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레비치는 왜 추상화를 포기해야 했을까?
‘쉬프레마티슴(절대주의,Suprématisme)’으로 대표되는 러시아 화가 말레비치(Kazimir Severinovich Malevich, 1878~1935)가 그린 1930년대 이후의 작품을 본다면 사람들은 그 작품이 과연 말레비치의 작품이 맞는지에 대해서 의심이 들 것이다. 회화에 그다지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도, 혹은 말레비치나 쉬프레마티슴이라는 용어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라도 마치 몬드리안(Piet Mondrian, 1872~1944)의 작품처럼 한 번쯤은 그의 그림을 보았을 가능성이 높다.
쉬프레마티슴을 대표하는 작품 중 하나인 〈검은 사각형〉은 그저 흰 바탕에 검은 사각형이 그려져 있는 작품이다. 쉬프레마티슴은 우리말로 ‘절대주의’라고 번역되는데 이 추상화 같아 보이는 말레비치의 작품은 추상화와도 구별되는 더욱 급진적인 작품이다. 추상화의 경우에는 말 그대로 어떤 대상의 추상이지만 말레비치의 작품에서는 그저 흰 바탕과 어떠한 대상의 추상도 아닌 그저 하나의 대상인 검은 사각형이 있을 뿐이다. 말하자면 말레비치의 절대주의는 추상화마저도 추상해버린 것이다.
말레비치, 〈검은 사각형〉 Black square, 1915
리시츠키, 〈붉은 쐐기로 흰색을 쳐라〉 Beat the whites with the red wedge, 1919
러시아의 급진적 화가들은 말레비치의 급진적인 시도에서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의 예술적 수단을 발견했다. 그들은 원, 사각형과 삼각형 등 추상적 이미지를 그림으로써 어떤 사회 통념이나 이데올로기를 배제한 프롤레타리아트 세계관을 표현했다. 레닌은 자본주의 사회의 구습을 타파하기 위한 이러한 예술적 관행에 관대하였으며, 이를 새로운 사회 건설을 위한 실험으로 생각했다.
말레비치의 이러한 급진적인 예술적 태도는 이후 젊은 러시아 예술가들에게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으며, 로드첸코(Alexander Rodchenko, 1891~1956)나 리시츠키(El Lissitzky, 1890~1941) 등 일련의 혁명적 화가들은 이러한 말레비치의 급진적 시도 속에서 진정한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의 예술적 수단을 발견하였다. 얼핏 말도 안 되는 것처럼 들릴 수도 있겠지만 말레비치의 예술적 시도는 당시 러시아의 젊은 혁명적 예술가들에게는 낡고도 진부한 부르주아지 예술로부터 벗어나는 탈출구로 받아들여졌다.
리시츠키가 꾸준히 제작한 일련의 실험적 작품들 ‘프라운’(Proun, 프라운은 ‘새로운 예술작품’을 뜻하는 러시아어를 리시츠키가 줄여서 만든 조어이다)은 이를 잘 보여준다. 그는 원, 사각형, 삼각형 등과 같은 기하학적인 추상의 조합만으로 그림을 그렸다.
그가 이러한 기하학적 추상을 선호한 데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 원, 사각형, 삼각형 등의 기하학적 추상은 구상적 이미지와 달리 어떠한 사회적 통념이나 이데올로기도 배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과거에 구체적인 대상을 그리는 화가들은 귀족을 그리거나 호수나 바다를 그릴 때, 귀족이라는 통념에 사로잡혀 그들을 위엄 있게 그리거나, 호수의 쓸쓸함을 표현하기 위해서 자연을 고독하게 그리기도 하였다. 이러한 회화는 궁극적으로 보자면 당시의 부르주아지 지배계급의 편견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이었다.
이에 반해서 리시츠키의 ‘프라운’은 어떠한 선입견도 배제된 기하학적인 도형으로 구성된 것이므로 그 구성의 원리는 체계적이고 과학적인 것으로 간주되었다. 이러한 계급적 편견으로부터의 해방은 곧 과학적 세계관을 의미함과 동시에 프롤레타리아트의 세계관을 의미하는 것이다.
말레비치를 추종하는 일련의 이러한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은 자신을 ‘구성주의자(constructivist)’라 자처하며 새로운 사회의 건설을 위한 온갖 전위적인 예술 실험을 감행하였다. 물론 이러한 예술적 실험이 가능하였던 것은 블라디미르 레닌(Vladimir Ilich Lenin, 1870~1924)의 예술관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는 자본주의 사회의 구습을 타파하기 위한 예술적 관행에 대해서 관대하였으며 이를 새로운 사회 건설을 위한 실험으로 여겼다. 그러나 러시아의 이러한 과감한 예술적 실험들, 흔히 말하는 구성주의자들의 실험적 예술은 스탈린(Iosif Vissarionovich Stalin, 1879~1953)이 집권한 후인 1934년 이윽고 ‘사회주의 리얼리즘’이 공식적으로 선언된 이후 강제적으로 퇴각하고 말았다.
스탈린 정부가 공식적으로 표방하여 유일하게 인정한 사회주의 리얼리즘 예술이란 말 그대로 러시아의 발전된 사회주의 사회의 모습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알리는 것이었다. 스탈린은 이것이야말로 인민의 예술이며 과거의 구성주의자들이 행한 온갖 예술적 실험들은 서구 부르주아지 퇴폐 예술의 아류이자 모방으로 사회주의를 좀먹는 세균과도 같은 것이라고 취급하였다. 그리하여 러시아의 회화는 현실 대상을 재현하는 사실주의(realism)의 회화라는 19세기 이전의 회화로 되돌아가게 되었다.
아이러니한 사실은 스탈린주의가 표방한 사회주의 리얼리즘은 그 이론적 기초가 레닌의 예술 원칙인 현실에의 충실성, 사상성, 당파성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레닌이 생각하는 현실에의 충실성과 프롤레타리아트 당파성은 새로운 세계를 위한 과감한 혁명적 시도와 배치되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레닌의 사상은 부르주아지 세계와 급진적으로 단절된 혁명적 시도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근대적인 사상의 굴레를 넘어서는 지적인 면모를 보인다고 할 수 있다.
전체주의와 획일성을 강조하는 스탈린주의와는 전혀 딴판이다. 레닌이 집권한 이후 러시아는 근대 자본주의 사회를 넘어서려는 일련의 혁명적인 실험의 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근대를 넘어서려는 이러한 일련의 실험은 스탈린의 집권과 더불어 일소되었으며, 현실 사회주의는 획일화된 전체주의와 동일한 말로 전락해버리고 말았다.
구시대의 전통회화를 넘어서려는 말레비치 역시 스탈린의 사회주의 리얼리즘 선언 이후 스탈린 정부가 허용하는 유일한 형태의 회화인 사실주의 회화로 퇴화하고 만다. 1930년대 이후 그는 쉬프레마티슴이 아닌 구상회화를 그리는데 이 당시 그린 〈자화상〉은 바로 이러한 퇴행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더군다나 이 그림을 보면 구상화를 그리면서도 여전히 옷의 주름이라든지 목을 둘러싼 흰색 컬러 등의 모양을 기하학적으로 강조하는 방식으로 기존의 기하학적 도상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말레비치의 안쓰러운 흔적마저 보인다. 그는 외압에 의해서 자신의 실험적인 시도들을 거세당한 현실에 대해서 수치를 느꼈다. 어쩌면 이는 레닌의 혁명적 실험이 스탈린주의에 의해서 좌절당하는 상징의 하나일지도 모른다.
말레비치, 〈자화상〉 Self-portrait, 1933스탈린의 사회주의 리얼리즘 선언 이후 쉬프레마티슴에서 사실주의 화화로의 퇴행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그림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말레비치는 왜 추상화를 포기해야 했을까? (보고 듣고 만지는 현대사상, 2015. 08. 25., 박영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