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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로나의 밤
 
 
 
카페 게시글
그때 그사람 스크랩 박종훈
왕짱구 추천 0 조회 231 09.11.02 23:47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할리우드에서 ‘황산벌’로 날아온 박중훈
“스타가 흥행에 관심없다는 건 ‘싸가지’없는 얘기”
●답습하거나 반복하는 일은 내 성격에 안 맞아
●시대를 아는 사람이 코미디 해야 눈물 나오게 할 수 있다
●웃음과 유머, 끝까지 가져갈 것
●배우의 자존심은 개런티 아니라 연기력
●팬들에 외면받는 외로운 예술가 되긴 싫어
●한국영화 시장점유율 40% 견인차 스크린쿼터제 존속해야

인터뷰 교섭을 하면서 박중훈에게 ‘투캅스’를 제외하고 “당신을 공부하는 데 필요한 영화 세 편만 추천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인정사정 볼 것 없다’ ‘할렐루야’ ‘게임의 법칙’을 꼽았다. ‘인정사정 볼 것 없다’는 사운드가 좋으니 DVD로 보라는 조언을 곁들였다. 집에 DVD가 없어서 비디오테이프로 봤다.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 시네플러스에서 열린 ‘황산벌’ 시사회에서 이준익 감독, 영화배우 정진영 이문식과 함께 무대에 오른 박중훈은 “관람 전에 어떤 지침을 내리는 것은 건방진 일”이라며 “후배를 격려하기 위해 시사회에 나와준 안성기 선배에게 고맙다”고 말했다.

비극적인 계백장군의 이야기를 코미디로 다룬 ‘황산벌.’ 초반부는 다소 생경하고 어색한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중반부로 접어들면서 영화의 힘에 끌려들어갔다. 처자식을 죽이고 전쟁터에 나온 계백장군은 처음부터 끝까지 단 한 번도 웃지 않는다. 연극배우들이 다수 병사로 출연해 욕설과 해학으로 지역감정과 전쟁을 풍자한다. 전라도 사투리를 쓰는 계백장군의 설정도 재밌다.

시사회 다음날 광화문 네거리 일민미술관 1층에 있는 카페 ‘이마’에서 박중훈을 만났다. ‘신동아’ 인터뷰 코너를 꾸려가면서 영화배우로는 송강호(2003년 6월호)에 이어 박중훈이 두 번째다. 박중훈은 인터뷰 협의차 필자와 첫 통화를 하면서 “송강호 인터뷰를 했던 분이죠?”라고 확인했다. 강남 아미가호텔 헬스클럽에 비치된 ‘신동아’에서 송강호 인터뷰 기사를 읽어봤다는 것이다. 박중훈은 다른 영화배우의 인터뷰 기사까지 꼼꼼히 읽는 다독(多讀) 습관이 있다.

 

1995년 전후 충무로 독주

 

-이번 인터뷰를 준비하면서 관련자료들을 조사해보니 충무로가 박중훈씨 덕에 먹고 살았던 시절이 있었더군요. 그런데 송강호 인터뷰 기사에서 ‘1980년대는 안성기, 90년대는 한석규, 앞으로 2000년대는 송강호 시대가 전개될 전망’이라고 들은 풍월로 썼습니다. 박중훈이란 이름이 빠져 서운하지 않았나요.

“기분 좋고 유쾌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생각하거든요. ‘이 꽃은 아름답다’처럼 감성이 들어간 말은 진리의 명제가 될 수 없습니다. 칼 루이스하고 벤 존슨이 0.01초 차이로 금메달 은메달을 나눠갖지 않습니까. 그러나 배우의 연기는 보는 사람에 따라 다릅니다. 예를 들어 최무룡 안성기 최민수 차태현 식으로 시대를 구분하다 보면 내가 중간에 낄 수도, 빠질 수도 있습니다. ‘신동아’를 읽으면서 송강호 인터뷰를 한 사람이 영화 쪽 전문가같지는 않고, 비전문가 입장에서 그렇게 볼 수도 있겠구나 하고 수용했습니다.

한국 영화사에서 안성기가 빠지지는 않을 거예요. 야구 투수 이야기에는 최동원이나 선동열이 반드시 들어가야겠지요. 씨름은 이만기 빼면 얘기 못할 거고…. 그러니까 나는 가끔 빠질 수 있는 처지구나, 그렇다면 좀 더 분발하자고 생각하는 거지요. 가질 수 있는데 아직 못 가진 것과 영원히 가질 수 없는 것이 있잖아요. 나는 영원히 가질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질투를 안 합니다.”

-박중훈이 충무로에서 독주했던 시기는 언제쯤이라 할 수 있습니까.

“1995년 전후라고 생각합니다. 작품으로 보면 ‘투캅스’에서부터 ‘인정사정 볼 것 없다’까지.”

-‘황산벌’은 감이 어떻습니까. 흥행에 성공할 것 같습니까.

“작품 자체로는 만족합니다. 코미디적 요소도 있지만 나중에 비극으로 끝나거든요. 그런 것이 알려지면 관객에게 사랑받을 수 있을 것 같아요.”

-전도연 이미숙이 주연한 ‘스캔들-남녀상열지사’와 ‘황산벌’ 등 역사적 소재를 현대적 감각으로 재해석하는 작품이 유행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 영화의 소재가 최근 몇 년 사이에 다양해졌습니다. 과거에는 어떤 영화가 성공하면 베끼기 일색이었던 적도 있었습니다. 최근 뜨는 장르가 무엇이냐고 물으면 선뜻 대답 못하겠어요. 그런 점에서 고무적이라 생각합니다. 기본적으로 영화에서 코미디, 액션, 에로는 어느 시점에서나 인기 있는 장르죠.”

-‘황산벌’은 코미디영화인데 계백장군은 한 번도 웃지 않더군요. 병사들은 코미디를 하고 장군은 트래지디(비극)를 하는 묘한 구성입니다.

“황산벌에서 5000명이 죽었다고 합니다. 충장(忠將) 계백의 죽음 또는 백제의 패망을 코미디라는 이름으로 희화화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계백장군을 흠모하고 기리는 수많은 사람이 있지 않습니까. 가벼운 유머를 섞되 계백은 장엄하게 그려야 한다는 주문이 있었지요. 이준익 감독은 “당신이 코미디를 잘하는 배우로 각인돼 있고 수염을 달고 갑옷을 입고 사투리를 쓴다는 설정 장치가 재미있으니 거기서 한 번 더 꺾지 말라’는 주문을 했습니다. 하지만 관객이 박중훈이란 배우에게 웃음을 기대할 것 아닙니까. 결국 감독 뜻에 따르기로 했죠. 코미디도 하면서 동시에 장엄함을 주며 두 마리 토끼를 잡기가 벅찼습니다.”

-계백장군이 전라도 사투리를 쓴다고 해서 충청도 쪽에서 항의가 있었다지요.

“원래 김유신 장군은 승장이기 때문에 역사적 기록이 풍부하게 남아 있습니다. 김유신 장군은 경북 김천 생입니다. 그런데 계백은 패장이기 때문에 언제 태어난 사람인지도 모르고 고향에 대해서도 확실한 기록이 없어요. 백제는 충청권, 경기 이남권, 호남권을 영토로 차지한 나라입니다. 부여가 수도니까 충청도 사람이었을 가능성이 크다고는 할 수 있겠지만 호남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역사적 사실을 정면으로 왜곡하는 것이 아니라면 영화적인 가상으로 이해해야 하는 것 아닐까요. 그러나 충청도 분들께 미안합니다. 충청도 사람들은 계백장군에 대해서 자부심을 갖고 있어요. 계백장군 기념동상도 충청도에 있는데 계백장군이 전라도 사투리를 쓰니까 박탈감이 생길 수도 있겠지요.”

삼국통일 이전 신라가 영남정권이라면 고구려는 이북정권이고 백제는 충청·호남 연합의 DJP정권이었다. 이 영화는 본래 2002년 대통령선거 직전에 개봉해 논란거리를 만들어볼 생각이었다고 한다. 시나리오 기획을 맡은 조철현 타이거픽처스 대표는 고향이 전남이다. 박중훈의 부친은 경북 청도 출신이다. ‘영남 2세’인 박중훈은 영화 찍느라 전라도 사투리를 공부했다.

 

지역감정 확인이 ‘황산벌’ 제작 의도

 

-신라 병사들이 진흙을 짓밟으면서 ‘백제놈들’을 향해 지역감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장면이 인상적이더군요.

“이 영화를 통해 지역감정을 확인하려는 제작 의도가 있었습니다. 군사정권 때 독재자들이 정권유지를 위해 지역감정을 이용하지 않았습니까. 이 영화에서도 장군이나 고위층이 전쟁에 이기기 위해 병사들에게 백제를 밟아야 한다는 의식을 심어주고 있습니다. 우리 현대사에 비슷하게 대입될 수 있는 부분입니다. 어느 전쟁을 막론하고 총칼 들고 나와 목숨을 잃는 것은 민초들입니다. 이라크전쟁에서도 부시와 후세인이 직접 싸우는 건 아니잖아요.”

-‘거시기’(이문식 분) 병사가 고향으로 돌아와 어머니와 만나는 마지막 장면의 배경 화면에 바둑판처럼 구획정리된 논이 가득하더라고요. 거시기가 뛰어오는 길도 구불구불한 옛길이 아니고 경운기가 다닐 정도로 넓고 반듯한 길인데, 실수인가요, 의도적인가요.

“의도적인 건 아닙니다. 옛날엔 두렁이 구불구불한 논이 더 많았겠지만 반듯하게 구획된 논도 있지 않았겠어요?”

-영화의 마지막 장면과 같이 바둑판처럼 구획된 논은 해방 이후 생긴 겁니다. 그건 분명히 경지정리된 논이에요. 명감독도 디테일에서 실수할 때가 있다고 하더라고요.

“옥의 티다(웃음). 감독을 비롯해 제작진이 농촌 출신이 아니라서 그런 것까지 읽지 못했을 겁니다. 영화라는 게 참 조심해야 돼요.”

 

이 악물고 연기하다 잇몸치료 받아

 

얼마 전 CNN 래리 킹 라이브(Larry King Live)에 케빈 코스트너가 출연했다. 코스트너는 ‘늑대와 함께 춤을’ 등으로 우리에게도 익숙한 배우이고 감독부문 오스카상을 받았다. 래리 킹이 “영화가 흥행에 실패했을 때 힘들지 않느냐”는 질문을 던지자 코스트너는 좋은 영화의 기준을 이렇게 설명했다.

“흥행 여부가 궁극적으로 영화의 가치를 말해준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내가 생각하는 영화의 진정한 판단기준은 5년 또는 10년 후 아들에게 보여줄 만한 영화여야 한다는 거지요. 20년이 지났을 때도 타당하게 느껴지고 같은 의미로 다가와야 합니다. 아들에게 이 영화를 보렴, 이 장면은 꼭 봐야 한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내가 영화를 평가하는 기준입니다.”

-코스트너의 말에 동의합니까.

“영화에서 흥행이 중요하지 않다는 의미라면 건방진 거 아니예요? 엄청난 돈을 개런티로 받는 스타가 흥행이 잘되면 다행이고, 안 되면 그만이라고 말하는 것은 싸가지없는 얘기예요. 그러려면 돈을 받지 말든지…. 우리가 지금 무인도에서 영화하는 게 아니잖아요. 관객이 있기 때문에 영화를 만드는 거예요. 아무리 뛰어난 소설가의 작품이라 하더라도 책 뒤에 정가가 붙어 있다면 상업소설입니다. 내가 출연한 영화가 유료로 영화관에 걸리는 순간 나는 상업배우가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영화는 좋은데 흥행이 안 된 것이 자랑거리는 아니란 얘기죠. 흥행을 의식해 중심이 흔들리는 영화를 만들어선 안 되겠지만 관객을 끊임없이 배려해야 합니다. 극단적으로 말해 나는 100년 뒤 캡슐에 담긴 필름을 꺼내 명작이라는 평가를 받는 영화보다는 상영 당시 사랑받는 영화를 선택하고 싶습니다. 물론 이 시대에도 사랑받고 다음 시대에도 부끄럽지 않은 영화가 된다면 더 좋겠지만. 나는 이 시대의 외로운 예술가가 되긴 싫어요.”

-자녀는 몇 있습니까.

“여덟 살짜리 아들과 여섯 살 된 딸이 있습니다. 그리고 두 살짜리 딸도….”

-10년 뒤 자녀들에게 ‘이 영화 보라’고 추천할 영화가 있다면 무엇입니까.

“이명세 감독이 찍은 2편의 영화입니다. ‘나의 사랑 나의 신부’ ‘인정사정 볼 것 없다’를 추천하고 싶어요. 하나만 선택하라면 ‘인정사정 볼 것 없다’입니다. 지금 봐도 옛날 영화같지 않거든요. 이명세씨는 독특한 영화감독입니다.”

박중훈은 한국 최초로 할리우드에 진출한 배우다. 처음에는 할리우드의 싸구려 액션 영화 ‘아메리칸 드래곤’에 출연했다. 그 다음에 출연한 ‘찰리의 진실’은 ‘양들의 침묵’을 만든 조너선 드미 감독이 메가폰을 잡았다. 영화 속 비중은 그리 크지 않다. 드미 감독은 ‘인정사정 볼 것 없다’에서 박중훈의 연기에 매료돼 그를 캐스팅했다고 한다. 박중훈은 이 영화를 찍으며 이를 악물고 연기하다 잇몸 치료를 받아야 했다.

이번엔 그를 주연으로 하는 영화 ‘비빔밥’을 촬영하러 할리우드로 간다. 유부남 선배 변호사와 사랑을 하는 로펌의 백인 미녀 변호사는 선배가 이혼을 미뤄 속을 끓일 때마다 한국식당을 찾는다. 그녀의 단골 메뉴는 비빔밥. 박중훈은 그녀의 하소연을 듣는 웨이터다. 동양인 웨이터와 백인 미녀 변호사의 사랑, 그야말로 영화 같은 이야기다.

 

“동양남자의 명예회복 해주고 싶다”

 

-중국계 청룽(成龍), 저우룬파(周潤發)는 할리우드에 진출해 성공했습니다. 박중훈씨에게 기대를 거는 팬들이 많습니다. 어떤 계획을 갖고 있습니까.

“같은 골프장이라도 골퍼에게 매번 다른 느낌을 줍니다. 공이 놓인 위치가 다르기 때문이지요. 골프에는 결코 답습이 없습니다. 그래서 재밌습니다. 날씨와 바람도 달라집니다. 답습하거나 반복하는 일은 어릴 적부터 내 성격에 안 맞았어요. 그래서 학교를 싫어했고 규칙적 생활을 좋아하지 않았죠.

어느 순간 중언부언 복습을 하는 연기에 지쳐 있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할리우드에 가서 성공하면 큰돈을 벌 수 있고 세계적으로 이름을 떨칠 수 있겠지만 반복하지 않고 답습하지 않는다는 게 가장 큰 매력인 것같아요.

구미 사람들에게 동양여자는 신비롭지만 동양남자는 좀 열등하다는 인식이 있거든요. 동양남자는 눈이 가늘게 찢어지고 힘이 약하고 유머도 없고, 자전거 타고 배달하는 사람으로 인식하는 거죠. 할리우드에서 성공한 청룽과 저우룬파도 발차기 아니면 쌍권총으로 각인돼 있죠. 발차기와 쌍권총이 아닌 한 인간의 매력적인 연기를 보여주고 싶다는 갈망이 있습니다. 동양남자의 명예를 회복해주고 싶다고나 할까요.”

-한국영화가 세계시장에서 상품성을 인정받고 흥행에 성공하는 일이 유망하다고 생각합니까.

“한국영화가 메이저급 해외시장을 석권하는 것은 한 세기 안에는 불가능하다고 봐요. 가장 큰 이유가 언어예요. 메이저 언어는 영어 중국어 스페인어 프랑스어입니다. 기본적으로 영어권 영화가 세계시장을 석권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요. 이치로가 가고 박찬호가 갔다고 해서 미국 메이저 야구를 동양인이 석권했다고 할 수는 없거든요. 역시 메이저리그의 대표인종은 흑인과 백인입니다. 중국권이 낮잠을 깨서 어느 순간 기운이 동양으로 넘어와 세계적인 미의 기준이 달라진다면 모르겠지만….”

-미국에서 동시녹음으로 영화를 찍자면 영어 대사에 어려운 점은 없습니까.

“물론 있죠. 다만 미국사람처럼 영어를 잘할 필요는 없었어요. 미국에서 태어난 에이시언 아메리칸(Asian American) 역을 맡은 게 아니고 아시아에서 미국으로 이민 간 사람의 역할을 했거든요. 그리고 다이얼로그 코치가 있습니다. 다만 상대방 대사에 반응하기가 어려워요. 계산해서 나오는 반응은 본능적으로 튀어나오는 반응처럼 자연스럽지 못하거든요. 청룽이 ‘아이 돈 노우(I don’t know)를 ‘아이 똔 노우’ 라고 했거든요. 내 영어에 한국식 악센트가 많지만 그걸 트레이드마크로 생각하고 당당하게 나가려고 합니다.”

박중훈 하면 ‘투캅스’를 떠올리는 팬들이 많다. ‘투캅스’는 프랑스 영화 ‘마이 뉴 파트너‘를 리모델링한 영화다. ‘투캅스’ 1편은 개봉관에서만 87만명의 관객을 끌어들였다. 당시엔 전국집계가 나오지 않았다. 요즘 기준으로 보면 800만 관객을 동원한 셈이다.

-경찰을 신랄하게 고발하는 내용이 많았는데 항의가 들어오지는 않았습니까.

“문민정부 출범 이후 표현의 자유에 대한 굴레가 완화됐습니다. 경찰에서 비공식적으로 항의를 하긴 했어요. 경찰을 비하하는 내용이 많았지만 경찰이 국민과 가까워지는 계기가 됐다고 생각합니다. 형사역을 네 번 해봤어요. ‘투캅스 1’ 에서 강직한 경찰, ‘투캅스 2’에서 부패경찰, ‘아메리칸 드래곤’에서는 인터폴, ‘인정사정 볼 것 없다’에서는 깡패형사.”

 

“중앙일간지, 시사월간지 다 읽는다”

 

박중훈과 인터뷰중인 황호택 논설위원.

박중훈은 인생에서 큰 시련을 겪은 적이 있다. ‘마누라 죽이기’를 촬영하던 중 대마초를 피운 혐의로 구속됐다. 구속적부심을 통해 풀려난 뒤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그를 광고모델로 썼던 기업들이 상품 이미지에 타격을 입었다며 줄소송을 제기하는 바람에 그는 깡통을 차다시피했다.

미국의 일부 주에서는 대마초가 합법화돼 있다. 대마초는 담배보다 중독성이 약한 편이다. 클린턴은 대통령선거에 출마해 대마초를 피웠다는 공격을 받자 “실험 삼아 피우긴 했지만 연기를 들이마시지는 않았다”고 변명한 적이 있다.

-대마초 피운 것이 교도소에 집어넣고 패가망신시킬 일이라 생각합니까.

“대마초 자체가 유해하냐 무해하냐에 대해서는 따지고 싶지 않아요. 나는 이 사회에서 혜택받은 사람으로 악법도 지켜야 할 입장이에요. 인생공부 했습니다. 예전엔 기고만장했는데 그 일로 인해 기가 꺾였어요.”

-데뷔 초기에는 청춘물을 했고 ‘게임의 법칙’ ‘인정사정 볼 것 없다’ 같은 액션물도 했지만 지금은 코믹배우 이미지가 굳어져 있는 것 같습니다. 역할 변신을 시도하고 싶은 생각이 없습니까.

“말론 브랜도처럼 카리스마 강한 배우가 병약한 병자역을 할 수도 있겠지만 관객이 보고싶어 하지는 않을 거예요. 말론 브랜도한테는 역시 ‘대부’를 기대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관객이 박중훈에게 바라는 역이 있고, 또 내가 잘할 수 있는 역이 있지 않습니까. 배우가 천의 얼굴을 가져야 됩니까. 아니면 한 가지 얼굴을 깊이 있게 가져야 됩니까. 나는 후자 쪽에 무게를 둡니다. 웃음과 유머를 끝까지 가져가고 싶어요. 칼 루이스가 100m, 200m달리기 하고 넓이뛰기하면 됐지 마라톤까지 잘할 수 있습니까. 100m달리기와 마라톤은 쓰는 근육이 다릅니다.”

-영화전문지 ‘스크린’ 10월호의 박중훈 특집에 ‘내가 좋아하는 것 100가지’ 목록이 나오더군요. 그 중 첫째가 가족이고 둘째가 신문 읽고 뉴스 보기던데….

“중앙일간지와 시사월간지는 거의 다 읽습니다. 영화는 시대의 거울이거든요. 나는 영화라는 장르를 통해 시대에 참여하는 거지요. 최소한 그 시대가 어떤 시대라는 걸 알고 엔터테인먼트를 하는 것과 그냥 웃기는 엔터테이너 노릇이나 하는 것은 다릅니다. 항상 내 자신과 후배들에게 세상 돌아가는 것을 알고 업데이트를 해야 한다고 독려하고 있습니다. 찰리 채플린이 시대를 몰랐다면 가슴 저미는 코미디 연기를 할 수 있었을까요. 시대를 아는 사람이 코미디를 해야 눈물이 나오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요사이 독자들이 헷갈려요. 어떤 신문은 필요 이상으로 칼날을 세우고 있고, 친정부 신문들은 너무 감싸고 도니까…. 신문을 집에서 8개나 구독하면서 양쪽 다 읽는데 내가 편집을 하면서 봅니다. 독자로서 다양한 시각이 존재한다는 것은 박수 칠 일이지만 기사에 의도가 들여다보일 때는 피곤하고 답답해져요.”

 

“두루뭉실한 거짓말이 더 악의적”

 

-동아일보에 연재한 ‘박중훈의 세상스크린’에서 ‘우묵배미의 사랑’에 출연할 때 개런티 문제로 승강이를 벌인 이야기를 재밌게 읽었습니다. 이번에 ‘황산벌’에서는 얼마나 받았습니까.

“밝히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3억~5억원 수준이겠죠?

“밝히지 않는 게 좋을 거 같고요. 남이 인정해주는 것보다 조금 적게 받으려 합니다. 가치대로 따박따박 받으면 충무로에서 미움 받습니다. 잘나갈 땐 관계 없지만 인기가 떨어지면 기회를 안 줘요. 괘씸죄가 제일 무섭다고 하잖아요. 돈을 많이 가져가면 그만큼 관객을 더 동원해야 하니 부담이 돼요.

아버지께서 이사관 하시다가 그만두고 산하단체로 나왔는데 비슷한 시기에 옷 벗은 다른 사람보다 봉급을 훨씬 적게 받았지요. 어머니께서 핀잔을 주니까 아버지께서 ‘두고 봐라. 나는 적게 받으니 연임될 수 있다. 많이 받는 사람은 연임 안될 것’이라고 하셨죠. 나중에 그대로 됐어요.

개런티가 배우의 최고 자존심은 아니에요. 배우의 자존심은 연기력입니다. 그러나 제작자나 배우 아닌 사람들이 배우에게 돈 많이 가져가지 말라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비싸면 안 쓰면 되잖아요. 시장가격이 형성돼 있는데 배우 스스로 덜 받겠다는 건 갸륵한 일이지만 그것을 강요해서는 안 됩니다. 나는 19년차 배우지만 단 한 번도 1등 개런티를 받은 적이 없어요. 내 목표는 1.5등 개런티입니다. 그래서 내가 총알을 안 맞아요. 좀 비겁하죠.”

박중훈이 청춘스타로 뜨고 나서 합동영화사 곽정환 사장이 그를 ‘뜨겁고 부드럽게’라는 제목의 에로영화에 출연시키려고 했다. 에로영화가 한창 유행할 때였다. 곽사장은 그를 캐스팅하고 싶은 욕심에 7시간 동안 방에 가둬놓고 재떨이를 날리기도 했다. 박중훈이 그 자리에서 “제임스 딘도 영화 세 편 하고 죽었는데 지금 내 나이도 제임스 딘하고 비슷합니다. 이제 영화 안 하겠습니다. 이걸로 끝내겠습니다”고 말하자 풀어주었다고 한다.

-합동영화사의 ‘깜보’는 박중훈씨의 첫 출연작입니다. 어찌 보면 은인인데…. 그렇게 사정하고 위협하는데도 거절한 이유가 궁금해요. 이미 꽤 컸을 때니까 영화제작자의 고압적 태도에 반발한 건지, 아니면 작품이 마음에 안 든 건지….

“그 작품은 하기가 싫었어요. 컸기 때문에 거절한 게 아니라 아직 제대로 못 컸기 때문에 거절한 것일 수도 있어요. 그리고 나를 ‘깜보’에 캐스팅한 것은 이황림 감독이었습니다. 그후 이황림 감독의 영화 ‘인연’에 출연했고 다른 영화에 조연으로 나간 적도 있어요. 나는 신의를 저버리는 사람이 아닙니다. 의리에 관한 내 나름의 철학이 있습니다. 급류에 빠져 죽는 사람을 건지려고 아무 장비도 없이 뛰어들어 함께 빠져죽는 것은 진정한 의리라고 생각지 않습니다. 빨리 나무막대나 튜브를 찾는 것이 합리적이고 진정한 의리라 보거든요. 당시 곽정환 사장이 절체절명의 위기에 놓였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소설작품이 영화의 원재료가 되는 경우가 많은데요. 황석영씨의 글을 보니까 박중훈의 폭넓은 독서량에 놀라곤 한다는 말을 했더군요.

“황석영씨의 작품 가운데 ‘낙타누깔’ ‘무기의 그늘’ ‘삼포가는 길’을 좋아합니다. 내가 SBS 특집극 ‘머나먼 쏭바강’(박영한 원작)을 촬영하느라 베트남에 1년 가량 체류했습니다. 거기서 황씨의 ‘무기의 그늘’을 읽으며 출중한 작가라고 생각했습니다.

최근에는 소설보다 수필을 좋아합니다. 최인호씨의 ‘나는 아직도 스님이 되고 싶다’, 서울대 생물학과 최재천 교수가 쓴 ‘생명있는 것은 다 아름답다’를 좋게 읽었습니다. 이어령씨는 개인적으로 영향을 많이 받은 분입니다. ‘붉은 악마의 문화코드로 읽는 21세기’를 읽다보면 이분의 천재성에 놀라곤 합니다. 작은 것을 통해 전체를 읽는 능력이 있다고 할까요. 그러니까 사과 떨어지는 것을 보고 만유인력을 생각해내는 거나 마찬가지죠. ‘축소지향의 일본인’도 좋은 책이었습니다. 나는 이어령씨의 글에서 소양을 쌓는 데 도움을 받았어요.”

-황석영씨는 송두율씨와 대비되죠. 황씨는 북한체제 깊숙이 들어갔다가 돌아와 군말없이 5년 동안 감옥생활했잖아요.

“그렇죠. 송씨의 경계인이라는 말이 비겁하게 느껴져요. 새빨간 거짓말보다 두루뭉실한 거짓말이 더 악의적이에요. 적절한 비유인지 모르겠지만 ‘서울대 나왔다’고 거짓말을 했다가 들통나면 ‘서울대 구경갔다가 왔다고 했지, 언제 졸업했다고 했느냐’는 식의 거짓말 말이죠. 이런 식의 궤변은 비겁해요.”

 

문화권력 누리려는 영화기자는 문제

 

박중훈은 1966년생이고 1985년 중앙대 연극영화과에 입학했다. 영락없는 386이다. 박중훈은 대학시절 사회적 이슈에 관심이 없어 데모하는 학생은 모두 ‘빨갱이’인 줄 알았다고 한다.

“공무원인 아버지는 자식들에게 데모하지 말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습니다. 나는 밥상머리에서 공화당시대의 논리를 주입받으며 자랐습니다. 그리고 사회인식이 다른 과보다는 상대적으로 결여돼 있는 예술대학을 다녔습니다. 경제적으로 어려움 없는 환경에서 자라 사회적으로도 불만이 없었어요. 스무 살부터 영화배우를 해 일이 바쁘니까 다른 데 신경 쓸 겨를도 없었습니다. 그때 사회참여를 못한 것에 대해 부끄러움을 가지고 있어요.”

-‘세상스크린’ 칼럼에서는 ‘최루가스에 울먹이던 시절이 없었더라면 지금의 민주시대가 올 수 있었을까요’라고 썼더군요. 그런 인식의 변화는 언제 왔습니까.

“1980년대 말에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이 노태우 대통령이 당선되니까 대부분 탄식했습니다. 양김(김영삼, 김대중) 가운데 하나가 대통령이 됐어야 한다는 거였죠. 영화배우가 되면서 많은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지식인, 정의파, 이런 사람들이 시대에 대해 탄식했습니다. 그들로부터 영향을 받았습니다.

배우생활을 하느라 강의를 제대로 못들었어요. 학점이 모자라 네 학기를 더 다녔습니다. 정신없이 대학시절을 보낸 거죠. 영화배우는 왜 하느냐, 영화배우는 무엇을 해야 하느냐, 이런 명제를 끊임없이 고민하다 보니까 시대를 이해하기 위한 공부를 하게 됐습니다. 알고 싶은 갈증이 생긴 거죠. 연령으로 보면 대학을 졸업한 후 20대 중후반에 깨달은 게 많았다고 할까요. 그냥 바쁘게 기계처럼 사는 데 대한 회의가 생기면서 미국 유학을 결정하게 된 거죠.”

그는 뉴욕대 대학원에서 연기교육학으로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영화를 찍고 나면 수많은 영화평이 나옵니다. 영화언론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합니까.

“배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는 질문과 비슷해요. 배우를 일괄적으로 묶을 수 없듯이 영화언론도 마찬가지입니다. 매체의 수준과 소속 기자의 수준이 대개 비슷하지만 왕왕 아닌 경우도 있습니다. 더러 권위적으로 영화평을 쓰고 이걸로 또 다른 권력을 획득하려는 기자들이 있어요. 나는 그런 기자에게 아부까지는 못하지만 싫은 얘기는 안 하는 편이에요. 기자한테 싫은 얘기해서 좋을 게 뭐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런 기자는 속으로 무시하는 편이죠.

영화에 대해 겸허한 마음을 갖고 모르는 것은 공부하고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에게 따스한 시각을 가지고 대안을 제시하는 기자를 존경합니다. 이런 기자들이 쓴 기사는 우리들에게 채찍이나 독려가 될 수 있습니다.”

‘덕담이나 하겠지’ 하고 던진 질문인데 평소 영화언론에 대해 생각했던 바를 작심한 듯 털어놓았다.

 

인상 깊은 배우·감독은 안성기, 강우석

 

-‘박중훈의 세상스크린’을 연재할 때 다른 사람이 대필해주지 않냐는 질문을 많이 받았던 모양이죠? ‘알래스카의 에어컨’ 편에서 ‘세상스크린은 내가 직접 쓰고 있다’고 추신을 달았더군요. 혹시 신문사 데스크가 많이 고치지 않았습니까.

“거의 고치지 않았어요. 아마 철자법이나 띄어쓰기 정도 고쳤을 겁니다.”

-모아서 책이라도 만들면 어때요.

“제의가 왔지만 거절했습니다. ‘연기론’ 같은 전문서적이라면 몰라도…. 지금 제가 인생을 회고할 때는 아닙니다.”

-동종업계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코멘트하기가 조심스럽겠지만 영화판에서 만난 감독 배우들에 대해 ‘200자 평’을 해보면 재밌을 것 같아요.

“나하고 친하다고 느끼는 사람을 빠뜨리면 섭섭해하는 경우를 더러 봤습니다. 그래서 말하기가 조심스럽습니다. 안성기 선배는, 배우로서보다는 한 인간으로서 그 분의 영향을 크게 받았습니다. 인격적으로 훌륭하고 머리가 좋은 분입니다. 덕이 많은 사람이에요. 강우석 감독은 뛰어난 머리와 재능이 있습니다. 이 정도만 하지요.”

박중훈은 2001년 ‘싱글벙글’이라는 영화배우 골프모임을 만들었다. 회장은 안성기, 부회장은 한석규 박중훈이다.

-골프는 언제 시작했어요.

“5년 됐습니다. 안성기 선배가 1987년에 권했는데도 안하던 것을 호기심 에 시작했는데 재밌더라구요.”

-핸디캡은 얼마나 됩니까.

“보기 플레이어입니다. 라이프 베스트 스코어는 82타입니다. 지난 6월 용산고등학교 동창인 농구선수 허재와 라운딩을 하다 싱글 스코어 직전까지 간 거지요. 아직 싱글은 못해봤습니다. 나는 스트로크 게임은 잘 안합니다. 배우로서 복받고 사는데 골프 쳐서 남의 돈까지 따면 얄밉게 생각하겠지요. 그렇다고 져줄 수도 없지요. 네 명이 22만원 만들어 한 홀에 1만원짜리 스킨스 게임을 즐깁니다.”

카페 ‘이마’의 옆자리에 앉았던 여성들이 양해도 구하지 않고 사진을 찍자 박중훈이 얼굴을 살짝 찌푸렸다. 인터뷰 녹음을 하는데 계속 큰 소리로 떠들어 신경을 거슬르던 여성들이었다.

“인터뷰하면 칼로리가 많이 소모돼요. 인터뷰어와 둘이 만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고 독자들과 만나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죠. 어떻게 보면 수만 명과 얘기하고 있는 것이죠. 말 한 마디가 조심스럽습니다. 인터뷰에 집중하고 있는데 갑자기 사진을 찍으니까….” 박중훈은 화를 내지는 않았다.

-안성기씨 하고는 집이 300m 가량 떨어져서 골프장에도 함께 간다지요. 어제 ‘황산벌’ 시사회장에도 왔더군요.

“나는 성기형을 존경하고 성기형은 나를 챙겨줍니다. 참여하는 경조사와 행사가 비슷하고 집도 가깝습니다. 영화까지 같이 찍을 때는 아닌 말로 변 색깔도 비슷할 겁니다(웃음). 왜냐하면 먹은 음식이 같으니까요.”

-안성기씨는 핸디캡이 얼마나 되나요.

“부동(不動)의 싱글입니다. 85개 넘기는 걸 못 봤어요. 80대 초반에서 주로 놉니다.”

-배우가 되기 전 청소년 시절에 가장 감명 깊게 본 영화는 무엇입니까.

“알 파치노 주연의 ‘스카페이스’라는 영화가 있어요. 그 영화에서 배우의 매력이 너무 진해 큰 영향을 받았습니다. ‘대부’ ‘디어헌터’도 기억에 남습니다.”

-나도 마피아영화를 좋아합니다. 한국 조폭영화가 결국 마피아영화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미국 마피아영화에 나오는 배우들은 웃지 않고 실감나는 연기를 하는데, 박중훈씨는 ‘10분 이상 진지해지는 걸 못참는다’는 평이 있더군요.

“같은 마피아지만 내가 하는 건 마피아 코미디입니다. 마피아영화를 느와르로 그린 영화가 ‘대부’ 같은 거고 로버트 드니로의 ‘애널라이즈 디스’는 조폭 코미디 영화지요. ‘게임의 법칙’은 느와르에 가깝고요. 같은 마피아 소재지만 접근하는 방법은 다르죠. 장르를 구분한다는 건 무의미할 수도 있어요. 예술장르는 평론가들이 분류하기 위해 나눈 것이지 예술가가 이렇게저렇게 분류해 만든 건 아니거든요.”

 

‘투캅스’ 시사회 때 아버지 인정받아

 

-박중훈씨의 글에 돌아가신 아버지를 회고하는 사부곡(思父曲)이 있더군요. 아버지는 어떤 분이었습니까.

“내 성격의 80~90%는 아버지께서 만들어주었습니다. 보건사회부에서 이사관까지 지냈지요. 높은 관직에 올랐던 건 아니지만 멋있는 분이었습니다. 우리 집 가훈이 재미있어요. 첫째는 ‘매사는 열심히’, 둘째는 ‘행동은 정정당당하게’입니다. 아버지께선 약주에 취해 들어오시면 항상 가훈을 말씀하셨죠.

가훈을 실천하다 시행착오를 겪기도 했어요. 겸손하면서 정정당당한 것이 분명히 같이 갈 수 있는 일인데도 마치 정정당당한 것은 겸손하지 않은 것으로 착각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적을 많이 만든 시절도 있었고…. 아버지의 가르침은 영화계에서 나의 중심을 잡아주었습니다.

아버지는 약자에게는 가슴이 넓은 편이었고 강자에겐 당당히 맞설 줄 아는 분이었거든요. 한 남자로서 아버지를 좋아하고 본받으려 했습니다. 내가 인기인이니까 어딜 가나 잘해주잖아요. 그래서 나한테 하는 걸로 사람을 평가하지 않아요. 다른 사람한테 어떻게 하나를 보고 평가하는 편이에요.”

박중훈은 3형제 중 막내다. 아버지는 아들이 용산고 연극부에 들어가자 심하게 때렸다. 중훈이 고시에 패스하거나 육군사관학교에 들어가길 바랐다고 한다. 중훈이 다닌 연극영화과는 대학 부설학원쯤으로 생각하고 ‘딴따라’의 길로 들어서려는 막내를 창피하게 생각했다는 것이다.

-아버지님께서 언제부터 막내를 인정하기 시작했습니까.

“‘투캅스’ 시사회 때 사람들이 몰려와 박수를 치자 흐뭇해하셨죠. 1987년엔 백상 예술대상 신인상을 받자 아버지께서 흥분하셨어요. 아버지와 친한 분이 백상 사회봉사상을 탔거든요. TV가 시상식을 생중계했습니다. 공무원들은 훈장 표창 같은 것에 큰 의미를 두니까요.

아버지께서 어머니와 싸우는 걸 못 봤어요. 나는 ‘즐거운 우리집, 어서오라’라는 노랫말 같은 집에서 자랐어요. 아버지한테 잘못해서 야단 맞을 때 빼고는 집에 항상 웃음꽃이 피었거든요. 내가 코미디를 하고 웃는 상이 된 것도 사실 부모님 덕분이죠.

아버지는 어린 시절에 불행하게 자랐나봐요. 할아버지가 할머니를 버리고 중국으로 갔다고 해요. 아버지는 자식들에게 행복한 가정을 물려줘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있었던 것 같아요. 아버지가 늘 ‘중훈아, 아비 어미 싸우는 거 봤냐’며 ‘너도 이렇게 살아라’고 하셨어요. 결혼한 지 10년 됐는데 화목한 결혼생활이란 게 참 힘들더라고요. 초반에 많이 싸웠습니다. 아직도 갈 길이 멀지만….”

 

“‘짠돌이’ 아니다”

 

부인 윤순씨는 재일교포다. 일본에서 미국 뉴욕대 대학원으로 유학을 왔다가 박중훈을 만났다. 박중훈과 연애할 때는 한국말을 한마디도 못했으나 결혼한 뒤 연세대 한국어학당을 다녀 지금은 썩 잘한다.

“농구선수 허재가 동창입니다. ‘인정사정 볼 것 없다’ 찍느라 집에 자주 못들어갔더니 큰애가 ‘아빠 우리 집에 또 놀러오세요’라고 말했어요(웃음). 충격을 받고 우울했는데 허재가 ‘차라리 너는 다행’이라고 위로하더군요. 허재는 합숙하다 집에 들어가면 아들이 ‘아빠 집 어디냐, 빨리 가라’고 한대요(웃음).

그런 면에서 이해해주는 아내가 고맙지만 나도 노력해야죠. 총각 때와 결혼 초반에는 몰랐는데 가정을 수십 년 동안 건실하게 지키는 인생 선배를 보면 존경심이 들어요. 쉬운 일이 아니거든요.”

-어떤 타입의 여배우를 좋아합니까. 다시 결혼한다면 이런 여배우와 하고 싶다는 타입이 있을 거 아닙니까.

“다시 결혼한다면 아무래도 지금 살고 있는 사람과는 다른 스타일, 그러니까 지금 마누라의 단점을 보완할 수 있는 사람과 결혼하고 싶지 않겠어요? 그런데 그런 상상을 하지 않으렵니다. 왜냐하면 아내와의 의리를 지켜야 해요. 내가 대마초사건으로 전재산을 다 뺏기고 고작 몇십 만원 남았던 시절이 있거든요. 막막하던 시절부터 시작해 내가 힘들고 외로울 때마다 나를 떠나지 않고 수많은 위기 속에서 보여준 이 사람의 신의를 내가 저버리면 안 됩니다. 그래서 나는 그녀가 떠나지 않는다면 내가 먼저 등을 돌리고 싶지는 않아요.”

여담으로 물어본 건데 심각한 사부인곡(思夫人曲)을 읊는다.

-한때 새롬기술에 투자해서 꽤 큰돈을 벌었다는 이야기를 신문에서 읽었습니다. 코스닥 거품이 한창일 때였지요. 지금도 주식투자를 하고 있습니까.

“새롬기술은 친구가 어렵다고 해서 도와줬던 거예요. 2억7000만원 빌려주었다가 나중에 주식으로 받았죠. 하지만 나는 그때나 지금이나 주식투자 안합니다.”

-그래도 코스닥 붐이 한창일 때라 ‘따따블’은 했겠네요.

“언론에 보도된 대로 50억원, 100억원은 아니고 따따블 정도는 돼요.”

-스포츠지 연예부 기자가 ‘검소한 생활철학으로 사치와 낭비와는 담을 쌓고 산다. 도가 지나쳐 가끔 동료들로부터 너무 짜다는 핀잔을 듣는다’고 코멘트했더군요. 이런 평가에 동의합니까.

“전혀 동의하지 않습니다. 나는 돈 씀씀이에서 남에게 제 할 도리를 못 했다고 생각한 적이 한번도 없어요. 소위 한 턱 낼 때도 있습니다. 나를 ‘짠돌이’라고 얘기하는 사람들은 전혀 나를 모르거나 친하지 않은 사람들이에요. 내가 그들의 기대치를 충족시키지 못하는 점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영화계에서 짜다는 소리를 듣지 않으려 펑펑 쓰는 것도 어리석은 짓이에요. 내 모토가 ‘알뜰하게 살자’인데 짠돌이하고 알뜰하게 사는 것 하고는 큰 차이가 나죠. 알뜰한 것은 자기 도리를 하면서 사는 것이고 짠돌이는 경우가 없는 돈 씀씀이라고 생각합니다.”

-한 달에 용돈을 얼마나 씁니까.

“쉽게 얘기할게요. 얼마 전에 ‘황산벌’에 출연한 배우들하고 술을 먹었어요. 시사회 끝나고 후배들이 ‘선배님 술 한 잔 먹읍시다’ 해서 30여 명이 가라오케에 갔어요. 요금이 400만원 나오더군요. 그렇지만 개런티도 몇 억원 받는다지, 돈도 좀 있다지 하는 생각을 후배들이 갖고 있으니 한 잔 사야 할 것 아니에요? 걔네들이 얻어먹고 나서 ‘진짜 후하다’고 생각지 않았겠지만 그래도 400만원이 들었어요. 아내는 아직도 옷을 재래시장에서 삽니다. 티셔츠 하나에 2000원 줬다고 좋아합니다. 가계부를 꼬박꼬박 적습니다. 400만원 써야 할 때는 쓰지만 쓸데없이 4000원을 낭비하는 것에 대해서는 집착하는 편이에요.”

박중훈에 대해 각계에 지인이 많은 ‘왕발’이라는 평이 있다. 교제범위의 ‘문수’가 크다보면 밥 먹고 술 마시고 경조사 챙기고…경비가 들게 마련이다.

-좋아하는 주종은 뭡니까.

“국산 양주를 주로 먹습니다. 특별히 좋은 술 한잔 할 때는 발렌타인 30년을 먹어요. 워낙 비싸니까 술집에서 발렌타인을 먹은 적은 없습니다. 병째로 마실 때는 요즘 새로 나온 ‘리볼브’를 마십니다. 임페리얼도 좋아하고….”

-주량은 얼마나 됩니까.

“박중훈 하면 술 할 정도는 아니지만 큰 실수 안 하고 한 병은 먹어요. 20대 초반에는 소주를 많이 먹었어요. 소주는 서민의 벗인데 내가 고급 위스키를 좋아한다고 해서 미안하네요.”

 

“CF 200여 편 찍었지만, 이젠 가린다”

 

-요즘은 어떤 CF에 출연하고 있습니까.

“한 편도 없습니다.”

-아니, 왜 그래요.

“내가 광고를 한 200편 찍었어요. 4∼5년 전 동시에 열대여섯 편을 찍은 적도 있죠. 이 광고 저 광고 다 나오니까 지겨워지고 희소성도 없어진 거죠. 5년 전에 자의로 영화를 쉬면서 광고까지 같이 그만뒀습니다. 이제는 돈 된다고 넙죽넙죽 받아먹지 않고 내게 도움이 되는 광고를 해야겠다 하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광고 모델료와 영화 출연료 중에서 어느 쪽이 쏠쏠합니까.

“한 제품의 1년 광고 모델료가 대충 인기배우의 영화 한 편 출연료의 절반 정도 돼요. 투입된 노동력과 비교하면 광고 모델료가 훨씬 비싼 거죠. 타이슨이 2회전 1분3초 만에 상대를 때려 눕히고 대전료를 90억원 받으면 1분에 20억원 이상 받은 거지요. 하지만 타이슨의 눈물 젖은 노력과 샌드백 치는 시간은 계산 안 한 거지요.

배우의 광고 모델료는 노동력의 가치가 아니라 이미지의 가치를 파는 겁니다. 이미지를 형성하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는가에 대한 대가입니다. 더불어 사는 사회에 위화감을 조성할 정도로 많은 건 사실이지만….”

-스크린쿼터 폐지 반대운동에 열심히 참여하더군요. 국산영화 하면 저질의 대명사처럼 여겨지던 시절도 있었지만 요즘은 국내 상영영화의 40% 정도가 한국영화입니다. 그래서 스크린쿼터 없애도 한국영화가 고사하지 않을 거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어요. 주로 경제계에서 나오는 이야기지만 영화시장 지키자고 효자상품, 자동차 반도체 조선 철강 수출이 어려움을 겪게 해서는 안 되는 거 아닙니까.

“한국영화가 40~50% 증가한 원인과 결과를 혼동하면 안 됩니다. 교통사고가 줄었다고 해서 신호등을 없애자는 논리거든요. 신호등이 있었기 때문에 교통사고가 줄어든 겁니다. 시장점유율 40%로 버틴 원인을 파고들면 스크린쿼터가 있기 때문이라는 거죠. 스크린쿼터가 별 거 아니라면 미국 영화업계가 그렇게 양보하라고 떼쓰겠습니까. 거꾸로 뒤집어보면 별 거니까 트집을 잡죠.

포스코 철강이나 삼성전자의 반도체도 미국에서 덤핑 판정을 받습니다. 거인의 나라 미국도 이렇게 자국 산업을 보호하고 있습니다. 한 편 제작하는데 평균 1300억원 들어가는 할리우드 영화와 50억원짜리 국산영화가 한국시장에서 똑같은 소비자가격으로 경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미국영화에 덤핑 판정을 하지 않습니다. 영화개방을 하지 말자는 게 아닙니다. 쌀시장 개방하고는 달라요. 그러나 미국영화의 독과점을 제도적으로 막아보자는 얘기죠.”

 

“영화배우 되면서 성실해졌다”

 

-어떤 집에 삽니까.

“강남구 도곡동 타워팰리스에 삽니다. 작년 12월에 입주했습니다.”

-몇 평짜리?

“102평입니다.”

필자의 지인이 타워팰리스 120평으로 최근 이사했다. 전망이 좋아 대모산이 바라다보인단다. 매일 특급호텔 스위트룸에서 자는 기분이라 밖에 나가기가 싫어질 지경이라고 했다. 120평짜리가 40억원을 호가하니 102평도 30억원이 넘을 것이다.

-‘깜보’라는 영화 주연을 맡기 위해 영화사 사람들이 자장면 먹다 단무지가 떨어지면 중국집에 단무지 심부름 가고 대걸레로 청소도 했다지요. 매사에 집념이 그렇게 강한 편입니까.

“학창시절에는 성실한 학생이 아니었어요. 영화배우가 되면서 성실해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나 스스로도 놀랄 정도였으니까요. 내가 좋아하는 걸 해서 그런가 봐요. 내가 좋아하는 걸 하면서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컸다고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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