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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회 동주문학상 수상작
수상자 이은
수상작 언니, 우리 물류창고에서 만나요 외 4편
본심 장석주 나희덕 이병률
예심 강재남 강주 김학중 안은숙 정재훈
언니, 우리 물류창고에서 만나요
창고가 보이면 십자 성호를 긋습니다 그것이 창고에 대한 예의이니까요
어제는 S푸드, 훈제된 고깃덩어리들을 포장했어요 그제는 올포유, 당신을 위해 사정없이 옷을 갰어요 하마터면 옷에 깔려 죽는 줄 알았어요 오늘은 아이스크림 공장, 우주선이 희미한 빛을 내며 지나가요 떨어지는 것들은 모두 속도가 됩니다
속도를 이기지 못하는 얼음이 쏟아져요 얼어붙은 손가락이 비명을 질러요 손가락은 가만히 둔 채 아이스크림이 흘러내려요 빵과 빵 사이 너무 많은 눈보라, 빵또아에 끼어 있는 손가락이 물끄러미 바라봅니다
설렘의 구멍에 얼음을 가득 채워요 설렘과 설렘 사이 너무 많은 눈보라, 꼿꼿이 서서 눈보라를 맞고 있는 설렘, 재빠르게 히말라야산맥의 눈을 퍼담아요 몸속에 가득한 눈보라, 왈칵 쏟아질 것 같은 눈보라, 눈보라에 갇혀서, 뜨거운 어둠 속에서 오소소 돋아나는 눈보라,
눈보라를 헤치고 깨진 얼음 조각 같은 달이 따라옵니다 버스 안에 몸을 숨기고 얼어붙은 손가락을 문지릅니다 오늘따라 버스 안은 엄숙합니다
강 건너에 오늘의 일용할 해가 떠올랐습니다
언니, 우리 내일 또 만나요!
한 처음에 아웃소싱이 있었다
아담과 하와가 벌거벗은 몸으로 나무 위의 과일을 따고 있었다
그 나무 아래로 고양이 두 마리 지나다녔다 고양이가 도로로 뛰어들었고 납작해졌다 바닥에서 떼어내려 했으나 떨어지지 않았다
빨간 버스를 타고 그곳에 도착했다 계단을 따라 4층으로 올라갔고 인력센터 출근부에 나를 기입했다 체온과 휴대폰 번호를 기입하고 나의 신체를 기입했다 소지품 검사대를 통과하고 바코드를 찍고 와이파이를 껐다 우리는 완전히 물류창고에 편입되었다*
나와 닮은 사람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잠깐 밤 산책 나온 사람들로 착각했다 밤고양이들이 떼로 창고로 들어갔다 창고는 창고마다 고양이들로 그득했다 뺨이 움푹 들어간 고양이가 반장이었다 고양이들은 일제히 두 손을 벌리고 나에게 일을 다오! 일을 다오! 다른 고양이들이 달려오기 전에 그들의 손은 재빨랐다 두 발이 공중에 떠 있었다
점 점 점 늘어나고 점 점 점 커지는 창고에서 몸집을 키우기 위해, 고양이들의 대화는 금물이므로 눈짓으로만 소통해야 한다 하늘만큼 땅만큼 쌓여가는 상자들 사이에서, 당신은 겨드랑이에서 흘러내리는 땀을 몇 번씩 식혔다 다른 고양이들이 밀려오기 전에 다시 뜨거워지는
우리들의 성실한 노동의 의무를 위해 우리는 서로 모른 체하기로, 역시 알바의 배치는 날카로웠다 오늘도 어떤 결함도 불량도 발생하지 않았다 밤새 꺼지지 않은 창고의 불빛이 우리를 밀어낼 때까지
빨간 버스를 앞질러 바퀴 안으로 고양이 한 마리가 달려들었다 헤드라이트가 도로에 납작하게 들러붙은 고양이 눈으로 쏟아져 들어갔다 고양이 두 눈이 어둠을 빨아먹고 있었다 다른 고양이들이 밀려오기 전에 아담과 하와같이 우리는 그곳에 편입되었다
*외부하청
아이슬란드
허기진 배를 움켜잡으면 아이슬란드에 가 닿을 수 있을까. 아이슬란드 하면 얼어 있는 손발이 녹을 것 같고, 지표면으로 온천수가 솟아오를 것 같고, 빙하 아래 푸른 물고기들이 헤엄치는 것 같고, 양손에 아이스를 들고 있으면 아이슬란드에 다녀온 것 같고.
여기는 물류창고, 나는 레일 앞에 서 있다. 숨 쉴 틈 없이 밀려오는 상자들 속으로 아이스를 넣는다. 속도를 이기지 못하는 아이스가 굴러떨어진다. 나는 그것을 빙하라 부른다. 빙하는 푸르고 깊다.
아이스와 아이스 사이 너무 많은 눈보라, 지게차와 지게차 사이, 소시지와 소시지 사이, 치즈 스틱과 치즈 스틱 사이, 아이스를 켜켜이 쌓는다. 손톱이 갈라져 살 속을 파고드는 줄도 모른다. 손가락이 얼어서 펴지지 않은 데 나는 빙하와 빙하 사이에서 보트를 타고 간다.
미친 듯이 눈이 내리는 아이슬란드, 해가 지지 않는 나라 아이슬란드, 한 손에 아이스를 들고 한 손으로 아이슬란드를 더듬는다. 바닥에 떨어진 아이스는 아이스가 아니므로 나는 너를 아이슬란드에 데려다 줄 수 없다.
나는 아이슬란드를 안고 급속 냉동실로 들어간다. 숨 쉴 틈도 없이 아이스를 담고 있다. 너무 많은 아이스, 바다에 떠다니는 아이스, 줄지어 서서 빙하기를 기다리는 아이스, 드넓은 아이슬란드, 봄여름가을겨울 아이슬란드, 당신은 아이스슬란드에 가 본 적 있나요.
아이스를 양손에 들고 있으면 나는 아이슬란드로 되돌아오고, 가 본 적 없는 아이슬란드를 꿈꾼다. 생각에 잠겨 있다가 나는 아이스를 바닥으로 떨어뜨린다. 떨어진 아이스를 바라보며 나는 다시 빙하라고 불러본다.
빙하는 깊고 푸르다. 아이스를 양손에 들고 나는 빙벽을 오른다. 아슬아슬하게 빙벽을 타고 오르는 나의 등은 땀으로 젖는다. 나는 아이슬란드에 가지 않았지만 아이슬란드에 간다. 아이스가 다 녹기 전에.
사라진 손가락
- 나는 모든 직업을 무서워한다 주인과 노동자들, 모두 촌스럽고 상스럽다. 펜을 쥔 손은 쟁기를 잡은 손과 비길 만하다. 굉장한 손들의 세기로다! 나는 결코 손을 갖지 않으리라.
아르튀르 랭보
들판 한가운데 우뚝 서 있는 창고를 만나게 되었어요 동생을 따라나서자 바람이 식칼처럼 아프게 뺨을 저밉니다 거대한 창고는 창고에서 한 발자국만 내디디면 다시 창고로 올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아침이면 빨간 버스를 타고 출근을 하고 아케이드를 지나듯 줄지어 창고로 들어갑니다
무시무시한 사건들은 왜 여자들에게만 일어나는 걸까요 칼이 손가락을 누를 때 피 묻은 도마가 눈앞에 다가왔어요 손가락을 왜 다쳤냐면 손가락들이 너무 많아서 그랬습니다 죄송합니다 그저 칼을 잡았을 뿐입니다 손가락이 칼날에서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편의점으로 나가는 돈까스를 손질하고 있었어요 끝없이 펼쳐진 돼지고기들이 한 필의 피륙 같았어요 양손으로 칼을 잡고 고기를 자르고 있었어요 순간, 칼이 어디로 갈지 방향을 잡지 못했어요 잘린 손가락이 물고기처럼 펄떡거렸어요
사라진 손가락 찾아주세요 119 구조대에 전화를 했어요 구급대원이 잘린 손가락이 있냐고 물었어요 바닥으로 떨어졌는데 어디로 간지 모르겠어요 저희가 도착할 때까지 빨리 찾아보세요 전 손가락을 세어 보았어요 비어 있는 자리에서 피가 솟구쳤어요 손가락이 11시 방향으로 날뛰었어요
사라진 손가락을 찾아서 바닥을 기었어요 그때 손가락은 펄떡거리는 생선처럼 보였어요 하얀 접시 위에 담긴 도미 한 마리가 지느러미가 잘린 줄도 모르는 도미 한 마리가 껍질이 벗겨진 줄도 모르는 도미 한 마리가 허연 살을 드러내고 접시 위에서 자기가 죽은 줄도 모르는 도미 한 마리가 살아서 꿈틀거리고 있었어요
손가락을 주워서 나는 이거 붙일 수 있어요 하고 구급대원에게 물었어요 글쎄요 붙여봐야지요 나는 구급차를 타고 달리며 생각했어요 사라진 손가락도 요리를 할 수 있을까 사라진 손가락도 다시 사라질 수 있다는 것 사라진 손가락처럼 사라진 창고도 피 흘릴 수 있다는 것
육체에서 뻗어 나온 것들 중에서 가장 혁명적인 것이 손가락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무수한 손가락들을 세상에 방생한 뒤 신은 뒤돌아보지 않나요
잃어버린 손가락을 찾고 있는데 비명과 비명 사이 한쪽 작업실 블라인드가 내려갑니다 이렇게 몸통에서 갈라져 나온 손들이 제멋대로 춤추고 있는데 잘린 손가락으로 죽어서도 벗어날 수 없는 앞치마를 두르고 있는 사람들, 머리에서 발끝까지 하얀 옷을 입고 돼지고기 살덩어리를 저미고 자르고 튀기고 있었어요
손가락들이 얼마나 벗어나기 위해 아우성치는지 손이 손에서 미끄러지고 손이 손을 붙들고 있어요 손가락 11이 손가락 22를 향해 손가락 33이 소리쳤어요 그때 손가락에 피를 낸 칼을 보았어요
선물 포장
상자가 해체될 때까지 선물이 쌓인다
한 개의 선물이 선물로 포장되기까지 포장을 기다리는 선물들이
불시에 나의 욕망을 들여다본다
네게로 오는 선물이 다시 내게 도착할 때까지
기다리지 않은 선물이 당신에게 도착해서
선물이 될 때까지 선물은 선물이 아닌 것이다
송달지를 흘깃 보니
내가 사는 주소지 근처 아파트로 배달될
선물들이 포장된다
송장을 분실할 경우 선물은 목적지를 상실한 채
해체 순서를 기다린다
선물이 몇천 개로 늘어나고 쌓이고 쌓인다
거대한 트럭의 아가리를 향해 던져진다
붉고 물렁물렁한 소시지들이 내 팔뚝에 걸쳐진다
선물이 팔뚝에서 자꾸 미끄러진다
선물은 선물이라 부르는 순간 미끄러진다 사라지고 마는
꿈과 같은 이름이 된다
선물들이 해체된다
해체된 선물이 쌓여서 다시 선물들로 퍼져 나간다
수상소감
나의 시는 어디에서 오는가? 모두가 잠든 사이에 물류창고에서, 얼음 공장에서, 심야 식당에서, 어두운 복도에서, 휴게실에서, 밤거리에서, 지하철에서, 핑크빛 태양에서 푸른빛 새벽까지…… 나의 언어는 나의 체험에서, 나의 내부에서 출현한 것들입니다. 그것들이 나의 심장을 뛰게 했고, 살아있는 감각으로 다가왔습니다.
시를 쓰면서 저는 자유로워졌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연과학을 하면서 자유로워졌다고 합니다. 각자가 선택한 것이지만 ‘나’라는 자아가 시를 선택하여 그곳으로 갔는데 조건이 외부의 우연과 맞아서 내부의 필연이 되었습니다. 외부의 우연이 내부의 것과 만나 필연으로 바뀌듯이 시는 저에게 숙명처럼 다가옵니다. 움직이는 몸과 태어나는 언어 사이에서 브레인이 셔터를 내릴 때까지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심사해주신 장석주 선생님, 나희덕 선생님, 이병률 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동주문학상을 제정해 주신 『시산맥』 대표 문정영 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오랫동안 제 곁에서 가르침을 주신 스승님들께 감사 인사드리며, 저와 함께 한 문우들과 기쁨을 나누고 싶습니다.
이번 일본 문학기행(윤동주 시인의 발자취를 통해서) 더욱 뜻깊은 상의 의미를 얻었습니다. 함께 문학기행을 다녀온 문우들과 좋은 인연에도 감사드립니다.
이 은
강원도 동해 출생.
2006년 『시와시학』 등단.
2009년 2013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창작지원금 수혜.
2012년 시집 『불쥐』 발간.(한국문화예술위원회 우수도서 선정)
2018년 시집 『우리 허들링 할까요』 발간.
2023년 제8회 동주문학상 수상.
제8회 동주문학상 심사평
이번에 진행된 제8회 동주문학상에는 130여 명의 시인이 응모를 해 주셨다. 그 미학적 위상이 날로 높아져 가는 흐름에서 이번 심사도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응모해주신 모든 시인분께 깊이 감사드린다. 1차 예심을 거쳐 2차 예심위원에게 전송된 응모 수는 32명이었다. 그중 2차 예심을 거쳐 본심에 올라온 작품집은 아래와 같다.
3. 『동명이인』 7. 『빵틀과 나무젓가락』 10. 『폴 세잔의 사과를 훔치다』 12. 『꽃피는 서랍』 22. 『밤이 부족하다』
본심 대상작들 중 두 분의 작품집이 마지막까지 남았다. 『폴 세잔의 사과를 훔치다』 시집 원고는 철학적 사유와 다른 예술에 대한 풍부한 소양을 바탕으로 세련된 언어를 구사하는 시편들이다. 소재나 주제도 다양하고 잘 정제된 편이었지만, 사유를 끝까지 밀고 나가기보다 추상적 진술과 낭만적 정서가 혼재된 점이 아쉬웠다. 그런 몇 가지 점들이 선자들의 선택을 유보하게 했다.
『밤이 부족하다』 시집 원고는 신자유주의 체제 속에서 노동과 자본, 기계와 인간 등을 둘러싼 집중된 문제의식을 보여주고 있는 시편들로, 체험의 구체성과 핍진한 묘사가 돋보였다. 그리고 이전의 노동시와는 사뭇 다른 노동의 양태와 발랄하고 자유로운 화법이 새롭게 느껴졌다.
1부 “한 처음에 아웃소싱이 있었다”에서는 물류창고와 택배 시스템을 중심으로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겪는 고통과 불안을 실감 나게 그려내었고, 2부 “이게 기계인간인가”에서는 인간의 기계화에 대한 비판적 인식을 다양하게 변주하고 있다. 3부 “밤의 공동체”에서는 야간 알바를 하는 사람들의 연대와 꿈을, 4부 “어떤 자로도 너의 영혼을 잴 수 없고 어떤 저울로도 너의 영혼을 달 수 없으니”에서는 비가시적 시간성 속에서 존재의 인식과 관계론을 다루고 있다. 이렇게 노동의 물질적 차원과 정신적 차원을 아우르며 공동체의 미래를 모색한다는 점에서 시집의 전체적 짜임새도 탄탄한 편이다.
이 시대의 노동은 더 이상 온전하지도 건강하지도 않다. 그의 시들 역시 온통 깨지고 녹아내리고 굴러떨어지는 존재의 비명으로 가득하다. 하지만 그 비명과 소음을 건져 올리는 시인의 시선과 목소리에는 세계의 본질을 향해 직진하면서 생겨난 속도감과 간결한 힘이 느껴진다. 다만 아쉬움이 있다면, 문제의식이 너무 선명하다 보니 동어반복과 다소 거칠고 직설적인 문장들이 눈에 띄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1세기 노동의 현주소를 치열하게 증언하는 한 권의 시집을 만났다는 것은 선자들에게도 참 반갑고 보람 있는 일이었다. 동주문학상 수상을 진심으로 축하드리고, 수상을 계기로 앞으로의 시 세계를 계속 기운차게 열어가시기 바란다.
심사위원 장석주(시인) 나희덕(시인. 글) 이병률(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