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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히 서서
출애굽기 14: 10-14
10 바로가 가까이 올 때에 이스라엘 자손이 눈을 들어 본즉 애굽 사람들이 자기들 뒤에 이른지라 이스라엘 자손이 심히 두려워하여 여호와께 부르짖고
11 그들이 또 모세에게 이르되 애굽에 매장지가 없어서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냐 어찌하여 당신이 우리를 애굽에서 이끌어 내어 우리에게 이같이 하느냐
12 우리가 애굽에서 당신에게 이른 말이 이것이 아니냐 이르기를 우리를 내버려 두라 우리가 애굽 사람을 섬길 것이라 하지 아니하더냐 애굽 사람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낫겠노라
13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영원히 다시 보지 아니하리라
14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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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펄전(Charles H. Spurgeon) 목사가 목회하면서 어려운 때가 있었습니다. 힘드는 일을 당하여 낙심하고 있을 때 교인의 집을 심방하게 됩니다. 담이 있는 마당에 소가 있습니다. 그런데 담에 갇힌 소는 고개를 쳐들고 멀리 초원을 바라보고 서있습니다.
스펄전 목사가 주인에게 묻습니다. "저 소는 왜 저렇게 고개를 쳐들고 있습니까?" 주인이 대답합니다. "초원의 풀을 먹고 싶은데 담을 넘어갈 수 없으니 주인이 문을 열어주기만 기다리며 바라보고 있는 것입니다."
스펄전 목사님은 그 때에 깨닫습니다.
"환경 때문에 일이 막히고 사람 때문에 막혀있는 시간들이야말로 고개를 들고 하나님이 예비해 놓으신 더 좋은 것들을 바라볼 시간이로구나!". 모든 것이 막혔다 싶을 그 때는 바로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할 때입니다.
가나안을 향해 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로 진퇴양난의 어려움에 빠지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심히 두려워합니다. 그리고 낙심하며 원망합니다. 그러나 본문은 어려운 상황의 해결책을 제시합니다.
13절입니다. "너희는 두려워말고 가만히 서서 하나님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가만히 서서' 는 '잠잠히 있으라' 는 뜻입니다. 잠잠히 하나님을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힘을 얻는 것은 잠잠히 하나님을 신뢰할 때입니다.
이사야 30절 15절입니다. "주 여호와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가 말씀하시되 너희가 돌이켜 안연히 처하여야 구원을 얻을 것이요 잠잠하고 신뢰하여야 힘을 얻을 것이어늘 너희가 원치 아니하고". 하나님이 귀하게 사용하신 인물들은 한결같이 하나님 앞에 가만히 서서 하나님의 역사를 바라보던 사람들입니다.
다같이 '오 신실하신 주' 를 찬양합니다.
"하나님 한 번도 나를 실망시킨 적 없으시고
언제나 공평과 은혜로 나를 지키셨네
오 신실하신 주 오 신실하신 주
내 너를 떠나지도 않으리라
내 너를 버리지도 않으리라
약속하셨던 주님
그 약속을 지키사 이후로도 영원토록 나를 지키시리라
확신하네. 지나온 모든 세월들 돌아보아도
그 어느 것 하나 주의 손길 안 미친 것 전혀 없네."
어느 누구도 진퇴양난의 어려움 앞에서 원망하고 불평하는 백성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오히려 그들을 인도하던 모세의 모습을 본 받아야 합니다. 이제 여러분들은 가만히 서서,
첫째로 하나님의 구원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패니 크로스비(Fanny J. Crosby)는 생후 6개월만에 실명함으로 평생 빛을 보지 못하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믿음의 눈을 뜨고 살았습니다. 시각 장애인으로의 삶은 암담했지만 결코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한 발자국도 나아갈 수 없는 현실 속에서도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보았습니다. 앞길을 열어 가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느끼며 살았습니다. 그리하여 믿음의 눈이 열려진 그녀는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찬송가 231장을 통하여 그녀는 그 나라에서 있게 될 일을 노래합니다.
"주가 맡긴 모든 역사 힘을 다해 마치고 밝고 밝은 그 아침을 당할 때
요단 강을 건너가서 주의 손을 붙잡고 기쁨으로 주의 얼굴 뵈오리
나의 주를 나의 주를 내가 그의 곁에 서서 뵈오며
나의 주를 나의 주를 손에 못 자국을 보아 알겠네."
본문 13절에서 모세는 선포합니다.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여기의 '보라' 는 '주목하라' 는 뜻입니다. 앞으로 행하실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환경을 바라보지 말고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환경을 바라보고 사람을 바라보았습니다. 10절입니다. "바로가 가까워 올 때에 이스라엘 자손이 눈을 들어 본즉 애굽사람들이 자기 뒤에 미친지라 이스라엘 자손이 심히 두려워하여."
어려운 일을 당할 때 어려운 일만 바라보면 좌절하게 됩니다.
괴롭히는 사람들만 바라보면 낙심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진퇴양난의 벽에 부딪혔을 때 눈을 들어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러기에 모세는 하나님이 이루시는 구원을 바라보라고 외칩니다.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사람을 다시는 영원히 보지 못하리라".
인생은 바라보는 방향에 따라 결정됩니다. 바라보는 것의 영향을 받습니다. 여러분이 늘 보는 것은 무엇입니까? 늘 보는 것에 따라 행복해지기도 하고 불행해지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환경을 바라 보지말고 하나님을 보라고 명하십니다.
이제 어려움에서 눈을 돌려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아무리 위급한 상황에 처해도 하나님만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해야 합니다
레이머(Leymer)는 미국의 물리학 박사입니다. 한번은 자가용 비행기를 몰고 학술 강연을 가던 중 기계 작동이 정지하였습니다. 비행기가 하강하면서 추락할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때 레이머는 3초의 기도를 하였습니다. "하나님 살려주세요. 열심히 주를 섬기겠습니다."
그런데 비행기가 땅에 닿을 순간에 갑자기 위로 상승하는 것입니다. 옆에 보니 예수님께서 기계를 작동하고 계셨습니다. 그 후 레이머 박사는 "나는 주님과 함께" 의 슬로건으로 평생을 살았습니다.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순간에 주님은 우리에게 다가오셔서 추락하는 삶의 기수를 올려주십니다.
그리하여 레이머 박사는 가는 곳마다 "3초의 기도가 필요합니다" 라고 간증합니다. 3초의 기도는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는 방법입니다.
그렇지만 어려움이 닥쳤을 때 3초의 기도를 못할 때가 더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할 때 위기를 분명히 해결하여 주십니다.
진퇴양난의 어려움이 닥칠 때 경계할 것은 두려움입니다. 두려움은 우리의 기도를 가로막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심히 두려워하여 여호와께 부르짖었다고 했습니다. 10절입니다.
"바로가 가까워 올 때에 이스라엘 자손이 눈을 들어 본즉 애굽사람들이 자기 뒤에 미친지라 이스라엘 자손이 심히 두려워하여 여호와께 부르짖고". 그들의 부르짖음은 신앙적인 부르짖음이 아닙니다. 그들의 부르짖음 속에는 믿음이 없습니다. 두려움이 그들의 믿음을 삼켰기 때문입니다.
두려움은 믿음이 없는 곳에서 힘을 발휘합니다. 그리고 두려움은 원망과 불평을 불러옵니다. 11절입니다. "그들이 또 모세에게 이르되 애굽에 매장지가 없으므로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뇨."
두려움이 임할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생각한 것이 아니라 떠나온 애굽을 생각했습니다. 추격하는 바로를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떨게 만듭니다. 사람을 의지하게 만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움을 정복해야 합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신뢰함으로 정복해야 합니다.
사람을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능력만 의지해야 합니다. 잠언 29장 25절은 증거합니다. "사람을 두려워하면 올무에 걸리게 되거니와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안전하리라". 하나님은 지금도 당신을 의지하는 사람의 방패가 되어 주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셋째로 하나님의 역사를 기다려야 합니다
미국 수정교회 로버트 슐러(Robert H. Schuller) 목사의 간증입니다.
"우리 교회의 스탠리 장로가 심각한 심장 질환을 앓다 혼수상태에 빠져 병원에 입원한 적이 있었습니다. 담당 의사는 스탠리가 전혀 희망이 없으며 살아난다 해도 식물인간이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슐러목사는 심방을 하던 중 유명한 신경 외과의사 브랜튼 박사의 말이 생각났습니다.
"두개골 부분에 심각한 질병을 앓고 있는 사람일지라도 여전히 뇌에는 정상적인 부분이 아주 많습니다."
나는 그의 말을 믿고 스탠리 장로가 들을 수 있도록 그의 귀에 대고 말했습니다.
"스탠리 장로님, 슐러 목사입니다. 당신은 곧 회복될 것입니다." 그러자 그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그가 희망을 가질 수 있었던 첫 번째 표식이었습니다.
스탠리는 혼수 상태에 빠져 있으면서도 회복된다는 꿈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역사를 기대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후 스탠리 장로는 아내의 차를 타고 교회에 목발도 없이 걸어들어 왔습니다.
나는 뛰어나가 그를 맞이하였고 그는 말했습니다. "목사님, 당신은 위대한 분입니다." 그때 나는 대답했습니다. "스탠리 장로님, 위대하신 분은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어려움을 당할수록 침착해야 합니다. 조급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로버트 모건(Robert J. Morgan)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두려워하지 말아야 할 이유를 "홍해의 법칙(Red Sea Rules)" 이란 그의 책에서 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두려워할 이유가 충분했다. 하지만 이유를 따져서 생각한다면 안전을 확신할만한 이유가 더 더욱 충분했다. 그들에게는 동맹군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동맹군은 애굽에 재앙을 내려 바로를 굴복시켰을 뿐 아니라, 광야에서도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이스라엘을 자상하게 인도하신 분이었다. 그 동맹군은 하나님이시다."
이스라엘 백성들 가까이에는 하나님이 계셨습니다. 바로 보다 더 가까이 계셨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두려움 때문에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지 못한 것입니다. 그렇지만 모세는 바로 곁에 하나님이 계심을 알았고 기도함으로 언제나 가까이 임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역사를 기다렸습니다. 신명기 4장 7절입니다.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가 그에게 기도할 때마다 우리에게 가까이하심과 같이 그 신의 가까이함을 얻은 나라가 어디 있느냐".
그러므로 어려울 때 할 일은 기도하며 하나님의 역사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급할수록 기도하며 하나님의 일하심을 기다려야 합니다.
길이 안 보인다고 길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으나 하나님의 눈에는 보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볼 수 없는 것까지 보십니다. 길이 없을 때는 길을 만들어 주십니다. 그러므로 진퇴양난의 상황에서 두려워하거나 원망치 말아야 합니다.
오히려 두려움을 기도로 바꾸어야 합니다.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당신 가까이에 계십니다.
이제 '가만히 서서' 하나님을 구원을 바라보십시오. 그 하나님을 의지하십시오. 그 하나님을 기다리십시오. 그리할 때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인생을 역전시켜 주실 줄로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출처: 성경 벌레들 글쓴이: 성경 벌레
여호와의 구원을 보라
출 14: 10-14
영국에서 있었던 일화입니다. 폭우가 쏟아지던 어느 여름날 한 농가를 지나가던 여인이 그 집 주인에게 우산 하나만 빌릴 수 있는지 물었습니다. 주인은 별 생각 없이 자신이 쓰던 우산 중에서 다 부서지고 낡은 우산 하나를 쓰도록 내어 주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주인인 한 여인에게 우산을 씌워 주고 그곳을 떠났습니다. 다음날 어떤 사람이 아주 예쁘게 포장된 편지와 함께 그 우산을 다시 가져왔는데 그 편지에는 ‘참 감사합니다.’ 라는 정중한 인사와 함께 어제 우산을 빌렸던 여자의 싸인이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그 싸인은 엘리자베스 여왕이라고 되어 있었습니다. 농부는 얼마나 가슴을 치며 후회하였겠습니까? 그런 줄 알았더라면 내가 정성을 다해서 그분을 영접했을 텐데 그분에게 내가 가진 가장 좋은 우산을 드렸을 것을, 영국 한 농가에서 있었던 이 농부의 실수, 즉 여왕을 여왕으로 알아보지 못하고 제대로 대접하지 못했던 이 비극적인 실수가 첫 번째 성탄을 맞이했던 유대 땅에서도 있었습니다. 만왕의 왕이시고 만 주의 주이신 예수께서 유대 땅에 오셨건만 이 사건의 엄청난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그분을 만날 수 있는 특권을 상실했던 사람들이 있었고 그러나 반대로 예수님을 영접하고 맞이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크리스마스(Christmas)란 예수님이 탄생하신 날입니다. 인간 스스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죄에서 우리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예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탄생하신 날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예수님의 탄생을 기뻐하며 축하하고 경배하고 예배하는 날로 크리스마스를 지켜야 합니다. 크리스마스(Christmas)는 Christ(그리스도)+Mas(경배, 예배)라는 말이 합성된 말입니다. ‘그리스도’란 구약 히브리어 ‘메시아’(Messiah)에 해당하는 헬라어로서 ‘하나님께로부터 기름부음을 받은 자’라는 뜻이고 ‘마스’란 가톨릭의 미사와 같은 말로 ‘예배’를 드린다는 의미입니다. 다시 말해서 크리스마스란 그리스도의 탄생을 축하하고 예배하는데 그 본래의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러한 크리스마스의 정신이 오늘 우리 주변에는 차츰차츰 잊혀져 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때때로 절망적이며 한 발자국도 전진할 수 없는 상황이 발생하게 됩니다. 마치 앞에는 홍해 바다요, 뒤에는 애굽의 훈련된 군대가 달려와 진퇴양난의 이스라엘 백성의 모습이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성탄과 송년 주일을 맞이하면서 여호와의 구원을 보는 축복자들이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1. 원망을 버려라
본문 11절 “그들이 또 모세에게 이르되 애굽에 매장지가 없어서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냐 어찌하여 당신이 우리를 애굽에서 이끌어 내어 우리에게 이같이 하느냐"
“어찌하여 이끌어 내어” 본 구절을 필두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려움에 직면할 때마다 구원의 은혜를 욕되게 하는 불신과 원망 섞인 불평을 서슴없이 내뱉었습니다. 하나님은 이 백성이 자신을 “열 번이나“ 시험했다고 했습니다. 한편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어 내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모세를 원망하므로 자신들의 믿음이 얼마나 뿌리 없는 것인가를 잘 드러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을 차지하게 된 원인은 오직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 때문입니다. 애굽에 매장지가 없어서 이끌어 내어 광야에서 죽게 하느냐고 원망하였습니다.
사진을 찍을 때 어떤 표정으로 찍으시나요? 그 사진의 표정이 여러분 인생을 결정짓는다면 여러분들은 사진을 평범하게 찍지 않을 것 같습니다. 1960년대에 캘리포니아의 버클리대학교에서 두 명의 심리학 박사들이 재미있는 실험을 합니다. 여학교에서 졸업생 140명을 대상으로 30년 동안 추적을 들어갑니다. 사진을 찍을 때 진짜 미소로 웃음을 지었던 사람과 가짜 미소를 지었던 사람을 추적을 들어갔습니다. 놀라운 결과가 나옵니다. 진짜 미소를 지었던 사람들의 인생에 행복도, 만족도, 성공, 건강까지 모든 것이 월등하게 차이가 나기 시작하더라는 겁니다. 원망하면 은혜와 구원을 빼앗깁니다. 원망만 버려도 인생과 신앙이 달라집니다. 웃음과 감사로 여호와의 구원을 보며 사는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2. 우상을 버려라
본문 12절 “우리가 애굽에서 당신에게 이른 말이 이것이 아니냐 이르기를 우리를 내버려 두라 우리가 애굽 사람을 섬길 것이라 하지 아니하더냐 애굽 사람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낫겠노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자신들을 구원하여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실 것이라고 선포한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였고 불신하였습니다. 믿어야 할 것을 믿지 않고 믿지 말아야 할 것을 믿는 것이 우상입니다. 자유를 위한 역경보다는 안일을 위한 굴종을 쉽사리 택하는 이스라엘의 노예근성과 인생의 주인을 쉽게 바꾸는 불신앙을 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약속이나 은혜와는 상관없이 일시적인 편리나 안락을 위하여 에서와 가룟 유다처럼 쉽게 바꾸고 팔아 버리는 믿을 수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상황과 계산에 따라 언제든지 배신하였습니다. 사탄에게 예속된 사람들입니다. 진실한 성도는 어떠한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오직 하나님만 섬겨야 합니다. 세상의 금과 명예를 다 준다 하여도 흔들리지 않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오늘 한국교회에 두 가지가 흔들리고 있습니다. 크리스천들이 거룩한 생활을 지키지 못해 국민들에게 인정을 받지 못하게 되었고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이적과 기적의 능력이 사라져 가고 있습니다. 이렇게 거룩한 생활에서는 국민들의 지탄을 받게 되었고 경건의 능력은 상실되고 경건의 모양만 남아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교회의 위기라고 말합니다. 어느 40대 아주머니가 편의점에 물건을 사러 갔습니다. 젊은 남자 점원이 반갑게 맞이하며 말했습니다. “어서 오세요 아주머니, 정말 젊고 멋있어 보여요.” 기분이 좋아진 아주머니가 점원에게 말했습니다. “어머 그래요? 내가 몇 살 같아요?” “30대 초반 같으세요.” “어머, 그렇게 봐주니 정말 고마워요.” 그러자 남자 점원이 말했습니다. “뭘요. 저희 가게에선 뭐든지 30% 할인해 드리잖아요.”
사탄의 달콤한 음성에 귀를 기울이면 죽습니다. 사탄은 모든 사람들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아니하고 지옥으로 질질 끌고 갑니다. 모든 우상을 다 버리고 여호와의 구원을 보며 사는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3. 두려워 말라
본문 13절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영원히 다시 보지 아니하리라"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두려워 말라고 권고하고 있습니다. 성경에 366번 나온다고 합니다. 매일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수는 많았지만 오합지졸이었습니다. 노예근성과 훈련도 없고 질서도 없었습니다. 마귀는 성도에게 두려운 마음을 줍니다. 그래서 아무것도 못하게 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마음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닙니다. 믿음이 부족할 때 두려움이 생깁니다. 하나님의 주권과 능력과 축복을 믿으면 두려움은 순간 안개처럼 사라집니다. 성도는 이겨 놓고 싸우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면 두려운 마음이 생깁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신앙하라는 말씀입니다. 넘실대는 홍해의 바닷물이나 중무장한 애굽 군대를 바라보지 말고 뒤로부터 오시는 하나님의 크신 능력을 소망해야 합니다. 앞뒤가 막혔다 하더라도 하늘은 언제나 열렸습니다. 한 쪽문이 닫히면 반드시 한 쪽문은 열립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과 홍해 바다 앞에서 구원 받은 것처럼 성도는 죄에서 구원 받은 것입니다. 불가능하게 생각했던 홍해가 갈라짐으로 다 죽을 수밖에 없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 살았고 다 죽일 거 같던 애굽 군인들은 바다에 빠져 다 죽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고 이것이 하나님의 구원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우리의 모든 것을 초월하십니다. 세상의 여러 가지 두려운 마음을 다 버리고 하나님의 구원을 보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미국 일리노이 주 다우너즈 글로브란 이름의 작은 도시가 있습니다. 그 도시에 메리온 웨이브(Marion E. Wade)란 이름의 젊은이가 있었습니다. 꿈 많은 한창 나이의 어느 날 사고를 당하여 두 눈이 멀게 되었습니다. 절망에 빠지게 된 그는 방 안에만 들어앉아 눈물로 세월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어느 날부터 하나님께 부르짖기 시작하였습니다. “하나님 제가 왜 이 젊은 나이에 눈이 멀어 폐인이 되어야 합니까?” 그렇게 애타게 부르짖는 어느 순간 하늘로써 은혜가 임하였습니다. 마음 속 깊은 곳으로 은혜가 임하고 기쁨이 넘치게 되면서 삶에 대한 용기가 용솟음치게 되었습니다. 그 후로 그의 나날이 달라졌습니다. 살아야 할 이유를 찾게 되고 내일에 대한 희망을 품게 되었습니다.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여 손끝으로 글자를 읽힌 후에 ‘Service Master Co'란 이름으로 회사를 설립하였습니다. 그리고는 고린도전서 10장 31절을 기업경영의 신조로 내세웠습니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이 말씀을 바탕으로 삼고는 경영의 목표를 다음 세 가지에 두었습니다. 첫째 종업원들의 행복을 추구한다. 둘째 고객들의 만족을 추구한다. 셋째 이익증대를 추구한다. 회사는 나날이 번영하여 99년의 경우 40개국에서 8조원의 수익을 올렸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회사로 지금도 번영을 누리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들이 배우고 익혀야 할 것이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란 신조입니다. 모두 두려움을 버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갈 때 날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가는 순간까지 여호와의 구원을 보고 누리게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은 성탄절이며 송년 주일입니다. 불평과 우상과 두려움을 버립시다. 미련 없이 과감하게 버립시다. 그리하여 날마다 여호와의 구원을 보며 증거하며 살아가는 행복한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위기와 승리
출 14: 10-16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출애굽기14:13)
인간은 살아가면서 누구나 막다른 위기를 경험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 막다른 위기는 우리의 인생을 바꾸어 놓는 결정적인 요인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신앙의 사람들은 이 막다른 위기를 승리와 영광이 되게 하는 전환기로 삼아야 합니다. 이 위기는 우리를 새롭게 하고 위대하게 하고 가치 있게 하는 변화의 기회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막다른 위기에 대처할 때에 나의 방법이 아니라 하나님의 방법을 따라 가고자 합니다. 하나님의 방법이 인간의 시각과 판단으로 볼 때는 어리석고 무모하게 보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방법은 우리에게 우리 영혼에 풍성함을 줄뿐 아니라 하나님의 깊고 높고 넓고 큰 사랑의 관계로 이끌어 줍니다
. 우리가 위기를 맞이할 때에 그것이 실패의 길에 있는 것 같고 고통만이 있는 것 같지만, 하나님의 방법에 순종함으로 종국에는 생각해보지도 못했던 많은 것을 찾는 기쁨과 승리를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의 400년간의 노예생활에서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지도자로 세우시고, 애굽 땅에 10가지의 재앙을 내리심으로 애굽의 바로 왕을 항복시키시고 이스라엘 민족을 해방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바알스본 맞은편 홍해에 이르러 진을 쳤습니다. 그러나 마음이 변한 바로는 애굽의 병거와 마병과 군대를 보내어 추적하게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홍해바다를 앞에 두고 애굽군대의 추격을 당하는 막다른 위기에서 두려움과 절망에 빠졌습니다. 그러므로 모세를 원망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진퇴양난의 막다른 위기를 맞이한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막다른 위기를 하나님의 이름에 영광이 되게 하셨고 이스라엘 민족에게 승리와 영광이 되게 하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막다른 위기와 어려움을 경험 할 때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의 막다른 위기는 하나님과 함께 대처하는 것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방법은 우리를 승리하게 하시고 영광스럽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럼 막다른 위기가운데 있는 이스라엘 민족을 하나님의 어떻게 구원하셨습니까?
“두려워하지 말고”, “너희는 가만히 있을 지니라“ 고 했습니다.
우리가 막다른 위기를 맞이할 때에 하지 말아야 할 것은 하지 말아야 하고 지켜야 할 것 지켜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막다른 위기에서 두려움에 떨며 소란을 피웠습니다. 그들은 모세에게 불평하며 원망했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애굽에 매장지가 없어서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냐? 어찌하여 당신이 우리를 애굽에서 이끌어 내어 우리에게 이같이 하느냐. 우리가 애굽에서 당신에게 이른 말이 이것이 아니냐? 이르기를 우리를 내버려 두라. 우리가 애굽 사람을 섬길 것이라 하지 아니하더냐? 애굽 사람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낫겠노라."(출14:11-12)
그러나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희는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영원히 다시 보지 아니하리라(14)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출14:13-14)
모세는 먼저 ‘두려워 말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막다른 위기에서 먼저 두려움에서 자유 하도록 해야 합니다. 두려움을 갖는 것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기 때문입니다. 두려움을 갖는 것은 믿음이 부족하기 때문이며 그것은 하나님을 능력을 모욕하는 불신앙입니다.
모세는 두려워 말라고 하면서 ‘가만히 있을지니라.’고 했습니다. 가만히 있으라는 것은 두려움을 잠재우라는 것입니다. 두려움에 빠져 떠들지 말고 소란을 피우지 말라는 것입니다. 불평의 소리와 원망의 소리를 멈추고 그 소리를 잠재우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행하시는 구원을 보도록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신앙의 사람들이 막다른 위기를 겪을 때마다 대처해야할 하나님의 방법은 먼저 가만히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대체로 원망과 불평의 소리를 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계시다면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느냐?”, “하나님은 우리에 대하여 무책임하신 분이시다”, “하나님이 정말 계신가?” 고 불평하며 원망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런 원망과 불평의 소리는 신앙생활에 회의를 가지도록 하고, 소란스러움을 조성하기도 합니다. 이런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가만히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막다른 처지에서 기도합니다. 그런데 기도하되 하나님의 뜻을 찾는 지혜로움을 구하고,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행하시는 일을 찾는 기도 보다는, 두려움과 공포에 사로잡혀 원망으로 부르짖는 기도를 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런 기도를 성경은 “이스라엘 자손이 심히 두려워하여 여호와께 부르짖고”(10)라고 기록했습니다. 죽게 됐다고 원망하며 울부짖는 기도에서 조용히 하고 하나님의 행하시는 일을 보기 위한 믿음의 기도를 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막다른 위기와 어려운 상황에 있을 때, 불신앙에서 나오는 절망과 불평과 원망의 감정의 소리를 잠재우고,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보도록, 곧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싸우시는 것을 볼 수 있도록, 더욱 깊은 기도의 세계를 만드시기를 바랍니다. “너희는 가만히 있을 지니라”는 하나님의 방법에 있기를 바랍니다.
“앞으로 나아가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하여 앞으로 가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앞을 가로막은 홍해를 향하여 가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도저히 납득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앞으로 나가라고 하십니다. 그것은 홍해를 넘어 목적인 하나님의 약속의 땅이 있기 때문입니다. 홍해를 향하여 가라는 것은 홍해를 넘어 목적지를 향하여 진행하라는 것이고 홍해가 있을지라도 피하지 말고 대면하라는 것입니다.
능력 있고 위대한 사람은 믿음의 목적이 있는 사람이고 그 목적을 가로막는 장해물을 직면하여 뚫고 전진하는 사람입니다. 바울은 아무리 어렵고 막다른 상황 중에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그 어려움과 직면하여 돌파하는 위대한 삶을 살았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신앙생활에서 우리에게 납득되지 않는 질문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믿음의 목표를 분명히 하고 그 질문들과 직접 대면하여 돌파하는 용기를 가지십시오. 그 안에는 하나님의 세계의 충만함을 깨닫는 위대한 깨달음이 있는 것입니다.
‘코라손 아키노’ 여사는 필리핀의 첫 여성 대통령으로 1986년 고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독재정부를 무너뜨린 민주화 운동을 이끈 지도자입니다. 그녀는 필리핀 의 민주주의 상징이 됐습니다. 평범한 주부로 '코리'라는 애칭으로 불리기도 했던 아키노 전 대통령은 1983년 야당 지도자였던 남편 ‘베니그노 니노이 아키노’가 암살당하자 정치에 뛰어들었습니다. 끈질긴 민주화 투쟁으로 1986년 평화적 봉기를 이끌어내어 마르코스 독재정부를 무너뜨렸습니다. 그녀는 비폭력시위 평화적 집권의 세계적 선구자가 됐습니다.
그녀가 2009년 8월1일 세상을 떠나자 미국의 오바마 대통령은 성명을 통해 아키노 전 대통령의 타계 소식을 듣고 깊은 슬픔에 빠졌다면서, 아키노 전 대통령은 20여년 전 비폭력 '피플 파워' 운동을 통해 필리핀을 민주화로 이끌었다고 높이 평가했습니다.
코라손 아키노 여사는 ‘타임’지와의 회견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한 인간, 한 인간에게 목적을 가지셨습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목적이 무엇인지를 깨닫는 것이 가장 중요하고 인간을 가장 행복하게 합니다.”
그녀는 하나님의 주신 생의 목적을 깨닫고, 그 목적을 향하여 나아갈 때, 부딪치는 온갖 시련을 피하기보다는 대면함으로 훌륭한 민주화 운동의 지도자와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그녀는 성 빈센트 대학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받을 때 이런 연설을 했습니다. “기독교 신앙이란 폭풍이 지나갈 때에 참고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폭풍을 가슴에 안고 걸어가는 불꽃같이 고요한 소망입니다” 이 연설 내용은 아키노 여사의 신앙이며 신념이기도 했습니다. 그녀는 대통령이 된 후에 난관에 부딪칠 때마다 돌아서거나 멈추어 서 있지 않고 “부딪쳐 보자”(Let's face it)는 믿음으로 승리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홍해를 바라만 보며 절망하는 이스라엘에게 나가 부딪쳐 보라고 하십니다. 홍해와 같은 막다른 위기에서 신앙의 목적인 구원의 삶의 확신을 가지고 부딪쳐 보십시오. 바로 그곳에 홍해를 가르시는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깨달은 히브리 저자는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 받은 자에게는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느니라. 그러므로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우고, 너희 발을 위하여 곧은 길을 만들어 저는 다리로 하여금 어그러지지 않고 고침 을 받게 하라."(히12:11-13)
징계와 같은 막다른 위기를 피하지 아니하고 직면하여 연단의 기회로 삼는 사람은, 의의 평강의 열매를 맺게 하시는, 홍해를 가르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간직하게 되는 것입니다.
지팡이를 들고 손을 바다위로 내밀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지팡이를 들고 손을 바다 위로 내밀어 그것이 갈라지게 하라 이스라엘 자손 이 바다 가운데서 마른 땅으로 행하리라."(출14:16)고 하셨습니다. 모세의 지팡이는 미디안 광야에서 양을 치던 지팡입니다. 그 지팡이는 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 부름을 받으므로 하나님께 사용되는 지팡이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출애굽기 4장 20절에서는 ‘하나님의 지팡이’ 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이 지팡이를 바다에 내밀어 바다가 갈라지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양을 치던 지팡이와 같이 평범성에 있는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사용하는 지팡이처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용하시는 사람으로 삼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로 하나님의 능력을 나나내는 지팡이처럼 홍해를 가르며 사는 사람으로 살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로 우리의 믿음의 삶을 내놓아 홍해를 가르며 살라고 하십니다. 여러분 우리 모두는 홍해를 가르는 능력 있는 지팡이처럼 사시는 능력의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영국의 ‘팬덤’ 이라는 분은 ‘하나님이 내속에 계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하실 수 있는 모든 것을 나도 능히 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고후13:5) 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홍해를 가르는 지팡이와 같은 능력 있는 인생을 살아 갈수 있는 사람인 것입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명하신 대로 지팡이로 높이 들어 바다위로 손을 내밀자 하나님께서는 큰 폭풍으로 바닷물을 물러가게 하심으로 물이갈라져 건너가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혜와 믿음, 보잘 것 없는 지팡이와 같은 것일지라도 그것 하나님이 사용하시어 바다를 향하여 내밀면 바다를 가르게 되는 것입니다.
이탈리아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 상사의 아들 ‘바비 힐’이라는 13세의 소년은 어느날 알버트 슈바이쳐에 관한 기사를 읽고 유럽지역 미종군 사령관 ‘린제이’ 장군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제가 산 아스피린 한 병을 보냅니다. 이 약을 아프리카에 계신 슈바이쳐 박사의 병원에 낙하산으로 떨어뜨려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린제이 장군은 이 소년의 이야기를 방송으로 내보냈습니다. 방송을 들은 유럽인들은 40만불어치의 약품을 모아 이탈리아와 프랑스가 제공한 비행기편에 바비군 까지 동승시켜 슈바이쳐 박사에게 보냈습니다. 슈바이쳐 박사는 “어린 아이가 이런 큰 일을 할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할 수도 없었다”며 감격을 술회했습니다. 한 어린아이의 가지고 있는 지팡이를 바다위로 내밀자 40만불 어치의 구급약품이 보내지는 홍해를 가르는 것과 같은 역사가 나타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내가 가지고 있는 믿음과 사랑, 헌신의 지팡이를 바다위로 내미시는 순종을 보이십시오. 나의 삶을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순종하는 것이 되도록 하십시오. 그곳에 홍해가 갈라지게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가 있을 것입니다. 아멘.
앞으로 나아가자
출 14: 10~16
성경을 보면 각각의 제목이 참 재미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무 것도 없던 이 세상을 만드신 것에 관한 말씀이 창세기입니다. 그리고 애굽에서 종살이 하면서 고생하던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께서 구원하셔서,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시는 내용을 증거한 말씀이 출애굽기입니다.
그런데 출애굽기 중에서도 특별히 오늘 봉독한 말씀은 모세의 인도로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이 약속의 땅으로 가던 중 큰 문제가 생긴 일에 관한 말씀입니다.
1) 홍해 때문에 앞으로 나아갈 수 없는 문제가 생겼습니다.
2) 뒤에서 애굽의 바로 왕의 군대가 뒤쫓아 오는 문제가 생겼습니다.
3) 이스라엘 백성이 혼돈에 빠지는 문제가 생겼습니다.
이때 일치단결을 했으면 문제가 하나씩 해결될 텐데, 이스라엘 백성은 온통 불만과 불평으로 꽉 차서 모세에게 모든 화살을 돌렸습니다.
“애굽에 매장지가 없으므로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뇨? 어찌하여 당신이 우리를 애굽에서 이끌어 내어 이같이 우리에게 하느뇨?”
나 같으면, “내가 그랬느냐? 하나님이 시킨 것이지.” 하고 한 마디 했겠지만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너희는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또 다시는 영원히 보지 못하리라”(출 14:13)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출 14:14)
사실 모세의 이 말은 백성을 잠재우기 위한 하나의 수습책이지 근본적인 해결이 아니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소리를 듣기 위해서 기도하러 산으로 올라갔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두 가지를 말씀하셨습니다.
“머뭇거리지 말라”
“앞으로 나아가라”
이제 2002년은 머뭇거리면서 주저앉는 자가 아니라 앞으로 나아가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앞으로 나아가자”하는 제목의 말씀으로 은혜를 받으려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살던 소돔과 고모라 성을 멸망시키기로 한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그의 조카인 롯을 위하여 기도한 것 때문에 거기서 롯을 구하기 위해서 천사를 보냈습니다.
롯의 집에 천사가 들어간 것을 본 소돔 사람들은 롯의 집으로 가서 소돔을 일으켰습니다.
“이 저녁에 네게 온 사람이 어디 있느냐? 이끌어 내라 우리가 그들을 상관 하니라”
그러자 롯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런 악을 행치 말라 내게 남자를 가까이 아니한 두 딸이 있노라 청컨대 내가 그들을 너희에게로 이끌어 내리니 너희 눈에 좋은 대로 그들에게 행하고 이 사람들은 내 집에 들어왔은즉 이 사람들에게는 아무 짓도 하지 말라”
이 말을 들은 소돔사람들은 “이 놈이 들어와서 우거하면서 우리의 법관이 되려 하는도다 이제 우리가 그들보다 너를 더 해하리라” 하면서 문을 부수려고 했습니다.
그때 천사가 롯을 집으로 끌어들이고 문을 닫으면서 떠들어대는 소돔사람들을 전부 소경으로 만들었습니다.
천사는 롯에게 이곳에 유황불이 떨어지기 때문에 이곳을 떠나야 한다고 말하면서 세 가지를 당부했습니다.
1) 앞만 보고 나가시오.
2) 뒤를 돌아보지 마시오.
3) 머무르지 마시오.
사람들은 신앙생활을 하다가 무슨 일을 만나면 옛날을 동경하게 됩니다. 그러나 옛날은 잊어버리고 항상 앞만 바라보면서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다음과 같이 증거했습니다.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빌 3:13~14)
우리가 왜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까? 그것은 우리 앞에 꿈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앞에 영생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앞에 천국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처럼 앞을 향하여 나아갈 때, 우리 앞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있습니다. 그 장애물은,
1) 의심입니다.
신앙생활의 가장 무서운 적은 의심입니다. 물위를 걸어가던 베드로가 물에 빠진 것은 의심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믿음이 적은 자들아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0~33)
그리고 예수님은 마가복음 11장 23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지우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룰 줄 믿고 마음에 의심치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2) 욕심입니다.
우리 인간을 망치게 하는 것은 욕심입니다. 야고보 1장 15절은,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하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다시 말해서 욕심이 생기면 죄가 생기고 죄가 커지면 죽음이 온다는 것입니다.
다섯을 가진 사람은 열을 갖고 싶어 합니다. 그리고 열을 가진 사람은 다른 사람의 것을 빼앗아 더 가지려고 합니다. 이와 같이 욕심은 한도 끝도 없습니다. 그러나 욕심을 버리면 우리에게 평안이 오게 됩니다.
성경은 선에 대한 욕심은 가져도 악에 대한 욕심은 버리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선은 아무리 많이 행해도 악해지지 않지만 악은 하나만 해도 악해지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모든 악한 욕심은 전부 버리시기 바랍니다.
3) 미움입니다.
요한일서 3장 15절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예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미워하면 안 됩니다.
4) 시기입니다.
우리나라 사람은 참 묘합니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이 잘되는 것을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특히 나와 경쟁하는 사람이 잘되면 어떻게 해서든지 깎아 내리려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서는 영웅을 만들지 못합니다.
5) 모함입니다.
남이 잘되는 것을 시기하다가 보면 나중에는 모함까지 하게 됩니다. 우리나라의 역사에 의하면 모함 때문에 충신들이 얼마나 많이 죽었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 기독교인은 세상 사람보다 영적으로도 높이 있어야 하고 생활적으로도 높이 있어야 하며 생각도 높이 있어야 합니다.
6) 분열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왜 홍해를 건너가지 못했습니까? 그것은 그들이 서로 분열했기 때문입니다. 분열은 파괴를 일으킵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잘되면 예수의 이름으로 똘똘 뭉쳐야 합니다.
한국교회에 1500만 명의 신자가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60만 명에 불과한 천주교만한 힘이 없습니다. 천주교에서는 추기경을 하나 세우면 종신토록 추기경을 중심으로 뭉치기 때문입니다.
시편 133편 1절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그러면 어떻게 해야 이 장애물을 헤치고 나갈 수 있습니까?
첫째, 감사하면서 나아가야 합니다.
감사하면서 사는 사람은 원수가 없습니다. 불만하는 사람은 원수가 있지만 감사하고 사는 사람은 적이 없습니다. 만약 목사는 장로를, 장로는 목사를 서로 틀렸다고 하면 되겠습니까? 아무리 잘못한 것이 있어도 밖에 나가면 서로 자랑해야 합니다.
지난번에 성탄예배와 송구영신예배, 신년하례예배를 드리면서 온 교인이 참석했는데, 신년예배에 참석하셨던 타 교회 목사님과 장로님들이 그 때의 예배분위기가 너무나 좋았다고 이야기 했습니다. 또한 그 때 예배에 참석한 후, 우리 교회에 등록한 교인이 많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얼마나 좋았는지 모릅니다.
둘째, 찬송하면서 나아가야 합니다.
찬송은 기도가 되기도 하고 설교가 되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찬송 속에 설교와 기도가 전부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어느 날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가 하는 일이 너무나 힘들어서 낙심을 하고 집에 돌아왔습니다. 그러자 그의 아내가 상복을 입고 나왔습니다. 깜짝 놀란 마틴 루터는 아내에게 물었습니다.
“우리 집에서 누가 죽었소?”
“당신이 믿는 하나님이 죽었어요.”
“하나님이 왜 죽소? 내가 믿는 하나님은 살아계신데...”
“당신이 지금 하는 것을 보니, 하나님이 꼭 죽은 것만 같아요.”
이 때 마틴 루터가 작사한 찬송가가 “내 주는 강한 성이요”(384장) 하는 찬송가입니다. 마틴 루터는 이처럼 강한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종교개혁을 할 수 있었습니다.
찬송은 죽어가는 소리로 부르는 것이 아니라 개선장군과 같이 당당하게 불러야 합니다.
셋째, 순종하면서 나아가야 합니다.
신명기 28장 2~6절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미치리니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며… 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니라”
부활하신 예수님은 승천하시기 직전에 제자들을 불러 모으시고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행 1:4~5)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 1:8)
이 말씀을 들은 제자들은 순종을 하여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서 기도를 했습니다. 드디어 열흘이 되던 날에, 하나님께서 성령의 바람을 마가의 다락방에 불어넣었습니다. 혀가 불같이 갈라지면서 방언이 터져 나왔습니다. 그런데 그 방언을 들은 헬라파 유대인들은 무식한 것으로 알았던 예수의 제자들이 자기나라의 말로 방언하는 것을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우리가 다 우리의 각 방언으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듣는도다… 이 어찐 일이냐”(행 2:11~12)
이때 성령을 받은 베드로가 처음으로 설교를 했습니다.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행 2:36)
이 설교를 듣고 마음에 찔림을 받은 사람들이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하고 묻자 베드로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행 2:38)
이 날에 세례를 받은 사람이 삼천 명이나 되었다고 성경은 증거하고 있습니다. (행 2:41)
우리 교회가 부흥된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교회가 앞으로 더 부흥되고 잘 되려면 더 강한 성령의 바람으로 이러한 역사가 일어나야 합니다.
넷째, 영권을 갖고 뭉쳐서 나아가야 합니다.
아무리 장작에 불이 붙었어도 흩어 놓으면 꺼져 버립니다. 불이 붙은 것끼리 자꾸 모아 놓아야 확 타버립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신유은사를 비롯한 여러 은사를 받은 우리가 단결하여 협력할 때 하나님께서 더 큰 역사를 하게 됩니다.
다섯째, 기도하면서 나아가야 합니다.
기도 없는 설교와 기도 없는 찬양과 기도 없는 봉사는 전부 물거품과 같습니다. 왜냐하면 기도하면서 하는 설교가 능력이 있고 기도하면서 하는 찬양이 영감을 주며 기도하면서 하는 봉사가 보람을 느끼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금년 한 해 동안 이러한 마음을 갖고서 앞으로 나아가는 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 아멘 -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보라
출 14: 10-16
기독교는 죽은 우상을 섬기는 헛된 종교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살아계셔서 구원을 행하시는 하나님을 믿는 종교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삶속에서 하나님의 섭리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동안 세계 역사에 등장한 신들은 수없이 많습니다. 로마에 가면 쥬피터(Jupiter) 신을 비롯한 많은 신들이 있고, 헬라에 가면 제우스(Zeus) 신을 비롯한 신들이 있으며, 중동지역에는 바알(Baal)신을 비롯한 신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신들은 한 시대를 풍미하는 것으로 끝나고 마는데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인류가 존재하면서부터 지금까지 유일신으로 자리하고 있습니다. 세계의 4대 계시 종교를 유대교와 기독교, 그리고 천주교와 이슬람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4대 종교에서 믿고 있는 신은 실상은 한 분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을 변형시켜서 인지하고는 있지만 유대교의 「여호와」나 이슬람에서 말하는 「알라」는 한 신에서 유래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존재와 사역을 보는 시각은 다르지만 근본적으로는 한분입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신 분이시고 그 하나님을 믿으려는 것이 종교의 본질입니다. 타종교도 그렇겠습니다만 특히 기독교는 지금도 살아계셔서 역사하시며,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느끼며 체험하는 종교입니다. 주일 3부 예배 시간 전에 고3 학생들을 위해 기도해주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금주 목요일(18일)이 대학 입학 수능시험일이기에 한 사람씩 안수하면서 기도하는데 감회가 깊었습니다. 대부분 어릴 때부터 본 교회에서 자란 학생들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그들 중에는 출생할 때 병원에서 그를 위해 기도를 해준 학생도 있고, 어떤 학생은 갓난 아기 때 와서 백일 예배를 드려준 학생도 있고, 유치원 다닐 때에 와서 지금까지 신앙생활하는 학생들도 여럿이 있었습니다. 가슴이 저려오면서 이 학생들이 금년 수능 시험 결과가 잘 나왔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열심히 기도해주었습니다. 시험 결과는 우선은 본인의 실력이 좋아야겠지만 그래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저들을 도우시면 기대했던 것보다 더 나은 결과가 나올 것입니다.
인간의 삶은 항상 좋은 일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나쁜 일도 있고, 불편한 일도 있고, 불행한 일도 있습니다. 어떤 때는 하루에도 좋은 일과 안 좋은 일이 동시에 생기기도 하고, 힘든 일과 즐거운 일이 교차하기도 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위기와 난관에 처할 때에 그리고 한계 상황에 부딪힐 때 많은 고민을 하고 있는데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해결해주시면 모든 것이 잘 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출애굽을 해서 홍해바다까지 왔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이스라엘이 진을 치고 있는 앞은 홍해이고 좌우의 한쪽은 죽음의 사막이고 한쪽은 높은 산입니다. 뒤에만 길이 나있습니다. 그래서 뒤 쪽으로 적들이 추격해온다면 이스라엘은 독 안에 든 쥐처럼 피할 수 없는 곳입니다. 실제로 바로는 이스라엘이 광야 길로 들어섰다는 보고를 받고 잃어버린 노동력을 되찾으려 병거를 앞세워 추격해옵니다. 이스라엘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절망적 상황에 놓이게 됩니다. 마지막인 것 같고 끝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때에 하나님은 그들을 위해 일을 하셨습니다.
첫째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보호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아무리 낭떠러지와 같은 위기 상황에 놓여 있다할 지라도 그리고 많은 것을 잃고 마지막이라고 판단될 때라도 지금도 살아계신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모든 난관과 시련을 극복해 나갈 수 있다는 믿음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뒤에서 추격해오는 애굽 군대를 보고 심히 두려워하며 공포심에 사로잡혔습니다. 그리고 지도자인 모세에게 왜 우리를 끌어내어 광야에서 죽게 하느냐? 항의하면서 원망하고 불평합니다. 그들은 출애굽하고 싶지 않았는데 마치 모세가 유혹해서 나온 것처럼 말합니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좋은 일이 있을 때에는 모두가 자기가 잘하여 된 줄 알고 공치사를 하지만 좋지 않은 일이 생기면 상대방이 못해서 생긴 일이라고 책임을 전가합니다. 그래서 어느 때는 아들은 아버지를 원망하고 아버지는 아들을 원망합니다. 부부지간에도 아내는 남편을 원망하고 남편은 아내를 원망합니다. 그것은 아담 때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위기를 당하는 것을 보고 그대로 계신 것이 아니라 그들 앞에 있던 구름기둥을 뒤로 물러가게 하셔서 애굽 군대와 이스라엘 백성 사이에 두심으로 이쪽에서 저쪽으로 갈 수 없고, 저쪽에서 이쪽으로도 올 수 없도록 하셨습니다. 신기한 것은 구름기둥 저편에는 구름과 흑암이 있고, 구름기둥 이편에는 밤이 밝음으로 밤새도록 저쪽이 이쪽으로 가까이 못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위기를 만날 때나 난관에 봉착할 때에도 하나님이 우리를 보호하기로 작정하신다면 대적들은 어둠속에서 고통을 당하고,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누리며 살 수 있는 축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뒤에서 추격해 오는 군대는 바로 군대입니다. 바로는 이스라엘 민족에게 무거운 짐을 지우고 학대한 사람입니다. 학대를 받을수록 이스라엘이 번성하는 것을 보고 두려워하여 더욱 이스라엘 백성을 괴롭힌 사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보호하시고 오히려 애굽에서 벗어나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바로가 많은 군사력을 가지고 이스라엘을 쫓는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한 이스라엘은 안전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들은 새 이스라엘이기에 언제나 하나님께서 보호하신다는 확신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의 편이 되어주시고, 구름기둥을 가로막아서라도 우리를 공격하는 대적들을 막아주시며, 빛의 세계에서 안전하게 살아가게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보호하십니다.
둘째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위해 홍해바다를 가르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떨면서 두려워 할 때에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서 두려워하지 말라는 격려를 하시고 이제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이스라엘을 위해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모세에게 지팡이를 들고 바다 위로 손을 내밀어 바다를 갈라지게 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인들이 어려운 문제를 당할 때에 뒤로 물러가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사람들은 어떤 문제가 생기면 과거로 돌아가고 싶은 회귀 본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옛날이 좋았다고 하면서 뒤로 가려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앞으로 전진하게 하십니다. 홍해 바다를 가를 수 있는 능력을 가진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한편으로, 사람들은 어떤 문제를 만나면 사람의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합니다. 이스라엘 민족도 예외는 아닙니다. 그들은 홍해 바다가 감히 갈라진다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이 어떻게 우리를 도우실까? 사막으로 인도하실까? 산으로 도망가게 하실까? 아니면 바로 군대를 물리치시고 퇴로를 만들어 탈출하게 하실까? 만을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홍해를 가르고 건너가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도 하나님의 능력을 믿어야 합니다. 더 이상 어떻게 할 수 없는 절망적인 처지라 할지라도 하나님이 홍해바다를 가를 수 있는 분이심을 믿는다면 하나님은 그런 믿음을 가진 사람들에게 길을 열어주실 것입니다. 플루타크(Plutarchos) 영웅전을 보면 ‘전쟁을 하는 데에 창과 방패는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내가 앞으로 나갈 수 있다는 것을 확신하는 것이다!’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경우에도 주저앉거나 포기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은 홍해바다를 갈라서라도 이스라엘을 건너가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역경을 이기고 홍해바다를 건넌 이야기는 주변에 많이 있습니다. 우리도 인생을 되돌아볼 때 인생의 어려운 길목마다 하나님께서 찾아오셔서 길을 여시고 문제를 해결해주신 것을 기억할 것입니다. 낙심하고 좌절하면서 절망적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때마다 상상하지도 못한 일들을 해주셔서 여기까지 인도하신 것을 느끼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과거만이 아니라 지금도 이스라엘을 위해 홍해바다를 가르시는 분이십니다.
셋째로, 하나님은 이스라엘은 구원하시고, 적대자는 수장시키셨습니다.
성서의 역사를 보면 하나님은 하나님의 계획을 성취하시기 위해 사람을 사용하십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모세와 같은 사람들을 들어 쓰셨습니다. 그런데 어느 때에는 불신자나 적대자까지도 들어 쓰실 때가 있습니다. 바로는 이스라엘의 적대자였지만 하나님이 사용하셨습니다. 바로가 이스라엘 민족을 학대하고 견딜 수 없는 중노동으로 그들을 괴롭히고 남자아이를 낳으면 죽이라는 명령을 하였기에 이스라엘은 출애굽하려는 마음을 갖게 됩니다. 만일 바로가 이스라엘 백성에 대해 관대하고 친절하고 포용력 있는 정책을 썼더라면 이스라엘은 에집트에서 안주했을 것입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가나안 땅이 좋다고 설명하면서 등을 떠밀어도 절대로 출애굽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애굽 생활이 좋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사람들에게 고난과 고통이 주어질 될 때에 그곳으로부터 탈출하고 싶고 새로운 길을 갈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에 중국의 조선족들이 많이 들어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중국에서 오신 조선족들은 고향을 어디라고 생각할까요? 한국입니까? 아니면 중국입니까? 얼핏 생각하면 한국이라고 말할 것 같지만 그들의 고향은 중국입니다. 언젠가 중국에 갔을 때에 깜짝 놀란 일이 있는데, 우리는 조선족들이 우리와 같은 핏줄을 나눈 민족이기 때문에 항상 우리 편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한국과 중국이 축구를 하는데 어느 편이 이기는 것이 좋으냐고 물어보니 겉으로는 ‘한국이 이겨도 좋고, 중국이 이겨도 좋습니다.’ 하는데 속마음은 중국이 이겼으면 하는 것입니다. 이미 그들은 중국화 되었기 때문입니다. 조선족들이 중국에 가서 산 기간이 길어야 100년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동안 중국 사람이 되었습니다. 미국에서 자리 잡고 평안히 지내는 분들에게 한국으로 들어오라고 하면 대부분 거절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제는 그 곳 문화가 익숙해졌고 그곳이 그들의 고향이고, 그곳에서 살아야 편안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에집트에서 무려 430년을 살았습니다. 그들도 이미 에집트화 되었습니다. 애굽 문물에 젖어버린 사람입니다. 에집트가 고향이며 에집트가 살기 좋은 곳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모든 것을 버리고 가나안으로 가자고 하면 훌훌 털어버리고 떠날 수 있겠습니까? 모세가 애굽을 탈출하자고 간곡히 권면해도 그들은 따라가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바로를 들어 쓰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바로로 하여금 이스라엘을 핍박하게 하므로 이스라엘이 떠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을 만드셔서 출애굽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모세가 바로에게 ‘우리 백성을 보내 주십시오’ 했을 때에 바로는 허락하지 않습니다. 그 이후에 물이 피가 되는 재앙에서 시작하여 마지막에는 장자가 죽는 재앙까지 열 가지 재앙이 있게 됩니다. 그런데 바로의 마음이 강퍅하여 이스라엘 백성을 내보내지 않습니다. 성경을 읽으면서 하나님이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했다고 하는데 왜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을까? 하는 질문을 가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바로의 마음이 완악하여서 순순히 내보내지 않았기에 유월절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유월절을 통하여 이스라엘을 구속하시려는 계획이 있으셨던 것입니다. 믿음의 세계에 들어오면 반드시 거쳐야 할 단계가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피로서 속죄함을 받아야 합니다. 구속함을 받아야 합니다. 이스라엘 민족도 출애굽하여 가나안 땅으로 가려면 먼저 유월절 어린양의 피로 속죄함을 받아야 했습니다. 바로가 쉽게 안 보냈으니 유월절이 있었던 것이지 바로가 일찌감치 보냈더라면 이스라엘 민족의 구속 사건은 없었을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해 적대자인 바로를 사용하셨습니다. 바로로 하여금 이스라엘을 추격하게 하신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이스라엘을 광야 해안가에 가두어 두시므로 바로로 하여금 추격하려는 의지를 주셨고 그 결과로 이스라엘은 홍해바다를 건넜고 바로와 그 군대는 수장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적대자인 바로의 역할은 여기가 끝입니다. 하나님은 적대자인 바로를 사용하시고 심판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삶 속에서 간혹 적대자들이 일시적으로 이기는 것 같고 기세등등하고 의기양양한 것 같지만 마지막에는 심판의 대상이 되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피해를 보는 것 같고, 박해를 당하는 것 같고, 망한 것 같고, 진퇴양난의 상황에 놓여있는 것 같아도 그러나 마지막에는 하나님께서 기적을 행하셔서라도 가나안 땅을 향해 새 출발을 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은 구원하시고 적대세력은 심판하십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성경 본문 14:15에 있는 말씀입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어찌하여 내게 부르짖느냐 이스라엘자손에게 명령하여 앞으로 나아가게 하고” 하는 말씀입니다. 앞으로 나아가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경우에도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전진해야 합니다. 뒤를 돌아보지 말고, 좌우를 보지도 말고, 앞을 향해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킹제임스성경(King James Version)을 보면 이 말씀을 ‘They go forward'라고 하였습니다. “앞으로 나가가게 하라, 이스라엘로 하여금 앞으로 나아가게 하라” 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요 명령입니다. 뒤는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오직 앞만 있습니다. 앞만을 향해서 전력질주 한다면 불꽃같은 눈동자로 우리를 지켜보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께서 홍해 바다를 가르시어 건너가게 하실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출애굽하여 홍해바다를 무사히 건너므로 하나님은 애굽 사람들로 하여금 여호와가 하나님인줄 알게 하셨고,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과 모세를 믿도록 하셨습니다.(출14:31) 이스라엘을 위해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하시기 바랍니다. 극한 질병으로 고통하는 분이 계십니까? 사업의 실패로 도저히 일어설 수 없다는 판단을 하시는 분들이 계십니까? 또는 인간관계로 큰 상처를 가진 분들이 계십니까? 그리스도인은 홍해바다가 앞을 가로막고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뚫고 나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그리스도인을 위해 일을 하시는 분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