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에 빗자루를 기대며/신현정
이 빗자루 손에 잡아보는 거 얼마만이냐
여기 땅집으로 이사와 마당을 쓸고 또 쓸고 한다
얼마만이냐
땅에 숨은 분홍 쓸어보는 거 얼마만이냐
마당에 물 한 대야 확 뿌려보는 거 얼마만이냐
땅 놀래켜보는 거 얼마만이냐
어제 쓸은 마당, 오늘 또 쓸고 한다
새벽같이 나와 쓸 거 없는데 쓸고 또 쓸고 한다
마당을 쓸고 나서
빗자루를 담에 비스듬하게 기대어 놓는다
빗자루야 그래라 네가 오늘부터 우리집 도깨비하여라.
<시 읽기> 담에 빗자루를 기대며/신현정
신현정의 시집 『자전거 도둑』을 읽는 일은 유쾌함 그 자체입니다. 조금 과장하자면 시집에 수록된 작품들 대부분이 우리를 유쾌한 세계로 이끌어 갑니다. 이 유쾌하다는 말 속에는 기쁨, 명랑, 재미, 해갈, 트임, 맑음, 밝음, 활동성, 생명감, 산뜻함 등이 깃들여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유쾌함을 느낀다는 것은 그 말 속의 이런 기운들을 몽땅 느끼는 것입니다.
위 시는 신현정이 그가 “땅집”이라고 부르는 교외의 마당이 있는 단독주택으로 이사를 와서 쓴 시입니다. 위 시의 주요 소재이자 대상인 마당도, 그리고 그 마당을 쓰는데 사용하는 키가 큰 빗자루도 새로 발견된 이 시대의 귀한 골동품처럼 반갑게만 여겨집니다.
아파트 문화와 시멘트 문화 그리고 아스팔트 문화는 땅(흙)을 아래로, 옆으로, 뒤로 밀어내는 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사람들은 흙마당을 잃었고, 흙길을 잃었고, 흙집을 잃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것들과 더불어 사람들은 흙의 모성성과 여성성 그리고 다산성과 포용성을 상실했습니다. 그 상실은 우리의 삶을 얇게, 뾰족하게 그리고 딱딱하게 만들어버렸습니다. 편리함을 얻은 대신 상실한 것의 값이 너무 큽니다.
위 시의 시인이 땅집으로 이사 와서 맨 먼저 발견하고 흥분한 것은 바로 이 흙이고 흙마당이며 흙마음입니다. 이 흙, 흙마당, 흙마음과의 만남은 그에게 있어서 마당을 쓰는 행위로 성취됩니다. 마당을 쓰는 행위는 마당과 일체감을 이루는 일입니다. 마당 속에 내가, 내 속에 마당이 들어오는 일입니다. 이런 일은 에로틱한 느낌까지 자아냅니다. 마당에 대한 지극한 애정과 마당의 모을 곱게 쓰다듬는 정성이 그 속에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핵심에 도달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당은 집과 우리 존재의 외부이면서 내부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자연이면서 문화입니다. 더욱이 그것은 인간들이 몸의 연장延長입니다. 농경사회적 이미지로 가득한 그곳에서는 인간의 몸의 연장답게 의식주의 행위가 펼쳐집니다. 곡식을 털고 말리고 쌓아두는 일, 빨래를 하고 그것을 널어 말리는 일, 저녁을 멍석 멍석에 누워 하늘과 별들을 바라보는 일이 이곳에서 이루어집니다.
그뿐 아닙니다. 이곳은 문화적인 공간이기도 하여, 그곳에서 결혼식이 열리고, 잔치가 베풀어지고 온갖 놀이가 벌어집니다. 또한 이곳은 미학적 공간이기도 합니다. 울타리를 따라 크고 작은 나무들이 자라고, 해마다 봉숭아가 피는 꽃밭이 있고, 하늘의 별들이 천정을 이루고 있습니다. 이런 마당을 갖는다는 것은 앞서 말한 모든 것을 가지고 산다는 뜻입니다.
땅집으로 이사 온 위의 시인은 이런 마당과의 만남에 자못 흥분합니다. 어찌 흥분이 되지 않겠습니까? 허공에, 서론도 결론도 없이 본론만 위태롭게 서 있는 것 같은 야박한 아파트에 살다가 이런 풍요로운 공간을 갖게 되었으니 말입니다. 그는 너무나 감격하여 “이 빗자루 손에 잡아보는 것 얼마만이냐”고 감탄의 말을 아끼지 못합니다. 청소기가 아닌 싸리비나 답사리비를 손에 쥐고 마당을 쓰는 일은, 도시문명 속에서 그가 잠시 잊었으나 억압했던, 그러나 잊을 수 없고 더 이상 누를 수 없는 아름다운 추억의 마당 쓸기를 지금, 이곳에서 가능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시인은 마당을 쓸고 또 씁니다. 새벽같이 나와 쓸 것도 없는데 쓸고 또 씁니다. 그 모습이 무척이나 인상적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인상적일 뿐만 아니라 공감을 자아내기도 합니다. 시인은 왜 이렇게 마당 쓸기에 열중할까요? 그것은 자신의 싸리비에서 가지런해지는 마당의 숨결과 그의 몸을 온전히 마당과 연애하듯 합일시키는 희열, 그리고 마당의 식솔들과 그에 얽힌 추억들을 들숨과 날숨처럼 들이마시고 뿜어내는 일이 너무나도 감격적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마당 쓸기는 집과 자신의 외부를 쓰는 일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마당이 인간들의 몸의 연장이라는 점에서 자신의 내부를 쓰는 일과 마찬가지입니다. 외부를 쓸 때의 너그러움과 내부를 쓸 때의 고요함이 일에서 함께 창조됩니다.
위 시의 시인은 마당을 쓸면서 그를 감격시키는 것들이 구체적인 세목을 열거합니다. 그러나 지면이 좁으니 그것을 다 열거할 수 없습니다. 그가 압축적으로 먼저 말한 것만을 여기에 적어보면 그것을 “땅에 숨은 분홍 쓸어보는 거 얼마만이냐” “마당에 물 한 대야 확 뿌려보는 거 얼마만이냐” “땅 놀래켜보는 거 얼마만이냐”는 것입니다. 밤새 마당에 떨어진 색색의 꽃이을 쓸어보는 일, 그리고 마른 마당에 물을 한 대야 확 뿌리며 마당의 생기를 돋우는 일에서 그가 누리는 기쁨은 그가 마당을 가짐으로써 얻을 수 있는 최대의 행복입니다. 여기서 시인과 마당은 서로 아끼는 가족이며, 사로 사랑하는 연인이며, 서로 장난하는 친구입니다. 특히 어른인 그가 물을 확 뿌려 마당을 놀래킨다고 하였을 때 그 익살스러움과 악의 없는 장난기는 본인도 독자도 즐겁게 만듭니다. 그는 정말 위 시에서 어린이 같은 설렘으로 마당에 대한 애정과 감탄을 제어하지 못합니다. 그 제어하지 못하는 감탄의 솔직한 표현이 위 시를 살려냅니다. 솔직성이 힘이 되는 경우입니다.
위 시의 중심에는 어린이 같은 어른이 활약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한편으로 매우 진지한 테마가 자리 잡고 있으면서 다른 한 편으로 순진하면서도 발랄한 세계가 형성됩니다. 새 옷이나 새 신발을 사다놓고 그것을 입어보고 만져보고 신어보며 어서 아침이 밝기를 기다리는 어린이처럼, 마당을 선물 받은 시인은 밤잠을 설치고, 마당을 쓸고 또 쓸거니와, 이런 그의 행동은 유치하지 않고 소란스럽지 않습니다. 그 대신 순수하고 간절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것은 바로 위 시가 지닌 어른으로서의 진지성이 이런 솔직한 어린이다움의 한계를 보충해주기 때문입니다.
마당을 쓰는 의식儀式(?)이 끝난 후, 시인은 빗자루를 담장에 비스듬히, 기대어놓았다고 하였습니다. 흙마당은 도시의 시멘트 담장과 달리 낮고, 자연스럽고, 편안합니다. 그것은 있는 듯 없는 듯하지만, 분명히 존재입니다. 그러면서 그것은 집과 마당의 수호자 역할을 점잖게, 묵묵히, 조용히 해냅니다.
그런 담장은 기대어 오는 빗자루를 편안히 받아주고, 빗자루 역시 아무런 부담없이 그런 담장에 몸을 기대고 있을 수 있습니다. 시골의 담장은 마당에 비하여 조금은 부성적인 존재인지라, 그 위로 넝쿨장미도 몸을 기대고, 호박잎도 무성히 기어오르고, 울타리콩도 마음 놓고 열매를 맺습니다. 이런 연상 속에서 담장이 빗자루가 비스듬히 기대어 있는 풍경을 상상하니 평화로움과 한가로움이 찾아옵니다.
시인은 이렇게 빗자루를 담에 기대어놓고, 빗자루를 향하여 말을 건넵니다. 네가 오늘부터 우리집의 도깨비 노릇을 하라는 것입니다. 빗자루는 여기서 아연 도깨비라는 수호신이 되어 마당과 시인의 집을 돌보는 존재가 되고 맙니다. 총을 간직하지 않아도, 몽둥이를 마루 밑에 숨겨 놓지 않아도, 이 집과 마당을 그 빗자루가 충분히 지켜줄 것처럼 느껴집니다.
위 시엔 흙마당을 가진 사람의 감격과 흥분이 눈에 잡힐 듯이 그려져 있습니다. 마당을 쓰는 외양도, 그 일을 하는 사람의 속마음도 투명하게, 생생하게 다 보이고 잡힐 듯합니다. 그리하여 그 마당을 갖게 된 시인에게 축하의 꽃다발이라도 전하고 싶은 심정이 됩니다.
이 글을 쓰다보니 저도 흙마당을 하나 갖고 싶어졌습니다. 아침이면 그 마당을 통과하여 세상으로 나아가고, 저녁이면 다시 마당을 통과하여 집으로 들어오고 싶습니다. 그리고 집에 머무는 시간에는 그 마당을 의지하기도 하고 돌보고도 싶습니다. 그런 마당은 완충지대로서, 세상의 난폭함과 싸늘함을 막아줄 것 같고, 다시 집 안의 밋밋함과 갑갑함을 달래줄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마당의 자연과 문화와 영혼은 우리를 한껏 부드럽고 여유롭게 만들어줄 것 같습니다. 흙마당이 지닌 자연성, 모성성, 여성성, 다산성, 포용성이 이런 생각을 하도록 이끄는 것임이 분명합니다.
위의 신현정이 시 <담에 빗자루를 기대며>와 함께 읽어보면 좋은 그의 작품이 있습니다. 시 <낮달>인데 전문을 다음과 같습니다.
와, 공짜달이다
어젯밤에 봤는데 오늘 또 본다
나는 얼마나 운이 좋은 놈이면
오늘 공짜달을 다 보는가 말이다.
흙마당을 쓸던 시인이 빗자루를 담에 기대어놓고 그 마당의 한가운데서 서서 무한으로 열려 있는 하늘의 달을 바라보며 감탄하는 풍경이 눈에 잡히 듯 다가옵니다. 교외의 흙마당에 서서 막힘없는 하늘의 달을 원 없이 바라보는 일은 얼마나 즐거운가요. 누구에게나 편애 없이 공짜로 열려 있는 달을 바라보는 일이 놀라운 경험이라는 사실이 참으로 놀라운 세상입니다. 흙마당을 갖고, 그 마당에서 달을 원 없이 바라볼 수 있는 신현정 시인이 부러울 따름입니다.
―정효구, 『시 읽는 기쁨』, 작가정신, 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