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크는 대체로 형이상학을 경멸하는 편이었다. 그는 Leibniz의 사변 형이상학에 대한 인상을 친구에게 써보내길, “자네와 나는 이런 실없는 지적 놀이를 충분히 알고 있네.” 그는 당대 형이상학을 지배하던 실체 개념이 모호하고 유용하지 않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을 송두리째 거부할 정도로 모험을 감행하지는 않는다. 그는 신의 존재를 뒷받침하는 형이상학적 논쟁의 유효성을 받아들이지만, 긴 말을 늘어놓지 않고 다소 불편하게 느꼈던 듯하다. 그는 단순히 전통적인 것을 반복하지 않고 새로운 사상을 표현할 때에는 언제나 개괄적이고 추상적인 아닌, 구체적이고 상세한 용어로 표현한다. 그의 철학은 과학의 연구처럼 하나씩 쌓아가는 단편적인 작업으로서, 17세기 유럽대륙의 철학 체계와 달리 거대한 통일성을 추구하지 않는다.
경험론이 모든 지식(논리학과 수학은 예외라 할 수 있지만)은 경험에서 유래한다는 학설이라면, 로크는 경험론의 창시자로 생각될 만하다. 따라서 『인간 오성론』 1권은 플라톤, 데카르트, 스콜라 철학자의 사상에 반대하면서 단지 이성에서 유래한 본유 관념(innate ideas)이나 원칙은 없다는 논증을 펼치는데 관심을 기울인다. 2권에서는 어떻게 경험을 통해 각양각색의 관념들이 생기는지를 상세하게 보여주는 일에 착수한다. 그는 본유 관념을 거부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그러면 이미 말했듯이 정신을 아무 특성도 관념도 없는 하얀 종이라고 가정해보자. 이 하얀 종이 위에 어떻게 글씨가 쓰이는가? 인간의 분주하고 복잡한, 경계에 구애받지 않는 상상력으로 거의 끝까지 다양한 방식으로 그려 넣은 방대한 기억은 어디에서 오는가? 이 질문에 나는 경험에서 온다고 한 마디로 답변한다. 우리의 모든 지식은 경험에 기초하며 궁극적으로 경험으로부터 모든 지식이 도출되기 마련이다.”
관념은 2가지 근원에서 유래한다. (a) 감각(sensation)과 (b) 정신 활동인 지각(perception)인데, 지각을 ‘내감(internal sense)’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우리는 관념을 수단으로 이용해야만 생각할 수 있고 모든 관념은 경험에서 유래하기 때문에, 우리가 획득한 어떤 지식도 경험에 앞설 수 없다는 사실은 자명하다.
로크는 지각이란 “지식에 이르는 첫 단계이자 지식을 얻기 위해 필요한 모든 재료가 모이는 입구”라고 말한다. 이 말은 현대인에게 거의 당연한 소리로 들릴지 모르는데, 적어도 영어권 나라의 교육 내용에 포함된 상식의 일부가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로크가 살았던 시대에 정신은 모든 종류의 사물을 선험적으로 알 수 있는 능력이라 여겼기 때문에 지식이 지각에 의존한다는 선언은 새롭고 혁명적인 학설이었다. 플라톤은 『테아이테토스(Theaetetus)』에서 지식과 지각의 동일성 논제를 논박하는 일에 착수했는데, 플라톤 이후 데카르트와 라이프니츠를 포함한 거의 모든 철학자들은 가장 가치 있는 지식은 대부분 경험에서 유래하지 않는다고 가르쳤다. 그러므로 로크의 철두철미한 경험론은 대담하고 혁신적인 견해였다.
『인간 오성론』 3권은 단어에 대해 다루면서, 주로 형이상학자들이 제공한 세계에 대한 지식이 순전히 언어와 관련될 뿐이란 점을 보여주려 한다. 3장 ‘일반 명사에 대하여(Of General Terms)’에서는 보편 개념에 대해 극단적인 유명론자의 입장을 취한다. 실제로 존재하는 모든 사물은 개별자들뿐이지만, 우리는 ‘인간’과 같은 관념을 만들어서 여러 개별자에게 적용하며 일반 관념에 이름을 붙이기도 한다. 일반 관념의 일반성은 오로지 다양한 개별 사물들에 적용된다거나 적용될 수 있다는 사실에서 성립한다. 그러니까 일반 관념은 우리 정신 안의 관념으로 존재할 경우, 바로 실제로 존재하는 다른 모든 사물처럼 개별성을 가진 존재라는 말이다.
3권의 4장 ‘실체의 이름에 대하여(Of the Names of Subtances)’에서는 스콜라 철학의 본질주의를 논박한다. 사물이 그들의 물리적 구조를 이루고 있을 실질적인 본질을 가지고 있을지 모르지만, 그것은 대체로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은 그 무엇으로서 적어도 스콜라 철학에서 말한 ‘본질(essence)’은 아니다. 우리가 알 수 있는 본질은 순수히 언어적인 것이고, 오로지 일반 용어의 정의로만 이루어진다. 예컨대 물체의 본질이 연장성(extent)인지, 아니면 연장성에 견고성(solidity)을 더한 것인지에 대해 논증하려면 낱말과 관련된 논증이 필요하다. 그러니까 우리는 ‘물체’란 낱말을 앞의 두 경우 가운데 어느 쪽으로 정의해도 무방한데, 우리가 선택한 정의를 고수하는 한 해로운 결과가 나올 리 없다. 별개의 독특한 종들은 자연에 의한 사실이 아닌, 언어에 의해 만들어진 사실이다. 그것들은 ‘별개의 이름들이 붙은 별개의 복합 관념들’일 따름이다. 자연의 사물들이 차이를 보인다는 사실은 분명하지만, 차이점은 계속되는 단계를 밟아 생겨난다. 그러니까 “종의 경계는, 그것들을 분류한 인간들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그는 괴물의 사례로 넘어가는데, 이것은 괴물이 인간인지 아닌지 의심스럽다는 주장과 관련된다. 이 논점은 Darwin이 점진적 변화에 따른 진화론을 채택하도록 설득하기 전까지는 일반적으로 수용되지 않았다. 스콜라 철학자들에 의해 시달림을 자청해서 당해본 사람들만이 다윈의 진화론이 얼마나 많은 형이상학적 잡동사니들을 쓸어내는지 깨닫게 되리라.
경험론과 관념론은 지금까지 만족스런 해답을 찾지 못한 철학적 문제가 한 가지와 마주하는 비슷한 처지에 놓인다. 우리가 어떻게 우리 자신과 우리의 정신 활동 이외에 다른 사물을 인식하는지를 보여주는 문제이다. 로크는 이 문제를 진지하게 고찰하지만그의 견해도 해결하기에는 역부족이다. 그는 한 곳에서(4권 1장)에서 이렇게 말한다. “정신은 사유하고 추리하는 모든 활동을 할 때 자신만이 응시하고 응시할 수 있는 관념들 이외에는 다른 직접적인 대상을 갖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의 지식은 관념들과 관계할 뿐이다.” 그리고 이렇게 말하기도 한다. “지식이란 두 관념의 일치와 불일치에 대한 지각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타인들이나 물리계의 존재에 대하여 알지 못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는 듯하다. 그 까닭은 타인들이나 물리계의 세계가 존재한다 해도 나의 정신 속에 있는 관념들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지식에 관한 한, 각자 자기 속에 틀어박혀 외부 세계와 모든 접촉이 차단된 지경에 이르고 만다. 하지만 이것은 역설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데, 그는 역설 문제에 관여하지 않으려 한다. 따라서 그는 다른 장에서 상이한 이론을 선보이지만, 앞장에서 말한 내용과는 일치하지 않는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우리는 실재하는 존재에 대해 3가지 지식을 가진다. 우리 자신의 존재에 대한 지식은 직관적이고(intuitive), 신의 존재에 대한 지식은 논증적이며(demonstrative), 사물에 대한 지식은 감각적(sensitive)이라고 말한다(4권 3장).
다음 장에서 그는 자신의 견해에 일관성이 결여되었다는 사실을 다소나마 알아챈다. 그는 어떤 이가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고 한다. “만약 지식이 관념들의 일치에서 성립한다면, 광신자와 멀쩡한 사람이 같은 수준에 있다고 말하는 셈이다.” 로크는 이렇게 답변한다. “관념과 사물이 일치하는 경우에는 그렇지 않다.” 그는 계속하여 단순 관념들은 모두 사물들과 일치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이미 보여주었듯이 정신은 자신의 힘만으로는 어떤 관념도 결코 만들어내지 못하며, 단순 관념들은 전부 사물들이 정신에 작용하는 자연의 방식에 따라 산출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실체라는 복합 관념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한다. “모든 복합 관념은자연 속에서도 동시에 존재한다고 밝혀진 단순 관념들로 구성되며 그렇게 만들어질 뿐이다.” 게다가 우리는 (1) 직관에 의한 지식, (2) 두 관념의 일치와 불일치를 판단하는 이성에 의한 지식, (3) 개별 사물의 존재를 지각하는 감각에 의한 지식을 제외하고는 어떤 지식도 얻을 수 없다(4권 3장)
이러한 모든 견해에 비추어 보면, 로크는 감각이라는 정신 활동이 외적 원인을 가지며, 외적 원인은 적어도 어느 정도 특정한 점에서 결과로 보이는 감각과 유사하다는 사실이 알려져 있다고 가정한다. 그러나 경험론의 원리를 일관되게 지킨다면 이 사실은 어떻게 알려지는가? 우리는 감각을 경험하지만, 외적 원인을 경험하지는 못한다. 그러니까 우리의 경험은, 만약 감각이 자연발생적으로 일어난다면 감각과 정확히 같다고 말할 따름이다. 감각에 원인이 있다는 믿음, 더욱이 감각 내용이 감각의 외적 원인과 유사하다는 믿음을 주장한다 해도 경험과는 완전히 독립된 근거에 입각해서 주장해야 한다. “지식이란 두 관념의 일치 또는 불일치에 대한 지각”이라는 견해는 로크가 말할 권리가 있지만, 이 견해에 포함된 역설에서 벗어나려는 시도는 일관성의 결여로 생긴 결과이다. 그러한 비일관성은 상식을 고수하겠다는 그의 결심이 너무 굳건하여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심각했다. 이 난점은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경험주의를 괴롭혀 왔다. 흄은 감각에 외적 원인이 있다는 가정을 버림으로써 난점을 제거했으나, 오히려 자신의 원리를 잊을 때마다 그 가정에 의존하는 일이 잦았다. 로크에게서 물려받은 “선행한 인상들 없이는 어떤 관념도 생길 수 없다(no idea with antecedent impression)”는 흄의 근본 원리는 우리가 인상에 대해 외적 원인이 있다고 생각하는 한에서만 그럴 듯한데, 바로 이 ‘인상’이란 낱말은 불가항력적인 방식으로 외적 원인을 암시한다. 흄은 어느 정도 일관성을 성취한 순간에 무턱대고 역설에 빠져들었다.
아직까지 아무도 신뢰성(credibility)과 일관성(consistency)을 동시에 갖춘 철학을 세우는데 성공하지 못했다. 로크는 신뢰성을 자기 철학의 목표로 삼았으며, 목표에 이르러 일관성을 포기했다. 위대한 철학자들은 대부분 로크와 반대로 일관성을 위해 신뢰성을 포기했다. 그러나 일관성 없는 철학은 논리적인 면에서 완벽하게 참될 수 없을 뿐이지만, 일관성을 갖춘 철학은 신뢰성의 측면에서 보면 완전히 헛것이 될지도 모른다. 가장 풍성한 결실을 맺은 철학 체계는 하나같이 눈에 거슬리는 비일관성을 분명 포함하기 때문에 어떤 면에서는 참된 내용을 담기도 한다. 모순을 포함하지 않는 일관된 체계가 로크의 체계처럼 다소 일관성이 없어 보이는 체계보다 더 많은 진리를 포함한다고 가정할 근거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