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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영화 <링컨>
에이브러햄 링컨은 미국 역사상 가장 많은 사랑과 존경을 받고 있는 제16대 대통령이다. 영화는 1865년 1월, 남북 전쟁의 거의 막바지 시기, 노예제도를 헌법으로 금지하는 수정 헌법 13조가 하원을 통과하는 한 달간의 숨 가쁜 과정을 그리고 있다. 종전이 되면 노예제도 폐지 선언이 폐기될 것을 우려해 전쟁이 끝나기 전에 헌법 13조 수정안을 통과시키려 애쓰는 링컨의 의지를 표현하고 있다.
감독 스티븐 스필버그는 이 영화에서 특유의 미국식 애국주의를 과하지 않게 그려냈다는 평을 들었다. <링컨〉은 전쟁영화가 아닌 정치 영화에 가까워 전쟁 장면은 비중이 낮다. 영화는 전쟁과 노예제도를 놓고 첨예하게 대립하는 공화당과 민주당 의원들을 설득하고, 이해와 갈등을 조율해 가는 링컨의 타협 정신과 리더십을 보여준다. 또한 영화는 스필버그 감독 특유의 스펙터클하고 빠른 전개 대신 시종 차분하고 진중하게 진행된다.
이 영화는 2005년도에 출판된 도리스 굿윈 저작인 『권력의 조건』의 내용 일부를 배경으로 해서 만들었다. 스필버그는 이 영화를 위해 무려 13년간 준비했다고 한다. 아마도 그가 가장 오랫동안 매달린 작품일 것이다. 스필버그가 작가 굿윈이 막 쓰기 시작한 『권력의 조건』의 판권을 산 것이 1999년이었다.
링컨역을 맡은 다니엘 데이 루이스의 명연기는 역시 탁월했다. 링컨의 외모를 거의 완벽하게 재현해 냈고 전쟁 중 대통령으로서 결단력 있고 고뇌에 찬 내면 연기를 선사했다. 2013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남우주연상을 받으면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3회 수상 신기록을 세웠다.
다니엘은 링컨이라는 캐릭터에 몰입하기 위해 촬영장에서 모든 사람에게 자신을 "대통령 각하 또는 미스터 링컨"이라 부르라고 요구했다고 한다. 심지어는 스필버그 감독조차 따라야 했다. 링컨과 관련된 책만 100권 이상 읽었고, 링컨과 최대한 닮은 외모를 만들기 위해 메이크업을 하는 데 오랜 시간 동안 공을 들였다.
지금 당장 병사들의 피를 멈출 수 있는 종전 선언이냐, 앞으로 태어날 수백만 명의 인권을 보장하는 헌법이냐, 이 어려운 선택의 기로에서 링컨이 보여주는 행보는 흥미롭다. 링컨은 전쟁이 끝나기 전에 의원 3분의 2의 찬성을 얻어 수정헌법 13조(노예제 폐지)를 통과시키려 했다.
그러나 여당 의원이 다 찬성해도 20명의 표가 부족했다. 링컨은 반대만 하는 야당을 탓하지 않았다. 설득·읍소·매수·강요 등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했다. 의원들을 백악관으로 부르고 직접 집으로 찾아가기도 했다. 영화에서 “부패로 통과되고 미국에서 가장 순수한 사람이 추진한 19세기의 위대한 입법”이라는 대사가 퍽 인상적이다.
II. 유일한 아카데미 남우주연 3회 수상의 다니엘 데이 루이스
다니엘 데이 루이스는 영화사상 최고의 배우 중 한 명으로 일컬어지고 있다. 연기력으로 전설급에 속하는 말론 브랜도나 로버트 드 니로나 알 파치노 급으로 손꼽히고 있다. 특히 <링컨>으로 오스카상 3회 수상을 하면서 영화사상 최고의 배우가 아니겠느냐는 논란을 불러일으키기도 했으며 *메소드 연기의 대표적인 달인으로 평가받기도 한다.
* 메소드 연기
메소드 연기란 배우들이 배역 인물들의 생각과 감정을 완전히 체화하여 실제 인물과 똑같이 연기하는 기법을 말한다.
다니엘은 1957년 영국 런던에서 계관시인인 세실 데이 루이스와 여배우였던 질 밸콘 사이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이후 런던 남쪽의 그리니치로 이사해 그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청소년 시절에는 영국 국립 청소년 극장에서 연기를 배우면서 무대 장악력이 뛰어나다는 칭찬을 받았다. 또한 연기 교수 존 하토치로부터 극찬을 받으면서 장래에 직업을 배우라는 직업을 갖겠다고 결심하는 계기가 되었다. 첫 데뷔작은 14살 되던 1971년에 존 슐레진저 감독의<사랑의 긴 여로>에 출연한 때였다. 동네 주차장에서 비싼 차를 파손시키는 작은 역할이었으나 일생 동안 잊지 못할 추억으로 남아있다고 했다.
이후 여러 작품에서 단역으로 출연하다가 1985년에 <전망 좋은 방>에 조역으로 출연하여 대중들의 주목을 받으면서 인지도를 넓히게 된다. 드디어 1987년에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 주연으로 출연하게 되었다. 이 작품에서 그는 체코 외과의를 연기하면서 본격적으로 메소드 연기에 몰입하기 시작했다.
1989년에는 짐 셰리던 감독의<나의 왼발>에서 뇌성마비 장애인을 실감나게 연기하면서 제62회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받으면서 본격적인 오스카상 사냥에 나서기 시작했다. 그는 촬영을 하지 않을 때에도 휠체어를 타고 다녔으며, 심지어는 식사를 할 때도 스태프들에게 밥을 대신 먹여달라고 부탁할 정도였다. 주인공역에 철저하게 몰두했다. 사진, <라스트 모히칸>에서
1990년에는 마이클 만 감독의 <라스트 모히칸>에 주연공인 나디니엘 역을 탁월하게 소화하면서 관객과 비평가들의 극찬을 받았다. 이번에도 그는 메소드 연기의 달인답게 주인공역에 몰입했다. 그는 직접 당시 주인공이 살았을 성 싶은 숲에서 사냥, 낚시를 하며 지냈고 촬영하는 동안 내내 긴 화승총을 휴대하고 다녔다고 한다.
1997년에는 짐 셰리던 감독의 <더 복서>에 출연한 이후 연기 활동을 잠시 접고 이탈리아 피렌체로 이사를 가서 그곳에서 제과공인 스테파노 베머에게 제화 수업을 받았다. 원래 목공 기술에도 뛰어나지만 이번에는 제화기술을 습득하면서 제화 작업에 푹 빠져 지냈다. 그는 이 두 직업으로도 먹고 살만하다는 평을 받고 있다.
3년간 영화계로부터 떨어져 지내던 그는 2002년에 마틴 스콜세지 감독과 협업하면서 <갱스 오브 뉴욕>에 출연하면서 이번에도 녹슬지 않은 뛰어난 연기력을 보여 주었다. 영화 자체는 평이 별로였지만 데이 루이스로 인해 구원받았다는 평을 이끌어 냈다. 이어서 2007년에는 <데어 윌 비 블러드>에 출연했다. 뛰어난 석유 사업가로 나온 그는 성공을 위해선 무지막지한 방법을 가리지 않는 냉혈한을 연기했는데 뛰어난 연기력으로 제80회 아카데미에서 두 번째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이후 띄엄띄엄 영화에 출연하다가 2012년에는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링컨>에서 링컨을 연기하면서 제85회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전무후무한 세 번째 수상이었다. 이때 타임지 표지에 "세계 최고의 배우"라는 이름으로까지 소개되었다. 이후 폴 토마스 앤더슨 감독의<팬텀 스레드>에 출연하고 2017년 6월 20일, 배우 은퇴를 선언하고 영화계를 떠났다. 알려진 바에 의하면 디자이너라는 새로운 직업을 위해서라고 한다.
다니엘은 어린 시절부터 실제 성격은 조용하고 내성적으로 알려져 왔다. 배우 생활과 별개로 자신의 사생활은 철저하게 보호하는 편이다. 과거 프랑스 배우 이자벨 아자니와 5년간 사귀면서 아이를 가졌지만 헤어졌다. 헤어진 이유는 줄리아 로버츠와 불륜을 저질렀기 때문이었다. 팬들로부터 욕을 바가지로 얻어먹은 두 사람은 결국 1년간 교제하다 헤어졌다. 이후 다니엘은 극작가 아서 밀러의 딸 리베카 밀러와 1996년에 결혼했으며, 슬하에 두 명의 자식을 두었다. 사진, 식구들과 함께
III. 에이브러햄 링컨의 일생
미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대통령인 링컨은 켄터키 통나무 오두막집에서 태어나 여러 곳을 전전하며 가난하게 자랐다. 어린 시절은 고난의 세월이었다. 아홉 살에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이후 10년도 채 지나지 않아 의지했던 누나마저 죽었다. 링컨은 우물을 파거나, 이웃의 돼지를 잡거나, 땅을 갈아서 가족의 빚을 갚아야 했지만 궁핍한 생활 속에서도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재능이 있었지만 정식 교육이라곤 1년도 받지 못했다. 입에 풀칠을 하기 위해서 뱃사공·점원·장사꾼·우체국장·측량 기사 등을 전전했다.
자신을 좀 더 체계적으로 닦기 위해 영문법과 셰익스피어 희곡, 기하학과 법학까지 공부해 나갔다. 결국 고학으로 변호사가 되었고 진정으로 존경받는 사람이 되겠다는 야망을 품고 정계에 진출했다.
그의 정치 경력은 기껏해야 별 볼 일 없이 임기를 마친 하원 시절과 상원 의원 선거에서의 낙선 두 번이 전부였다. 하지만 이 무명의 정치가는 전국적으로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던 쟁쟁한 라이벌들을 제치고 역사상 전무후무한 정치 역전의 드라마를 이루어낸다.
링컨은 미국의 16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후, 자신을 얕잡아 보고 멸시했던 같은 당의 라이벌들을 모두 내각의 일원으로 끌어들였다. 그리고 무한한 포용력과 탁월한 정치적 수완으로 그들의 협력을 이끌어 냈다. 남부의 반발로 시작된 남북 전쟁 가운데에서도, 이들과 함께 링컨은 훌륭하게 국가를 이끌어 갔다.
또한 링컨은 평생 친절하고 겸손한 태도를 잃지 않았다. 그는 실패에서 교훈을 얻었으며, 더 중요한 것을 이루기 위해 작은 것을 양보할 수 있었다. 그는 피비린내 나는 동족상쟁이라는 전쟁 중 재선에 성공해 국민의 지지를 받았고 마침내 남부의 항복을 이끌어냈다. 건국의 아버지들이 남겨준 영광의 땅에서 민주주의를 구하고 연방을 지키며 노예해방이라는 역사적 사명을 완수한 것이다.
● 변호사가 되기까지의 전반기 생애
링컨의 아버지 토머스 링컨은 목수와 머슴 등으로 전전하며 살다가 조용하지만 신앙심이 깊은 젊은 낸시 행크스와 결혼했다. 링컨은 1809년 2월 12일, 켄터키 주 시골구석의 통나무 오두막집에서 태어났다. 링컨이 태어난 후 아버지 토머스는 가족들을 이끌고 인디애나 주의 남서부로 이사 갔다.
링컨의 어머니는 주위 사람들에 의하면 아버지 링컨보다 뛰어난 여인이었다고 한다. 강한 정신력을 가지고 있었고 동시에 사랑과 자비심을 겸비한 여인이었다. 어린 링컨에게 성경을 읽어주었고 읽고 쓰는 법을 가르쳤다. 그러나 그녀는 링컨이 아홉 살 때 ‘우유병’에 걸려 세상을 떠났다. 사진 켄터키주 링컨이 태어난 오두막집
‘우유병’은 뱀풀이라는 독초를 먹은 소의 우유를 먹으면 걸리는 치명적인 병이다. 그녀는 링컨과 손위 누나인 세라를 남겼다. 링컨은 누나 세라와 무척 가까웠다. 살던 곳이 워낙 시골 개척지라서 이웃이 없던 탓에 누나와 친하게 지내면서 놀았기에 남매는 정이 도타웠다. 세라는 결혼해서 아기를 낳다가 21살의 나이로 일찍 세상을 떠나 링컨을 무척이나 슬프게 했다.
그는 사랑했던 어머니와 누나 두 여인을 저세상으로 보냈다. 아내가 세상을 뜨자 아버지는 켄터키 주로 가서 새 아내를 데려왔다. 계모인 사라 링컨은 딸 둘과 아들 하나가 딸린 과부로 열정과 애정을 가지고 가정을 보살폈다.
사진, 링컨이 자란 인디애너주 통나무집
다른 계모들과는 달리 링컨 남매를 친자식처럼 대했는데 특히 링컨을 귀여워했다. 후일 링컨은 그녀를 ‘천사 엄마’라고 부르며 회상했다. 일찍부터 사라는 링컨이보기 드문 재능을 가진 떡잎임을 알아보았다. 자신은 일자무식이었지만 링컨이 많이 읽고 배울 수 있도록 온갖 정성을 다했다. 친어머니가 사랑과 칭찬으로 링컨의 자신감을 키워주었다면 새어머니 사라는 그의 자신감을 더욱 키워준 셈이다.
사라는 시집 올 때 『성서』, 『이솝 우화집』, 『로빈슨 크루스』, 『천로역정』,『아라비안 나이트』 등 5권의 책자를 가지고 왔다. 어린 링컨은 이것을 되풀이해서 읽으면서 거의 외우다시피 했다. 그는 후에 성장하면서 『워싱턴전기』, 『월터 스코트 작품집』, 『키케로』, 『데모스테네스의 연설집』, 『셰익스피어 작품집』 등의 고전들을 읽고 또 읽었다.
이러한 독서는 그의 훌륭한 인격형성에 피와 살이 되었고 훗날 발휘되는 그의 우수한 영어 산문 문체를 구사하는 데에 큰 도움이 되었다. 링컨은 기껏해야 1년 정도 학교를 다녔다. 이는 그의 아버지가 그를 농사꾼이나 하인으로 취직시키려는 생각에 서 더 이상의 교육을 받는 것을 탐탁하지 않게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이런 이유로 아버지와는 점차 사이가 틀어져 갔다. 그는 독학을 통해서 모든 지식을 습득할 수 있었다. 1830년 이른 봄, 링컨 가족은 일리노이 주로 이사했다. 일리노이에 도착했지만 농부가 될 마음이 별로 없던 링컨은 농사일 말고 여러 다른 일에 손을 댔다. 그는 마지못해 아버지의 새로운 농장에서 일했지만 한편으로는 선원이 되어 배를 타고 미시시피강을 따라 뉴올리언스까지 항해하기도 했다.
● 대통령 링컨
사진 아래로
대통령 취임식 장면, 남북전쟁 당시 전선을 방문한 링컨, 게티스버그 연설 장면
링컨은 1837년 무렵에 변호사를 개업하고 이후 일리노이 주 주의원과 연방 하원의원을 지냈으나 정계를 은퇴했다. 1850년대부터 노예제도에 관한 논쟁이 치열해지자 다시 소란한 정계에 뛰어들었다.
그리고 1860년 링컨은 치열한 선거전 끝에 제16대 미국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노예제도 때문에 국론이 갈가리 찢긴 사태에 직면해 그는 대통령 취임 연설식장에서 무엇보다도 남부의 연방 탈퇴를 결코 묵과하지 않을 것이며 연방의 고수를 확고하게 다짐했다.
그가 임명한 장관들 중에서 국무장관 윌리엄 슈어드, 재무장관 새먼 체이스, 육군 장관 사이먼 캐머런(나중에 에드윈 스탠턴으로 바뀐다), 이 세 사람은 수완에서는 자기들이 링컨보다 뛰어나다고 생각하며 대통령을 자기들 마음대로 쥐고 흔들 수 있는 촌닭 정도로 깔보고 있었다.
그러나 시골티가 물씬 풍기는 대통령에게는 이들 각료들에게서 찾아볼 수 없는 타인의 입장을 이해하는 공감 능력, 치열하게 인생을 살아오면서 습득한 불굴의 정신, 여러 고전을 통해 체화한 웅대한 사상과 고결한 품격이 깃들어 있었다.
그는 이솝우화 같은 속담을 즐겨 인용했고 때로는 음담패설도 서슴지 않았다. “시인 월트 휘트먼은 링컨을 ‘노예제 때문에 생긴 남북 갈등이라는 비극적인 무대에 웃음거리를 도입한 사람’이라고 표현했다.
● 링컨의 죽음
남군이 항복한 이틀 뒤 1865년 4월 14일 화창한 금요일, 이날은 링컨에게 가장 행복한 날이었다. 전쟁도 끝났고 노예제도 폐지 헌법 수정안도 통과되었기 때문이다. 그날 밤 링컨 부부는 포드 극장에서 〈우리 미국인 사촌〉이라는 연극을 관람할 예정이었다. 저녁 10시경, 링컨은 극장 특별석에 부인 메리와 나란히 앉았다.
그 옆에는 링컨과 가까운 사이인 래스본 대령이 앉았다. 10분쯤 지나서 암살자 부스가 하인에게 명함을 보이고 특별석으로 들어갔다. 그가 포드 극장의 단골 배우인지라 하인은 의심을 품지 않았다. 부스는 광신적 남북 분리주의자였다.
사진, 링컨 암살 장면 상상화
그는 링컨 가까이 다가가 대통령의 뒷머리를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링컨이 앞으로 쓰러지자 헨리 래스본이 침입자를 잡으려 했다. 그러자 부스는 칼을 꺼내 래스본을 여러 군데 찌르면서 특별석 아래의 무대로 뛰어내렸다. 그는 앞에 드리워진 국기 주름에 장화가 걸려 뒹굴며 떨어졌다.
그러나 번쩍거리는 단검을 휘두르며 “폭군의 말로는 이런 것이다!”라고 소리치며 극장 밖으로 도주했다. 잠깐 동안 관객들은 총소리와 부스가 무대 위로 뛰어내린 것이 연극의 일부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대통령 부인이 “대통령이 총에 맞았어요! 대통령이 총에 맞았어요!”라고 비명을 질렀다.
그때서야 주위에서는 사태를 알아차렸고, 특별석 근처의 젊은 의사 찰스 릴리가 맨 먼저 달려갔다. 그는 대통령의 머리에서 쉴 새 없이 피가 나오는 것을 보고는 길 건너편에 있는 피터슨 하숙집으로 급히 링컨을 옮겼다. 메리는 시시각각 목숨이 꺼져가는 남편의 침대 맡에서 자기가 죽었어야 한다고 절규하며 눈물을 쏟아냈다. 1865년 4월 15일 아침, 링컨은 드디어 숨을 거두었다.
헐레벌떡 도망쳤던 부스는 워싱턴 교외의 리처드 개릿이라는 농부의 집에 머물렀다. 부스의 존재를 몰랐던 농부는 며칠 동안 부스를 손님처럼 대접해 주었으나 이상한 기미를 느끼고 군 당국에 신고했다. 급히 출동한 연방군에게 포위된 부스는 불타는 헛간에서 투항을 거부하고 총격전을 벌이며 최후 발악을 하다가 마침내 사살되었다.
사진, 워싱턴 링컨 기념관의 석고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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