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은 나의 그림자였다.
장 폴 사르트르가 “인생은 B(Birth)와 D(Death) 사이에 C(Choice) 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C(Choice)를 C(Challenge)라고 생각하며 산 사람입니다.
선택 즉 만남을 통해 한 평생을 사는 인간, 결국은 자기가 태어난 곳, 태어난 때 말고는
모두 자기의 도전에 의해 살고 있습니다.
저는 그런 의미에서 제가 태어난 곳이나 태어난 때 만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느낀 것은 행운이었다 싶습니다.
감히 옮겨 적기 민망하지만 일본 내쇼날 파나소닉 창업자이신 마쓰시다 고노스케 씨께서
크게 성공하신 후 성공비결을 어느 직원이 물으니까
“첫째, 가난하게 태어난 것. 둘째, 배우지 못했다는 것. 셋째, 매우 왜소(병약)하게 태어난 것” 이라 했다 않은가!
그렇게 태어나서 역으로 극복하며 살았기에 성공하셨다는 말이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은 살면서 자기가 주어진 운명을 도전이라는 삶으로 살아 성공 여하가 결정되는 것이라 믿습니다.
제가 태어난 곳은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참으로 깊은 산골이었습니다.
시골 촌뜨기 인 셈이지요. 그래서 어렸을 때 모두가 힘든 삶이었지요.
또한 태어난 때는 일제 강점기였지만 제가 여덟 살 때 일본이 패망하여
일제라는 강압의 세월은 느끼지 못하고 살은 것이었습니다.
이런 삶들이 이제 8 순을 넘긴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행운이었구나 싶습니다.
한 가지 더 행운이 있었다면 우리 부모님 6 남매를 낳으셨다가
4 남매를 두 살도 안 되어 하늘나라로 보내고 두 남매만 남기다 보니까
이것들이 살까 아니면 중간에 또 어떻게 되지 않나 싶어
1년이 지난 후에야 출생 신고를 해주신 것이 살아온 삶 되돌아보면 이 또한 행운이었다 싶습니다.
그런데 제가 지금부터 하려는 이야기는 나의 그림자 가난에 대해 짚고 넘어가려 합니다.
빛이 있으면 꼭 나타나는 그림자처럼 저에게 가난은 아마 제 목숨 다 할 때까지 같이 가려 나 봅니다.
그림자는 빛이 있어야 나타나지만 저에게 가난은 한 평생 같이한 유일한 그림자입니다.
우리 부모님 17세 때 동갑내기로 만나셔서 큰 댁에서 살림을 시작하셨습니다.
그때 다 그랬지만 우리 아버지는 형제 분이셨는데 장손 이신 큰아버지만 위하던 때라
아버지는 머슴이나 다름없는 생활을 하신 거였지요.
그렇게 사시다가 분가 하여 나오신 집은 제가 네 다섯 살 때 살던 집이었는데
동네에서 가장 초라한 집이었습니다. 그러나 부모님은 이제 내 집에서 사신다는 큰 기쁨이었습니다.
집은 거의 쓰러져 가는 집이었기에 대나무 쪼개어 대각선 모양으로 만든 문짝은 제대로 닫히지도 안 했고,
방바닥은 멍석이 깔린 그런 집이었습니다.
하루는 어머님이 한글을 배우시러 이웃집에 가셨는데 잠을 깬 제가 어머님을 찾다가 계시지 않자
멍석에 발을 비벼 피가 나 우는 바람에 어머님이 단숨에 뛰어오셔 달래시느라 배우던 글도 못 배우셔서
낫 놓고 기역 자도 모르시는 어머니가 되시게 한 것이 제 한 평생 불효였다 하며 가슴을 치는 저입니다.
어머니 아버지는 그때부터 죽도록 일을 하셨지요.
머슴처럼 사시다가 이제 독립해서 사셔야 하셨으니 해가 뜨기 전부터 일어나셔 달이 올라오는 줄도
모르고 온갖 일을 하셨고 그 결과 몇 년 만에 새집으로 이사하셨습니다.
그때가 제가 8살 때인 것 같습니다.
뼈를 깎는 고통으로 일을 하셔 가난을 벗어나려 하신 것이었습니다.
제가 어렸지만 부모님 고생하시던 모습이 지금도 선합니다.
아버지는 지게가 어깨에서 벗어난 적이 없었고 어머니는 낮에 그처럼 힘든 온갖 일을 다 하시고도
밤이면 삯 바느질을 하시느라 밤을 새우시던 기억은 결코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해서 9살 때 즉 해방이 된 다음 해 1946년 8월 어느 날로 기억됩니다.
동네에 살던 심 순희 라는 누나가 저를 학교에 보내라고 어머님을 설득하러 왔습니다.
어머님은 하루 종일 일 하시고 오셔 저녁을 준비하고 계셨는데 누나의 말을 듣고 놀라셨습니다.
어머님은 9살이나 된 제가 아기로 보이셨으니 까요.
행여 어쩔세라 모두가 다니던 서당에도 안 보냈는데
집에서 15 리나 되는 학교에 보내라니 놀랠 수밖에 없으셨지요.
그러나 해방 된 이듬해 그간 일제 강점기라 학교에 보내지 안했던 아이들 모두를
학교에 보내라는 캠페인이 전개되던 해라 어머님도 허락하셨습니다.
하지만 어머님에게는 제가 아기였고 놓으면 금방이라도 무슨 일이 생기시는 것으로 걱정이 많으셨습니다.
그러나 심 순희 누나가 업고 다니겠다고 약속까지 하며 받아낸 허락이었습니다.
그러나 먹고 살기 힘든 때 학교 가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때 가난으로 고생한 이야기를 하면 저와 연배가 아닌 사람은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 이야기’라고 치부 하실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사실입니다.
입고 다닌 옷은 하얀 무명을 사다가 검은 물을 드려 아래는 핫바지로 해 입혔고
윗도리는 하얀 저고리를 입고 다녔으며 검은 고무신만 신어도 감지덕지 하던 시절이었습니다.
면에 학교가 하나밖에 없었고 한 반(班)에 칠팔십 명이었으며
아이들은 굶주림에 지쳐 얼굴은 노랬고 부운 얼굴들이었지요.
월사금을 못 내어 집에 돌려보내 부모님을 애태우던 시절 누가 알까요.
공책이 없어 하얀 종이 한 장 사다가 접고 접어 32장이 되면 실로 꿰매 노트를 만들고
자로 줄을 쳐서 만든 노트 생각이나 들겠습니까?
지우개는 검은 고무신 조각 내어 휘발유에 담갔다가 쓰고요.
책가방이 무엇입니까? 보자기에 책을 싸서 짊어지고 다녔고
비가 오면 종이 우산이면 천운이었고 도롱이 삿갓을 쓰고 다니기도 했는 걸요.
그런 때가 언제 있었느냐고요?.
1학년 입학하러 가는데 그때는 그랬습니다. 간단한 질문을 하고 답을 하였지요.
그런데 제가 8 살이 될 때까지 제 이름은 장영(場永)이었습니다.
어머니가 마당 두엄 자리 있는 곳에서 저를 낳으셔서 마당 장(場)자하고 길 영(永)자 하고 말입니다.
다르게 말하면 마당쇠라는 의미였지요.
하도 자식들이 쉽게 죽으니까 이름을 거칠게 지어야 오래 산다 해서 그랬답니다.
그런데 8 살 때까지 장영 이로 만 불리던 제가 갑자기 태영 이라 하라니 얼마나 어려웠겠습니까?
면접 하러 들어가면서 이름을 외우느라 태영이 태영이 하고 중얼거리며 들어간 기억이 새롭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학교생활은 참으로 힘들었습니다.
15 리나 되니 귀엽게 만 자란 제가 얼마나 힘든 일이었겠습니까?
오고 가는 것도 힘든데 배마저 굶고 사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오늘 날처럼 급식을 주는 지금 아이들이 이 이야기를 믿겠습니까?
그때는 굶고 다니는 학생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쌀밥은 고사하고 보리밥도 제대로 먹지 못했던 학생이 다수였던 시절이니 말입니다.
그래서 보릿고개라는 말이 전부인 시절이었으니 말입니다.
저도 학교 갈 때면 고구마 한두 개 가지고 가서 산 바위 밑이나 나무 뒤에 숨겨 놓았다가 오면서 먹었고,
벼 이삭 팰 때면 벼 이삭 뽑아 까먹으면서 오고, 칡 캐서 먹고, 콩 보리 구워 먹고,
소나무 새가지 꺾어서 껍질 벗겨내고 훑어 먹고, 산 딸기 머루 다래 따 먹고
하여튼 먹을 수 있는 것은 오며 가며 먹고 살던 시절 아련합니다.
또한 교복 입은 학생이 몇 명이나 있었나요.
김 성수 라는 학생이 교복을 입었는데 졸업 사진 찍느라 교복을 빌려서
위에는 교복이요 아래는 핫바지 차림 상상이나 되십니까?
졸업 앨범 살 돈이 없어 앨범도 못 샀는데 8 순이 다 되어 동창인 송 재만이란 친구가
앨범 사진을 스캔 해서 보내주었기에 사진 보며 울기도 했습니다.
여행 한 번도 따라가지 못 했습니다.
하여간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삶 어떻게 견디며 살아왔나 싶습니다.
참으로 그림자처럼 제 곁을 결코 떠나지 안 했던 가난
지금도 곧 노인 4고에서 또 겪게 될 고통 생각하면 인생은 고해 다는 말 맞다 싶습니다.
하지만 제가 가난했기에 가난 벗어나려 죽도록 열심히 살아온 내 삶은 다행이라 싶고,
나이마저 한 살 늦게 된 것이 다행이었구나 싶습니다.
그 혜택으로 몇년을 더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으니까요.
이제 그렇게 어렵게 사시던 부모님은 이미 하늘에 살림 차리신지 오래 되었고,
저도 이제 약속된 삶이 없이 언제 떠날지 모르는 나이 되고 보니
제가 가난과 함께 살았던 그 고향 그 삶이 그리우며,
같이 놀던 옛 친구들 보고파 ‘내 고향으로 날 보내 주’ 해 보지만
모두 이미 가고 없으니 그리워라 그때 그 삶 이여...
아 불러봅니다.
미국 어는 흑인의 영가(靈歌) 민요 "내 고향으로 날 보내 주" 를....
빌 게이츠가 그랬지요.
"태어나서 가난한 건 당신의 잘못이 아니지만 죽을 때도 가난한 건 당신의 잘못이다."
또 다른 말을 빌려 위로 삼으렵니다.
"그림자를 보지 마라. 몸을 돌려 태양을 바라 보라."
<끝>
첫댓글 자전적 소설을 한번 써서 남겨 보시지요.
이룻 교장선생님처럼 글 솜씨가 좋으시면 생각해 볼 수 있겠지만
한 가지 이루지 못한 것이 저를 붙듭니다.
다만 저의 좌우명 "내 가슴속에는 피곤한 심장이 있다. 그러나 아무에게도 해롭게 하지 않을 착한 양심이 있다."
헬렌 켈러가 남긴 말에
"세상은 온통 고통으로 가득하지만 그 고통을 이겨가며 살아가는 사람으로도 가득하다." 변명의 답이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