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리 슈틸리케(61·독일) 축구 대표팀 감독은 경기 종료 휘슬이 울리자 선수들과 인사를 나누던 평소와는 달리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며 라커룸으로 곧바로 향했다.
13일 호주 캔버라에서 열린 한국과 쿠웨이트와의 2015 호주 아시안컵 A조 조별리그 2차전.
슈틸리케 감독은 A조 최약체라는 쿠웨이트를 맞아 졸전을 펼친 것에 화가 난 모습이었다. 그는 경기 후 작심한 듯 강한 발언을 쏟아냈다. “우리는 이겼지만 이기지 못할 경기를 했다.” “우리 선수는 100번 정도 공을 빼앗겼다.” “오늘부로 우리는 더는 우승 후보가 아니다.”
하지만 한국 축구의 부진에 실망한 팬들이 잘 모르는 사실이 있다. 한국은 이번 아시안컵에서 오만과 쿠웨이트에 각각 1대0으로 승리하며 2연승으로 8강행을 확정했다. 아시안컵 초반 두 경기에서 무실점으로 2연승을 거둔 것은 1988년 대회 이후 27년 만의 일이다. 두 경기 만에 8강행 티켓을 따낸 것도 8강 제도가 도입된 1996년 이후 처음 있는 일이다. 그만큼 아시안컵이 만만한 대회가 아님을 보여준다.
번번이 중동에 발목 잡힌 한국
한국 축구는 이번 아시안컵에서 55년 만의 우승에 도전하고 있다. ‘아시아의 맹주’임을 자부하는 한국으로선 부끄러운 역사다. 한국이 처음으로 아시안컵 우승컵을 들어 올린 대회는 1956년 제1회 홍콩 아시안컵. 당시엔 베트남, 홍콩, 이스라엘, 한국 4팀이 출전해 풀리그로 우승을 가렸다. 한국은 이스라엘을 2대1, 베트남을 5대3으로 꺾는 등 2승 1무로 정상에 올랐다.
1960년 홈에서 열린 2회 역시 4팀이 출전했다. 한국은 베트남, 이스라엘, 대만에 3연승을 거두며 대회 2연패를 달성했다. 당시엔 예선을 거친 4개국이 풀리그로 우승팀을 가렸기 때문에 결승전을 따로 치르지 않아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
이 대회를 마지막으로 한국은 아시안컵 우승과 인연을 맺지 못했다. 1972년 태국, 1980년 쿠웨이트, 1988년 카타르 아시안컵에서 결승에 올랐지만 준우승에 머물렀다. 1972년에는 이란에 1대2로 무릎을 꿇었고, 1980년엔 개최국 쿠웨이트에 0대3의 완패를 당했다. 1988년 카타르 대회에서는 사우디아라비아와 만나 승부차기 끝에 패해 정상 문턱에서 고배를 마셨다. 세 번 다 중동을 넘지 못했다.
이란과의 질긴 악연
1996년 UAE(아랍에미리트) 아시안컵은 축구 팬이라면 잊을 수 없는 대회다. 이란과의 질긴 악연이 시작된 대회이기도 하다. 한국은 이란과의 8강전에서 알리 다에이에 후반에만 4골을 내주며 2대6으로 참패했다. 한국 축구사의 비극으로 남아 있는 경기다. 지금도 이란 원정을 가면 이란 현지 팬들이 한국 선수들에게 ‘식스(6)! 투(2)!’라는 구호를 외칠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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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년 카타르에서 열린 아시안컵 8강 이란과의 경기에서 이용래가 이란 안드라닉과 볼을 다투고 있다. 조선일보DB
그 대회부터 한국은 아시안컵에서 이란과 내리 다섯 번 연속 8강에서 만났다. 2000년과 2007년, 2011년엔 한국이 이란을 물리치고 4강에 갔고, 2004년엔 이란이 한국을 누르고 준결승에 올랐다. 그런데 두 팀 다 결승엔 한 번도 진출하지 못했다. 한준희 KBS 해설위원은 “한국과 이란이 거의 매번 8강에서 혈투를 벌인 탓에 이긴 팀은 정작 준결승에서 힘을 쓰지 못했다”고 말했다. 한국은 2000년 4강전에선 사우디아라비아에 1대2로 패했고, 2007년 준결승전에서는 이라크에 승부차기 끝에 무릎을 꿇었다.가장 아쉬웠던 2011년한국 축구가 가장 아쉽게 생각하는 아시안컵이 2011년 카타르 대회다. 2010 남아공월드컵 16강 진출로 신바람을 낸 한국 축구는 이듬해 열린 아시안컵을 맞아 박지성·이영표·차두리 등 베테랑 선수에 기성용·이청용·구자철·지동원·손흥민 등 신·구 조화가 잘 이뤄져 강력한 우승후보라는 평가를 들었다. 하지만 숙적 일본과의 4강전에서 아쉬움의 눈물을 흘려야 했다.연장 종료 직전 황재원의 극적인 동점골로 2대2 무승부를 만든 한국은 정작 승부차기에서 구자철·이용래·홍정호가 모두 실축하며 0대3으로 완패했다. 박지성과 이영표의 대표팀 은퇴 무대라 더욱 아쉬운 결과였다.사실 한국이 아시안컵에서 그토록 고전한 이유는 이 대회에 큰 관심이 없었던 것도 원인이 됐다. 1988년 아시안컵에서 MVP를 차지했던 김주성 대한축구협회 심판운영실장은 “당시 협회와 대표팀뿐만 아니라 모든 국민이 월드컵·올림픽·아시안게임 등의 ‘국위선양’ 대회에만 관심을 기울였다”며 “1983년 출범한 프로축구가 그다음으로 중요했고 아시안컵은 별로 주목받지 못했다”고 말했다.위상 달라진 아시안컵하지만 최근엔 분위기가 달라졌다. 유로(유럽축구선수권)나 코파아메리카(남미축구선수권)와 같은 대회가 지속적으로 주목을 받으며 아시아 최고를 가리는 대회인 아시안컵의 위상도 올라갔다.특히 아시안컵 우승으로 얻는 컨페더레이션스컵 출전권이 값지다. 월드컵이 열리는 장소에서 대회 개최 1년 전에 열리는 컨페드컵은 월드컵의 리허설 무대로 손색이 없다. 한국은 개최국 자격으로 나간 2001 컨페드컵 이후엔 이 대회에 참가하지 못했다.55년 만의 우승에 도전하는 슈틸리케호(號)는 과연 축구 팬들의 오랜 숙원을 풀어줄 것일까. 한국은 17일 오후 6시 브리즈번에서 열리는 조별리그 마지막 경기에서 개최국 호주와 A조 1·2위를 다툰다./장민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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