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산위 양지바른 곳에 진달래가 활짝 웃고 있습니다. 3월도 지나 4월을 열면서 드디어 여기저기 봄이 왔음을 알리고 있습니다. 이제 겨울 점퍼도 벗어야겠다 싶기도 한데 아직 아침 공기가 머뭇거리게 합니다. 조금 땀이 나더라도 추운 것보다는 낫지 싶어서 그냥 입고 집을 나섭니다. 다음 주를 지나면 정말 벗어버려야겠다, 생각은 하고 있습니다. 아파트 현관을 나서면서 얼굴에 확 닿아오는 바람은 ‘아직’이야 하고 소리칩니다. 그래봤자다, 며칠 후에는 벗을 거야 마음으로 소리칩니다. 하기야 4월에도 눈바람 날린 적이 있기는 합니다. 함부로 객기부리다 감기라도 걸리면 안 됩니다.
손녀가 운전면허를 취득하였습니다. 모두 순탄하게 잘 나가다가 주행에서만 두 번째로 통과되었습니다. 그래도 잘했다 싶습니다. 내 경우 주행만 다섯 번씩을 했으니 말입니다. 요즘은 대부분 집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서 시험을 치르지만 저는 이 부천에서 인천 송도 끝으로 가서 2종 면허시험을 치렀습니다. 다섯 번이나 다녀왔습니다. 그리고 몇 년 지나 이 부천에서 의정부까지 가서 1종 면허시험을 치렀습니다. 역시 다섯 번을 다녀왔습니다. 그 날은 하루 일과가 그것으로 끝이었습니다. 요즘은 시험 통과하자 면허증이 바로 나오나봅니다. 세상, 이렇게 편하고 빨라졌다니까요. 하기야 또 ‘라떼’ 이야기는 할 필요가 없지요. ㅋㅋ
4월, 정치권은 여전히 시끄럽고 세상은 아직 전쟁 중이고, 역시나 잔인한 달이 되려나? 그래도 올해는 벚꽃 구경은 가능하답니다. 멀리 갈 것까지도 없습니다. 우리 동네가 최고입니다. 모두 둘러보며 봄을 즐기기 바랍니다. 그리고 건강하고 행복한 4월을 빕니다. *)*
2022년 4월 2일 김종우 목사 드림
“네 샘으로 복되게 하라 네가 젊어서 취한 아내를 즐거워하라 그는 사랑스러운 암사슴 같고 아름다운 암노루 같으니 너는 그 품을 항상 족하게 여기며 그 사랑을 항상 연모하라” (잠언 5 :18 - 19)
<스펜서>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아들을 둘이나 낳았습니다. 처음에는 서로 좋아서 결혼하지 않았을까요? 왕자를 둘이나 낳아주었으니 당연히 그만한 대접을 받을 만도 하지 않았나요? 그런데 왜? 그 십년 사이에 멀어졌을까요? 하기야 젊고 예쁜 아내라는 인식은 남편이 아닌 다른 사람의 눈에만 그럴 뿐입니다. 이미 긴 시간 함께 살아온 부부라면 그다지 감동을 줄 수 있는 사이는 아닐 것입니다. 대부분 그렇지만 처음의 감동이란 얼마간의 시간이 흐르면 그냥 일상이 되어버립니다. 아무리 부부라고 해도, 아니 부부이기에 더욱 서로가 새로운 감동을 만들면서 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아주 긴 시간을 함께 가야 하기 때문이지요. 하루 이틀 살고 그만둘 사이가 아닙니다.
왕족이고 왕가라고 해도 사람은 그냥 사람입니다. 의식주 일상은 그대로입니다. 다만 갖추는 종류가 다를 뿐이지요. 좀 더 화려한 집에서 살고, 우아한 옷을 입고, 보다 좋고 많은 음식을 먹는다는 정도의 차이입니다. 물론 가지고 누리는 것들도 다릅니다. 소위 편하고 화려하고 좋은 것들을 많이 가질 수 있고 누릴 수 있습니다. 그래봐야 한 백년을 가져보겠습니까? 하기야 백년 아니라 하루마저 길 수도 짧을 수도 있습니다. 백년이 아니라 지구의 역사만큼이나 오래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들 이렇게도 아우성치고 쌈박질하고 아귀다툼도 마다하지 않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한 평생이 편안하게 간다는 것이 결코 쉽지 않음을 우리 모두 알고 있습니다.
왕가의 삶을 자세히는 모릅니다. 짐작으로 매우 격식과 규율이 엄하리라는 것만 알고 있습니다. 듣고 보는 것과 직접 당하는 것과는 매우 다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소설 ‘왕자와 거지’에서도 어느 날 갑자기 왕자가 된 거지가 왕자 노릇을 해야 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한 마디로 미칠 지경입니다. 여태 ‘마음대로’ 살아왔는데 이제는 전혀 달라집니다. 간단히 말해서 여태 있던 ‘나’는 없어져야 합니다. 왕이 되어야 할 사람으로 바뀌어야 하는 것입니다. 어쩌면 차라리 감옥에 들어가는 것이 낫겠다 싶겠지요. 비록 갇혀 있어도 내 맘대로 생각이라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생각부터 바꾸어야 합니다. 나를 버리라는 것입니다. ‘내’가 아니라 ‘왕자’입니다.
일례로 입이 벌어질 지경입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요? 식사 시간에 입을 옷, 식사 후 차 마실 시간에 입을 옷이 달라야 합니다. 정말 그랬나 싶은 일이 있습니다. 크리스마스 잔치에 모입니다. 하루 전 들어갈 때 몸무게를 달아둡니다. 사흘 후 떠날 때 몸무게를 확인한답니다. 2 - 3kg은 무게가 불어있어야 한다나요? 맛있게 잘 먹었다는 증표를 보여주어야 한답니다. 세상에! 그런 규율도 있나요? 말인즉 ‘그냥 재미로’ 하는 일이랍니다. 거참! 우리 세상에서는 꿈도 꾸지 못할 일입니다. 조용히 음식이 운반되고 가만히들 앉아서 가져다주는 음식을 조용히 먹습니다. 그런데 왜 그 식사자리에 긴장감이 돌고 있지요? 식사도 업무인가요? 그곳에서는 그런가봅니다.
하기는 처음에는 무슨 군사훈련이 있나보다 생각했습니다. 군용차들이 들어갑니다. 군인들이 내려서 규율에 맞게 착착 움직여 탄약통(?)들을 나릅니다. 그렇게밖에 안 보입니다. 그런데 그것들이 식당으로 들어갑니다. 군인들이 군복을 벗고 조리사복들을 입습니다. 그리고 탄약통을 하나씩 엽니다. 무기가 아니라 음식이 나옵니다. 세상에, 놀랐잖아요. 아마도 파파라치들이 따라오지 못하도록 조치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군사훈련이니 따라붙을 이유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어찌어찌 알고 멀리서 카메라를 들이밀며 기회를 노리고들 있답니다. 그러니 아무래도 신경이 써질 것입니다. 카메라 성능도 대단히 정밀하고 고도로 발달되어 세미한 것까지도 담을 수 있다는군요.
갓 스물에 결혼했습니다. 아들 둘을 낳았습니다. 말이 통하는 친구라고 해야 그 아들 둘과 시중을 들어주는 ‘매기’뿐입니다. 모두가 다 규율에 충직합니다. 지키는 사람들과 시중을 드는 사람들 모두가 한결 같습니다. 말이 좀 통하는 사람은 고작 이 세 사람인데 그마저 만나고 싶을 때 맘대로 가까이 할 수도 없습니다. 매사가 마치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듯 노출되는 느낌입니다. ‘다이애나’의 입장에서는 숨이 막힐 지경입니다. 그런 속에서 버티며 살아갑니다. 그래도 믿고 의지할 수 있는 남편, 왕세자마저 자기와 거리가 멀어집니다. 다른 여자를 생각하고 아마 밀회도 가지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문제에 대해 가족 누구도 말해주는 사람은 없습니다. 자신만 왕따 되는 기분입니다. 그냥 알아서 살라는 뜻인가요? 아니면 그게 세자비의 운명인가요?
다이애나의 삶과 운명을 이미 알고 있기에 충분히 이해하면서 봅니다. 그리고 아주 짧은 기간의 현장을 보지만 그것만 가지고도 전체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젊고 예쁜 세자비와 숨겨진 왕가왕족의 모습은 파파라치의 집중 표적입니다. 그런데 다이애나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 듯합니다. 그게 더 왕가의 신경을 건드리는 부분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더욱 단속하는지도 모릅니다. 폐쇄적인 숨 막히는 분위기, 감시당하는 기분, 억제해야만 하는 감정, 게다가 남편의 외도, 어느 것 하나 마음 편한 것이 없습니다. 그저 평범한 사람으로 평범하게 사는 것이 행복이지 싶기도 합니다. 영화 ‘스펜서’(Spencer)를 보았습니다. 감정 연기가 일품입니다.
질문 5.
유대인들, 특히 목자라는 제사장, 서기관이나 바리새인들은 자기네 아버지가 하나님이라고 확신하고 신앙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의 아버지가 하나님이 아니라 마귀라고 하셨습니다.(요 8 : 41 - 44) 누구 말이 맞나요? 그러면 예수님은 왜 하나님 백성이라 자부하던 유대인들을 마귀의 자식이라고 질책하셨습니까? 이유가 뭔가요? 혹시 오늘날 목사님이나 성도들에게도 ‘너희 아버지는 하나님이 아니라 마귀다,’라고 말씀하실 수 있는 거 아닌가요?
그리스도인들은 당연히 하나님을 영적 아버지로 부르며 믿고 살고 있습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도 당연히 하나님 아버지께 드립니다.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기도문에도 그렇게 나와 있습니다. 마 6 : 9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그래서 감히 우리의 청을 드릴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도 가장 가까운 사람은 부모입니다. 자랄 때는 부모가 절대적인 보호자이며 공급자입니다. 필요한 것은 부모에게서 받고 또한 부모에게 요구합니다. 어떤 권리가 있어서가 아니라 그냥 부모이기 때문입니다. 부모와 자식의 관계는 세상 그 무엇으로도 지우거나 끊을 수가 없습니다. 부모는 혹시 갈라지더라도 부모와 자식의 관계는 갈라지지 않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관계입니까. 그리고 자식은 혹 부모를 떠날지라도 부모는 자식을 버리거나 포기하지 못합니다. 시대가 하도 괴이해서 아주 드물게 부모가 자식을 학대하고 버리는 일이 생기기도 하지만 아무도 그런 사람을 사람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아버지이신 하나님은 당신의 아버지로서의 사랑을 세상 이야기로 예를 들어 말씀하셨습니다. 자식은 스스로 다 컸다고 아버지에게서 재산을 미리 할당 받아 아버지 곁을 떠나 멀리 갑니다. 그리고 제멋대로 살아봅니다. 있을 때야 세상이 호락호락해 보일지 모르지만 돈 없으면 누구 하나 거들떠보지도 않는 곳이 바로 세상입니다. 먹을 것조차 얻기가 쉽지 않게 되자 비로소 아버지 생각이 납니다. 돌아갈 면목이 전혀 없지만 일단 먹고살아야 하니 어쩌겠습니까? 거지도 상거지 꼴을 해가지고 집으로 향합니다. 그런데 그 동안 아버지는 어떻게 지내셨을까요? 어쩌면 하루도 맘 편한 날이 없었을 것입니다. 아직 어리고 사회 경험도 없는 녀석이 돈의 힘만 믿고 세상으로 나갔는데 어찌 걱정이 안 되겠습니까? 이제나저제나 걱정으로 하루하루를 지내셨을 것입니다. 매일 동구 밖을 지켜보다 어느 날 상거지가 하나 들어오는 것이 보입니다. 아무리 변해도 아비가 제 자식을 몰라보겠습니까? 우리가 잘 아는 눅 15장에 나오는 ‘돌아온 탕자’의 이야기입니다.
오래도록 부모와 함께 사는 것도 복이지요. 대부분은 자식보다 먼저 세상을 떠납니다. 그래서 살아생전 효도하라고 권합니다. 함께 하는 시간이 그리 길지 않음을 말합니다. 아무튼 부모와 자식은 세상에서 가장 특별한 사이입니다. 세상에 발을 디디게 해주는 관계입니다. 혹 부모를 모를 수는 있으나 부모가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부모가 가까이 오래 함께 계신다는 것도 복입니다. 그 함께 할 수 있는 기간이 육신의 부모는 한 세기를 넘기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영원토록 함께 해주실 수 있는 아버지가 계십니다. 우리 영의 아버지 곧 하나님입니다. 그 아버지가 약속하십니다. 수 1 : 9 “내가 네게 명한 것이 아니냐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두려워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하시니라” 어디를 가든지 함께 해주신답니다. 우리 육신의 부모도 자식이 어렵고 힘들어 할 때 기댈 수 있는 힘이 되어주고 아낌없는 지원을 해주기도 합니다. 사회에 나갈 때 홀로서기가 가능하도록 채워주고 밀어줍니다.
우리 영의 아버지는 무엇에 가장 큰 관심을 가지고 계실까요? 우리는 이 연약한 육신을 지탱하고 육신의 안락과 쾌락을 좇아가기 쉽습니다. 그래서 일단 먹고사는 일에 집중합니다. 좀 살만하면 그 다음에는 즐거움을 좇아갑니다. 그러나 그 육신은 한 세기를 견디기 어렵습니다. 늙어가고 힘도 빠지고 모습도 초라해져 갑니다. 아무리 잘 먹고 잘 보존하며 잘 꾸며도 늙어가는 몸을 따라가기 어렵습니다. 결국 병들거나 쇠약해져서 떠나게 됩니다. 그래서 생각해봅니다. 하나님이 처음부터 사람을 죽도록 창조하셨을까? 육신의 부모도 자기 자식 죽는 모습을 보면 마음이 찢어지는데 우리 하나님 아버지는 자녀라는 하나님 백성이 여기저기서 죽어 넘어지는 것을 보며 아무런 감정이 없으실까? 그렇지 않으리라 믿습니다. 죽을 존재로 창조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죽게 된 것이지요. 또한 죽을까 염려되어 경계까지 시켰습니다. 말을 듣지 않은 것이지요. 결과는 경계한 대로 죽음입니다.
마귀가 지배하는 세상을 되찾으려고 당신의 사람을 창조하셨습니다. 창 1 : 27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창조하신 목적이 있습니다. 28절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한 마디로 생육 번성 충만 정복하여 다스리라는 것입니다. 어디를? 하나님 지으신 이 피조세계를. 왜요? 마귀가 쥐고 있으니까. 혼자서는 힘들 것을 아시기에 먼저 생육하고 번성해야 합니다. 그래 충만해지면 세상을 정복하는 것이지요. 마귀를 물리치고 본래대로 하나님의 사자가 되어 하나님 백성으로 하나님 나라를 만들어 다스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계획이었습니다. 물론 아직은 마귀가 지배하는 세상입니다. 그러니 마귀의 방해가 있을 것을 아십니다. 자기 것 빼앗으려는데 가만있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경계하십니다. 창 2 : 16 - 17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담이 먹습니다. 물론 돕는 자라고 붙여준 하와가 먼저 먹고 아담에게도 넘겨줍니다. 아담이 그것이 무엇인지 알면서도 아무 거리낌 없이 받아먹습니다. 결과는 이미 경계한 그대로 ‘죽음’입니다. 그런데 사실 그 후 아담은 930세까지 살다 갑니다. 아니 ‘먹는 날 죽으리라’ 하셨는데 9백년이 넘도록 살았다니 말이 됩니까? 이제 생각해봐야 할 문제가 있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육신보다는 우리의 영에 더 관심이 많으십니다. 육이 죽어도 영은 죽지 않습니다. 그러나 영이 죽으면 육은 따라서 죽게 됩니다. 그러므로 먼저 영이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육이 따라서 살게 됩니다. 어느 것이 우선해야 하는가, 잘 생각해야 합니다.
이 장면을 다시 보겠습니다. 일단 하나님이 아담을 창조하신 부분부터 보겠습니다. 창 2 : 7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이 부분 ‘천지창조’라는 영화에서 보면 정말 땅의 먼지 같은 흙이 모여서 사람 형상을 만들어가는 장면이 나옵니다. 문자 그대로 표현한 것이지요. 그러면 ‘생기’는 어떻게, 또 ‘생령’은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요? 이것은 눈에 보이는 물체가 아닙니다. 마치 호흡을 불어넣듯 ‘생기’를 표현한다 해도 ‘생령’은 정말 어렵습니다. ‘영’을 어떻게 그립니까? 그런데 ‘살아있는 영’이랍니다. 그렇다면 그 전에는 죽어있는 영이었다는 것이지요. 영이 죽어있었는데 생기가 들어가서 생령 곧 살아있는 영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이 창조는 육신의 창조 이야기가 아니라 영의 창조 이야기입니다. 죽어있었는데 살아난 이야기며, 어쩌면 생명이 없었는데 생명이 태어난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죄를 짓고 나서 곧 하나님의 경계해주신 말씀을 지키지 않고 자기 욕심대로 선악과를 먹고 나서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창 3 : 19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예, 흙으로 돌아갔습니다. 다시 정리합니다. 처음 흙에 생기를 넣어 생령이 되었습니다. 다음 하나님 말씀을 버리고 뱀의 말대로 선악과를 먹었으니 도로 흙이 되었습니다. 이것을 간단한 도식으로 설명한다면 이렇습니다. 흙 + 생기 = 생령. 생령 + 뱀의 말 = 흙.
그렇다면 생기와 뱀의 말이 서로 대칭이 됩니다. 뱀의 말은 생명을 빼앗는 구실을 하고 생기는 생명을 주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생기는 바로 ‘하나님 말씀’ 곧 생명의 말씀인 것입니다. 쉽게 정리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먹으면 생명을 얻고 뱀의 말을 먹으면 죽음이지요. 그러니 이 뱀의 말이란 곧 마귀(사단)의 말입니다. 예수님도 말씀하셨습니다. 요 6 : 63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 예수님의 말씀이 곧 생명입니다.
그러니 아담이 뱀의 말 곧 선악과를 먹자 아담의 영이 처음 상태 곧 죽은 상태로 돌아간 것입니다. 육체는 930세를 살았을지 모르나 그의 영은 이미 죽은 것이지요. 아무튼 여기서 알아야 할 사실은 내가 누구의 말을 먹느냐 하는 것이 생과 사를 가른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속에 누구의 말이 들어 있느냐 하는 것이 살았느냐 죽었느냐 하는 것을 판별할 수 있는 근거라는 사실입니다. 내 속에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 있으면 살아있는 자이고, 뱀의 말 곧 마귀의 말이 들어 있으면 죽은 자입니다. 그리고 자기가 가지고 있는 말을 전할 수밖에 없는 일입니다. 우리가 누구의 말을 지니고 있느냐, 그것은 누구의 말을 전하고 있느냐 하는 것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우리 속담에도 ‘말이 씨가 된다,’라는 것이 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그 말대로 실체가 나타난다, 또는 그 말대로 이루어진다는 뜻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좀 무서운 느낌이 듭니다. 말, 함부로 할 것이 아니지요.
그렇다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마땅히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생명을 받는 것이고 당연히 그 말씀으로 사는 것입니다. 만약 뱀의 말, 사단의 말을 먹으면 죽는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그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교회에 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에서는 당연히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고 있다고 믿습니다. 바로 그것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 하나님 백성인 유대인들은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고 제사장이나 율법사에게서 말씀을 듣습니다. 그 때는 성전의 주요 임무가 제사였고 말씀은 어디서든 제사장, 율법사 또는 서기관이나 바리새인들을 통하여 듣고 배웠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종이었고 당연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 오시기 전까지는 크게 문제 될 일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시고 나서 문제가 생긴 것이지요. 예수님과 그들 사이에 다툼과 갈등이 일어난 것입니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요? 다른 것보다 우선 말이 서로 달랐습니다. 물론 읽는 성경은 다를 리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 성경을 가지고 전하는 말씀이 달랐다는 것입니다.
백성들도 뭔가 다르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마 7 : 29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고 저희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무엇보다 근본적인 차이가 있었습니다. 요 3 : 31 - 32 “위로부터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고 땅에서 난 이는 땅에 속하여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느니라 하늘로서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나니/ 그가 그 보고 들은 것을 증거하되 그의 증거를 받는 이가 없도다” 바로 위에서 오신 이와 땅에서 난 이의 차이입니다. 위에서 온 이는 ‘그 보고 들은 것을 증거’합니다. 그런데 땅에서 난 이는 ‘땅에 속한 것을 말’합니다. 쉽게 말하면 예수님은 하늘을 이야기하는데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땅의 것으로 이야기한다는 말입니다. 왜 똑같은 성경을 가지고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하는가, 그것은 한쪽은 하늘을, 다른 쪽은 땅을 이야기하기 때문입니다. 달리 표현한다면 영의 이야기와 육의 이야기라고 해도 될 것입니다.
한 예를 들겠습니다. 예수님이 니고데모에게 거듭나야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요 3 : 3) 그러자 니고데모가 사람이 이렇게 나이 들어 어떻게 모태에 다시 들어갔다 나올 수 있느냐고 되묻습니다. 예수님은 영이 다시 나야한다는 뜻으로 말씀하신 것을 니고데모는 육신이 다시 나는 것으로 알아들은 것이지요. 이것은 그래도 초보의 수준입니다. 예수님이 수가 성 근처 우물가에 머무셨습니다. 거기서 사마리아 여인과 대화를 합니다. 주제는 ‘물’입니다. 그런데 잘 아는 대로 여자가 말하는 물과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물이 확실하게 다릅니다. 무엇이 다르지요? 여자가 말하는 물은 말 그대로 육신이 먹는 물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주시고자 했던 물은 물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이었습니다. 이렇게 같은 말을 사용하더라도 이것이 땅의 말인지 하늘의 말인지 분별하지 않으면 성경을 제대로 읽지도 전하지도 못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유대 지도자들과의 빈번한 다툼은 거기서 비롯되었습니다. 그들은 성경을 가지고 있어도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고 보신 것입니다. 그러니 그들이 가르치고 전하는 말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뱀의 말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아버지는 하나님이 아니라 마귀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오늘은 어떠한가요? 하나님의 종이라 자부하는 목자들이 정말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까? 그들이 아버지라고 부르는 그 분이 과연 하나님일까요? 깊이 생각해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당시 서기관 바리새인들이 예수님 하신 말씀에 동의하였습니까? 아니 우리 아버지가 마귀라고? 이게 말이나 되는 이야기입니까? 우리들 사이에서조차 농담으로라도 ‘당신 아버지는 마귀야,’ 한다면 얼마나 기분 나쁩니까? 그런데 웬 허술한 젊은 녀석이 자기보다 한참 연배인 어른들에게 좀 심하게 표현해서 ‘마귀 자식들’이라고 했으니 가만있을 수 없겠지요. 그래서 어떻게든 죽여 없애려고 발버둥 친 것입니다. 결국 소원대로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판단합니다. 어느 쪽이 옳습니까? 서기관 바리새인들입니까, 예수님입니까? 문제는 그런 일이 그 때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자문해봐야 합니다. 내가 아버지라고 부르는 분이 과연 하나님인지 마귀인지 분별해야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분별할 수 있습니까? 이미 답은 나와 있습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소위 ‘하나님 말씀’이 하늘의 말인지 땅의 말인지 분별하면 됩니다. 흔한 예를 들겠습니다. 마 24 : 29 “그 날 환난 후에 즉시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리라” 예수님이 마지막 때를 말씀하신 내용 중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빛을 내지 않고 별들이 떨어진답니다. 그래서 그 때는 우주에 커다란 개벽이 일어날 것이라고 설교를 많이 들었습니다. 나아가 지구 종말까지 이야기했습니다. 말 그대로 설명한다면 그럴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SF 영화를 보아서 짐작할 수 있지만 별들이 아니라 별 하나만 떨어져도 지구가 박살날 지경입니다. 그러니 말씀대로 그리면 그렇게 됩니다. 생각해봅시다. 그렇게 박살이 난 지구에 우리 주님이 뭐 하시겠다고 재림하십니까? 이상하지 않습니까?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마귀의 말입니다. 그러니 그렇게 설교하신 목자는 미안하지만 하나님의 종이 아니라 마귀의 종입니다. 그의 아버지는 하나님이 아니라 마귀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