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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톡방 논쟁
ROUND 2
강 문 석
난 파출소에서 해결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란 걸 알면서도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끓어오른 화를 다스릴 수 없을 것 같아 굳이 파출소를 찾아갔던 것이다. 그런데 파출소에 들어서서부터 한 발짝 뒤에서 침묵으로만 사태 추이를 지켜보던 사제가 앞으로 나섰다. 사제는 먼저 파출소장에게 이곳 업무가 아닌 걸로 소란을 피워 미안하다며 정중하게 사과했다. 그러곤 양팔을 벌려 두 사람 옆구리를 감싸면서 숙소에 가서 대화하자며 파출소 밖으로 끌었다.
오륙 년 동안 다섯이 함께 여행하면서 한 번도 없었던 불상사가 하필이면 가장 원거리인 속초에서 일어난 것에 난 절망감을 느꼈다. 철도와 같은 교통편이 없는 곳이라 내가 여기에다 동행한 이들을 내려두고 차를 몰고 떠난다면 그들은 부산으로 돌아오기가 깨나 힘들 것 같았기 때문이다. L회장의 생뚱맞은 대북전단 발언으로 설악산 관광을 못하나 싶어 조바심을 내던 두 여자는 파출소를 나서자 일단 안도하는 낯빛이었다. E여대를 나왔다는 울산 출신 재미 교포는 종종 남편에 대한 불만을 아내에게 털어놓아 눈빛으로도 두 사람은 오늘 누구를 탓해야하는지를 충분히 교감하고 있었다.
붉으락푸르락 불만 가득한 얼굴로 씩씩거리며 차문을 열려는 L회장 소맷자락을 아내가 빠르게 다가가 붙잡았다. “형만 한 아우가 어디 있겠습니까 회장님, 우리 저 양반은 6.25 때 인민군에게 아버지를 잃는 바람에 죽을 고생을 하며 자라서 그쪽 얘기엔 그만큼 더 민감한 것 같아요” 라고 하는데 L회장이 잡힌 소맷자락을 홱 뿌리치며 “그래서 난 고생한 놈들 바로 보지 않아요.”라고 버럭 소릴 질렀다. 그런 무안을 당한 아내를 보기에도 민망했던지 사제가 옆으로 조용히 불러서는 “율리아나 씨, 오늘 강 교수 말은 하나도 틀리지 않았어요. 그렇게만 아세요.”라고 했다. 파출소에선 L회장 발언을 경찰에게 한마디도 전하지 않아 난 내심 사제에게도 서운했었다.
결국 난 사제에게 안전하게 운전할 자신이 없다며 오늘은 여기서 그냥 돌아가는 게 좋겠다는 말을 하고 말았다. 설악산 관광을 주선했다가 입장이 난처해진 사제는 그 이야긴 숙소에 가서 해도 늦지 않다고 에둘러 말했다. 사제는 단풍시즌 피크에 맞춰 특별히 숙소를 배려해준 군 후배에 대한 예의도 아니란 생각을 하는 것 같았다.
해가 서편으로 많이 기울었는데도 60평 리조트 룸에선 울긋불긋 불타는 설악산 단풍이 전면 통유리 너머로 조망되었다. 내부 인테리어도 5성급 특급호텔에 결코 뒤지지 않을 정도의 품격이 느껴지는 리조트였다.
사제가 따라주는 와인을 서너 잔이나 마시고도 나는 분이 풀리지 않아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 그렇게 새벽녘까지 엎치락뒤치락하다보니 재작년 성탄 때 사제관에서의 파티가 떠올랐다. 그때 L회장은 자랑처럼 김일성 때부터 VIP로 북한을 드나든 사실을 털어놨었다. 미국에서 번 돈을 보따리로 싸들고 가서 최고 권력자와 함께 사진도 찍으면서 대접을 푸짐하게 받았다는 자랑이었다. 이런 불상사가 벌어지고 보니 난 그가 해외 고정간첩임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침에 모두 기상했을 때 난 머리가 띵했지만 차를 몰 사람은 여전히 나밖에 없었다. L회장은 부동산 소개업에 당장 필요도 없는 덩치 큰 구형 노트북을 고집스럽게 어깨에 메고 낑낑거리며 권금성까지 올랐다. 그 시각까지도 화가 덜 풀린 난 저런 머리로 그 어렵다는 S대는 어떻게 나왔나 싶어 그가 내 앞을 스칠 때마다 눈을 치뜨며 한껏 경멸하는 시선을 보냈다.
L회장 배는 항상 만삭의 임산부만큼이나 불룩하게 치솟아 있었다. 연전 경주 보문호수를 둘러본 후 인근 거구장에서 저녁식사를 할 때였다. 맛난 음식을 이것저것 정신없이 끌어넣고 난 L회장에게 옆자리에서 아내가 더 드시라는 말을 했을 때, 그는 다이어트를 위해 좀 절제해야한다고 했다. 그러자 마주앉은 사제가 “이왕 나온 거 오늘 끝까지 다 먹고 빵 터잤뿌라!” 하는 바람에 한바탕 웃음바다가 되었다. 아내는 '빵 터잤뿌라' 말마디가 그렇게도 재밌게 들렸는지 뒤에도 과식하는 사람이나 과체중인 사람을 만나면 자주 입에 올리면서 깔깔거렸다.
코로나 이전, L회장 부인 엘리사벳과 그녀의 딸만 귀국하여 사제와 함께 거제 외도를 다녀온 적이 있었다. 그때도 내가 차를 몰았다. 네 사람이 탑승한 차안에서 여자 탤런트처럼 늘씬한 50대 미모의 재미교포 2세는 우리말을 할 줄 몰랐다. 난 딸이 양국 언어로 스무고개처럼 재미나게 장난을 하는 줄 알았다. 우리말을 외국인이 흉내내는 것처럼 묘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헌데 한국말을 가르치지 않은 그녀의 엄마가 날 의식한 때문인지 딸이 말을 걸어올 때마다 쩔쩔매면서 입을 닫으라고 주문하고 있었다. 난 그런 교포 가족의 삶이 결코 행복해 보이지 않았다.
L회장 부음을 접한 건 코로나 엔데믹 무렵이었다. 난 그가 이승을 떠나기 전 설악산 악연을 화해하지 못한 채 계속 미워했던 게 마음에 걸렸다. 사제는 전화로 아내의 황반변성 경과를 물으면서 그 소식을 지나는 말처럼 가볍게 전했다. 하지만 난 결코 가볍게 들을 수 없었다. 망자는 자신이 원하던 김정은 천하를 보지 못하고 눈을 감았으니 얼마나 원통했을까 싶었다. 하지만 그가 그토록 흠모해마지 않았던 정은 할배를 원도 없이 만날 수 있으니 그것만으로도 그는 성공한 것일 수 있다. 하지만 쇠똥 밭에 굴러도 이승의 삶이 낫다고 했는데 여든 초입에 아쉽게 떠나고 말았으니 한편으론 또 얼마나 원통했을까 싶기도하다.
그는 이승에서 보스턴 한인성당 사목회장을 세 차례나 맡았다고 자랑했지만 그걸로는 하늘나라에 보화를 충분히 쌓지는 못했을 거란 생각을 줄곧 해오던 터였다. 부디 이제부터라도 지구상 최악의 깡패집단 망자와는 연을 끊고 하늘나라에서 영복을 누릴 수 있도록 이승에서 저지른 모든 죄악을 진심으로 사죄하길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직장 떠나온 지 사반세기 세월이 흘렀지만 난 아직도 여러 군데 모임을 갖고 있다. 현직 때 모임은 주로 상호간 친목을 위한 산악회라든가 사진서클, 출신학교 동문회와 같은 것이었다면 지금은 퇴직동기회를 비롯하여 직장 은퇴자단체 그리고 서울과 부산에 걸쳐 네 군데나 되는 문학단체 모임이다. 노년의 모임은 인생황혼의 쓸쓸함을 덜어주기는 하지만 떠도는 말대로 생기를 불어넣는 방편이 될 수는 없고 오히려 뜻하지 않은 스트레스를 받는 일마저 종종 벌어진다.
난 살아생전 스마트폰을 만난 건 큰 축복이란 생각을 줄곧 해오고 있었다. 폰의 무궁무진한 기능 중에 발신과 수신이 동시에 이뤄지는 카톡이 있어 더욱 그러하다. 카톡은 친목단체 활동에도 유용하게 작동한다. 아파트 18층에서 1층 세대별 우편함까지 모임 안내문을 찾으러 이삼일이 멀다하고 오르내리자니 그 일이 무척 성가셨는데 단톡방이 생기면서 실시간으로 소식을 접할 수 있게 되었으니 얼마나 편리한지 모른다.
동시에 많은 인원에게 실시간으로 알리고자하는 내용을 전할 수 있는 단톡방. 그 내용이 손안에 쏙 들어오는 폰에 들어있어 내용을 확인하러 다시 장소를 옮길 필요도 없다.
내가 추풍령 밑 고향에서 자라던 50년대에도 정치 쪽엔 자유당과 민주당이 대립하고 있었다. 바로 보수와 진보의 대결이었다. 나는 70여 년이 지난 지금도 그때를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다. 당시 정치판도 지금처럼 보통 땐 평안해 보이다가도 선거 때만 되면 두 정당은 격하게 대립하곤 했다. 심할 땐 지프차에 달린 확성기로 “못 살겠다 갈아보자!”는 구호를 핏대를 세워 쩌렁쩌렁 울리면서 내달리면 그 뒤를 상대정당 차량이 뿌연 먼지를 일으키며 뒤쫓는 촌극도 벌어졌다.
중학에 입학하자 학교에선 나에게 웅변을 하라고 했다. 초등생 때 대구매일신문 <아동문화란>에 동시와 산문을 자주 발표했던 걸 알고 그랬던지 학교에선 나에게 웅변원고도 직접 써보라고 했다. 그렇게 원고를 쓰느라 끙끙거리다보니 정치 쪽에서 벌어지는 추한 갈등도 또래들보다 일찍 접할 수 있었다. 당시 내가 목격한 정치현장은 페어플레이와는 거리가 먼 그야말로 정상 모리배들의 약육강식 현장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저질로 타락한 정치현장을 어린 나이에 목격한 때문인지 초등 1년 때 동란에서 아버지를 잃을 정도로 공산침략에 대한 트라우마가 깊었는데도 나는 이상하게도 쉰 중반에 직장을 떠나올 때까지 좌파로 살았다. 어느 대선 땐가는 중앙연수원 교육 중에도 기권을 하지 않고 4백 킬로미터나 떨어진 집까지 찾아와 야당후보를 찍을 정도였다.
인생 마흔이면 미혹에 흔들리지 않는다고 했지만 나는 자유당과 공화당 시대를 거치면서도 오로지 민주당에 표를 찍었으니 인생 황혼에 이르러 돌아보니 후회막급이 아닐 수 없다. 좌편향으로만 살아온 나였지만 예순을 넘길 무렵부터 좌파의 일탈이 목격되기 시작했다. 서로 무력으로 대치하고 있는 적국을 찾아가 핵폭탄을 만들도록 자금을 건네는가하면 휴전선 방벽을 허무는 일까지도 좌파는 서슴지 않았다.
그 바람에 나는 자신의 2세와 그 새끼들의 앞날이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그즈음 용기 있는 어느 국립대학 교수는 국민을 불안하게 사지로 몰아넣은 그 위정자를 국민의 이름으로 사형에 처해야 한다는 칼럼을 SNS에 올리기도 했었다. 급기야 대통령뿐 아니라 입법기관인 국회까지 도를 넘는 일탈을 보이자 국민들 사이에선 국회의원도 해외에서 수입해오자는 말까지 나왔다.
유럽 국가 중엔 국회의원이 무보수로 일하는 나라도 있다며 그 나라를 지목했던 것이다. 국회의원이 검소하게 자전거로 출퇴근하며 성실하게 국민의 심부름꾼 역할을 하는 영상이 나에겐 큰 감동을 안겨주기도 했다.
달포 전, 나는 문인협회 소설분과 단톡방 초대를 받았다. 초대한 상대가 낯선 이름이라 우선 문협 회원 명부부터 뒤졌으나 그런 이름은 보이지 않았다.
무언가 착오가 생겼나보다 하고 그냥 넘겼는데 다음날 직접 전화가 걸려왔다. 서울이라고 했다. 그렇게 나는 100명이 넘는 그 단톡방에 들게 되었다. 하지만 그곳 단톡방도 자주 활동하는 회원은 10여명에 불과했다. 나는 나이든 사람이 잘 부탁한다는 가입인사를 하기도 뭣해서 그냥 지내면서 가끔씩 다른 곳에서 받은 영상이나 글을 한번씩 올리기 시작했다.
스마트폰으로 내가 교유하는 단톡방은 몇 개나 더 있다. 100명이 넘는 ‘안동문예대학’도 그 중 하나다. 이 단톡방에 다시 부름을 받은 건 아직 1년도 채 안 된다. 단톡방 운영자가 안동 관광의 필수코스인 지례예술촌을 운영하고 있을 때 만났다. 그때 서울을 출발한 우리 일행 40여명 여행작가 그룹은 예술촌에 일박하면서 촌장의 시집을 만났고 그의 강의를 들었다.
촌장은 중장년시기에 이미 대구에서 대학교수로 재직하면서 대구경북문협회장으로도 문재를 떨친 인사였다.
나는 자신을 멀리 안동에서 단톡방에 초대해줘서 고마웠으나 사는 곳과 멀리 떨어져 그쪽에서 펼치는 강좌나 행사에 참석이 어려웠다. 언젠가는 신학기 ‘문예대학’을 개강하면서 나에게 수필 강의를 좀 맡아달라는 요청을 받기도 했지만 난 그때도 응하지 못했다. 나는 그런 미안함을 떨치고자 조용히 단톡방을 물러나왔다.
그러다 세월이 이삼년 지났을 때 나는 다시 그곳 회원이 되었다. ‘한국정신문화의 수도 안동’은 이재명 고향인데도 그를 고향에 발붙이지 못하도록 막았다는 걸 모르지 않는 나로선 자신을 다시 초대해준 안동 단톡방에 무한한 고마움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다.
부산 소설가 20여명 단톡방도 있다. 나는 이곳엔 자진해서 가입했다. 내가 소설을 쓰기 시작한지 불과 사오 년밖에 되지 않아 가입도 그만큼 늦어진 거였다. 이곳은 인원도 적긴 하지만 어쩌다 발생하는 공지사항을 올리는 것 말고는 아주 조용하여 적막감마저 감돈다. 나는 그 조용함이 현직 때 대학을 비롯한 교육계에 종사한 학자들이 많아서인지 모두들 소설 쓰는 일에 매달리는 때문인지 아직도 제대로 분위기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소설가들의 모임인데 소설인협회란 이름을 사용하고 있는 건 뿌리가 다른 소설가단체가 먼저 그 이름을 선점한 때문이다. 하지만 '소설가클럽'이라든지 꼭 '소설가'는 붙여야 밖에서 볼 때 얼른 이해하게 될 것 같았다.
회원 수가 120명을 넘는 부산가톨릭문협에도 단톡방이 있다. 요즘 들어 새로 단장을 하느라 단톡방이 여름날 매미 떼처럼 시끄럽다. 상당기간 나는 이 단톡방을 떠나있었다. 회원 중 누가 책을 내든가, 문학상이라도 수상하면 하루 종일 호떡집에 불난 것처럼 소란한 때문이었다. 나처럼 그렇게 떠난 회원들이 많았던지 이제 새 지침을 내려 절대 회원들 맘대로 댓글을 달지 못하도록 엄명을 내리고 있다. 제대로 성공한다면 신앙인이자 문학작품을 만드는 지성들의 사랑방 역할을 톡톡히 하리라 나는 기대하고 있다.
사반세기 전, 나는 어느 날 갑자기 직장을 떠나왔다. 외환위기로 국가가 부도를 만난 때문이었다. 당시 공기업 직장에선 정부의 요구대로 최소 2600명을 잘라야만 한다고 가이드라인을 정해 밀어붙였다. “지금 나간다면 그나마 퇴직금은 줄 수 있고, 그렇지 않으면 그 뒤는 어떻게 될는지 알 수 없다”는 다분히 협박조여서 30년 넘게 일한 나로선 막판에 이 무슨 날벼락인가 싶었다.
준비되지 않은 갑작스런 퇴직으로 하루아침에 실업자가 된 나는 ‘산지기나라’란 카페를 만들었다. 현직 때 직장산악회를 따라 체험한 국내외 산들이 떠올라 명칭을 그렇게 정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때 국제통화기금이 외환위기와 같은 뜻으로 통하는 게 나로선 좀 신기했다. 하여튼 ‘아이엠에프사태’는 금 모으기 행사 등을 통해 세계에서 유례가 없을 정도로 빠르게 진정되었고 새천년 초입부터는 오히려 많은 사람들이 해외여행에도 나서고 있었다.
비록 직장은 잃었지만 그런 국민들의 저력에 놀라며 나도 그들과 함께 항공기에 오르곤 했다. 제주도를 비롯한 울릉도 대마도 등을 자주 찾았고 여행지 풍광을 담은 생생한 기록사진을 카페에 자주 올렸다. 800여 명 카페 회원들도 이러한 카페지기의 열정에 감동하는 분위기였다. 너무나 당연한 말이지만 세상에 무한한 것은 없다. 산지기나라카페에 어느 날 ‘네덜란드 홍등가’에 관한 글과 사진이 올라온 걸 나는 발견했다.
내가 보기에 사진으로 찍어서 올린 글이 삐뚤삐뚤하고 사진도 순서가 뒤죽박죽으로 배치하여 혼란스러웠다. 매사 깔끔한 것을 좋아하는 편인 나는 카페지기로서 그 포스팅 내용을 새로 만들다시피 확 뜯어고쳤다. 그러고 며칠 지나지 않아 <다음>으로부터 ‘카페 정지’를 당했다. 정지사유는 음란물 때문이라 했지만 미리 올라있던 회원 글을 카페지기가 손질했을 뿐이란 항변은 끝내 통하지 않았다.
그 일로 산지기나라 카페만 생각하면 나는 지금도 사이버 공간에서 이뤄지는 업무에 뭔가 허점이 있는데도 서로 완전한 소통을 할 수 없다는 게 무척 안타까웠다. 본인 사업상 업무에서 컴퓨터를 자유자재로 다루어야하는 아들놈에게 정지된 카페를 좀 살려보라고 했지만 안 되는 모양이었다. 답답한 마음에 단골 폰 대리점을 찾아가서도 같은 부탁을 해보았지만 불가능했다.
하지만 <산지기나라> 카페 정지는 나에게 소설을 쓰도록 만들었다. 소설이나 수필이나 같은 문학인데 무슨 차이가 있을까만은 자칫 소설을 한 편도 써보지 못하고 끝날 수도 있는 생에 카페 정지는 소설을 쓰도록 만들었던 것이다. 꼴같지 않게 어설픈 이 '단톡방 논쟁' 작품도 지금은 나라 말아먹는 빨갱이 집단으로 변한 좌파들이 나라를 지켜왔다는 허무맹랑한 여류작가의 주장에 열받아 시작한 글이니 무슨 작품성을 따질 수 있겠나 싶기도 하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