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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를 만나러 가는 길은 대부분 흥겹습니다. 허나, 때때로 부끄러움 때문에 불편하기도 합니다. '소금꽃' 김진숙님을 만나러 가는 길은 그래서 버겁기도 하는 것이리라 여깁니다. 내 사는 동네의 어른 중 한 분이신 박종택 선생님이 '희망버스'를 타고 다녀온 후기를 보내주셨기에 샘의 허락도 없이 옮겨 놓습니다. 불편한 글입니다. 한국사회의 오늘이 고스란히 드러난 글을 대하는 불편이 있더라도 일독을 권합니다.
장맛비에 벗님네들 건강하시압!
평화를 비옵니다!
희망버스를 타고
차에 타다
지금도 귀가 멍멍하다. 스피커의 큰 소리가 귓가에 울리는 듯하다.
“ 정리해고 철회하라!”
“ 김진숙이 승리한다!”
“ 우리가 김진숙이다!” “ 우리가 승리한다!”
장대처럼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약속장소로 갔다.
지난 7월 9일(토) 3시, 순천 조은프라자 앞에서 차는 이미 기다리고 있었다.
순천. 광양. 고흥. 완도 지역에서 올라온 여러 부문의 회원과 개인들이 함께 모였다.
민주노총, 진보연대, 전교조, 진보정당 관계자들이 함께 모여들었다.
특히 전교조 조합원들도 15명 정도 되어서 나로서는 참 반가웠다.
순천에서 버스 두 대가 출발했다.
부산역 광장에서 만남의 마당을 열다
차내에서 전체 행사 순서를 알리는 종이가 나누어졌다.
행사의 진행순서는 7시 - 8시30분까지 1부 행사로서, ‘부산역 광장에서 부산지역 시민과 함께하는 연대 콘서트 및 만남의 마당’이 있고,
약 한 시간 반에 걸쳐서 거리행진을 하면서 영도 한진중공업에 도착하고,
거기서 2부 ‘대동한마당과 밤샘 연대의 문화난장’이 펼쳐질 예정이었다.
모든 행사가 끝나면 10일 오후 1-2시 경에 작별하는 계획으로 되어 있었다.
부산역에 우리 팀이 도착했을 때는 이미 1부 행사가 진행중이었다.
날은 어둡고, 비는 내리고, 사람들은 오가고, 저 멀리 무대에서는 무언가 진행되고 있었다.
가까스로 무대 쪽을 향해 나아가서, 그 빗속에서도 앉아 행사에 집중하고 있는 사람들에 합세했다.
비는 내리다 말다를 반복했고, 얇은 비옷을 입은 나는 쏟아지는 비에 우산을 펴다 접다를 반복했다.
팔과 다리는 이미 다 젖었지만, 상체까지 젖으면 오늘 밤 내내를 한데서 지내기가 힘들 것이라는 본능적인 판단에서 나온 행동이었다.
나는 모르지만 많이 알려진 듯한 어떤 MC가 나와서 사회를 보았다.
천리길 걸어서 내려왔다는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들 대표가 인사를 했다.
같은 해고노동자로서 연대의 뜻으로 참여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했다.
송경동님을 포함한 3명의 시인들의 시낭송이 이어졌다.
“ 나는 지상 높은 곳에서 태어났다.” 김진숙님을 표현했다.
시는 장중하고 비감하고 깊은 내용을 담고 있었다. 나는 깊이 공감하고 감동했다.
다음에 여러 팀의 노래, 율동, 발언이 계속되었다.
노래 가사, 율동의 뜻을 다 이해하거나 알 수는 없었다.
비는 내리다 말다를 반복했지만, 마음속에 일기 시작한 어떤 기운과 감동은 나를 고양시켰다.
나는 마치 어떤 축제마당에 온 듯했다.
거리행진을 하다
1부 행사를 마치고 이제 영도 한진중공업을 향해서 거리 행진이 시작되었다.
거리행진시간 내내 나는 근래에 느껴보지 못한 어떤 고양된 기분에 휩싸여 있었다.
때는 늦은 토요일 밤, 비는 내리고, 뻥 뚫린 대로를 만 명이 함께 활보하는데,
동행하던 방송차에서는 시민을 향한 홍보말과 노래가 섞여 나왔다.
‘아침이슬’, ‘함께 가자 우리’, ‘불나비’, ‘님을 위한 행진곡’
이 모든 것들이 함께 작용하여 다소 들뜨고, 흥분되고, 뿌듯한 기분이 들었는지도 모른다.
마치 어떤 해방구에서 활보하는 자유인이 된 듯했다.
두 시간 가까이 걸린 거리행진동안 내 발걸음은 가벼웠고 기분은 상쾌했다.
철없던 어린 시절 마치 소풍 나온 아이와 같았다.
경찰의 차벽에 막히다
부산이 생소한 나로서는 한진 중공업 85호 크레인이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 잘 몰랐다.
가까이 온 듯했다. 아마 11시가 조금 넘었을 것이다. 우리가 경찰 저지선에 도달한 것은.
거기 경찰은 대로 전체를 가로막는 차벽을 치고 대기하고 있었다.
길 양쪽에는 겨우 한 두 사람이 통과할 수 있는 틈새가 있었지만, 전경들이 철통같이 막고 있어서
우리 대중은 결국 행진을 멈추었다.
이제부터 저 철벽을 넘어가는 것이 당면 과제였다.
어떻게 하면 저 차벽을 넘어서 김진숙님께 가까이 갈 수 있을까? 어떻게 돌파할 것인가?
대중들의 차벽을 뚫고 나아가려는 몸부림이 시작되었다.
물론 경찰의 저지는 완강했다. 시위 대중들이 양쪽 틈새로 나아가려 몸부림치며 수없이 시도하였으나, 좁은 틈새를 전경들이 철통같이 지키고 있으니 역부족이었다.
이러한 몸싸움 과정에서 민노당 이정희의원이 실신하고, 수 많은 사람들이 다쳤다.
활로를 찾으려 고심하던 현장 지휘부는 이제 차벽을 곧바로 올라가는 방법을 선택했다.
어디선가에서 벽돌을 나르기 시작했다.
젊은 남자들 수 십명이 벽돌과 모래주머니 나르기에 합세했다.
막아선 차벽 앞에 벽돌로 축대를 쌓아 올려서, 거기를 타고 올라가 차벽으로 가자는 발상이었다.
매우 색다르고 모험적인 방법이었다.
바야흐로 벽돌담이 상당히 높이 쌓아졌으리라 짐작가는 시점에서 결국 일은 벌어졌다.
차벽 저쪽에서 고무호스가 솟아오르더니, 순식간에 물대포가 발사되었다.
그런데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다음에 품어져 나온 것은 차가운 물이 아니라 최루액이었다.
아, 나는 20년도 더 전에 맞아본 최루액을 이제 다시 뒤집어쓰게 된 것이다.
비옷을 입고 거기에 우산까지 썼지만 소용없었다.
강력한 물줄기에 비닐 비옷과 우산은 속수무책이었다. 얼굴, 팔, 다리에 최루액이 흘렀다.
벽돌을 쌓고 타고 올라오는 것이 결정적인 위협이라고 판단한 경찰은 최루액 살포라는 비장의 무기를 뽑아든 것이다. 집회 대중은 극도의 혼란에 빠졌고, 도처에서 기침소리와 신음소리가 이어졌다.
경찰의 작전은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 이제 전경들이 차벽 앞쪽으로 진군하여 나와서는 집회 대중들을 압박했다. 최루액으로 목욕하고 신체적, 정신적으로 혼란에 빠진 대중들은 밀어 닥치는 전경들에게 쫓기어 뒤로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기침하고, 넘어지고, 소리치면서 뒤로 뒤로 밀렸다.
결국 시위 대중은 철통같은 경찰의 차벽에 막혔다.
대중들이 순수히 물러가지 않자, 경찰은 최루액을 뿌려 대중을 흩어버렸다.
그리고 방패와 진압봉을 가진 전투경찰의 추격으로 집회대중들은 차벽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시위대중의 평화는 경찰의 폭력 앞에 속수무책이었다.
결국 폭력이 다시 이겼다.
용산에서, 쌍용자동차에서, 유성기업에서 그리고 여기에서도 또 다시 폭력이 이겼다.
그러나, 계속 이길 것인가? 끝없이 이길 수 있을까?
우리 함께 온 목적
우리는 그냥 자유롭게 걸어서 185일 동안 지상 35m 상공에서 버티고 있는 한 사람에게 가까이 가서
이렇게 말하고 싶었을 뿐이다.
“ 김진숙님, 우리는 당신을 잊지 않고 있다. 그동안 미안하고 가슴조였다.
높은 곳에 당신 홀로 놓아두고 우린 마음이 편치 못했다. 우리는 당신 김진숙을 사랑한다!
우리는 결국 당신이 승리 할 것으로 믿는다. 당신이 승리하는 것이 곧 우리가 승리하는 것이다.
그것이 한진 해고노동자들이 다시 일터로 돌아가는 길이고, 그것이 이 어둡고 답답한 세상에 한줄기 촛불을 켜는 일이다. 이것이 우리 국가, 우리 민족이 반드시 해야 할 일이다.
우리는 당신을 잊지 않았다. 당신은 결코 혼자가 아니다.
당신은 살아야 한다. 살아서 땅으로 내려와야 한다. 당신은 살아서 승리해야 한다.
그것이 오늘 날 이 어둡고 척박한 대한민국의 희망이다.
우리는 당신의 생존, 당신의 승리를 통해, 우리 대한민국의 생존과 희망을 확인하고 싶다.
당신은 이제 땅으로 내려와야 한다.
이미 너무나 오래, 너무나 높은 곳에서, 너무나 힘들게 보냈다. 쏟아지는 장대비와 뜨거운 햇살을 거기서홀로 감당하기는 벅차다.
당신은 이제 살아서 땅으로 내려와야 한다. 내려와서 가족과 동지도 포옹하고,
목욕도 한번 하고, 이제 좀 쉬어야 한다.
우리는 당신을 사랑한다. 당신은 우리고 우리는 당신이다. “
우리는 단지 이렇게 말을 하고 싶었다. 그것 뿐이다!
이것이 185일 고공농성에 맞추어 전국 각지에서 185대 희망버스를 타고 내려온 목적이다.
힘과 돈과 특권을 다 누리고 있는 세력은 이 소박한 소망이 그렇게도 무섭단 말인가!?
대동 문화 난장 활짝 피다
차벽과 밀집한 전경들과 최루액 벼락은 우리 행진을 막는데 충분했다.
우리는 소리 높여 투쟁을 외쳤지만, 아무도 돌맹이 하나, 파이프 한 개 들지 않는 비폭력 대중이었다.
맨 손에 가슴만 뜨거운 우리가 어떻게 차벽을 넘을 수 있겠는가?
우리의 행진을 막는 목적이라면 저들이 이겼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 우리의 희망, 우리의 비탄을 막는 데는 실패했다.
또한 우리의 축제를 막을 수는 없었다.
밤새도록 간간히 쏟아지는 비속에서 대동한마당과 문화난장은 비보다 줄기차게 이어졌다.
과장해서 말하지만, 나는 지난 1년 동안 보고 들을 수 있었던 노래, 율동, 연설보다 더 많이 보고 들었다.
우리시대 어른인 백기완 선생, 문정현 신부를 비롯해서, 모슨 교수, 어떤 목사, 무슨 단체 대표들의 연설이 이어졌다.
구성진 전라도 사투리의 진도 아리랑이 끝나면, 광주 어떤 한 쌍의 질퍽한 현실 비판적 패러디 판소리가 이어졌다. 젊은이들은 좋아하겠지만 나는 전혀 모르는 무슨 그룹이 나와, 익숙하지 않는 장르의 노래를 불렀다. “ 저것이 도대체 노래인가? ”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끝나자 청중 속에서는 박수와 환성이 들렸다. 나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즉흥 퍼포먼스가 있었고, 즉흥적인 초현대 그림그리기가 있었다. 경쾌하고 전투적인 배경음악에 맞추어 연출되는 서울 어떤 젊은 3인조의 율동은 참으로 가관이고 감동적이었다. 그렇게 아름답고 힘찬 젊은 몸짓을 본적이 없었다.
시종 함께 참여한 장애인 그룹이 있었는데, 그들을 대표하는 3인조가 나와서 부르는 노래가 크게 울려 퍼졌다. 이런 마당에 사물놀이가 어찌 빠질 쏘냐! 쇳소리 장구 소리는 울려 퍼지고, 앉아 보고 있던 대중들은 벌떡 일어나서 한판 춤마당이 어우러졌다.
이것이야 말로 우리들의 축제임에 틀림없다! 이보다 더 흥겹고 신나는 대동마당이 어디 있단 말인가!
자, 하여튼 9일 밤 12시경부터 10일 오후 2시까지 무대가 이어졌으니, 장장 14시간 지속된 공연에서 몇가지 그룹이나 연사가 나와 노래하고, 춤추고, 율동하고, 발언했는지 기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주최 측의 정해진 순서에 따르는 것이 아니었고, ( 사실 주최 측이 누구인지도 모른다. 사회자도 그냥 그 자리에서 바꿔지곤 했으니 말이다.) 그 때 그 때 자발적인 참여로 이어졌다.
권영길, 이정희, 김선동, 정동녕, 천정배의원과 노회찬님도 보였다.
함께 최루액 벼락을 맞고, 함께 밀리고, 함께 날밤을 새웠는데, 의원들 중 한 두분의 발언을 들을 수 있었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이 스치기도 했다.
다음을 기약하다
아침 7시 기자회견이 있었다. 50여명이 연행되고, 상당수가 다쳤다고 들었다.
세분의 의원들이 대표로 부산 지방결찰청에 면담하러 가서, 연행자 석방과 김진숙님 접촉을 요청했으나 효과는 없었다. 이제 행사 주최측은 무언가 결정을 해야 했다.
집회를 계속할 것인가, 아니면 다음을 기약할 것인가?
막후에서 많은 논의가 있었을 것이다. 결국 2시 20분경 집회를 종료한다는 발표가 있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대부분 뜬 눈으로 온 밤을 지새운 것, 뜨거운 폭염속에 지쳐 쓰러져 있는 참가자들, 더는 나아갈 수 없는 차벽 - 이 모든 것들이 고려되어 집회의 종료가 선택되었으리라.
집에 도착하다
우리 버스는 7시 20분 경 출발지 순천 조은프라자 앞에 도착했다.
간단히 서로 작별을 하고 집으로 향했다.
전교조 순천지회 식구들이 함께 저녁식사를 하자고 고맙게 권했으나,
좀 지치고 우선 목욕을 하고 싶어서 사양했다.
몸과 옷 여기 저기 묻은 먼지, 땀, 최루액이 싫었다.
집에 오자마자 샤워를 했다. 아, 이 시원함이란!
각시가 정성스레 차려준 저녁을 먹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마치면서
이제 태풍같은 날은 지나고 나는 편안한 방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나는 왜 이번 희망버스를 탔는가?
이유는 단순하다. 무거운 마음의 짐을 견디기 힘들었던 것이다.
한 여인이 185일 동안 35m 상공에 농성한다는 것은, 과연 이것이 있을 수 있는 일인가?
있어서도 있을 수도 없는 일이다. 도저히 인간으로서 가능한 일이 아니다. 그런데 하고 있다.
사실, 나 하나 참가해서 전체 행사에 큰 도움이 된 것은 아니다. 정리해고 문제 해결된다는 보장도 없다.
나는 거기서 전경과 부딪치며 몸싸움도 못했고, 철옹성 차벽을 넘지도 못했고, 발언이나 노래를 통해 대중들에게 힘을 주지도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기 갈 수 밖에 없었던 것은, 마음이 편치 못했기 때문이다. 오직 그것이 이유다.
또 다시 3차 희망버스가 진행된다면 어떻게 할까? 글쎄 잘 모르겠다.
내 마음의 부담을 견딜 수 없다면, 다시 참여할 밖에 없지 않을까?
첫댓글 그날 희망의 버스를 타셨던 분 중...노동자강연 하시는 박준성선생님께선 매일 40키로 행군을 하시면서 ..
소금꽃을 향한 폭풍질주를 쓰신 것을 봤습니다. 간암을 이겨내시고 노동자 속에 계시는 선생님을 역사와 산에서 일 년에 몇 년 가끔 볼 때마다 사람의 얼굴은 그사람의 살아온 여정이구나 ..싶은 마음이 들게 합니다. 작은책이라고 제가 구독하는 노동자들이 쓰는 잡지가 있는데...지난 6월호에 송경동시인의 특집글을 읽었던 기억이 있는데...역사의 흐름 속에 빠지지 않고 계시는군요....마음의 부담을 뿌리치고 있는 제가 부끄럽습니다.
'포크레인'을 앞세운 자들의 세상을 몇 년 살다보니 '희망 버스'의 등장이 눈부시군요. 한의학적으로 말하면 깡패처럼 氣가 센 자들이 과하면 대개 중풍(뇌졸증 등)으로 죽죠. 血을 상하게 하기 때문. 거꾸로 혈이 좋으면 건강하고 기는 절로 '순해지는' 법입니다. 안 되는 자들이 정권을 잡아 기득권 세력과 스크럼을 짜고 그 구조를 강화하려는 지독한 기세를 부리는데 그 종말이 어언간 가까워진 듯. 기와 혈은 본시 남과 여 같고 너와 나 같으며 평등하고 평화로운 지향을 갖습니다. 우리 '혈'이 그 동안 고생이 많습니다. 스스로 맑히고 보태어 저 기의 처참한 결과를 또 준비하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