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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몽주의의 배경과 발전
18세기의 유럽은 많은 변화가 있었던 시기였는데, 무엇보다 영국에서는 산업혁명으로 인해 기술 혁신이 이루어지게 되면서 사회와 경제 부문에 급격한 변화가 발생하였습니다. 이러한 생산기술의 혁신은 곧 유럽 전역으로 확대되어 빠른 공업화가 유발되었습니다. 또한 정신적으로도, 이성적, 진보적, 자유주의적, 과학적 이념이 확산되면서 계몽의 시대, 즉 계몽주의가 대두되었는데, 그 당시에는 각종 문제에 대한 올바른 해답만 알게 된다면, 인류가 한 단계 더 나아가 새로운 과학의 시대로 도약할 수 있다고 믿게 되었던 것입니다. 나아가 철학이 일종의 정신을 다루는 과학으로 발전해, 복잡한 인식에 관한 모든 문제에 대한 객관적인 해답을 내놓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시대는 그야말로 유럽인들에게 있어, 희망과 기대에 가득 찬 시대, 고결한 시대, 감격의 시대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실제의 상황은 그러하지 못했습니다.
프랑스는 여전히 신의 은총을 바탕으로 하는 군주제 국가에 머물러있었고, 그래서 거의 모두가 구시대적이고 부패한 통치체제에 반감을 품고 있었는데, 갈수록 그 반감은 더욱 커졌습니다. 당시의 귀족들은 권력을 장악하려고 안간힘을 쓴 반면에, 중산계급은 급격히 지식계층으로 성장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것은 프랑스에서 발생한 대혁명의 전제 조건이 되었던 것입니다. 겉보기에는 여전히 교회와 국가가 아주 강한 듯했지만, 절대왕정의 부패상을 추적하고, 그 내용을 글로 옮겨 일반 대중에게 알리는 지식인들이 출현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정치도 눈에 띄는 변화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점점 자신의 세력을 확대시켜 가던 부르주아 시민계급은 프랑스에서 미증유의 정치혁명을 일으키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1789년의 프랑스 대혁명입니다. 이 프랑스 대혁명은 온 유럽을 뒤흔든 엄청난 사건이었습니다.(우리나라의 경우로 쉽게 바꿔보면, 조선 말엽에 중인과 상민층의 민중들이 대거 일어나 임금을 폐하고 사형에 처했다는 사건이라고 생각하면 되겠습니다.) 특히 지금의 독일 지역은 프랑스 혁명의 사상적 영향을 가장 많이 받은 곳이었는데, 시민계급이 정치화되지 못했던 독일에서는 이 혁명이 다른 방식으로 표출되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철학의 혁명’이었는데, 칸트와 헤겔로 대표되는 독일 관념철학은 철학을 혁명이라 부를 수 있을 정도로 혁신적인 내용을 담고 있었던 것입니다. 드디어 인간의 지성은 이전에는 없었던 새로운 단계로 접어들게 되고, 근대는 마침내 완성되었던 것입니다.
계몽주의란?
계몽주의는 비단 철학의 사조만을 가리키는 용어는 아닙니다. 근대적 사유를 일컫는 대표적인 말로, 인간의 이성을 통하여 사유하는 자세를 이르는 말입니다. 독일의 위대한 철학자인 칸트는 계몽주의를 ‘인간이 다른 사람들의 의견에 굴종하는 것으로부터 해방되어, 자기 자신이 스스로 이성을 행사하는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이라고 정의하였습니다. 이 말을 풀어 보면, ‘계몽’이란 ‘인간의 이성을 자유롭게 활용하는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한마디로 스스로 생각하는 능력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사람들은 어떤 종교적, 정치적 권위에 무조건적으로 복종해 왔었는데, 이러한 점을 극복하고 인간이 이성의 능력을 통하여 스스로 행복해질 수 있다고 보는 것이 바로 계몽주의의 관점인 것입니다. 르네상스에서 출발했던 근대(세)는 계몽주의에 와서 비로소 이성의 능력을 긍정함으로써 현실화되기 시작하였습니다.
나아가 계몽주의란 인간이 자신의 이성을 활용하여 세계를 이해하고, 그러면서 인간이 처한 조건을 개선할 수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더 이상 신의 은총이나 보살핌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인간 스스로 노력하여 지식과 자유를 얻고, 행복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넓게 보아 계몽주의는 17세기까지 발전되었던 여러 사유의 연장선상에 있었습니다. 그것은 17세기 영국의 철학과 18세기 프랑스 계몽주의, 그리고 독일 철학까지를 포괄하는 것이었습니다. 계몽주의는 인간 이성에 대한 낙관적인 전망을 가지고 있었고, 신으로부터 벗어난 합리적인 사유를 통하여 발전한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전망은 인간의 이성으로 수립된 과학을 신뢰하여, 인간의 힘으로 세상의 모든 것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낙관론으로 기울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계몽사상이 20세기까지 세계를 지배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사실입니다. 물론 앞으로 우리가 살펴볼 것처럼 이성의 힘을 불신했던 철학자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현대 프랑스 철학에서 ‘이성’의 폭력적인 힘이 비판받기 전까지, 이성을 중시하는 계몽사상은 유럽 전체를 지배해 왔다고 말해도 과언은 아닐 것입니다.
이러한 계몽주의 사상가들은 정치적 열망이 강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인간의 국가가 신의 나라를 모방한 것이라는 근대 이전의 신학적 정치관을 깨끗이 버렸습니다. 그리고는 ‘자연권’과 ‘계약론(한 사회의 법, 국가체제를 사람들 사이의 계약을 통해 이루어진 것이라고 파악하는 이론. 홉스, 로크, 루소 등의 근대 정치 이론은 모두 계약론이라고 볼 수 있음)’을 통하여 새로운 정치 이론을 내놓게 됩니다. 그렇게 정치에 대한 이론적, 철학적 사유는 계속 발전하고 있었지만 아쉽게도 현실의 정치는 그대로 머물러 있었습니다. 이러한 정치적 현실은 계몽 사상가들을 비판과 개혁, 그리고 혁명을 지향하는 사람들로 변모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들은 독단적이고 권위주의적인 국가를 비판하면서, 자연권에 기반을 둔 정치적 민주주의를 구상하기 시작했습니다. 영국의 로크, 프랑스의 볼테르와 시에예스(1748~1836; 프랑스의 정치이론가. 1789년 프랑스 혁명 직전 ‘제3신분이란 무엇인가?’ 라는 소책자를 발간하여 혁명의 방향을 제시) 그리고 루소, 미국의 토머스 제퍼슨(미국의 정치가, 철학자. 미국 독립선언문을 기초하였고, 1800년 미국의 제3대 대통령이 되었다. 1809년 정계에서 은퇴한 후 버지니아 대학을 설립하여 민주적 교육을 위해 노력) 같은 사람들은 모두 그러한 계몽주의 사상가들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 계몽 ~ 일반적으로 전통적인 권위나 편견 또는 속된 믿음으로부터 사상이 해방됨을 뜻하며, 따라서 기존의 가치와 질서에 대해 비판적이고 자유스러운 사상 태도의 확립과 보급을 의미한다. 영어로 계몽이라 하면 ‘빛을 비추는 것’이고, 독일어로 계몽이란 ‘밝게 하는 것’을 말한다. 칸트는 계몽사상을 정의하여 ‘인간이 스스로 미숙함으로부터 탈피하는 것’이라 했고, 헤르더는 계몽시대를 가리켜서 ‘회의와 흥분으로 술렁이는 위대한 세기’라고 했는데, 특히 헤겔은 계몽주의를 프랑스 대혁명의 이념적 기반으로 규정한다. 계몽주의의 주요 특징은 형식상으로 보면 합리적인 명석함, 삶을 억압하는 어떤 힘이나 현세에 부정적이고 비이성적인 교의에 비판적 시각, 그리고 지식, 탐구 및 서술에서 경험적 요소의 신장 등이다. 또한 내용상으로는 인간을 인간답게 하며 동시에 그로 하여금 논리적으로 바른 사고와 인륜적으로 선한 행동을 할 수 있게 하는 능력으로서의 이성에 대한 가르침을 들 수 있다. 영국에서는 로크, 흄, 프랑스에서는 몽테스키외, 볼테르, 디드로, 독일에서는 볼프, 칸트, 레싱 등이 계몽사상가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이들은 전제주의, 권위주의, 기성 종교 등을 비판했다.
※ 계몽주의의 핵심이념
① 인간은 천성적으로 타락한 존재가 아니다.
② 삶의 목표는 삶 그 자체지, 사후의 삶이 아니다.
③ 지상에서 선한 삶을 위한 기본 조건은 무지와 미신에서 인간의 정신을 해방시키는 것이다.
④ 무지와 국가의 자의적인 권력에서 해방된 인간은 진보와 개선의 능력을 갖추고 있다.
⑤ 모든 것이 서로 관련되어 있고, 모든 것이 자비로운 섭리라는 거대한 계획의 한 부분이다.
프랑스에서 꽃핀 계몽주의
우리가 좁은 의미로 계몽주의를 이해하고자 할 때 그것은 종종 프랑스 계몽 사상가들의 계몽주의를 가리키곤 합니다. 프랑스에서의 18세기는 흔히 프랑스 계몽주의의 시기라고 불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프랑스의 계몽주의를 통합하여 정의하는 것은 불가능할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서로 다른 입장과 배경을 가지고 있었고, 또 활동의 영역도 달랐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특징을 몇 가지로 간추려 보면 그들은 모든 근대적 사유를 공유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우선 그들은 ‘이성에 대한 확신’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는 데카르트의 합리주의 그리고 인간 이성을 통하여 사물을 설명하는 물리적 자연의 법칙을 찾을 수 있음을 증명한 뉴턴과, 이성을 통하여 사회 문제를 해결하고 조정할 수 있다고 믿었던 로크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종교나 풍습을 미신으로 간주하고 사유의 기준을 이성에서 찾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감각주의(감각을 인식의 원천으로 간주하는 지적 경향)’의 경향을 가진 사람들로 ‘유물론’과 ‘무신론적 세계관’을 지지하기도 했습니다. 볼테르는 이신론(18세기 계몽주의 시대에 나타난 합리주의적 종교관. 이 관점에 따르면 신은 세계를 창조했지만 세계에 간섭하지 않는다. 신의 계시나 교회의 가르침이 아닌 이성을 통하여 얻을 수 있는 종교적 지식을 인정하는 합리주의적 종교관이다.)을 지지하던 사람이었고, 디드로(1713~1784; 18세기 프랑스의 대표적인 계몽사상가. 백과전서의 출간을 주도하여 생애의 대부분을 이 작업에 매달렸다. 당시의 대표적인 유물론자로 진화론적 사상을 소유)는 열렬한 무신론자였으며, 돌바크(1723~1789; 프랑스의 계몽사상가. 원래 독일에서 태어났으나 1749년 프랑스에 귀화하였고, 백과전서의 자연과학 항목을 집필. 그가 쓴 ‘자연의 체계’는 유물론의 성서로 불렸다.)는 철학의 선택은 미신과 유물론의 양자택일일 뿐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또한 프랑스의 계몽 사상가들은 ‘사회혁명’의 필요성을 강조하기도 합니다. 이는 계몽사상이 부르봉 왕조의 지배에서 벗어나 프랑스를 혁명으로 인도한 사상이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든 경향을 표현해 주는 것은 다름 아닌 <백과전서>입니다. 프랑스 계몽 사상가들은 종종 ‘백과전서파’로 불리곤 하는데, 백과전서의 출간은 당시 프랑스에서 활동하던 쟁쟁한 지식인들의 참여로 이루어진 거대한 작업이었습니다. ‘디드로’와 ‘달람베르’의 주도로 편찬된 백과전서는 흔히 프랑스 혁명의 사상적 배경이 된 저작으로 여겨지고 있는데, 그들의 목적은 모든 지식을 포괄하는 보편적 사전을 만드는 데 있었습니다. 튀르고(1727~1781; 계몽주의 시대 프랑스의 정치가, 경제학자. 성직자였다가 볼테르를 읽고 신앙에 회의를 느껴 관리 생활을 하였다. 백과전서 편찬에 참여), 볼테르, 루소, 몽테스키외 등 184명의 사상가와 학자가 참여하여 만든 백과전서는 실제 당시 프랑스의 학문과 기술을 집대성한 것입니다. 통일적 관점으로 이루어진 저작은 아니었지만 근대적 지식과 이성 중심의 사고를 전개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1751년에서 1772년 사이에 발간된 백과전서는 이성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가톨릭교회를 강하게 비판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기 때문에 결국 발행이 금지되었습니다. 이 저작은 기성의 권위에 비판적이었던 만큼 프랑스 사회를 광범위하게 개혁하는 것이 그 목적이었는데, 이는 프랑스 혁명의 사상적 배경이 되어 혁명 이전 구체제의 권위를 무너뜨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습니다. 백과전서파는 학파라기보다 범 계몽적 지식인들의 연합이라고 볼 수 있는데, 학문적 의미 이외에도 상당히 정치적 의미를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쉬어가기 ; 환자의 도망
직원; "왜 수술실에서 달아났는지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병원 직원이 기진맥진한 환자에게 물었다.
환자; "아~ 글쎄, 간호사가 '겁내지 마세요! 맹장수술은 아주 간단한 일이니까' 하지 않겠어요!"
직원; "그래서요?"
환자; "그래서라니? 그 간호사가 (나를 수술할) 의사한테 그러더란 말이에요!"
프랑스 계몽주의의 5가지 조류
프랑스의 계몽주의에서 표현된 의견들 가운데서 크게 5가지 조류로 분류할 수 있는데, 그것들의 대부분은 결국 17세기에 발전한 사상들의 연장인 것입니다. 그리고 가끔 과장된 형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① 재래의 풍습을 맹랑한 것으로 보고 이에 반항하는 기세가 있었고, 이 결과로 이성에 대한 호소가 있었습니다. 이 이성의 중시는 일부 데카르트의 합리주의에 연유하는데, 그러나 그것은 두 사람의 영국 사상가인 뉴턴과 로크에게서 더 많은 영향을 받았습니다. 프랑스의 사상가들, 특히 볼테르는 영국의 사상을 계몽주의의 모범으로 보았습니다. 프랑스의 사상가들은 뉴턴이 인간은 이성을 사용하여 이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사건을 설명하는 물리적 자연의 법칙들을 발견할 수 있음을 증명했다고 생각했습니다. 또 로크는 인간이 이성을 사용하여 모든 사회 문제를 잘 조정할 수 있는 법칙들을 찾아낼 수 있음을 증명하였다고 그들을 생각했습니다. 이성에 대한 이 호소는 본래 맹랑한 권위층에 대항하여 사색인의 권리를 확보하려는 욕망에 기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주의 깊게 전개된 인식론에 근거를 두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사회 개혁을 위한 하나의 테크닉이었던 것입니다. 뉴턴이 우리에게 하나의 새로운, 그것도 최종적인 것으로 생각되는 물리학을 주었듯이, 우리는 하나의 새로운 그리고 최종적인 사회 제도를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계시된 종교가 필요 없습니다. 아니, 우리는 그러한 것을 내버려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물리적 자연뿐만 아니라 또한 사회를 위한 법칙들도 찾아내는 데 충분한 지능을 주었다고 믿어도 좋습니다. 몽테스키외는 로크의 정치학적 원리의 대부분을 채택하였습니다. 가령 권력의 분리, 여러 가지 개인적 권리, 정부의 당연한 목표로서의 일반 민중의 복리 같은 것을 채택하였습니다. 그는 기후와 심리적 조건이 나라에 따라 다르기 때문에 정치적 제도가 또한 다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인정하였습니다. 로크는 이것을 깨닫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한편, 어느 나라에서나 널리 시행되어야 할 법률들은 적절한 사실들에 대한 이성의 분석에 의하여 결정될 수 있다고 몽테스키외는 생각하였습니다.
② 감각주의로의 경향이 널리 퍼져 있었습니다. 데카르트는, 금수(禽獸)는 무감정한 자동 기계라고 가르쳤습니다. 로크는 유기적으로 조직된 물질이 생각하는가 생각하지 못하는가 하는 물음을 제기하였습니다.(이 물음에 부정적인 답을 내리기는 하였지만) 볼테르는 금수와 인간을 갈라놓은 데카르트의 구별이 옳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벼룩이나 벌레와 마찬가지로 생각하는 물질이라고 그는 말하였습니다. ‘라 메트리’는, 사람과 사람이외의 다른 생물들과의 차이는 유기적 조직의 복잡성의 정도의 차이일 따름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이 이후에 ‘콩디약’은 맨 처음의 단순 관념들은 사실은 따로따로 된 감각들이라고 하는 로크의 학설을 취하였고, 또 다른 모든 심적 사실들이란 이 단순 관념들과 이 관념들이 끌어내는 여러 가지 고통과 쾌락이 기계적으로 얽혀 결정짓는 복합 관념들이라는 설을 발전시켰습니다. 그는 생명을 불어넣은 조상(彫像; 조각상)을 가상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조상에 감관(感官)을 하나씩 주어 가면, 마침내 그 조직이 충분히 복잡하게 된 후엔 이 조상이 하나의 어엿한 사람이 될 수가 있을 것이라고 결론지었습니다. 디드로는 루크레티우스의 사상과 비슷한 사상을 가졌던 사람인데, 그는 자연 속에 살아 있고 의식적인 요소들이 언제나 있었다고 상상하였습니다. 이 요소들이 서서히 함께 모여 마침내는 동물들과 사람들의 영혼을 형성하기에까지 이르렀다고 그는 생각했습니다. 엘베시우스는 단순한 요소들로부터 복잡한 형태로의 점차적 이행이라는 생각을 가졌었고, 또 이 생각을 도덕률의 발달에 적용하였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쾌락과 고통에 대한 감수성을 가지고 있으며, 전자를 추구하고 후자를 피한다고 합니다. 우리가 도덕률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은 경험이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의 쾌락 추구에서 믿도록 한 확신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적으로 잘 지도되는 교육을 통하여 사람들을 훈련시켜 우리가 그들로 하여금 따르게 하고, 싫어하는 도덕률을 그들이 따르게끔 할 수 있다고 엘베시우스는 낙관적 자신을 가지고 부언하였습니다. 우리는 그저 그들의 행동에 상벌을 가하기만 하면 됩니다. 그렇게 하면 우리는 그들을 높게 도덕적 목적을 가진 존재로 만들 수 있습니다. 이리하여 엘베시우스는 본래 근본적으로 도덕적 허무주의였던 것 위에다 도덕적 열성을 가진 교육 계획을 세웠습니다.
③ 프랑스 계몽주의의 감각주의적 및 관념 연합설적 이론들은 유물론적인, 심지어는 무신론적인 세계관으로 흐르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다른 누구보다도 뉴턴의 사상에 가까웠던 볼테르는 좀 주저하는 빛을 띠면서도 이신론자(理神論者)로 만족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무신론자들을 도저히 좋게 여겨질 수 없으며, 따라서 무신론자들의 사회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더욱이 그는 하나님이 비록 그 능력에 있어서 제한되어 있을지는 몰라도 세계의 제일 원인으로서 필요하다고, 뉴턴과 동일하게 생각했습니다. 디드로는 무신론을 열렬히 지지하였습니다. 그는 어떤 종교 이론이나 악의 사실 앞에서는 날아가 버리고 말며, 또 여러 가지 지적 모순에 빠지게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콩디약의 감각주의는 유물론을 그럴듯한 것으로 만들었습니다. 독일 계통의 남작 돌바크는 유물론과 무신론을 극단적인 형식으로 표현하였습니다. 그는 대담하게 말하기를, 뉴턴이 물리학에서 신학으로 넘어가서 뭐니 뭐니 말하는 것은 맹랑한 일이라고 하였습니다. 목적론이란 혼란된 개념입니다. ‘정신’이니 ‘영혼’이니 하는 말은 아무런 경험적 증거가 없는 무의미한 말입니다. 의식이란 다름 아닌 뇌 속의 운동입니다. 기독교의 예정론적 신이 모순덩어리라고 한다면, 이신론의 신은 쓸데없는 공상입니다. 철학에 있어서 둘 중의 하나를 택할 진정한 그 무엇이 있다고 하면, 그것은 미신과 유물론의 양자택일입니다.
④ 우리가 프랑스 계몽주의에서 고찰한 모든 조류의 배후에는, 사회주의에 대한 갈망이 있습니다. 이것은 부르봉왕조의 프랑스에서 혁명적인 갈망이었고, 다른 조류는 도중에서 끊어졌으나 이것만은 프랑스 대혁명의 시기까지 명맥을 유지하였습니다. 달랑베르가 <백과전서>의 <예비적 서설>에서, 그의 세기는 현행 법률과 관례를 전부 뜯어고쳐 사회 정의의 정체를 세우기를 갈망하였노라고 말했을 때, 그는 그 세기의 근본 조류를 알아맞힌 것입니다. 프랑스 계몽주의의 시기는 기존 제도를 비난하고 장래에 대한 소망이 무한히 부풀어 오른 낙관주의의 시기였습니다.
⑤ 루소의 낭만주의는 가장 독창적인 것일 뿐만 아니라, 프랑스 계몽주의의 가장 특기할 만한 철학적 공헌이었습니다. 루소는 비록 개인적 인간관계에 있어서는 허영심이 강하고 성미가 급하고 또 다투기를 잘했으나, 온 인류에 대한 감상적 사랑을 품고 있었습니다. 그는 유물론이 냉랭하다하여 싫어했고, 또 무신론은 인격에 대해서 무관심하다 하여 싫어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세기의 대부분의 사상가와 마찬가지로 그도 기존 질서에 대해서 적의를 품고 있었습니다. 그는 좀 더 나은 세계를 성취하는데 있어서 이성이 아무 소용도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성은 너무나 일정해 있고, 너무나 고정적이어서 무엇이든지 현재 행해지고 있는 것을 고수하는 데 너무나 급급합니다. 사람들이 문명이라고 부르는 것을 그는 일련의 도덕적, 지적으로 어리석은 짓이요, 또 대부분의 사람을 불가피하게 노예 상태로 이끌어 가는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오직 심정의 생래적(生來的)인 충동에 의지함으로써 인간은 좀 더 나은 쪽으로 인도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프랑스 혁명과 민주주의
1789년 7월 14일, 일단의 군중들이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하면서 프랑스 대혁명이 발발하게 됩니다. 부르봉 왕조 하에서의 학정과 귀족, 성직자와 같은 특권 계급의 전횡, 그리고 눈에 띄게 성장한 시민계급의 불만으로 일어난 이 혁명은 요원의 불길처럼 번져 나갔습니다. 결국 1792년 프랑스는 왕정을 폐지하고 공화정을 선포하면서 혁명의 불길은 더욱 거세져, 1793년 1월에는 국왕이었던 루이 16세가 처형되었습니다. 이렇게 사태가 악화되자 유럽의 거의 모든 나라의 왕실은 프랑스 대혁명에 겁을 집어먹고 대프랑스 동맹을 결성하여 프랑스를 공격하는 상황까지 벌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왜 하필 프랑스에서 혁명이 일어나게 되었을까요? 그것은 프랑스의 정치, 사회적 상황이 그 어떤 나라보다 복잡했기 때문입니다. 당시 유럽에는 어느 곳도 민주적 공화정치를 정치 제도로 선택한 나라가 없었습니다. 영국만 해도 명예혁명을 통하여 왕정을 어느 정도 청산해 내기는 했지만 그것은 부르주아 시민계급과 귀족 세력의 적절한 타협을 통하여 이룬 것입니다. 양측이 서로 기득권을 나누어 가졌기 때문에 프랑스와 같은 유혈 혁명은 피할 수 있었지만 사회 자체는 더 넓은 민주주의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영국은 재산 유무에 따라 선거에 참여할 수 있는 자격이 제한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이에 반해 프랑스의 상황은 아주 복잡하여 부르주아 시민계급이 귀족 세력을 압도하지 못했습니다. 전통적인 농업국이었던 프랑스에서는 공업 발전이 그다지 이루어지지 않았고, 귀족 세력과 성직자들의 권력이 월등히 우세한 상태였습니다. 그들은 잘해야 팽팽한 세력 균형을 유지할 수 있었을 뿐입니다. 이런 가운데 부르주아 시민계급은 하층의 민중들을 혁명에 끌어들여 프랑스 혁명을 주도하게 됩니다. 민중의 가담으로 혁명은 성공하였고, 이후 몇 차례의 反혁명 기도와 反프랑스 동맹국들의 침략에 꿋꿋이 대항하여 혁명을 지켜 낼 수 있었습니다. 프랑스 혁명은 소수의 유산 시민계급이 일으킨 혁명이 아니라 프랑스 민중 모두가 일으키고 참여한 혁명인 것입니다. (프랑스 혁명에 대하여는 후에 기록할 세계사 이야기에서 상세하게 살펴보겠습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도 프랑스 혁명의 정신입니다. 프랑스 혁명의 이념인 자유, 평등, 박애는 모든 사람이 자유롭고 평등하며, 모든 사람은 형제이니 서로 사랑해야 한다는 정신을 표현한 것입니다. 이러한 프랑스 혁명의 사상은 당시 서유럽 사회에 큰 충격을 던져 주었습니다. 자유, 평등, 박애의 사상은 온 유럽으로 번져 나가고 유럽의 민중들은 깨어나기 시작합니다. 그 와중에 민주주의와는 어울리지 않는 나폴레옹이라는 절대적 지배자가 등장하기도 했지만 프랑스 혁명의 정신은 유럽 사회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고, 오늘날에도 여전히 이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리하여 유럽은 19세기 내내 혁명의 물결 속에 잠기게 됩니다. 1830년 혁명(보수적 군주와 정부에 대항하여 유럽 전역에서 일어난 혁명. 프랑스에서는 복고된 왕정이 몰락하고 루이 필립의 입헌군주제 정부가 들어섰다. 전면적인 해방을 원했던 급진파의 주장은 관철되지 않았다. 폴란드, 이탈이라, 독일에서 일어난 혁명은 철저히 진압되었다.)과 1848년 혁명(유럽 각지에서 일어난 혁명. 정치적 자유를 쟁취하기 위한 혁명이었지만 1846년부터 지속된 경제 위기의 영향도 있었다. 프랑스에서는 루이 필립의 왕정이 붕괴하고 제2공화정이 들어서지만 대통령으로 당선된 루이 나폴레옹의 친위 쿠데타로 공화정은 무너지고 제2제정이 수립되었다. 다른 유럽 국가에서의 혁명 역시 모두 실패로 끝났다.)은 프랑스뿐만 아니라 온 유렵에서 동시에 일어난 것입니다. 마르크스가 훗날 유럽에서의 동시다발적인 공산주의 혁명을 주창해 낸 것도 결국 프랑스 혁명과 19세기의 연이은 혁명들에 영향 받은 것입니다. 프랑스 혁명이 만들어 낸 민주주의라는 보편적 정신은 인류의 가장 위대한 유산 중의 하나이고, 오늘날까지 다시 되새겨야 할 정신입니다.
그 대혁명의 영향은 비단 정치에만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정치의 혁명은 사유의 혁명을 낳았는데, 그것은 프랑스가 아닌 독일에서 일어났습니다. 독일은 당시 정치적으로 후진적인 지역이었는데, 아직 민족국가로 성립되지도 않았고, 여러 개의 나라들로 복잡하게 조각나 있었습니다. 그런 연유로 그들은 곧바로 정치 혁명으로 나아갈 수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독일은 계몽되지도 않았고 정치적으로 성숙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사회의 정신적인 기반이 필요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독일의 혁명은 정치가 아닌 철학에서 일어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정치와 철학
언뜻 보면 정치는 철학과 별 관계가 없을 듯이 보입니다. 진리를 추구하는 철학이 거짓말투성이의 정치와 무슨 관계가 있을까 하는 생각을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이는 아마도 플라톤이 말했던 철인정치가 현실로 구체화되어진 역사를 볼 수 없음에도 기인할 것입니다.) 그러나 둘 사이에는 불가분의 관계가 있습니다. 그리스 아테네에서의 최초의 철학이 꽃피었던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정치는 과학, 예술 등과 마찬가지로 철학의 조건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정치는 어떤 식으로든 철학이 추구하는 진리와 관계를 가진다는 말이 됩니다. 과연 그럴까요? 우리의 일상을 둘러보면 정치는 진리와 별 관계가 없습니다. 오히려 온갖 거짓말이 난무하는 곳이 정치의 장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철학의 관심을 끄는 정치가 아닙니다. 철학이 주목하는 정치란 제도화되고 구태의연한 거짓말의 정치가 아닌, 미래를 향해 열려 있는 정치인 것입니다. 진리는 그러한 정치에서만 드러납니다. 그것은 흔하지도 않고,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야 비로소 인정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진정으로 철학이 추구하는 정치를 맛보지 못하였기 때문에 정치와 철학의 괴리감을 더욱 멀고 깊게 느끼는 것일 겁니다. 과거 우리나라에서도 존경을 한 몸에 받고 있던 대학교수와 같은 지식인들이 정치일선에 참여하여 이렇다 할 성과는커녕, 오히려 정치적 한계와 오욕을 치룬 몇 분들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분들은 앞마당에서 뒤뜰로 사라져갔습니다. 그 분들이 모셨던 수장首長에게 백화점 판매원 마냥 외투를 입혀주는 조금은 눈꼴사나운 빛바랜 활동사진을 우리들에게 남긴 채….)
프랑스 혁명이야말로 그 대표적인 예가 될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날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자유와 평등의 이념은 프랑스 혁명 이전에는 아주 불온하고 위험한 사상이었습니다. 그 이념을 진리로 드러낸 것은 바로 중세의 계급적 질서를 파괴한 프랑스 혁명이었습니다. 그것은 곧바로 인정된 것이 아닙니다. 그 후로도 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야 프랑스 혁명의 이념은 사람들에게 인정받게 되었습니다. 그것마저도 오랜 시간 동안 많은 사람들이 피땀 흘려 얻어 낸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 혁명이 철학에 끼친 영향이었는데, 이러한 정치의 혁명은 철학의 혁명을 야기한 것입니다. 이후로 철학은 본격적으로 인간과 역사에 대해 사유하고, 인간의 권리와 정치의 원칙에 대한 구체적인 이론을 내놓게 됩니다. 정치는 철학의 지평을 넓힙니다. 새롭게 나타나는 철학은 다시 정치를 풍요롭게 하고 새로운 시도를 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는 프랑스 혁명 없이 칸트, 헤겔의 철학과 마르크스주의, 콩트의 사회학 등의 사유를 상상할 수 없을 것입니다. 새로운 정치를 통해 철학의 발전은 가속도를 내고, 철학의 발전은 다시 새로운 정치의 가능성을 열어 가는 상호 연관 작용이 깊이 개입되어있는 것입니다. 정치라는 현실과 철학이라는 이상에는…. 요즘 우리나라에서 벌어지고 있는 정치인들, 특히 대선인가 뭔가 하는 권력에로의 해바라기와 같은 집착(집안싸움은 물론 이합집산들까지)을 보이는 분들을 보고 있노라면 정말 실소失笑를 금할 길이 없습니다. 대체 그 분들의 생각은 어디에 가서 노닐고 있으며, 과연 안하무인격으로 우리 국민들을 얼마나 무시하는지를 보고 있자니 참으로 역겨운 생각마저 듭니다. 제가 더욱 더 억울한 것은, 이런 저런 꼬락서니를 아무리 안 보려 해도 “정치를 경멸하는 국민은 경멸당할 만한 정치를 가질 수밖에 없다.”는 어떤 현철賢哲한 분의 서글픈 지적을 잊지 못함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