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문> 쉬운 성경 18장 12 - 24절
12 마음의 교만은 멸망의 선봉장이요. 겸손은 존귀의 앞잡이다.
13 듣기 전에 대답하는 자는 미련하여 수치를 당한다.
14 사람의 영이 병을 이기게 하는데, 영이 상하면 어떻게 할 수 있을까?
15 명철한 자의 마음은 지식을 얻고, 지혜자의 귀는 지식을 찾는다.
16 선물을 주는 자는 그 앞길이 열려서, 중요한 사람 앞으로 나아가게 될 것이다.
17 재판에서 원고의 말이 옳은 듯해도, 피고가 오면 사정이 달라진다.
18 제비를 뽑아 분쟁을 해결하고, 서로 싸우는 둘 사이를 판결할 수 있다.
19 모욕을 당한 형제의 마음은 요새보다 정복하기 어렵고, 다툼은 요새의 빗장같이 마음을 닫게 한다.
20 말은 음식이 배를 채워 주는 것처럼 그 영혼을 만족시킨다. 곧 입술의 바른말이 사람을 만족시킨다.
21 혀는 살리기도, 죽이기도 하는 힘을 가졌으니, 혀를 놀리기 좋아하는 자는 그 대가를 받을 것이다.
22 아내를 찾은 자는 행복을 찾은 자요, 여호와께 은총을 입은 자이다.
23 가난한 자는 긍휼을 구하나, 부자는 거만하게 말할 뿐이다.
24 친구인 척하는 자도 많지만, 어떤 친구는 형제보다 낫다.
<묵 상>
본문은 바른 인간관계에 있어서 마음가짐, 화평, 언어생활 등에 대해서 증거 합니다.
2. 바른 인간관계 - 마음가짐, 화평, 언어생활(12-24절)
"마음의 교만은 멸망의 선봉장이요. 겸손은 존귀의 앞잡이다."(12절) 12절 말씀을 문자적으로 번역하면 “멸망의 얼굴은 교만이요, 존귀의 얼굴은 겸손이다”입니다. 교만한 마음과 겸손한 마음은 그 얼굴에 나타난다는 의미입니다. 나이 40이 넘으면 자신의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고 말합니다. 어떻게 책임을 질 수 있겠습니까? 그 의미는 지금까지 살아온 것이 얼굴에 고스란히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좋은 얼굴은 좋은 마음을 비추어 주는 거울과 같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관상을 봅니다. 얼굴의 생김새를 보고 그 사람의 운명이나 재수 따위를 판단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마음의 생김새, 영혼의 형상을 봅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회복된 사람의 얼굴은 빛이 납니다. 얼굴의 생김새와 상관없이 하나님의 이미지를 닮은 사람은 좋은 사람입니다. 복 있는 사람입니다. 얼굴을 뜯어고치기 전에 마음을 뜯어고쳐야 합니다.
"듣기 전에 대답하는 자는 미련하여 수치를 당한다."(13절)
"재판에서 원고의 말이 옳은 듯해도, 피고가 오면 사정이 달라진다."(17절)
여기서 '듣다'는 상대방의 사연을 듣는 것을 의미합니다. 상담은 찾아온 내담자에게 적절한 말로 도움을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상담에서 강조하는 것은 어떤 말을 어떻게 해줘야 하는 것에 초점을 두지 않습니다. 먼저 공감하고, 경청하는 것입니다. 상대의 말에 귀를 기울여 듣지 않고, 답을 줄려고 하는 것은 미련한 일입니다. 또한 서로 관계가 있는 사람을 상담할 때, 한쪽말만 듣지 않고 양쪽 말을 모두 들어야 합니다. 그래야 온전하게 파악하고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만약 재판관이 원고와 피고의 이야기를 모두 듣지 않고, 한쪽의 이야기만 듣고 판결을 내린다면, 그는 판사직을 내려놓아야 할 것입니다. 귀가 2개가 있고, 입이 1개가 있는 것처럼, 듣는 것을 말하는 것의 2배로 하는 것이 지혜로운 것입니다. 그런데 대분의 사람들은 말하는 것을 듣는 것의 2배로 합니다.
말에 관한 교훈의 결론이라 할 수 있는 말씀을 다음과 같이 증거 합니다. "혀는 살리기도, 죽이기도 하는 힘을 가졌으니, 혀를 놀리기 좋아하는 자는 그 대가를 받을 것이다."(21절) 죽고 사는 것이 혀의 힘에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직역하면, ‘죽음과 생명이 혀의 손안에 있다'입니다. 우리의 혀가 사람의 생명을 좌지우지한다는 의미입니다. 여기서 ‘대가를 받다'는 혀의 열매를 당사자가 먹게 될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쓸데없이 불필요한 말까지 하다가 그 말로 인해서 곤경에 처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어떤 말을 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표현하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말은 곧 자기 자신이고, 나의 말이 내가 어떤 사람인가를 보여줍니다. 내가 하는 말이 나를 세우기도 하고 무너뜨리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 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마 12:36-37)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권면합니다. "만일 누가 말하려거든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하라"(벧전 4:11)
"제비를 뽑아 분쟁을 해결하고, 서로 싸우는 둘 사이를 판결할 수 있다."(18절) '제비를 뽑아 분쟁을 해결한다'는 것은 그 과정의 공정성과 투명성을 의미합니다. 성경에 다양한 제비 뽑기가 나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을 분배할 때에도 했고, 성전에 봉사하는 사람들을 뽑을 때도 했고, 신약에서 가룟 유다를 대신 해서 맛디아를 뽑을 때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마지막입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구제를 위해서 일곱 집사를 뽑을 때와 안디옥 교회가 바나바와 바울을 전도자로 보낼 때는 제비 뽑기 하지 않았습니다. 만약 지금도 제비 뽑기만이 성경적이라고 우긴다면, 그 우김은 결코 성경적이지 않은 것입니다.
"친구인 척하는 자도 많지만, 어떤 친구는 형제보다 낫다."(24절) 친구를 사귐에 있어서 그 숫자보다 그 내용이 중요함을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친구를 보면 그 사람을 안다는 말처럼 우리가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서 나의 인생이 설 수도 있고, 혹 무너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친구는 형제보다 더 친밀하게 지냅니다.
예수님은 나에게 친구라 하셨습니다. 언제 그랬을까요? "너희가 나의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니라"(요 15:14-15절) 하나님은 사람이 그 친구와 이야기함같이 모세와 대화를 나누었다고 말해줍니다. "사람이 그 친구와 이야기함같이 여호와께서는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하시며 모세는 진으로 돌아오나 그 수종자 눈의 아들 청년 여호수아는 회막을 떠나지 아니하니라(출 33:11) 우리의 영원한 친구는 오직 예수님뿐이심을 잊지 마십시다. 친구와 만나서 심각한 이야기만 나눕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눕니다. 주님과 친밀한 교제를 나누며 사십시다. 평생에 단 한 가지 소원을 갖는다면 항상 주님과 의논하는 삶을 사십시다.
<오늘의 기도>
사랑의 아버지 하나님! 인생을 선하고 즐겁게 살기 원합니다. 때로는 옳은 일을 함으로 고난을 받을 때도 있지만, 그리스도인이라는 이유로 고난을 받았다면 부끄러워하지 않게 하옵소서. 나의 허물과 죄를 덮어 주시고, 친구로 여겨 주신 은혜를 알게 하시니 감사드립니다. 주님과 항상 의논하고, 질문하며 사는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옵소서. 어떤 공적인 일을 할 때에 공정하고, 투명하게 하는 그리스도인 되게 하옵소서. 자기중심적인 미련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 중심적인 지혜로운 사람이 되게 하옵소서. 무슨 말을 할 때에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처럼 하게 하옵소서. 부드럽고, 친절하고, 상냥한 말을 훈련하게 하옵소서. 사람을 살리는 말을 하게 하옵소서. 겸손한 마음을 품고 살게 하옵소서. 나의 얼굴빛을 환하게 하옵소서. 하나님의 형상대로만 회복시켜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