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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811. 묵상글 ( 성녀 클라라 동정 기념일. - 용서는 용서가 될 때까지.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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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811. 성녀 클라라 동정 기념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용서는 용서가 될 때까지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오늘 베드로는 나에게 죄 지은 형제에게 몇 번 용서해 주어야 하는지 묻습니다.
우리가 자주 하는 질문입니다.
이에 주님께서는 일곱 번 정도를 생각한 베드로에게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고 대답하십니다.
이 대답은 일흔일곱 번이면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용서는 용서가 될 때까지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이상 미워지지 않을 때까지입니다.
용서했다고 생각한 형제가 또다시 미워지지 않고,
간신히 용서했는데 또 죄를 지어도 화가 나지 않을 때까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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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811. 성녀 클라라 동정 기념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너도 너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하지 않느냐?”(마태 18,33)
예수님께서는 공동체설교(마태 18장)에서 먼저 공동체에서의 작은 이들의 가치에 대해서 말씀하시고 “되찾은 양의 비유”를 통해 마무리 하셨듯이, 이어서 공동체에서의 형제애를 말씀하시면서 먼저 죄지은 형제에 대한 “사랑의 교정 4단계 교정”에 대해 이야기하신 다음, 이제 “매정한 종의 비유”를 통해, ‘우리가 왜 용서를 해야만 하는지?’ 그 이유를 밝혀줍니다.
오늘 <복음>의 비유에는 대조적인 두 인물이 등장합니다. 한편에는 ‘조금만 참아달라는’ 종의 간청에 대해, 단지 참아 주는 것을 넘어서서 청하지도 않은 빚을 아무런 조건 없이, ‘먼저’ 탕감해주는 ‘자비로운 왕’이 있습니다. 다른 한편에는 “동료의 간청을 들어주기는커녕 오히려 그 동료를 끌고 가서 빚진 돈을 다 갚을 때까지 감옥에 가두어버리는”(마태 18,30) ‘무자비한 종’이 있습니다.
이 비유의 주제는 “용서”입니다. “용서”의 특성을 세 가지로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용서하되 끝까지 용서하라.”는 것이요, <둘째>는 “용서하되 먼저 용서하라.”는 것이요, <셋째>는 “용서하되 진심으로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첫째> “용서하되 끝까지 용서하라.”는 말씀은 이렇게 표현되고 있습니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 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마태 18,22)
이는 용서에는 한계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곧 용서하되 무한히, 계속해서, 끝없이 용서하라는 말씀입니다. 한 번 혹은 몇 번 용서해보고 그만 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가 미처 받아주지 못한다 하더라도, 끝까지 용서하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죽기까지 우리를 용서하셨듯이 말입니다.
<둘째> “용서하되 먼저 용서하라.”는 말씀은 이렇게 표현되고 있습니다.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너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하지 않느냐?”(마태 18,33)
이는 용서의 이유를 밝혀줍니다. 곧 우리가 용서해야 하는 이유는 우리가 잘못을 인정하기도 전에, 혹은 잘못을 고백하거나 용서를 청하기도 전에, 당신께서는 ‘먼저’ 우리를 용서하신 까닭임을 말해줍니다. 우리가 사랑하기도 전에 ‘먼저’ 사랑하셨고, 구원을 청하기도 전에 ‘먼저’ 구원하신, 하느님의 자비를 입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우리 역시, 내 형제가 용서를 청하기도 전에, 혹은 비록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거나 고백하기도 전에, ‘먼저’ 용서함으로써 하느님의 용서가 그들에게 베풀어지도록 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렇게 하면 우리 역시 하느님의 용서에 참여하게 되고, 그 용서를 통해 구원으로 인도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용서해야 할 궁극적인 이유는 ‘먼저’ 우리가 용서를 통해 구원을 받았을 뿐 아니라, 바로 그 용서를 통해 타인을 구원으로 인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셋째> “용서하되 마음으로 용서하라.”는 말씀은 이렇게 표현되고 있습니다.
“너희가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마태 18, 35)
이는 용서의 태도를 밝혀줍니다. 곧 진심으로 용서하라는 말씀입니다. 선심 쓰듯이 혹은 값싼 동정심이나 의무감이나 보상을 얻기 위한 방편에서가 아니라, 남의 시선이나 평가 또는 자신의 불편한 감정을 해소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진심으로 용서하라는 말씀입니다. 곧 용서하되 하느님의 마음, 하느님의 사랑으로 용서하라는 말씀입니다. 그것은 원망도 원한도 없는, 분노도 미움도 보복도 없는, 오직 사랑만이 있는 용서입니다.
결국, “용서”란 왕이 빚진 종을 “가엾이 여겨 빚을 탕감해주고 놓아 보내는 것”(마태 18,26)으로 드러납니다. 바로 우리가 이러한 하느님의 용서와 자비를 입었기에, 이제 우리 역시 이러한 용서와 자비를 이웃과 형제들에게 베풀어야 할 일 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마태 18,22)
주님!
용서할 수 있게 하소서. 아니, 용서하기에 앞서 용서받았음을 깨닫게 하소서. 그리하여 더 큰 사랑으로 용서하게 하소서.
일곱 번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끝까지 용서하게 하소서. 무한히 용서할 뿐만 아니라, 더 큰 선으로 사랑하게 하소서. 나아가, 그가 잘 되도록 기도하고 도와주고 돌보게 하소서.
오늘도 먼저 용서하고, 용서에 사랑을 더하게 하소서. 아무리 꺾이어도 결코 희망을 버리지 않으신 주님처럼, 저 역시 당신의 희망을 저버리지 않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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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811. 성녀 클라라 동정 기념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은혜를 기억하라
사람은 누구나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많은 은혜를 입으며 삽니다. 부모나 스승의 은혜뿐 아니라 이웃의 은혜도 큽니다. 그리고 자연의 은혜는 더욱 큽니다.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 용서의 은혜는 말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이 은혜로움에 대하여 잊고 지낼 때가 많습니다. “내가 남에게 베푼 것은 새겨 두지 말고 남이 내게 베푼 것은 잊지 말라”고 말하지만, 그 반대로 살 때가 있습니다. 은혜를 입은 것을 생각하면 남에게 은혜를 베푸는 것은 당연하지만 은혜를 입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못하니 마음이 박해집니다. 은혜를 베풀었으면 그 보답을 바라지 말고, 남에게 주었으면 후회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야 미움이 생기지 않습니다. 기대하게 되면 기대하는 만큼 “네가 그럴 수 있나?” 하는 서운함만 커지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 하고 묻는 베드로에게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억지로 눈감아 주고 참아 줄 수 있는 한계를 일곱 번으로 표현했지만,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넘어 자비심으로 용서하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한없이, 기꺼이 용서해 주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사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끊임없이 은혜를 입었고, 앞으로도 입게 될 것이고 죽음에 이르러서도 남의 도움을 받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남의 허물에 대하여 용서를 베푸는 것은 당연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못 박은 원수를 위해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모르고 있습니다”(루카23,34). 하고 기도하시고 용서하기를 하느님 아버지께 청했다면 그분을 따르는 우리 역시 주님의 힘을 입어 그렇게 해야 합니다. 이것은 선행이 아니라 마땅히 해야 할 일입니다. 믿음 안에서 용기 있는 사람이 용서할 수 있습니다.
탈출기 34,6-7에는 “주님은 자비하고 너그러우신 하느님이다. 분노에 더디고 천대에 이르기까지 자애를 베풀고 죄악과 악행과 잘못을 용서한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허물에 대하여 끊임없는 자애를 베풀어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한없는 은혜를 기억하며 나도 은혜를 베풀어야 합니다. 사실 용서는 사랑의 핵심입니다. 하느님 앞에 우리가 용서가 필요한 죄인, 사랑받는 죄인이라는 것을 깨달을 때 비로소 타인을 용서할 수 있습니다. 알게 모르게 이미 많은 사랑과 용서를 받았고 은혜를 입었다는 것을 인정할 때 남에게 관대해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의 생에 있어서도 허물을 안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나약함을 지녔다는 사실을 안다면 용서 안에 머물 수밖에 없습니다.
말로는 용서한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내가 옳았다는 말을 듣고 싶고, 아직도 사과와 해명을 듣고 싶어 하는 것이 우리의 마음입니다. 더 나아가 용서를 베풀어 주었다는 것에 대해 칭찬받고 싶은 마음도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용서는 그것을 극복하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하느님께 선택된 사람, 거룩한 사람, 사랑받는 사람답게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동정과 호의와 겸손과 온유와 인내를 입으십시오. 누가 누구에게 불평할 일이 있더라도 서로 참아 주고 서로 용서해 주십시오. 주님께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서로 용서하십시오”(콜로3,12-13).
“사랑하는 여러분, 스스로 복수할 생각을 하지 말고 하느님의 진노에 맡기십시오. 성경에서도 ‘복수는 내가 할 일, 내가 보복하리라’하고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오히려‘그대의 원수가 주리거든 먹을 것을 주고, 목말라 하거든 마실 것을 주십시오. 그렇게 하는 것은 그대가 숯불을 그의 머리에 놓는 셈입니다. 악에게 굴복당하지 말고 선으로 악을 굴복시키십시오”(로마12,19-21).
바오로 사도의 말대로 악에게 굴복당하지 않고 살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이런저런 상황에 흔들리지 않고 먼저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은혜, 받을 은혜를 기억하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용서할 사람은 용서해야 합니다. 아니, 용서를 먼저 청하는 날이 되기를 희망합니다. 하느님께서 먼저 인간의 빚을 탕감해 주셨으니 인간이 인간의 빚을 탕감해 주어야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당신의 은혜를 돌 판에 새기렵니다. 마음을 다하여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용서하시는 데에 결코, 지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우리가 하느님의 자비를 청하는 데에 지쳐 버립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다른 이들을 ”일흔일곱 번“ 용서하라고 말씀하시고 몸소 모범을 보여 주셨습니다... 언제나 우리의 기쁨을 되찾아 주시는 온유함으로, 우리가 고개를 들고 다시 시작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십니다. 예수님의 부활에서 도망가지 맙시다. 무슨 일이 있어도 결코, 포기하지 맙시다. 오직 그리스도의 생명만이 우리를 계속 앞으로 나아가도록 이끕니다!”(프란치스코 교황. 복음의 기쁨3항).
@@교황께서 선출되고 어느 기자가 물었습니다.
"당신은 누굽니까? " 교황께서는 "저는 죄인입니다. 하느님의 큰 사랑을 받는 죄인입니다."하고 대답하셨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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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811. 성녀 클라라 동정 기념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산보 중에 인터넷 강의를 듣는 것은 즐거움입니다. 일전에 피부질환과 면역체계에 대한 강의를 들었습니다. 우리의 피부는 부드럽지만 우리의 몸을 외부로부터 보호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피부는 바이러스에 의해서 각종 염증이 드러납니다. 단순포진, 대상포진, 지루성 피부염, 아토피, 건선이 있습니다. 최근에는 원숭이 두창도 새롭게 피부 염증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런 피부 염증은 두 가지 원인이 있다고 합니다. 하나는 과로와 긴장으로 우리 몸의 면역력이 약해질 때입니다. 다른 하나는 과다한 영양 섭취로 인한 비만과 화학 물질에 노출되는 환경의 변화라고 합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염증을 치료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그런 염증의 원인을 치료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합니다. 그날의 피로는 그날 푸는 것이 좋고, 적당한 운동으로 몸의 균형을 이루는 것이 좋습니다. 걱정과 근심은 하느님께 맡기고 ‘이 또한 지나가리라.’는 말씀으로 위로를 얻으면 좋겠습니다.
우리의 마음에도 염증이 생길 때가 있습니다. 걱정과 근심 그리고 원망과 분노입니다. 걱정과 근심은 나의 행동과 마음에서 생길 때가 많습니다. 원망과 분노는 타인의 행동에 영향을 받을 때가 많습니다. 마음에 염증이 생기면 그것이 우리의 몸에도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맛있는 음식을 먹어도 맛을 느끼지 못합니다. 아름다운 경치를 보아도 기쁘지 않습니다. 걱정과 근심 그리고 원망과 분노는 우리의 몸을 병들게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걱정과 근심 그리고 원망과 분노를 없애도록 해야 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걱정과 근심 그리고 원망과 분노를 없애는 방법을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바로 ‘용서’입니다. 영어로 용서를 나타내는 말은 ‘Forgive’입니다. For는 ‘위하여’라는 전치사이고, Give는 ‘주다.’라는 동사입니다. 용서는 ‘위하여 준다.’는 뜻의 합성어입니다. 목적어는 없습니다. 우리는 목적어를 다양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첫째, 나를 위하여 줄 수 있습니다. 이것이 어쩌면 용서해야하는 실질적인 이유일 수도 있습니다. 용서하지 못하고 분노가 가득차면 내가 힘들고 너무 괴롭기 때문입니다. 한국인들에게 있는 ‘화병’도 어쩌면 용서를 하지 못하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용서하지 않고 무관심한 태도를 보여도 괴롭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용서는 나 자신을 위한 것이라고 말을 하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둘째, 상대방을 위해서 줄 수도 있습니다. 인간은 동물과는 달리 ‘수오지심’이 있습니다. 이는 부끄러움을 아는 것입니다. 용서 받지 못한 사람도 가슴에 ‘한’이 맺히기 마련입니다. 많은 것을 가졌어도, 삶이 풍족해져도 자신의 잘못 때문에 깊은 잠을 자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고백성사는 이런 부끄러움과 죄책감을 갖는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이름으로 용서를 주는 것입니다.
셋째, 하느님을 위해서 줄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자비하신 분이십니다. 우리가 잘못을 해도 뉘우치면 우리를 용서해 주십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하면 하느님께서는 기뻐하시고, 우리가 범한 더 큰 잘못도 기쁜 마음으로 용서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 ‘성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지만 아픈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합니다.’
용서를 이야기하는 아름다운 이야기는 루가복음 15장에서 볼 수 있습니다. 유명한 ‘돌아온 아들’ 이야기입니다. 아버지는 돌아온 아들을 용서해 주었고, 아들을 위해 잔치를 마련하였습니다. 복음은 돌아온 동생을 용서하시는 아버지에게 불평하는 큰 아들의 이야기를 전해 주고 있습니다. 큰 아들은 자기에게 잘못한 것도 아닌 동생을 용서하지 못하였습니다. 아버지의 권한인 ‘용서’에 대해서도 ‘정의’라는 이름으로 불만을 이야기 합니다. 어쩌면 이것은 우리들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자비는 하느님의 몫이고, 정의는 인간의 몫인 것 같습니다. 세상의 질서는 정의가 바로서야 합니다. 그러나 신앙은 먼저 자비가 있어야 한다고 말을 합니다. 사랑이, 용서가, 자비가 우리를 영원한 생명에로 이끌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많은 사람들이 용서하지 못해서 잠을 못 이루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용서받지 못해서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예전에 이런 표어가 있었습니다. ‘자수하여 광명 찾자!’ 저는 이렇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용서하고 마음의 평화를 얻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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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811. 성녀 클라라 동정 기념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영적혁명의 삶
-끊임없는 기도와 회개가 답이다-
“당신 얼굴 이 종에게 빛나게 하시고,
당신 법령을 저에게 가르쳐 주소서.”(시편119,135)
계속 내린 폭우로 불암산 계곡물 흐르는 소리가 우렁찹니다. 바위산이라 아무리 비가 많이 와도 산사태는 없고 물은 맑은 편입니다. 흐르는 물소리에 떠오른 좌우명시 “하루하루살았습니다” 셋째 연입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끊임없이
하느님 바다 향해 흐르는 강이 되어 살았습니다.
때로는 좁은 폭으로 또 넓은 폭으로
때로는 완만하게 또 격류로 흐르기도 하면서
결코 끊어지지 않고 계속 흐르는 강이 되어 살았습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받으소서.”
끊임없이 바다 향해 흐른 강이 상징하는 바, 끊임없는 회개의 삶, 회개의 여정을 상징합니다. 기도처럼 회개 역시 결코 끊어지거나 중단되어선 안될 겁니다. 바로 영적혁명가의 삶이기도 합니다. 강이 끊임없이 흘러야 살 듯 사람도 내적으로 끊임없이 흘러야, 새로워져야 삽니다.
이것이 진정 영적혁명의 삶입니다. 물도 고이면 썩듯이 삶도 고이면 썩습니다. 끊임없이 흘러야 맑은 물이듯 삶도 그러합니다. 예전에도 나눴던 21년전 써놨던 “혁명”이란 시가 생각납니다.
“이런게 혁명이라면
가끔은 있었으면 좋겠다.
바짝 마른 바닥에
잡초와 오물들
대책없이 썩어 악취를 발하던 시내
폭우내리니
말끔히 씻겨 정리되고
하얀 모래에 맑게 흐르는 물
살아 노래하는 시내가 되었다.
이런 게 혁명이라면
가끔은 있었으면 좋겠다.”-2001.7.19.
하늘비가 많이 내려야 맑게 흐르는 계곡물이지만, 참 깊은 산은 가뭄에도 흐르는 맑은 물입니다. 정말 끊임없이 회개하는, 깊은 영적혁명가의 삶은 하루하루 평생 맑게 흐르는 강같은 삶일 것입니다. 제가 매일 평생 쓰기로 작정한 강론 역시 쓸 때 마다 하루하루 흐르는 강같은 삶을 염두에 둡니다. 정말 끊기거나 중단됨이 없이 한결같은 삶에, 강론이 소원입니다. 어제 20대 후반 자매와의 면담성사시 뜻밖의 말이 고마웠습니다.
“존함이 ‘이’자 ‘수’자 ‘철’자 신부님입니까?”
“예,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입니다.”
“아, 신부님 묵상글 봤습니다. 명료하고 심오했습니다.”
명료(明瞭;뚜렷하고 분명함)하고 심오(深奧;깊고 오묘함)하다는 두 말마디가 고맙고 고무적이라 사전을 찾아봤습니다. 강론은 물론이고 삶도 마음도 이랬으면 좋겠습니다. 참으로 회개한 맑고 투명한 영혼에 주어지는 은총의 선물이 명료함과 심오함이 아니겠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예전 어느 평신도 신학자의 “1.깊이가 남다르다, 2.쉽다, 3.아름답다, 4.울림(감동)을 준다”라는 평을 읽고 삶도, 마음도 그랬으면 하는 생각도 간절했습니다. 이 또한 회개의 은총이라 생각됩니다. 예전 로마에서 세계 베네딕도회, 시토회, 트라피스트회 수도자 모임시 호주 출신 수녀의 “1.좋은 메시지(good messages)를 준다, 2.다채롭다(colorful), 3.실천적(practical)이다. 4.단순하다(simple)” 제 강론 평에 고무된 일이 생각납니다.
이런 평을 다시 확인하면서 삶도 마음도 영성도 한결같이 그랬으면 하는 간절한 소원이요 끊임없는 기도와 회개의 은총이 이를 가능하게 해주리라 믿습니다. 좌우간 살아 있는 그날까지 한결같이 끊임없이 맑게 흐르는 강같은 삶에 강론이 되길 소원합니다.
무지에 대한 궁극의 답도 회개뿐임을 깨닫습니다. 회개를 통해 하느님께 가까워질수록 자기를 아는 겸손과 사랑과 지혜입니다. 바로 무지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진 맑은 영혼의 소유자가, 진정한 영적혁명가가 오늘 복음의 예수님이요 제1독서의 에제키엘이요, 오늘 기념하는 성녀 클라라를 비롯한 무수한 교회의 성인들입니다.
우선 복음에서 우리는 “형제의 죄에 대한 용서”와 “매정한 종의 비유”를 통해 예수님이 얼마나 무지한 인간의 실상에 정통한지 깨닫게 됩니다. 참으로 예수님을 닮은 지혜로운 사람이라면 한두번이 아니라 끊임없이 용서할 것이며, 예수님 또한 무한한 용서를 명하십니다. 회개해서 용서가 순서이지만 용서의 사랑이 상대방을 감동시켜 회개에로 이끌기도 합니다.
만탈렌트 빚을 탕감받은 자의 백 데나리온 빚진 자에 대한 무자비한 모습에서 우리는 인간 무지의 절정을 체험합니다. 이렇게 자기를 모를 수 있을까 믿어지지 않지만 자주 겪는 무지의 현실입니다. 만탈렌트 빚진자는 바로 하느님께 무한한 사랑의 빚을 지고 살아가는 우리들을 상징합니다. 살아있음이 사랑의 기적이요 사랑의 은총인데 이걸 까맣게 잊고 무지한, 잔혹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래서 진정 무지에 대한 답은 회개뿐임을 깨닫습니다. 하느님 앞에서 참 자기를 보고 아는 회개입니다. 회개와 더불어 자기를 아는 겸손과 사랑, 지혜의 선물입니다. 다음 주인의 무지한 이에 대한 질책은 그대로 우리 모두의 회개를 촉구하는 주님의 말씀처럼 들립니다.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하지 않느냐?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
오늘 제1독서에서 에제키엘은 주님의 예표를 보여주면서 무지한 백성들의 회개를 촉구하지만 별무소득입니다. 얼마나 완고하고 완강한 무지의 이스라엘 백성들인지 오늘 복음 서두 말씀이 입증합니다. 참으로 무지한 이들 한가운데서 고군분투하는 고독한 예언자, 하느님의 전사 에제키엘입니다.
“사람이 아들아, 너는 반항의 집안 한가운데에서 살고 있다. 그들은 볼 눈이 있어도 보지 않고, 들을 귀가 있어도 듣지 않는다. 그들이 반항의 집안이기 때문이다.”
무지의 사람들! 회개가 불가능한 사람들! 바로 인간의 정의같다는 부정적 생각도 듭니다. 어려서부터 죄에 대해 회개하는 습관을, 마음의 민감성을 키워줘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마음이 굳어져 무디어 지기전 어려서부터 역시 회개의 선택과 훈련, 습관화가 절실하다는 확신입니다.
회개의 달인이자 진정한 영적혁명가가 바로 예수님을 닮은 성인들이요, 오늘 기념하는 성녀 글라라가 그 좋은 모범입니다. 회개를 통해 영적혁명의 순결한 삶을 살았기에 평생 성 프란치스코와 깊은 영적우정을 나눌 수 있었음을 봅니다.
성녀 클라라는 42년의 수도생활중 대부분을 병상에서 보내야 할 만큼 건강이 좋지 않았지만, 봉쇄구역 안에서 오로지 기도에 의지하여 이 모든 일을 이루어 냈습니다. 1253년 8월11일, 성녀 클라라는 마지막으로 “저를 지어내시어 이 삶으로 부르셨으니, 주님, 찬미받으옵소서.”라는 찬가를 부르면서 주님의 품으로 돌아갑니다. 성녀는 선종 2년만인 1255년 교황 알렉산데르 4세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고 다음처럼 클라라의 덕을 기립니다.
“클라라는 숨어 살았지만 그 생애는 모든 이에게 알려졌고, 침묵하였으나 그 명성은 세상 끝까지 자자했다. 봉쇄 담장 안에 자신을 숨겼으나 곳곳에서 사람들을 가르치게 됐다.”
참으로 주님을 닮아 끊임없는 기도와 회개를 통해 영적혁명의 삶을 살았던 성녀 클라라를 비롯한 교회의 참 보물들인 성인들입니다. 새삼 인간 고질병인 무지에 대한 답은 회개를 통한 영적혁명의 겸손과 사랑, 지혜의 삶뿐임을 깨닫습니다. 바로 주님의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회개를 통해 무지에서 해방되어 영적혁명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무지의 치유에 미사은총보다 더 좋은 처방은 없습니다.
“보라, 신랑이 오신다. 주 그리스도를 맞으러 나가라.”(마태25,6).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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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811. 성녀 클라라 동정 기념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문화 심리학자 김정운 교수가 어느 책에서 다음과 같은 아주 인상적인 글을 쓰셨습니다.
“행복은 강도가 아니라 빈도이다.”
이 문장에서 커다란 공감을 할 수 있었습니다. 일상 안에서 일어나는 작은 것에서 계속 감탄하는 사랑은 행복의 시간이 길 수밖에 없습니다. 행복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이가 커다란 행복만을 꿈꾸고 있습니다.
어느 정도의 돈이 있어야 행복하다고 말하며, 이 정도의 지위를 가지고 있어야 행복할 수 있다고 하고, 내 가족 역시 이 정도는 되어야 남부끄럽지 않게 행복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세상의 물질적인 것과 세속적인 것만을 생각하며 쫓아가는 사람이 과연 행복할 수 있을까요?
필요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 것이 전부는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행복의 빈도를 높일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행복을 자주 느끼고, 또 행복감을 길게 누릴 수 있어야 합니다. 이는 엄청난 성취를 통해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엄청난 성취는 순간의 만족에 그치고 말기 때문입니다. 작은 일상도 내 행복을 위해 필요한 시간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즉, 절대로 소홀히 해서는 안 될 귀한 시간입니다. 행복의 빈도를 높이는 것은 일상의 모든 것 안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크고 대단한 일회적인 것에서 행복을 찾아서는 안 됩니다.
베드로가 예수님께 용서에 관한 질문을 던집니다. 구약시대의 율법에는 동태복수법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즉, ‘눈은 눈으로 갚고, 이는 이로 갚아라.’라는 법칙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복수가 아닌 용서하라는 새로운 윤리적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유다인들도 하느님의 자비를 생각하여 남을 용서하기는 했습니다. 그러나 그 수는 4번을 넘지 않았습니다. 베드로는 새 나라의 새 법에서 몇 번까지 용서해주어야 하는지를 정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일곱 번을 생각합니다. 일곱이라는 숫자는 성경에서 완전수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의 기대와 달리,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즉, 용서에는 한도가 없다는 뜻입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빚진 것을 처리하는 한 왕의 처사를 하늘 나라에서 죄를 용서하는 하느님과 비교 설명하는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커다란 용서를 통해 하느님의 뜻대로 행동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용서에는 한도가 없기에, 계속된 용서를 하는 사람만이 하느님의 뜻에 맞게 살아가는 사람이고 이런 사람만이 하느님의 용서 역시 계속해서 받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행복은 강도가 아닌 빈도인 것처럼, 우리가 용서의 횟수가 많아질수록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면서 행복도 커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 행복을 나의 것으로 만들 수 있도록 오늘도 주님의 뜻을 적극적으로 실천하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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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안은 극도로 힘들고 추한 순간, 서로에 대해 아름다운 질문을 던지는 기술이다(데이비드 화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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