울, 누추한 말 구유간에서 태어난 하나님의 아들, 우리의 구세주이신 주님은 잔인한 헤롯왕의 유아 학살 사건이 벌어지고 있는 현장에서 모세오경의 율법에 따라 할례를 받으심으로 율법의 요구를 충족시키셨고, 완전한 인간, 완전한 신의 모습을 갖추신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첫번 크리스마스는 이렇게 살벌하고 시퍼런 칼날이 번뜩이는 죽음이 눈 앞에 있는 상황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금년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우리가 조용히 묵상해야 할 내용입니다.
MERRY CHRISTMAS TO YOU AL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