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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6편 고구려의 衰微와 北扶餘의 멸망/제 2장 고구려 대 鮮卑의 전쟁(2)
烽上王의 폐위와 美川王의 즉위
봉상왕은 처음에 그 숙부 달가를 죽이고, 또 그 아우 돌고(咄固)를 의심하여 죽였는데, 돌고의 아들 을불(乙弗)이 화가 자기에게 미칠 줄 알고 달아났다. 봉상왕은 그 뒤에 여러 번 을불을 찾았으나 찾지 못하였다. 을불은 도망하여 성명을 갈고 몸을 팔아, 수실촌(水室村) 사람 음뢰(陰牢)의 집에서 머슴살이를 하는데, 음뢰가 일을 매우 고되게 시켜, 낮으면 나무하고 밤이면 쉴 사이 없이 그 집 문 앞 늪에 돌을 던져 개구리를 울지 못하게 해서, 그 집 식구들이 편안히 자게 하였다. 을불이 견디다 못 하여 1년만에 또 도망하여 동촌(東村) 사람 재모(再牟)와 함께 소금장사를 하였다. 소금을 사서 배편으로 압록강으로 들여와 소금집을 강동(江東) 사수촌(思收村) 사람의 집에 부려놓았다.
그 집 노파가 공짜로 소금을 달라고 하므로 1말쯤이나 주었는데도, 노파는 마음에차지 않아 더 다라고 보채었다. 을불이 주지 않았더니 노파는 도리어 꽁한 마음을 먹고, 해치려고 소금짐 속에다가 몰래 신 한 켤레를 묻어놓았다가, 을불이 그 집을 떠나오자 뒤쫓아와서 소금을 뒤져 신을 찾고, 을불 등 두 사람을 절도로 말아 압록제(鴨綠宰)에게 고소하여, 을불은 태형(笞刑)을 맞고, 소금은 빼앗아 노파에게 준다는 판결이 내렸다. 을불은 이에 소금장사도 할 수 없고 머슴살이 할곳도 얻을 수가 없어서, 숱한 마을 온갖 동네로 돌아 다니면서 걸식하여 날을 보냈다. 옷은 너덜너덜 찢어지고 얼굴은 보기에도 무섭게 파리하여 아무도 옛날의 왕손(王孫)인가 하는 의심을 갖지 아니하였다. 이때 ‘신가’ 창조리(倉助利) 등이 봉상왕을 폐하면, 임금 될 인재로나 차례로나 모두 을불이 가장 합당하다고 하여, 북부(北部)의 ‘살이’ 조불(祖弗)과 동부(東部)의 ‘살이’ 소우(蕭友) 등으로 하여금 을불을 찾게 하였다. 그들은 비류수에 이르러 을불을 만났다. 소우가 을불의 어릴 때 모습을 알고 있었으므로, 그에게 나아가 절하고 가만히 말하였다. “지금 임금이 무도하므로 ‘신가’ 이하 여러 대신들의 의논하여 지금 임금을 폐하고 왕손(王孫)을 세우려고 하여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다시, “지금 임금이 인심을 잃어 나라가 위태로우므로 여러 신하들이, 왕손이 품행이 단정하시고 성격이 인자하시어 조상의 업을 이을 만하다고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니 왕손은 의심치 마십시오.”
하고 데리고 돌아와 창조리의 동지 조맥남(鳥陌南)의 집에 숨겨두었다. 가을 9월에 창조리가 봉상왕을 따라 후산(侯山)에 가서 사냥을 하다가, 갈대잎을 따서 갓에 꽂고 외쳤다. “나를 좇으려는 이는 나와 같이 갈대잎을 따서 갓에 꽂으시오.”하니 모든 사람이 다 창조리의 뜻을 알고 일제히 갈대잎을 갓에 꽂았다. 이에 창조리가 여러 사람들과 함께 봉상왕을 폐하여 딴 방에 가두니, 왕은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을 스스로 깨닫고 그 아들 형제와 함께 목을 매어 자살하였다. 을불이 왕위에 오르니 곧 미천왕(美川王)이다.
美川王의 遼東 전승과 鮮卑 구축
기원 197년 발기가 반란을 일으키고부터 기원 370년경인 고국원왕(故國原王) 말년까지는 곧 고구려의 중엽 시대인데, 미천왕의 일대는 이 중쇠(中衰) 시대 중에서 가장 왕성한 때이다. 저자가 일찍이 환인현(桓因縣)에 머물러 있을 때, 그 지방의 문사 왕자평(王子平 : 본래 만주인)의 말을 들으니, “고구려의 고대에 ‘우굴로’란 대왕이 있었는데, 그가 아직 왕이 되기 전에 불우하여 사방으로 돌아다니며 걸식을 할 때 가죽으로 신을 만들어 신었으므로, 지금도 만주에서 가죽신은 ‘우굴루(우굴로는 만주 노동자의 신)’라 함은 그 대왕의 이름으로 이름 지은 것입니다. 그 대왕이 그렇게 걸식하도록 곤궁하였지마는, 늘 요동을 되찾을 생각을 가지고 있어 요동 각지를 돌아다닐 때, 산과 내의 험하고 평탄한 것, 길의 멀고 가까운 것을 알기 위해 풀씨를 가지고 다니면서 길가에 뿌려 그 지나간 길을 기억했으므로, 지금 요동 각지의 길가에 ‘우굴로’란 풀이 많습니다.”고 하였다.
‘우굴로’가 을불과 음이 같고 또 고구려 제왕 중에 초년에 걸식한 이가 을불뿐이니 ‘우굴로’는 아마 미천왕 을불이 한미할 때의 이름으로 생각된다. 미천왕은 기원 300년부터 331년까지 무릇 31년 동안을 왕위에 있은 제왕이고, 그 31년 동안의 역사가 곧 선비 모용씨와의 혈전한 역사다. 간략하고 허술한 고구려 본기와 허황하고 과장된 진서(晉書)를 합하여 그 진실에 가까운 것을 뽑아 왕의 역사를 서술하면 대략 아래와 같다.
1) 현도의 회복 - 왕자 수성이 회복한 요동이 연우왕 때에 또 한의 소유가 되었음은 앞에서 말하였거니와, 미천왕이 즉위하고는 그 제2년에 곧 현도성을 격파하여 8천여 명을 포로로 하여 평양으로 옮기고, 16년에 현도성을 점령하였다.
2) 낙랑의 회복 - 낙랑도 또한 한나라 무제(武帝) 4군(郡)의 하나로서 대대로 드리없이 옮겨졌지만, 대개 역시 요동 땅에 가설(假設)한 것이고, 평양의 낙랑과는 거리가 멀리 떨어져 있으므로 동천왕(東川王) 본기에, 위군(魏軍)이 낙랑으로 물러갔을 때 동천왕은 평양으로 도읍을 옮겼으며, 동천왕이 평양으로 천도한 뒤에도 위ㆍ진(魏晉)의 태수는 여전히 존재하였으니, 만일 지나의 낙랑이 곧 조선의 평양 - 남낙랑이라 한다면 이는 평양이 고구려의 왕도인 동시에 또 지나 낙랑군의 군치(郡治)가 되는 것이니, 천하에 어찌 이같은 모순 당착(撞着)되는 역사적 사실이 있으랴? 미천왕의 낙랑 점령은 그 재위 14년, 기원 313년의 일이니, 진(晉) 사람 장통(張統)이 낙랑ㆍ대방 두 군(대방도 요동의 假設郡이요, 長湍 혹은 鳳山의 帶方國이 아님)에 웅거하고 있었으므로 왕이 이를 공격하니, 장통이 항거할 힘이 없어 모용외의 부하 장수 낙랑왕 모용준(募容遵)에게 구원을 청하였다. 그러나 모용준은 그를 구원하러 갔다가 패하여, 마침내 장통을 꾀어 백성 1천여 집을 몰아가지고 모용외에게 투항하여, 모용외는 유성(柳城) - 지금의 금주(錦州) 등지에 또 낙랑군을 가설하여 장통으로 태수를 삼았으니 이제 요동의 낙랑은 고구려의 차지가 되었다.
3) 요동에서의 전승 - 요동의 군치는 양평(襄平), 다시 말하여 지금의 요양(遼陽)이니, 진서(晉書)에 의하면, “미천왕(美川王)이 요동을 공격하다가 자주 패하고 물러나고 도리어 맹약을 청하였다.”고 하였으나 양서(梁書)에는 “을불(乙弗 美川王)이 자주 요동을 침범하되 모용외가 제어하지 못하였다(乙弗頻冠遼東 廆不能制).”고 하여 모용외가 늘 미천왕에게 패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어 두 책이 서로 모순된다. 그러나 진서는 당태종이 지은 것이고, 당태종은 요동이 아무쪼록 지나의 요동임을 거짓 증명하여, 저희 나라 신하와 백성들을 고무해서, 고구려의 요동에 대한 전쟁열을 일으키려 하여, 전대의 역사책인 사기(史記), 한서(漢書), 후한서(後漢書), 삼국지(三國志) 등에 기록되어 있는 조선 열국(列國), 그 중에서도 특히 고구려에 관계되는 문구를 많이 고쳤으니, 하물며 그 자신이 지은 진서(晉書)에서야 더 말할 나위 있으랴. 그러니 양서(梁書)에 기록되어 있는 것이 도리어 진실하고, 현도와 낙랑이 이미 차례로 정복 되었으니 겨우 몇 현(縣)밖에 남지 않은 요동도 고구려에게 되돌아왔을 것이지마는, 아직 충분한 증거가 없으므로 이만하여둔다.
4) 극성(棘城) 전쟁 - 기원 320년에 미천왕이 선비의 우문씨(宇文氏)와 단씨(段氏)와 진(晉)의 평주자사(平州刺史) 최비(崔毖)와 함께 연합하여서 모용외의 서울 극성으로 쳐들어갔다. 모용외가 네 나라의 사이를 이간시키므로 미천왕과 단씨는 물러나고, 우문씨와 최비가 모용외와 싸우다가 크게 패하여서 최비는 고구려에 투항하고 고구려 장수 여노자가 하성(訶城)에 웅거해 있다가 모용외가 장수 장통에게 패했다고 하는데, 이것은 진서(晉書)에 전해진 것으로서 거의 사실인 듯하며, 여노자는 고노자(高奴子)의 잘못인 듯하나, 고노자는 모용외를 여러 번 격파한 명장이니 이제 장통에게 붙잡혔다는 말이 자못 의심스럽고, 또한 고노자가 봉상왕 5년 이후에는 다시 본기(本紀)에 보이지 아니하니 그 동안에 이미 죽었을 것인데, 근 40년만에 갑자기 나타난 것도 매우 의심스럽다. 아마도 거짓 기록인가 싶다.
제3의 丸都, 지금의 輯安縣 紅石頂子山의 함락
기원 331년에 미천왕이 죽고 고국원왕 교(釗)가 왕위를 이었다. 이듬해 3년에 모용외도 죽고 그의 세자 황(皝)이 왕위를 이었다. 고국원왕은 그 야심은 미천왕보다 더했으나 재략이 그에 미치지 못했고, 모용황은 그 야심과 재략이 아버지 외보다 뛰어난 효웅일 뿐더러, 그의 서형(庶兄) 한(翰)과 그의 두 아들 준(雋)과 각(恪) 등이 다 절세의 기재(奇才)였다. 고국원왕이 평양의 서울을 서북(西北) 경영에 불편하다 하여 지금의 집안현 홍석정자산(紅石頂子山) 위에 새로 환도성을 쌓아 서울을 옮겼다. 이것이 제3의 환도성이니, 태조왕(太祖王) 때에 왕자 수성이 쌓은 제1환도는 아직 적국의 땅으로 되어 있고, 동천왕(東川王)이 쌓은 제2환도도 너무 적국에 가까이 있으므로, 나아가 싸우기에 편하고 물러나 지키기에 용이한 지방을 가려 서울로 하려고 이 제3의 환도성을 쌓은 것이다.
모용황은 고국원왕이 제3의 환도성에 천도하였다는 말을 듣자, 고구려가 장차 북벌할 것을 알고, 먼저 고구려에 침입하여 타격을 주는 동시에, 겉으로는 고구려를 피하여 멀리 달아날 곳을 가장하여 고구려로 하여금 방비를 소홀히 하게 하려고, 극성 - 모용한(募容翰)이, “우문씨는 비록 강성하나 실로 지킬 뜻을 가졌을 뿐인데, 고구려는 그렇지 아니하여, 우리가 만일 우문씨를 쳤다가는 고구려가 우리의 뒤를 엄습할 염려가 없지 아니하니 먼저 고구려를 치는 것이 옳습니다. 고구려를 치자면 두 길이 있으니, 하나는 북치(北置)로부터 환도성으로 향하는 북도(北道)인데, 북도는 평탄하고 넓으나 남도는 험하고 좁아서 고구려가 남도보다도 북도를 더 엄중히 방비할 것이니, 우리가 먼저 일부 군사를 내어 북도로 침입한다 일컫고, 가만히 대군을 내어서 남도로 공격하면 환도성을 개뜨리기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고 하여, 황은 한의 계교를 채용하였다.
고국원왕은 모용황의 군사가 북도로 침입해온다는 보고를 듣자 저들의 계교를 모르고 아우 무(武)를 보내 5만의 군사로 북도를 방비하게 하여, 무는 황의 장군 왕부(王富)를 목베고 그 군사 1만 5천을 전멸 시켰으나, 왕은 적은 군사로 남도를 방어하다가 황의 대군을 만나 크게 패하여 단기(單騎)로 도망하니, 환도성이 드디어 적병에게 함락되어 왕태후(王太后) 주씨(周氏), 왕후 모씨(某氏)도 다 적병에게 잡혔다. 모용황은 환도성을 얻고 다시 왕을 쫓으려다가, 황의 장군 한수(韓壽)가, “고구려의 왕이 비록 패해서 달아났으나, 여러 성의 구원병이 다 모여들면 넉넉히 우리 대군의 적수가 될 것이고 또 고구려의 국내에는 험한 산이 많아 추격하는 것이 위험하니, 고구려 왕의 아버지의 무덤을 파서 해골을 가지고 그 모후(母后)와 아내를 잡아가면, 그는 죽은 아버지와 살아 있는 어머니와 아내를 되찾기 위해 할 수 없이 항복할 것이니, 그런 다음에 은혜와 믿음으로 무마하여 그를 움직이지 못하게 한다면 장래 우리의 중원(中原) 경영에 아무런 장애가 없을 것입니다.”고 하였다.
황이 그의 말을 쫓아 국고(國庫)에 들어가 역대의 문헌을 불태우고 모든 진귀한 보물과 재산을 약탈하고, 성곽과 대궐과 민가를 모조리 파괴하고, 미천왕의 능을 파 그 시체와 왕태후 주씨, 왕후 모씨를 싣고 돌아갔다. 적병은 비록 돌아갔으나 죽은 아버지와 생모가 적국에 잡혀갔으므로, 고국원왕은 부모를 찾아오기 위해 공손한 말과 많은 예물로 모용씨와 교제하고, 하는 수 없이 지나 대륙에 대한 경영을 포기함에 이르러 수십 년 동안 약한 나라가 되었다.
환도성의 세 번의 천도는 고구려 상대(上代)의 성쇠의 역사를 충분히 설명해주는 것이니, 태조왕 때에 왕자 수성(遂成 : 뒤의 次大王)이 요동을 점령하고 제1의 환도성을 지금의 개평 부근에 처음으로 쌓던 때가 고구려의 가장 강성한 때이고, 발기가 모반하여 요동을 들어 공손씨에게 항복하므로 산상왕(山上王)이 제2의 환도성을 지금의 환인현 부근에 옮겨 쌓았다가 이것까지 위의 장수 관구검에게 파괴당하려 하던 때가 고구려의 쇠퇴해진 시기이고, 미천왕이 선비를 구축하여 낙랑ㆍ현도ㆍ요동 등 군을 차례로 회복하여 중흥의 실적을 올리다가 중도에 죽고, 고국원왕이 왕위를 이어가지고 제3의 환도성을 지금의 집안현 부근에 다시 쌓았다가 또 모용황에게 파괴당하니, 이때는 고구려의 가장 쇠미해진 시기였다. 삼국사기에는 비록 이러한 관계를 자세히 서술하지 못하였으나, 본기(本紀)의 지리를 자세히 고찰해보면 그 대강을 얻을 수 있고 삼국지(三國志)에 이이모(伊夷謨)가 다시 새 나라를 만들었다고 한 것은 곧 제2의 환도성 신축을 가리킨 것이다.
이상의 기록은 조선사략(朝鮮史略)과 삼국사기에 보이는 것을 뽑아 기록한 것이어니와, 진서(晉書)는 이미 대략 말한 바와 같이 당태종이 고구려를 헐뜯고 욕하기 위해 허다한 사실 아닌 기사를 거짓으로 만든 것이 많은 글이다. 그러므로 위의 기사도 의심스러운 점이 없지 아니하니, 예를 들면 모용황이 미천왕의 무덤을 파갔다고 하였으나, 미천왕 때의 고구려 서울은 평양이었고, 미천왕이 돌아간 지 12년만에 고국원왕이 환도성에 천도하였으니, 고구려 역대의 왕릉은 다 당시 왕도(王都) 부근에 있었으므로, 미천왕은 돌아간 뒤에 반드시 평양에 묻혔을 것이고 환도성에 묻히지 않았을 것인데, 환도성을 침략한 모용황이 어찌 평양에 묻힌 미천왕의 능을 파갈 수 있으랴? 그러므로 미천왕의 능을 파갔다는 말이 극히 의심스러운 동시에, 그 이하에 기록된 왕태후와 왕후를 잡아 갔다는 것도 믿기 어렵다. 다만 이 뒤에 고구려가 30여 년 동안 곧 모용씨가 멸망하기 이전에는 다시 지나 대륙을 경영하지 못했음을 보면 모용씨에게 크게 패하여 불리한 조건의 조약을 맺은 사실이 있었음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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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편 고구려의 衰微와 北扶餘의 멸망,
제2장 고구려 대 鮮卑의 전쟁(2)에 대하여
조선상고사를 즐겁게 감상하였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