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제도 포로수용소에 얽힌 이야기
17만여명의 포로가 수용되었던 거제포로수용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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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제도포로수용소는 1951년 2월 지금의 거제시 수양동과 고현동을 중심으로 거제도 일대에 설치되어 6·25전쟁 당시 조선인민군과 중공군 포로들을 수용, 1953년 7월까지 운영되었다. 거제군은 현재 거제대교로 육지와 연결되었으며, 거제포로수용소는 1983년 12월 20일 문화재 자료 제99호로 지정되었다.
거제 포로수용소유적공원
거제도에 포로수용소가 설치된 것은 육지와 가까워 포로를 수송하기에 용이하고 당시에는 육지와의 교통수단이 배 밖에 없었으므로 포로를 격리 수용하기에 적합했기 때문이다.
이 수용소는 1950년 국제협약인 「포로의 대우에 관한 1949년 8월 12일자 제네바 협약」에 따라 세워졌다. 이 협약에 의하면 ‘포로들에게 위협이 없을 정도로 전투 지역에서 충분히 떨어진 지역에 소재’하게 되어 있어 당시의 신현면, 즉 지금의 신현읍 고현리를 중심으로 한 문동리, 장평리, 양정리와 동부면의 디포리, 저구리의 농토 및 임야 1,200정보쯤을 징발하여 수용소를 세운 것이다. 그 때문에 당시 그 곳에 거주하던 주민 2,116세대가 수용소 대지 밖으로 밀려났다.
거주민의 이주 뒤에 그 자리에 수많은 막사가 들어섰고, 뒤이어 포로인 인민군과 중공군이 30만 명쯤 들어왔다. 당시 거제도에 살던 사람이 10여만 명쯤 이었는데, 흥남 부두에서 미 해군 함정 빅토리호가 싣고 온 피난민과 육지에서 건너온 피난민 20만 명쯤이 합쳐지자 거제도는 갑자기 사람들이 넘쳐나는 섬이 되었다.
거제도 포로수용소 경비초소(사진출처:국가기록원)
거제도 포로수용소(사진출처:국가기록원)
1951년 5월 포로수용소 내6수용소에서 수용소 사령관 F. T. 돗드 준장이 포로들에게 납치되어 4일 만에 풀려나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 사건은 인민군 대좌 이학구가 주동한 것으로 그들은 포로의 대우를 개선해줄 것, 자유의사에 따른 포로 송환 방침을 중지할 것과 포로대표위원단을 인정할 것 등을 요구했다. 그들은 유엔군과 대치하고 한편으로 반공 포로를 인민재판으로 처형하였다. 그 당시 사건이 일어난 제76수용소에서는 즉결인민재판의 결과에 따라서 처형된 반공 포로의 시체들이 매일 몇 구씩 쏟아져 나왔으며, 죽은 반공 포로가 무려 105명에 이른다고 한다. 유엔군 쪽의 강력한 저지로 돗드 준장이 구출되면서 사건은 매듭지어졌지만, 반공 포로와 공산 포로 간의 갈등은 더욱더 격해져 따로 분리하게 되었다. 반공포로 분리작전으로 약 12,000명의 북한 송환희망 포로들이 제17수용소(저구리)로, 8,000명의 북한 송환거부 포로들이 제18수용소(용초도)로, 10,000명의 민간인 억류자들이 제19수용소(봉암도)로, 그리고 5,600명의 중공군 포로들은 선박을 이용하여 제20수용소(제주도)로 수송되었다. 1952년 7월 17일작전은 완료되었다. 이렇게 거제도의 기존 수용소, 즉 유엔사 관할 제1포로수용소에는 북한 공산포로 약 48,000명만이 남게 되었다.
북한과 유엔 사이에 휴전협정이 1953년 7월 27일에 체결됨에 따라 전쟁은 기약없는 휴전에 들어갔다. 6·25전쟁이 끝난 뒤 남북 양쪽의 전쟁 포로 교환이 있었는데, 남과 북 어느 쪽도 선택하지 않고 거부한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남과 북 어디에도 정주하지 못한 채 ‘중립국’을 택했다. 북한군 포로 74명, 남한군 포로 2명, 중국군 포로 12명은 인도로 또는 남미로 흩어져 힘들고 고생스러운 세월을 겪었다.
거제 포로수용소유적공원
한편, 거제군은 1965년 6월에 착공, 1971년 여름에 준공된 거제대교개통으로 육지와 연결되었다. 그리고 거제포로수용소는 1983년 12월 20일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99호로 지정되었으며, 거제시 신현읍 고현리에 면적 8,887㎡의 거제도 포로수용소 유적공원으로 남아있다.
참고자료단행본거제시지편찬위원회. 거제시사. 경남: 거제시지편찬위원회, 2002.단행본신정일. (신정일의) 새로 쓰는 택리지 : 숨겨진 우리 땅의 아름다움을 찾아서. 3, 경상도 . n.p.: 다음생각, 2012.웹페이지"거제도 포로수용소 유적공원." 거제도 포로수용소 유적공원. n.d. 수정, 2018년 4월 27일 접속웹페이지"거제도 포로수용소." 위키백과. n.d. 수정, 2018년 4월 19일 접속 집필자허은심
시대/연대
· 시대 : 현대-6.25전쟁(1950.6.25~1953.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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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제도 포로수용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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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제도 포로수용소 경비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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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천재 이만희 감독의 전쟁영화 『7인의 여포로(1965)』
「7인의 여포로」는 1965년 제작된 이만희 감독의 전쟁영화이다. 6·25 전쟁 중 북한군의 포로가 된 간호장교 일곱 명을 호송하는 과정에서 중공군이 이들을 겁탈하려 들자 분개한 북한군 장교는 그들을 사살하고 간호장교들을 구해준다. 그리고 북한군 장교는 그의 부하들과 함께 간호장교들을 따라 대한민국으로 귀순한다는 내용의 영화이다. 이 영화는 반공법 위반으로 문제가 된 장면과 대사를 다시 촬영하여 재차 검열을 받아 「돌아온 여군」으로 상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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