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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뮤즈는 무엇을 먹고 사는가 | ||||||||||||||||||||||||
[진수미의 주말 영화] 박헌수 감독의 <완벽한 파트너>, 88만원 세대 뮤즈들에게 부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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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0월 스티브 잡스가 가고, 같은 달 공식 전기가 발매되었다. 그럼에도 그의 성과를 둘러싼 논란은 좀 더 길어질 전망이다. 자서전에서 아이작스는 그를 “창의성과 예술성을 기술과 결합시켜 세계를 바꾼 천재”라고 평가했지만, <아웃라이어>의 작가 글래드웰은 그가 “혁신이 아닌 개량과 편집의 천재, 트위커(tweaker)”였다고 지적했다. 엇갈린 평가의 배경에는 창조 행위에 대한 반(反)낭만화 경향이 자리한다. 낭만주의 이전에, 창조는 무에서 유를 만드는 것을 의미했다. 이는 신의 권능으로만 가능한 행위였다. 낭만주의에 와서야 예술적 행위가 창조 작업과 결부되었고, 예술가는 신비한 능력을 지닌, 신에 버금가는 존재로 자리하게 되었다. 하지만 현대의 예술가는 전문적인 직업인으로 기능하고 있다. 예술가의 혹은 창조 행위의 탈(脫)낭만적 초상이 일반화되는 것이다.
창조의 샘이 메마르기 시작하는 예술가의 호구지책은, 자고로 '교육업'이 되겠다. 준석은 자신이 몸담고 있는 시나리오 스쿨의 수강생 연희(윤채이)에게, 희숙은 요리학원의 보조 막내 민수(김산호)에게 눈길을 주기 시작한다. 사제 관계, 스무 살 이상의 나이 차이는 결코 이들의 ‘넘사벽’이 아니다. 연애에 불이 붙자마자 어린 연인들은 중년 예술가의 뮤즈 노릇을 톡톡히 하기 시작한다. 문제는 이들도 욕망이 있고 욕망의 자각도가 예전보다 훨씬 높아졌다는 사실. 현대는 괴테와의 서신 교환으로 불멸의 이름을 얻고자 했던 베티나 폰 아르하임의 시대도, 로댕의 정부로 고통스러운 삶을 살았던 카미유 클로델의 시대도 아닌 것이다.
영화는 이 커플들의 욕망을 두 갈래로 다룬다. 첫째, 육체를 전시함으로써 ‘19금 섹시’ 코미디를 표방하는 것이다. 이 부분은 연희 역의 신인 윤채이를 통해 주로 성취된다. 윤채이를 훑는 카메라 워킹은 <경멸>의 브리지트 바르도 수평 트래킹 숏을 노골적으로 연상시킨다. 하체의 볼륨감이 특히 눈부신 이 여배우는 <너에게 나를 보낸다>의 정선경을 잇는, 엉덩이 강조 마케팅의 수혜자가 될 전망이다. 여기서 김산호의 활약이 다소 저조하다는 점(눈웃음이 매력적이고 투정부리는 돌출 입이 사랑스러운 이 남자배우의 책임이 아니라는 사실은 밝혀야겠다)은 여성 관객으로서 아쉬운 측면이나, 점잖은(?) 체면에, 이쯤에서 삼가하기로 한다. 둘째, 세대론적 관점에서 성공한 기성 작가와 그의 어린 뮤즈인 예술가 지망생 간의 창작을 둘러싼 갈등을 ‘로맨틱’ 코미디로 그리는 것이다. “예술은 텃세”라는 슬픈 대사에 이 모든 정황이 응축되어 있다. 예술이 텃세라면, 그것은 더 이상 ‘예술’이 아니어야 한다. 그러나 이는 탈낭만화가 무자비하게 진행되는 시대에 어울리는 발언이 아니다. <88만원 세대>에서 우석훈, 박권일은 20대 예술가가 비정규직 중의 비정규직으로 내몰려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
<완벽한 파트너>의 햇병아리 예술가들도 상황이 다르지 않다. 연희는 시나리오 공모전에 당선 못한 습작생이고, 민수는 요리 보조 막내로 갓 취업의 관문을 통과한 처지이다. 포식자에게 뜯어 먹히기 좋은 생태적 지위에 있는 것이다. 이들이 세대 착취 구조 내 피식자 지위에서 벗어나기 위해 선택한 길은 ‘적과의 동침’이다. 영화는 이러한 사실을 애써 감추려고 하지 않는다. 하지만 은밀한 배움의 장인 ‘야학’의 내용이 대낮의 투명한 햇살 아래 공개되기는 어려운 것. 결국 이 88만원 세대의 뮤즈들은 예술적 창의성을 세대 간 경쟁자에게 착취당하는 구조로 빨려 들어간다. 흥미로운 것은 세대 내 적들, 즉 같은 세대의 경쟁자 역시 이러한 관계를 선망하고 질시한다는 사실이다. 매몰차게 말한다면, 어린 뮤즈의 대체 자원은 세상에 널리고 널렸다는 것. 이러한 갈등을 봉합하는 방식이 섬세하지 못하다는 점이 못내 아쉽다. 하지만 19금 로맨틱 섹시 코미디로서 <완벽한 파트너>는 합격선을 넘었다고 본다. 욕망의 칵테일은 나쁜 배합이 아니고 웃음의 요소도 적절히 배치되어 있다. 영화는 이들 싱글 남녀의 관계 지형도가 궁금한 이들을 위해 네 명이 한자리에 모이는 깜짝쇼를 마련하는데, 여기서부터는 그야말로 아침드라마의 영역이다. <완벽한 파트너>는 딱 이 지점에서 멈추고 관객들은 실소하게 된다. 여러 모로 영리한 영화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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