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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해의 불교 이해
글 경희대 철학과 허우성 교수.
미주현대불교 1993년 3월호부터 5월호까지 3번에 걸쳐 허우성 경희대학교 교수의 글 ‘만해의 불교이해’가 연재되었다. 하지만 여기에 소개한 글은 미주현대불교에 실린 글을 교정하여 그 길이가 축소된 글인데 허우성 교수로부터 직접 받아서 잡지에 실린 글 대신 이 글로 소개한다. --편집자 주.
산 밑 작은 집에 두어 나무의 매화가 있고 주인은 참선하는 중이다. 그들을 둘
러싼 첫 겹은 흰 눈, 찬 바람 혹은 따스한 빛이다. 그 다음의 겹과 겹은 생활․
전쟁․주의․혁명 등 가장 힘있게 전진되는 것은 강자와 채권자의 권리 행사다.
해는 저물었다. 모든 것을 자취로 남겨두고 올해는 저물었다.(1: 89)
서론
시대 배경: 일제시대
위의 시「세모」(歲暮)는 1930년대 만해 나이 쉰이 넘어 쓴 시로, 그가 살던 시대에 대한 민감성을 단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 산 밑 작은 집 매화나무 곁에서 참선하는 사람을 여러 띠가 겹겹이 둘러싸고 있다. 흰 눈, 찬바람, 따스한 빛이 그 첫째 띠이고, 생활, 전쟁, 주의, 혁명이 그 다음 띠이다. 마지막 띠는 강자와 채권자의 것이다. 만해는 강자와 채권자의 권리주장을 통렬히 느끼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시는 참선하는 자라고 해서 역사적․정치적 현실에서 자유로울 수 없음을, 출세간과 세간이 서로 이어져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양자의 연속성에 대한 통찰로 만해는 시대와 시세에 민감하지 않을 수 없었고 주로 경성에 머물며 역사의 갖가지 세력, 힘, 사조에 대하여 온몸으로 느끼며 그것들에 대응하려 했다.
한국사에 있어서 19세기 말에서 20세기는 일제 강점기, 식민지 시대로 불리는 고난에 가득한 시대였다. 만해에게도 이 시대는 민적(民籍), 인격, 정조가 빼앗긴 시절, 칼과 황금이라는 악마가 창궐하는 시대, 따라서 생명, 자유, 독립, 그리고 평화가 상실되고 죽음, 부자유, 굴종, 그리고 투쟁이 있던 때였다. 이처럼 민족의 생명과 자유, 그리고 독립의 상실이 그를 이해하는 첫째의 시대배경이 된다. 두 번째 배경은 불교의 운명과 일제의 불교침투이다.당시 불교는 이조 오 백년의 숭유억불정책으로 심하게 위축되어 사회의 영향력도 거의 없이 간신히 그 명맥을 유지할 정도였다. 사원은 모두 변두리 깊은 산 속으로 쫓겨나 사대부 관리의 수탈을 당했으며, 승려는 사회 최하층민처럼 멸시와 수모를 받고, 서울 성내의 출입도 포교도 엄히 금지되고, 공적으로는 아무런 사회성도 조직도 가지지 못하였다. 다만 무교, 도교, 토속신앙 등과 습합(習合)되어 사적인 형태로 존재해 왔다. 근대불교 위축의 주된 이유가 이조의 지속적인 불교탄압이라는 것은 해방 전에도 오늘날에도 불교인들에게는 하나의 정설처럼 되어 있다. 만해도 조선 특히 중엽 이후 유교 사상의 사상적 정치적 탄압으로 말미암아 불교가 산간 암혈에서 겨우 목숨이나 부지하게 되었는데 심하게는 승려의 도성 출입까지 금지하게 되었다고 보았다.
심하게 위축된 무종산승(無宗山僧)시대의 근대 한국불교를 더욱 어렵게 한 것은 일제의 침투였다. 그 침투는 1870년대부터 1911년 조선사찰령 반포를 기점으로 전후 두 단계로 나눠진다. 첫 단계로 사찰령 이전 일본불교가 한국불교에 침투했고, 둘째 단계로 한일합방 이후 1911년 총독부가 사찰령을 반포함으로써 한국불교는 일제의 손아귀에 송두리째 넘어가 관제 불교가 되어 자주권을 상실하고 말았다. 후에 백용성과 한용운 등이 사찰령에 반발하고 정교분리를 주장하게 된 것도 그 통제적 구속적 성격에 대한 항변이며 저항이었다. 일본불교의 침투의 결과 중, 해방 후까지 커다란 영향을 미친 것은 대처승의 등장과 득세이다. 한국불교는 전통적으로 출가승 중심이었다. 대처론은 해방 이전에도 백용성을 비롯한 출가승들의 반발을 불러일으키고, 해방 후 50년대와 60대의 한국 불교계를 뒤흔드는 비구․대처 갈등과 정화운동의 씨앗이 되었다.
1장 일생
만해의 일생을 상세히 추적해 볼 필요가 있다. 그것이 세간에서 출세간으로, 출세간에서 다시 출출세간으로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모습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1879년(고종 16)에 태어났고, 법명은 용운이고 법호는 만해이다. 유년시대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대원군의 집정과 외세의 침략 등으로 나라 안팎이 어수선한 시기였다. 4세때 임오군란이 일어났으며, 6세때부터 서당에서 십년 동안 한학(漢學)을 익혔다. 1892년 고향에서 천안 전씨(全氏)와 결혼한다. 97년 고향을 떠나 출가하여, 강원도 백담사 등지를 전전한다. 출가 직후 오세암에 머물며 불교의 기초지식을 섭렵하고 선(禪)을 닦았다. 1904년 블라디보스톡 등 시베리아와 만주 등을 주유하다가 봄에 고향 홍성으로 내려가 수개월간 머문 이후 다시 출가한다. 12월 맏아들이 태어난다. 1905년 김연곡사(金蓮谷師)에게서 득도(得度)하였다. 1907년 강원도 건봉사에서 수(首)선안거(최초의 선 수업)를 성취한다.
1908년 4월 일본의 마관․궁도․경도․동경․일광 등지를 순유하며 신문물을 시찰하고 그 해 10월 귀국한다. 1909년 승려취처(娶妻)문제에 관한 건백서를 두 차례 총독부에 제출하고, 1910년 백담사에서 『조선불교유신론』을 탈고한다. 11년 이회광(李晦光)의 친일매불(親日賣佛) 음모에 대항하여 박한영(朴漢永, 1870~1948)․진진응(陳震應, 震應慧燦, 1873~1941) 등과 함께 승려 궐기대회를 개최하고 임제동 운동에 가담하여 친일적 한일불교동맹 조약 체결을 분쇄했다. 13년 박한영․장금봉 등과 불교 종무원을 창설하고, 5월 통도사 불교강사에 취임한다. 5월 『조선불교유신론』(이하 『유신론』)을 발행한다. 14년 경전을 대중화하기 위하여 범어사에서 『불교대전』을 간행했고, 18년 경성 계동에서 불교의 홍포와 민족정신의 고취를 목적으로 월간지 『유심』(惟心)을 발간했다. 19년 1월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의 제창과 관련하여 최린․현상윤 등과 조선독립을 숙의하고, 3․1 운동 때 백용성 등과 함께 불교계를 대표하여 참여하였다. 최남선(崔南善)이 작성한 「독립선언서」의 자구 수정을 하고 공약 삼장을 첨가한다. 3월 1일, 경성 명월관에서 33인을 대표하여 독립선언 연설을 한다. 거사 이후 일경에게 체포된다. 7월 10일 서대문 형무소에서 일본 검사의 심문에 대한 답변으로 「조선독립의 서」를 기초하여 제출한다. 8월 경성지방지원 제 1형사부에서 유죄판결을 받는다. 투옥 중 20년 일제가 3․1 운동을 회개하는 참회서를 써내면 사면해 주겠다고 했으나 이를 거부한다. 21년 만기 감형되어 출옥한다. 1926년 시집 『님의 침묵』과 『십현담주해』를 나란히 출판한다. 27년 일제에 대항하는 단체인 신간회(新幹會)를 발기한다. 30년 정교분립, 교정확립, 불교대중화이라는 3대 강령을 내세운 만(卍)당의 당수로 추대된다. 31년 조선불교청년회를 조선불교청년동맹으로 개칭, 불교를 통한 청년 운동을 강화하고, 그 해 월간지 『불교』를 인수하여 사장에 취임하였다. 이후 많은 논설을 발표하여 불교의 대중화와 항일 독립사상 고취에 힘쓴다. 33년 재혼하고 서울 성북동에 방응모, 박공 등의 성금으로 성북동에 심우장(尋牛莊)을 짓는다. 이듬해 딸을 낳게 된다. 35년 『흑풍』을 조선일보에 연재하였고, 이듬해 조선중앙일보에 장편 『후회』(後悔)를 연재하였다. 37년 불교계통의 항일 단체인 만당사건(卍黨사건)이 발각되어 많은 후배 동지들이 검거되고 자신도 고초를 겪었다. 39년 회갑을 맞으면서 『유마경』을 강설한다. 40년 창씨개명에, 43년 조선인학병의 출정에 반대했다. 1944년 65세를 일기로 서울 성북동의 심우장에서 중풍으로 죽었다. 동지들에 의해서 다비된 뒤 망우리 공동묘지에 유골이 안치되었다.
2장 시대의식
만해의 다채로운 이력이 말해 주듯이 그는 전통적인 선사가 아니라 시인이고 독립지사였다. 지난 일백년 불교사에 나타난 불교인 중 그 어느 누구보다도 민족의 운명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18세 이후 만해의 인생은 특이했다. 아들을 낳았지만 제대로 키워 본적이 없었고, 출가의 동기도 생사문제만이 아니었다. 깨달음과 불조혜명(佛祖慧命)을 잇기보다는 민족의 생명과 자유, 독립을 더 큰 가치로 여겼고 법맥(法脈)이나 순수를 크게 문제삼지 않았다. 연보에 수안거(首安居) 한번만 기록될 정도로 선의 실수(實修)는 적었다. 매화나무가 있는 깨끗하고 고요한 산골 암자와 같은 곳이 아니라 먼지로 자욱한 경성에 주로 머물며 시대의 공기를 호흡하고 정치와 사회 문제에 깊이 관여했다. 그의 인생의 목표는 출세간에서가 아니라 출출세간에서 생명을 꽃피우는 일이었다.
진리도 때를 잘 맞추어야 한다는 만해의 시중(時中)의식은 그가 몸담고 살아가던 그 시대를, 도미(道味)의 현재가 주는 만족이나 자족, 또는 충만 대신에, 위기의식, 부정과 결핍으로 가득한 시기로, 정의와 자유, 평등, 인권이 상실되고 부재하는 시기로, 악마와 원수가 창궐하는 시기로 파악했다. 역사가 상대계이긴 하지만 선악지업(善惡之業)은 망하지 않고 효험을 가지는 인과세계에 속한다고 보고, 선업을 위해 투쟁하고 인욕(忍辱)해야 하는 때라고도 했다. 만해는 민족뿐 아니라 당시 불교마저 그 자체 속에 내포된 불순과 객관적 정세의 불리로 말미암아 비상한 위기에 직면해 있는데도 아직 유신의 소리가 들리지 않음을 한탄하기도 했다.
중생세계의 특징인 상실과 결핍, 그리고 부재는『님의 침묵』의「당신을 보았읍니다」(1: 57~58)라는 시에 잘 형상화되어 있다. 이 시에는 없는 것, 따라서 회복돼야 할 것으로 가득 차 있다. 땅, 추수, 먹을거리, 인격, 생명, 민적, 인권, 정조가 없다. 이 없음(無)은 욕망을 내버린 이후의 무의 깨달음과 같이 행복과 도락의 원천이 아니라 정반대로 분노와 슬픔의 원동력이 되었다. 그의 부정의식은 윤리, 도덕, 법률과 칼과 황금의 관계를 포함한다. 윤리, 도덕, 법률 등 인간의 모든 제도는 오직 칼과 황금을 지닌 자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것이다. 뿐 아니라 그 칼과 황금도 한갓 헛된 것이라는 것이다.
이 결핍은 님의 침묵 또는 부재로 형상화되지만, 그 침묵이나 부재를 초래한 힘이 적극적으로 표시되면 악마가 된다. 역사의 세계는 마(魔)의 세계이다. 그 속에 살아가는 중생이 생사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보살은 그런데 이런 생사계를 떠나지 않는다. 방이 텅비어 시자(侍者)는 어디에 있는가, 라는 문수사리의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유마(維摩)는 마와 온갖 사된 견해가 그의 시자라고 대답했다. 중생이 즐기는 생사계는 군마외도로 가득한 세계이지만 보살은 이 세계를 버리지 않는다. 그래서 이들 군마외도가 모두 시자인 셈이다.
3장「나는 왜 중이 되었나」: 유교전통의 영향
만해의 불교이해와 실천에는 유가전통의 영향이 상당히 있었다. 이는 「나는 왜 중이 되었나」(1930)라는 간략한 회고담에 잘 나타나 있다. 이 글은 출가동기에 대한 자문 자답으로 시작되고 있다. “나는 왜 중이 되었나? 내가 태어난 이 나라와 사회가 나를 중이 되지 아니치 못하게 하였던가. 또는 인간 세계의 생사병고 같은 모든 괴로움이 나를 시켜 승방에 몰아넣고서 영생과 탈욕을 속삭이게 하였던가.”(1: 410) 여기에 제시된 두 가지 선택의 차이는 의미심장하다. 처음부터 이 나라와 이 사회의 상황에 몰려 중이 되었다면, 만해는 세속의 문제로 출가한 셈이며 이는 유가적 동기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생사병고에서 오는 괴로움에서 벗어나 영생과 탈욕을 얻기 위해서 출가했다면 이는 불교의 전통적 동기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글의 끝까지 가보아도 결정적인 해답은 보이지 않으며 전체적으로 유가적 동기와 불가적 동기가 교차되어 나온다.
이 글은 시종 만해의 출가 동기에는 전통 불교적 모티브(개인구원)와 유가적 모티브(전체구원)가 교착하며 불이불리(不二不離)의 관계에 있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어린 시절 한학 교육과 더불어 옛 의인의 전기 및 역사에 이름난 의인을 도덕적 전범으로 삼고 모방하고 싶었다는 만해의 상고정신(尙古精神)은 유가 전통을 반영한다. 그러나『서상기』를 읽고 인생이 전부 공(空)이 아닐까하고 회의하고 있는 대목과 고적한 사상 운운하면서 절로 출가하였다는 곳에서는 개인구원적 실존적 충동이 엿보인다. 그런데도 출가 동기가 현세의 초탈만이 아니었다는 점, 마음의 안정을 구하지 못하여 다시 속세로 나아가 유랑했다는 점, 이회광 일파와의 대결은 불교종단을 일제라는 세력으로부터 지키려는 것, 만세사건에 연루되었다는 점, 이런 여러 사실을 통하여 끊임없이 표출되는 구세(救世)의 욕구는 유가적 충동이라 할 수 있다.
그의 회고담은 다음의 말로 끝나고 있다. “그러면 나는 승려 30년에 무엇을 얻었나? . . . 안국동 법당 곁에 부처님을 모시고 일석(日夕) 생각함에 나는 결국 영생(永生) 하나를 얻은 것을 느낀다. 어느 날 육체는 사라져 우주의 적멸과 함께 그 자취를 감추기라도 하리라. 그러나 나의 마음은 끝없이 둥글고 마음 편한 것을 느낀다. 그렇더라도 남아일세에서나 중으로 그 생애를 마치고만 말 것인가. 우리 앞에는 정치적 무대는 없는가? 그것이 없기에 나는 중이 된 것이 아닐까? . . . 지자는 지 부지자 부지(知不知者不知)를 곡(哭)할 뿐이노라.”(1: 412) 결핍과 투쟁 중에서도 영생과 원만한 평안을 얻었을 수 있었다고 했다. 이 평안은 미완성의 역사 속의 대해탈이 아닐까.
만해가 의문으로 시작하고 의문으로 끝맺을 밖에 없었다는 점과 정치무대가 없어 승려가 된 것이 아닐까라는 마지막 말은, 해답의 의도적 회피가 아니라 그의 일생이 개인구원의 충동과 구세의 충동이 함께 어우러져 만들어졌고, 그의 불교 이해와 실천이 절대와 상대, 무한과 유한, 성과 속, 개인구원과 전체구원, 전통불교와 유가정신, 지혜와 방편, 실존과 역사인, 이들 대대(待對) 개념들이 불이(不二)의 차원에서 성립되어 왔음을 말해주는 것 같다.
4장 생명사상
출세간하는 힘, 그리고 다시 출출세간하여 세간으로 자유로이 돌아오는 힘은 어디에서 나올까? 중생구제를 위한 투쟁의 힘의 원천은 무엇일까? 그 생명력의 원천을 깨달음이라고 하고, 그 힘을 세간에 대활용하려는 태도를 자비라고 해보자. 살아있는 일체는 생명력을 갖고 있다. 그런데 만해에게 두 차원의 세계가 있었다. 하나는 영원의 법계, 초연 또는 초월의 경계이고, 또 하나는 우리가 몸담고 있는 용기(容器) 같은 기세간(器世間) 즉 상대적 역사계이다. 영생이 향유되는 곳이 영원의 법계라면 그 법계가 수시로 불완전한 방식으로 표현되는 곳이 기세간이라고 했다.
영생의 원천은 심, 일념, ‘나’ 또는 불성의 깨달음이다. 만일 유정 무정 모두 불성을 가졌다면 우리 마음과 풀 한 포기의 생명에는 차이가 없어서, 마음 그대로 생명이고 자연 그대로 생명이다. 『님의 침묵』의 시「낙원은 가시덤불에서」의 첫 구절에서 만해는 “죽은 줄 알았던 매화나무 가지에, 구슬 같은 꽃망울을 맺혀주는 쇠잔한 눈 위에, 가만히 오는 봄기운은 아름답기도 합니다.”라고 했다.(1: 62) 여기에 나오는 꽃망울과 봄기운이 자연의 생명을 가리키지만, 그것들은 우리 생명의 상징이기도 하다. 분재(盆栽)의 장미화가 얻은 “씩씩하게 고운 빛과 사무치게 맑은 향기”를(1: 270) 만해는 타인에게, 그 누구보다도 열패자(劣敗者)에게 나눠줘야 할 책임을 느꼈다. 열패자란 칼과 황금의 힘의 부족으로 생존경쟁에서 패배하여 생명과 자유를 부당하게 박탈당한 자로서 만해가 배려해야 할 자이다. 여기에 자신과 민족 모두가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다.
생명의 원천인 마음에 대하여 만해는 “심은 하시라도 하사 하물(何事何物)이라도 심 자체 뿐이니라 심은 절대며 자유며 만능이니라.”라고 하기도 하고(1: 90, 「心」), “이 우주간에 나 이외에는 없다.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 唯我獨尊)”이라고도 했다(2: 353, 1932) 개인이든 민족이든 생명체라면 당연 절대며 자유며 만능이다.
생명은 자유이다. 생명 있는 곳에 자유 있고, 자유 있는 곳에 생명 있다. 자유가 없으면 죽음밖에 없다. 그 내용이 『조선독립의 서』(1920)에 이렇게 표현되어 있다.
자유는 만유의 생명이요 평화는 인생의 행복이라. 그러므로 자유가 없는 사람은 죽은 시체와
같고 평화를 잃은 자는 가장 큰 고통을 겪는 사람이다. . . . 세상의 가장 이상적인 행복의 바
탕은 자유와 평화에 있는 것이다. . . 참된 자유는 남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음을 전제로 삼는
것으로서 약탈적 자유는 평화를 깨뜨리는 야만적 자유가 되는 것이다.
자유는 만유의 생명이요, 평화는 인생의 행복이라고 했다. 평화는 왜 말하는가? 나를 위하여 타자의 생명과 자유를 침해하게 되면 평화가 깨어지기 때문이다. 참된 자유는 타자의 생명과 자유를 지켜주지 않으면 안된다. 약탈적 자유는 다른 생명을 약탈하므로 반 평화적 야만적 자유이다. 생명과 자유 그리고 평화, 이 중 하나만 없어져도 다른 둘은 덩달아 없어진다. 만해는 따라서 다른 민족이나 국가의 생명과 자유를 약탈하는 제국주의와 군국주의를 비판할 수밖에 없었다.
생명과 자유, 그리고 평화에 대한 만해의 사상은 석존의 만물 평등관과 깊은 관계가 있다. 만물은 모두 생명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평등하고, 이런 평등을 유지하는 한 서로 평화롭게 지낼 수 있기 때문이다. 만해가 불교의 주의를 크게 평등주의와 구세(救世)주의로 나눠 설명하면서 “평등의 견지”에 대하여 “공간과 시간을 초월하여 얽매임이 없는 자유로운 진리”라고 했다.(2: 44) 시공을 초월하는 자유의 진리, 궁극의 진리에 이른다면, 인간세상의 갖가지 차별상, 즉 요절, 벌, 요사스러움, 충성됨, 성공, 실패, 생, 사, 강, 약 등의 차별상에 의해서 제한 받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2: 44) 그런데 중생들이 불평등한 거짓된 현상에 미혹하여 해탈하지 못함을 불쌍히 여기신 까닭에 석존은 평등한 진리를 가르치셨던 것이다. 이 평등의 진리는 진여의 차원에서 모든 상대적인 차별의 제한을 철폐한다.
생명과 자유 그리고 평화, 이 중 하나만 없어지면 다른 둘도 없어진다. 나와 너, 우리나라와 다른 나라 모두 당연 자유가 보장되어야 한다. 여러 나라와 인종 사이에 자유가 보장되지 않으면 평화가 깨어지고 자유가 보장되면 세계주의가 달성된다. “세계주의는 자국과 타국, 이 주(洲)와 저 주, 이 인종과 저 인종을 논하지 않고 똑같이 한 집안으로 보고 형제로 여겨, 서로 경쟁함이 없고 침탈함이 없어서 세계 다스리기를 한 집을 다스리는 것같이 함”을 말한다.(2: 45) 이와 같은 세계주의의 입장을 취하면 국가주의와 제국주의를 비판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생명은 저항하는 생명이다. 생명이 자유, 평화, 평등의 생명이라고 해도, 유약과 굴종의 생명은 아니다. 생명이 주는 자유는 절대이고 만능이므로, 역사에서 나타난 왕과 천황 등으로 대표되는 어떤 힘, 권능, 세력이든 이것들이 생명을 억압하려 들면 저항하지 않을 수 없다. 만해는 줄기가 하나만 있다는 「일경초一莖草」라는 풀을 노래하며 이렇게 말했다. “제 아무리 악마라도 어찌 막으랴. 초토(焦土)의 중에서도 금석(金石)을 뚫을 듯한 진(眞) 생명을 가졌던 그 풀의 발연(勃然)을. 사랑스럽다, 귀(鬼)의 부(斧)로도 마(魔)의 아(牙)로도 어쩌지 못할 일경초의 생명.”(2: 349, 1918) 귀신의 도끼로도 악마의 이빨로도 없앨 수 없는 일경초의 강인한 생명력, 그것의 발산을 자신과 민족 안에서 확인하려고 했을 것이다.
5장 님
시집 『님의 침묵』의 머리말에 해당하는「군말」에서 ‘그리운 것은 다 님’이라고 했다.(1: 42) 만해는 중생, 조국, 민족의 독립 자존을, 그리고 무엇보다도 생명을 그리워했을 것이다. 그 님은 그런데 추상적 원리가 아니다. 눈에 보이지 않으면서도 볼 수 있고, 손으로 만질 수 없으면서도 느낄 수 있고, 말을 주고받을 수 있는 존재이다. ‘당신’이라고 부를 수 있는 구체적 인격이다. 나에게 키스의 추억을 안겨준 님이고, 꽃싸움에서 나에게 번번이 져 주시는 분이다. 나를 책망하는 분이고, 내가 그 품에 안길 수 있다. 무엇보다도 나의 작은 생명을 바치면 으스러지도록 껴안아 주시는 분, 일거수 일투족에서 느껴지는 분이다. 그러나 님은 침묵을 지키고 있으므로 내가 애타게 기다릴 수밖에 없는 님이다. 님은 저 영원의 광명적 생명을 주시지만, 나의 육신의 생명을 앗아갈 수도 있다. “님이여, 당신은 봄과 광명과 평화를 좋아하십니다./ 약자의 가슴에 눈물을 뿌리는 자비의 보살이 되옵소서./ 님이여, 사랑이여, 얼음바다의 봄바람이여.”에서처럼.(「찬송」 부분 1: 64) 님은 광명과 평화를 좋아하는 자비의 보살이다. 광명과 평화를 빼앗긴 ‘약자’를 위해 슬픈 눈물을 뿌린다. 님에게 보살이 되라고 했을 때 나도 님 따라 자비의 보살이 안될 수 없다.
만해의 님이 인격적이지만 기독교에서 말하는 창조주로서의 인격신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신앙의 대상이긴 하다. 이 사실은 자력인 동시에 신앙의 대상이 되는 즉심시불’(卽心是佛)의 불교와 같은 종교가 가장 좋은 것이라고 했을 때 드러난다. 만해의 님은 ‘자력’과 ‘신앙’의 대상이다. 님은 내재적이며 동시에 초월적이다. 내재의 면은 자득해야 하고 초월의 면은 신앙으로 섬겨야 한다. 그 내재의 면이 바로 내 속의 불성이기도 하다면 당신이 바로 내가 된다.
6장 유아독존과 아공
영원한 생명은 세상에서 가장 존귀하므로 천상천하 유아독존(唯我獨尊)이고, 우주가 깡그리 사라져도 남는다. 생물, 무생물, 인간, 비인간의 천하만물이 모두 귀한 생명을 갖고 있다. 들판의 한 포기의 풀, 분재의 한 송이 장미꽃도 유아독존을 선언할 수 있다. 이 선언은 어떤 굴종과 억압 아래에선 살지 않겠다는 자유와 독립의 선언이다. 생명에 있어서 내 민족 네 민족의 차별이 있을 리 없다. 그 생명은 국가주의, 제국주의 등으로 왜곡된 역사를, 그 안에서 칼과 황금을 소유한 여왕, 천황 등을 악마의 범주에 넣어 도전하고 거부한다.
유아독존의 경계는 이미 가장 존귀하고 절대무한의 완전한 세계이므로, 역사에 참여한다고 해서 더 존귀하게 되지도 더 완전해 지지도 않는다. ‘영생’이나 ‘광명적 생명’이 모두 이런 세계일 것이다. 존귀와 자족이므로 눈물이나 이별이 없다. 그런데 우리에게 있는 자비심이 홀로 자족하며 지내도록 내버려두지 않고 나를 비워 세상의 열패자를 돌보게 한다. 그 비움이 아공(我空)이다. 아공은 자아의 유아독존성을 스스로 부정하는 자비에서 나온다. 그래서 아래와 같이 노래했다.
자비인 동시에 대용맹이라야 한다./ 인욕(忍辱)인 동시에 정진이라야 한다.
아공(我空)인 동시에 유아독존(唯我獨尊)이라야 한다. 「아공」, 2: 353~4, 1932.
자비는 자기부정과 자기희생을 감내하는 태도이므로 용맹, 인욕, 정진이 필요하다. 아공의 ‘공’이 제일 먼저 부정하는 것은 영원의 사랑, 초연(超然)과 초월이다. 둘째, 님의 현전(現前)을 부정한다. 생명의 유아독존을 부정하는 자비의 모습은 시「나룻배와 행인」에서 ‘나는 나룻배, 당신은 행인’이란 구절에 잘 나타나 있다. 행인이 중생, 민족, 민중이라면, 나룻배가 됨은 자비의 발현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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