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엘튼 존 “동성애혐오 문제 터놓고 말해야”
영국의 팝스타이자 동성연애자인 엘튼 존이 '동성애 혐오(homophobia)' 문제와 관련해 전세계가 터놓고 말할 필요가 있음을 역설했다고 AFP가 영국 주간지인 '더 뉴 스테이츠맨'를 인용해 22일 보도했다.
25일로 60세 생일을 맞는 엘튼 존은 이 잡지에 기고한 글에서 "나는 (연인인) 캐나다 영화제작자 데이비드 퍼니시와 법적으로 승인된, 오랜 기간 사랑을 할 수 있는 특권을 부여받았다"고 주장했다.
동성애 커플에게도 일반 커플과 마찬가지로 세금, 연금 등에서 같은 권리를 부여하는 '시민동반자법'이 발효된 후 데이비드 퍼니스와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린 그는 "2005년 12월 나는 내가 사랑하는 남자와 법적으로 묶였으며, 그것은 나의 법적 권리이자 인권"이라며 "모든 사람이 이를 알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세계의 많은 남자와 여자들이 단지 그들의 사랑 때문에 박해받고 공격당한다"면서 "(동성애를 인정하지 않는) 고집쟁이들이 어느 곳에 있든지 상관하지 말고 우리는 모두 일어서서 이런 기본적인 인권에 대해 터놓고 말해야 한다"고 밝혔다. 김영현 기자 (서울=연합뉴스) '한겨레 2007-03-22
[2001년] ‘톰과 제리’ 제작자 윌리엄 해너 사망
← 월리엄 해너
‘톰과 제리’ ‘고인돌 가족 플린스톤’ 등 세계인들에게 친숙한 만화를 제작한 애니메이션의 선구자 윌리엄 해너가 2001년 3월 22일 90세의 나이로 숨졌다. 1910년 미국 멜로즈에서 태어난 해너는 원래 기술자였으나, 대공황때 실업자가 되자 애니메이션 제작사인 퍼시픽 아트 앤드 타이틀에 일자리를 얻으면서 만화영화계에 첫 발을 디뎠다.
1937년 MGM사에 입사해 만난 조지프 바버라는 그의 평생 콤비였다. 두 사람은 1957년까지 만화영화사에 길이 남을 명작인 ‘톰과 제리’를 만들었고, 해너-바버라 프로덕션을 세워 ‘플린스톤’과 ‘더 젯슨스’ 등의 히트작을 냈다. 해너가 감독을, 바버라는 그림을 맡은 ‘톰과 제리’ 시리즈는 1백편 이상이나 제작됐다. ‘톰과 제리’ 시리즈의 첫 편격은 1940년에 만든 ‘퍼스 케츠 더 부트’였다. 이 작품이 아카데미상 후보에 오르자 MGM은 이들에게 후속편을 주문했다. 이후 ‘톰과 제리’ 시리즈는 아카데미상을 일곱 번이나 수상했다.
1957년 MGM 등 여러 제작사가 만화영화 제작을 중단하자 두 사람은 MGM을 박차고 나와 해너-바버라 프로덕션을 설립, 이후 ‘고인돌 가족’으로 잘 알려진 ‘플린스톤’ ‘요기 베어’ 등 3천여편의 TV용 애니메이션을 발표했다. 특히 1960년 처음 방영된 ‘플린스톤’은 6년간 프라임 타임을 차지했다.
[1995년] '물의 날', 7월 1일에서 3월 22일로 변경
세계 물의 날 = UN은 1992년 11월 47차 UN 총회에서 유엔환경개발회의(UNCED)의 건의를 수용하여 매년 3월 22일을『세계 물의날』로 제정 ·선포
우리나라의 『물의 날』은 한국수자원공사가 1990년부터 물 수요가 가장 많고, 물로 인한 재해가 발생하기 쉬운 시기인 7월 1일을『물의 날』로 제정하여 다양한 물행사를 개최한 것이 최초.
매년 7월 1일 「물의 날 기념식」, 「물 심포지엄」, 「물사진 전시회」, 「물 백일장」 및 「저수지 대청결운동」등 전국 규모의 다채로운 행사 개최.
『세계 물의 날』을 주관하고 있는 UN개발계획본부에서 우리나라에 대해서도 행사에 동참해 주도록 요청, 1995년부터 3월 22일로 『물의 날』을 변경하여 행사 개최 /한국수자원학회 kwra.or.kr
[1993년] 제1회 '세계 물의 날'
세계 물의 날 - UN은 1992년 11월 47차 UN 총회에서 유엔환경개발회의(UNCED)의 건의를 수용하여 매년 3월 22일을『세계 물의날』로 제정 ·선포
세계 물의 날 결의안(제47차 유엔총회) - 유엔환경개발회의(UNCED)에 의해 채택된 의제 제21의 제18장과 관련하여, 모든 경제활동을 거의 수자원의 공급과 질에 의존하고 있으나 수자원개발이
경제생산력과 사회복지에 대한 기여 정도는 널리 인정되지 않고 있고, 인구와 경제활동이 증가함에 따라 다수의 국가는 빠른 시일내에 물부족 사태에 도달하거나, 경제개발의 한계에 직면하고 있으므로 수자원 보전과 지속적인 관리는 지역적, 국가적, 세계적 차원에서 공공의 관심이 요구 된다는 것을 고려하여 의제 제21의 제18장을 포함한 환경개발회의(UNCED)의 권고에 따라 1993년을 시작으로 매년 3월 22일을 세계 물의 날로 선포 할 것을 결정한다.
수자원 보전과 개발, 의제 제21의 권고 이행수단과 관련하여 홍보물간 배포, 회의 ·세미나 개최, 전시회등을 통하여 국민의 관심을 제고시키는 활동을 국가적차원에서 구체화하여 이날을 기념할 것을 각 국가에 권장한다.
유엔사무국은 가능한 모든 수단을 통하여 국가가 세계물의 날을 기념하기 위하여 국가적 활동을 하는데 있어 도움을 주도록 하는 권고안을 수립할 것을 사무총장에게 요청한다.
유엔이 선택한 세계 물의 날이 성공하기 위하여 필요한 조치를 취할 것을 사무총장에게 요청한다.
또한 유엔이 세계 물의 날을 준수하는데 있어 수자원 보전과 관려한 특별 주제에 집중할 것을 사무총장에게 요청한다.
권한 행사에 있어 의제 제21의 제18장 이행에 우선권을 부여할 것을 지속개발 위원회(CSD)에 권고한다.
우리나라의 『물의 날』은 한국수자원공사가 1990년부터 물 수요가 가장 많고, 물로 인한 재해가 발생하기 쉬운 시기인 7월 1일을『물의 날』로 제정하여 다양한 물행사를 개최한 것이 최초
[1990년] 한국-체코 대사급 외교관계 수립
체코는 남·북한 동시수교국이다. 한국과 체코슬로바키아와는 1990년 3월 외교관계를 수립하였으나, 체코슬로바키아연방 해체에 따라 1993년 1월 1일 체코 정부와 새로운 외교관계를 수립하고 양국간의 교류를 확대해오고 있다. 1994년 10월에는 클라우스 총리가 내한하여 사증면제협정을 체결하였고 같은 해 문화협정을 체결하였으며, 1995년 과학기술협력 협정, 2001년 원자력 협력협정을 체결하였다. 1999년 5월 카바 외무장관, 2001년 밀로스 제만 총리가 방한하였다. 2001년 7월 현재 한국인 190여 명이 체류하고 있다. /naver
[1983년] 아마드 샤 말레이시아 국왕 방한
말레이시아는 1960년 2월 한국과 수교하여 상호 상주공관을 설치하였으며, 1973년 6월에는 북한과도 수교하였다. 한국과는 1962년 12월 무역협정, 1965년 12월 문화협정, 1973년 4월 항공협정을 체결하였다. 1981년 7월 전두환 대통령이 방문하였으며 1983년 3월 아마드 샤 국왕이, 같은해 8월 마하티르 총리가 한국을 방문하는 등 정상외교가 활발한 편이다. 2003년 교민수는 23명이며 체류자는 2962명이다. /yahoo
[1982년] 스위스 유엔가입 발의
스위스는 제2차 세계대전 후의 UN(국제연합)에 처음부터 참가하지 않았다. 그러나 국제적십자사 본부를 비롯하여 많은 국제기관의 중심이 스위스에 있으며, 전시(戰時)에는 교전 각국의 이익대표국이 되었고 전후에는 교전 각국의 국제회의의 무대가 되어 인도적인 역할을 다하고 있다.
1986년 UN에 가입하기 위해 국민투표에 부쳤으나 75%의 반대로 모든 주에서 부결되었고, 2002년 3월 3일 이에 관한 국민투표를 다시 실시한 결과 가입 지지가 근소한 표차로 승인됨으로써 수 세기 동안 지켜온 영세중립국으로서의 정치적 고립을 포기하고 9월 10일 유엔 본부에 국기를 게양하고 190번째 유엔 회원국이 되었다. /naver
[1977년] 인디라 간디 인도 수상 사임
인디라 간디(Gandhi, Indira, 1917~1984)는 알라하바드에서 태어났다. 인도의 초대 총리인 J.네루의 무남독녀이고 F.간디의 부인이다. 영국의 옥스퍼드대학에서 역사를 전공하였다. 12세부터 독립운동에 참가하여 1938년 인도국민회의파에 입당하였으며, 13개월간 투옥된 일도 있다. 옥스퍼드대학 재학 중, 후에 하원의원이 된 F.간디와 결혼하였다.
독립 후에는 아버지 네루의 호스티스 역할을 하면서 정치가로서의 훈련을 쌓았다. 1955년 여당인 인도국민회의파 운영위원회에서 활동하였고, 1959년 당수가 되었다. 1964년 바하두르 샤스트리 내각에 입각, 1966년 샤스트리 사망으로 총리에 취임하였다. 경제안정에 힘썼으나 강권정치를 편다는 야당의 공격으로 1977년 총선거에서 야당에게 패배하여 한때 정계를 떠나 있었다. 그러나 인민당이 우유부단한 정책으로 국민의 신임을 잃자, 1980년 총선거에서 승리, 총리에 복귀하였으나 1984년 시크교도인 경호원에 의하여 암살당하였다. /naver
[1973년] 경주시 황남동 미추왕릉 부근 고분 발굴 착수
← 금관, 금 허리띠(황남대총)
경주 황남리 고분군(慶州皇南里古墳群)은 경주시 황남동 일대에 있는 신라의 고분군으로 사적 제40호. 면적 15만 9878m2. 여기에는 미추왕릉(味鄒王陵)이라 전하는 고분을 비롯하여 이미 지정된 고분과 그 후 새로 소재가 파악된 173기를 더하여 250여 기의 파손된 고분들이 있다. 이 중에 미추왕릉군을 1973∼1974년 미추왕릉 고분공원으로 조성하여 돌담을 둘러쳐 보존하고 있다. 여기에서 금관을 비롯하여 화문옻칠그릇[畵文漆器] 등과, 부인띠[夫人帶]로서 침각명(針刻銘)이 있는 은으로 만든 허리띠 꾸미개 등 많은 껴묻거리가 출토되었다. 1973년에 발굴된 155호분 천마총(天馬塚)에서도 화려한 금관 등의 금꾸미개가 많이 나왔다. /naver
[1970년] 한국의 마라톤 선수 황영조(黃永祚) 출생
← 골인하는 황영조, 제25회 바르셀로나 올림픽 대회(1992)
강원도 삼척(三陟) 출생. 1992년 제25회바르셀로나올림픽 마라톤 금메달리스트. 초등학교 4학년 때 씨름을 시작하였고 사이클선수를 거쳐 1987년 강릉(江陵) 명륜고등학교(明倫高等學校) 육상선수가 되었다. 1988년 경부역전마라톤대회에서 최우수신인상을 차지하였고 1989년 경호(京湖)역전마라톤대회의 우승과 전국체전 10㎞단축마라톤에서 1위를 차지하는 등 고등학교 육상계의 제1인자로 떠올랐다. 1990년 코오롱에 입단하여 과학적이며 체계적인 훈련을 통해 경부역전마라톤, 동아마라톤, 영국 셰필드 하계유니버시아드 등을 석권하였다. 1992년 2월 일본 벳푸[別府(별부)]국제대회에서 2시간 8분 47초 기록으로 준우승을 차지하였고, 그해 바르셀로나올림픽에서는 2시간 13분 23초의 기록으로 1936년 손기정(孫基禎)에 이어 56년 만에 금메달을 획득, 국위를 선양하였다. 1994년 4월 제98회 보스턴마라톤대회에서는 2시간 8분 9초로 한국신기록을 수립하였다. /yahoo
[1968년] 울산에 석유화학계열 공업단지 기공
울산시를 중심으로 건설된 임해 공업단지인 울산공업단지는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의 핵심사업으로 1962년 1월부터 단지 조성에 착수, 1967년 7월 지역확장 공고를 거쳐 1974년 중반까지 계속되었다. 최초로 들어선 산업체는 대한석유공사의 정유공장(1964년 5월 준공)으로, 그것을 주축으로 하는 석유화학계열의 공장들이 뒤이어 들어섰다. /naver
[1967년] 북한 중앙통신 부사장 이수근 판문점서 위장 귀순
← 귀순한 뒤 기자회견을 가진 이수근씨
북한 중앙통신사 부사장으로 있던 이수근이 조선노동당 대남사업총책 이효순으로부터 위장 월남귀순하라는 지령을 받고 1967년 3월 22일 판문점에서 열린 군사정전회의를 취재하다가 회의가 끝나자 UN군측 대표인 준장 밴 클러프트의 승용차에 뛰어 올라 탈출에 성공함으로써 월남귀순하게 됐다.
한국정부는 그가 북한의 언론계 거물이며 지식인이라는 점을 감안하여 그를 대대적으로 환영하였고 행복한 생활을 영위할 수 있도록 보살펴 주었다.
그러나 그는 전국순회강연 및 TV-라디오 방송을 통하여 북한실정을 폭로하는 척하면서 한국의 각종 기밀을 수집하여 북한으로 보냈다는 혐의를 받았다.
그의 여러가지 행동이 점차 수상해지자 한국정부의 정보 및 수사당국에서는 그를 주시하고 경계하기 시작했고 이수근은 더이상 한국에 있을 수 없음을 눈치채고 위조여권을 만들어 비행기로 탈출, 호치민에서 북한으로 귀환하려다 한국정부의 정보요원에 의해 체포, 군용기 편으로 압송되어 재판을 받고 1969년 7월 3일 사형이 집행됐다.
하지만 사형 39년만인 2008년 12월 19일 위장간첩이 아니라는 취지의 판결이 내려졌다. 1989년 처음으로 문제 제기된 이수근의 간첩 논란은 이로써 종지부를 찍게됐다./조선
[1962년] 제4대 윤보선 대통령 사임
← 1962년 3월 22일 하야를 결의한 윤보선(왼쪽) 대통령의 표정은 너무나도 담담했다. 그는 이날 가족과 함께 안국동 8번지 자택으로 돌아갔다.
1962년 3월 22일 하야를 결의한 윤보선(왼쪽) 대통령의 표정은 너무나도 담담했다. 그는 이날 가족과 함께 안국동 8번지 자택으로 돌아갔다.
"나는 대한민국 국민 앞에 대통령직에서 물러날 것을 성명하는 바입니다"로 시작하는 윤보선 대통령의 사임 성명서가 1962년 3월 22일 발표됐다. 이날 오후 3시 청와대 대변인을 통해 사임 의사를 발표한 윤대통령은 고별회견에서 구정치인에 대한 정치활동정화법이 국민의 인화와 단결에 걸림돌이 될까 우려되며, 모든 질서가 안정되고 국제적 신망이 두터워져 안심하고 물러선다고 밝혔다.
국가재건최고회의는 3월 24일 본회의를 열고 윤대통령의 사임을 받아들여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민정 이양시까지 대통령 권한을 대행하기로 결의했다. 이로써 윤대통령의 청와대 생활은 경무대를 ‘청와대’로 고친지 19개월 만에 막을 내리게 됐다.
1960년 4.19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붕괴된 후 1960년 8월22일 민참양원 합동회의에서 제4대 대통령에 선출된 윤대통령은 1961년 5.16군사쿠데타가 발발하자 한때 사임을 발표한 바 있으나 박정희 소장의 요청으로 사임을 번복한 바 있다.
[1947년] 미국 대통령 트루먼, 파괴분자의 관직추방 명령
1947년 3월 미국 대통령 트루먼(Truman, Harry S., 1884~1972)은 의회에서 미국외교정책에 관한 원칙-트루만 독트린(Truman Doctrine)을 선언하였다.
그 요지는 공산주의 세력의 확대를 저지하기 위하여 자유와 독립의 유지에 노력하며, 소수자의 정부지배를 거부하는 의사를 가진 여러 나라에 대하여 군사적·경제적 원조를 제공한다는 것이었다. 이 원칙에 입각하여 당시 공산세력으로 인하여 직접적인 위협에 직면하고 있던 그리스와 터키의 반공(反共) 정부에 대하여 미국의 경제적·군사적 원조가 제공되었다. 이 원칙은 그후 미국 외교정책의 기조가 되었으며, 유럽부흥계획과 북대서양조약으로써 구체화되어 갔다. /naver
[1945년] 카이로에서 이집트 등 7개국 아랍연맹 결성
1945년 3월 22일 이집트의 수도 카이로에서 아랍 연맹이 결성되었다. 창립 회원국은 이집트·시리아·레바논·이라크·트란스요르단(지금의 요르단)·사우디아라비아·예멘 등으로 이후에는 리비아·수단·바레인·팔레스타인해방기구 등의 국가가 가입했다. 아랍 연맹은 회원국들의 정치적·문화적·경제적·사회적 계획을 강화·조정하고 회원국간 및 제3국과 생기는 분쟁을 조정하기 위해 창설되었다. 1950년 4월 13일 아랍 연맹은 집단 방위와 경제협력에 대한 협정서가 조인되면서 군사적 방어조치에 대한 조정권도 갖게 되었다. 그러나 아랍 연맹은 정치적인 문제, 특히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에 관한 문제로 내분이 생기면서 기능이 약화되었다. 1979년 3월 26일 이집트와 이스라엘이 평화협정을 맺자 아랍 연맹의 다른 회원국들은 이집트의 회원자격을 중지시키고 연맹 본부를 카이로에서 튀니지로 옮기기도 했다. /브리태니커
중동평화와 안전을 확보하고 아랍제국의 주권과 독립을 수호하기 위한 아랍연맹이 1945년 3월 22일 결성됐다. 초기 가맹국은 시리아 요르단 이라크 사우디아라비아 레바논 이집트 예멘 등 7개국이었으나 현재는 20개국과 PLO가 가입되어 있다. 그러나 창설멤버인 이집트는 이스라엘과의 평화조약 체결을 이유로 자격정치처분을 받았다.
1948년 5월 이스라엘이 독립을 선언하며 유태국가를 팔레스티나에 건설하려하자 전쟁돌입을 결의했다. 1990년 8월 카이로에서 열린 긴급정상회의에서는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을 비난하고 쿠웨이트에서의 이라크군 즉각 철수 및 사우디아라비아에 아랍연합군 파견을 결의한 바 있다. /조선
[1935년] 독일, 유럽최초로 정기적인 TV방송 개시
유럽 여러 나라들은 1930년대에 텔레비전 실험방송을 개시하였다. 프랑스와 독일은 1935년에, 영국은 1936년에, 미국은 1939년에 정규방송을 개시하였다. 그러나, 전쟁 중에는 중단했다가 전후에 다시 시작하여 본격적인 보급은 1950년대에 접어 들면서였다. 유럽의 방송운영체제는 국영 또는 공영방송을 채택한 나라들이 많고, 1950년대 후반에서 1960년대 전반에 걸쳐 복수 채널을 통한 방송체제로 전환한 나라들이 늘고 있다. 예를 들면, 영국에서는 1946년에 공공방송인 BBC(영국방송협회)가 텔레비전방송을 재개했고, 1955년에는 상업방송제작회사를 설립하여 공공방송체가 규제하고 감독하는 독특한 사설 텔레비전 조직인 ITA(독립텔레비전협회) 방송을 개시하였다. 1945년 10월 텔레비전방송을 재개한 프랑스는 1964년에 이르러 제2텔레비전방송도 운영하기 시작하였다. 1954년 정규방송을 시작한 이탈리아는 1961년에 제2텔레비전방송의 실현을 보았다. 독일은 1952년 텔레비전 방송을 시작하였고, 1963년에 제2텔레비전을 곁들이게 되었다.
미국에서는 1939년 방송회사 NBC(내셔널방송회사)가 소유하는 W2 XBS국이 실험 정규방송을 개시하여 만국박람회 개회식, 프로야구 중계방송 등을 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미국도 전시 중에는 방송사업이 답보상태를 면하지 못했으나, 전쟁 후에 재출발을 하여 본궤도에 오른 것은 1948년경부터의 일이다. 그 이후에는 경쟁본위의 상업방송제도하에 텔레비전 방송은 눈부시게 발전하여 통신위성을 이용한 국제 텔레비전 중계에도 오늘날 주도적 위치를 확보하고 있다. /naver
[1913년] 한국의 작곡가 김동진(金東振) 출생
김동진 [金東振, 1913.3.22∼ ]
평안남도 안주(安州) 출생. 숭실전문(崇實專門) 영문과와 일본 고등음악학교(高等音樂學校)를 졸업했다. 1938년 만주 신징교향악단[新京交響樂團(신경교향악단)] 바이올린·작곡을 담당했으며 평양교향악단(平壤交響樂團)을 창설하여 지휘했다. 월남 후 해군 정훈음악대 창작부장 겸 지휘자·초대 예술원회원·중앙대학교 예술대학과 경희대학교 음악대학교수를 지냈다. 정부수립 10주년 기념 음악회에서 《승리의 길》을, 서울 시향(市響) 제77회 정기연주회에서는 《가야금 협주곡》을, 혁명경축 음악회에서는 《조국》을 작곡·발표하여 한국 현대 음악의 선도적 역할을 하고 있다. 특히 가곡 《가고파》 《내마음》 《목련화》 등은 민족의 서정과 향수를 담은 작품으로 널리 불려지고 있다. 은관문화훈장, 국민훈장 모란장, 예술원상 등을 받았다. /yahoo
[1895년] 뤼미에르 형제, 최초의 영화 상영
← 오귀스트 뤼미에르
1895년 3월 22일 뤼미에르 형제는 파리의 한 모임에서 자신들이 만든 스크린에 시네마토그래프를 최초로 비공개 상영했다. 뤼미에르 형제는 초상화 화가였던 아버지로부터 재정적인 도움을 받아 사진 건판 생산공장을 세운 뒤 연간 약 1,500만 개의 사진판을 생산할 정도로 큰 성공을 거두었다. 뤼미에르 형제가 활동사진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아버지 앙투안이 파리에서 열린 토머스 에디슨의 활동사진 영사기 전시회에 다녀오면서부터였다. 이때부터 뤼미에르 형제는 구멍으로 들여다보는 에디슨의 키네토스코프를 영사장치와 연결시키는 작업에 몰두했다. 1895년 뤼미에르 형제는 발명에 성공하고 시네마토그래프라는 이름으로 특허를 얻었다. 같은 해 3월 22일, 그리고 6월 10일 비공개 시험상영을 마친 뤼미에르 형제는 12월 28일 파리의 카퓌신가에 있는 그랑 카페에서 최초의 영화 <뤼미에르 공장을 나서는 노동자들 La Sortie des ouvriers de l'usine Lumière>을 상영해 대중으로부터 큰 호응을 얻었다. /브리태니커
[1832년] 독일의 시인, 극작가, 정치가 괴테(Goethe, Johann Wolfgang von) 사망
← 독일의 시인 괴테
1749. 8. 28 ~ 1832. 3. 22
요한 볼프강 폰 괴테(1749~1832)는 인간이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재능과 정열을 남김없이 써버리고 후회없이 살다간 근대 유럽 최고의 지성인이었고 예술가였다. 그를 정의한다는 것은 그를 속박할 뿐이다.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 신적인 예지까지 터득했다는 평가가 그래서 설득력이 있다. 하이네는 그를 가리켜 “머리 끝에서 발바닥까지 천재”라고 예찬했고, T S 엘리엇은 “시인이라기보다 현인”이라고 경외했다. 시인·화가·무대연출가·정치가·과학자…. 괴테의 관심분야는 다양하다 못해 실로 초인적이었다. 문학사에 우뚝 선 존재였음은 물론 2700여점의 그림을 남긴 화가였고 26년간 바이마르 궁정극장을 이끌며 모차르트의 오페라를 280번이나 공연한 무대연출가였으며 바이마르 총리에까지 오른 정치가였다. 자연을 인간과 예술의 연원으로 간파한 그의 관심은 식물학·기상학·해부학·지질학·색채학 등으로까지 폭넓게 발전한다. 동물에게만 있고 인간에게는 없는 것으로 알려졌던 간악골(間顎骨)을 찾아낸 것도 괴테였다.
괴테는 평생을 사랑과 실연 사이에서 갈등했던 영원한 낭만주의자였다. 뭇 여성들과의 사랑과 이별 그리고 이를 문학으로 승화시킨 여든셋 괴테의 삶은 그가 왜 대문호의 반열에 올라야 하는지를 설명해주고 있다. 첫 사랑 프레데리케와의 이별은 시 ‘제젠하임의 노래’를 부르게 했고, 친구의 약혼녀인 샬로테(로테)와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은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탄생시켰다. 약혼까지 했지만 결국 헤어지고 만 릴리 쇠네만, 궁정에서 만나 1500통 이상의 연서(戀書)를 보냈던 유부녀 샬로테 폰 슈타인 등 그의 삶을 거쳐간 수많은 연인들은 언제나 마르지 않는 창조의 원천이었다.
30여년간을 함께 살았던 본부인 크리스티아네가 숨지자 괴테는 71세 나이로 16세의 울리케 폰 레베초를 만나 마지막 사랑의 불꽃을 지핀다. 결혼까지는 이르지 못했지만 “나는 요즘 춤 추듯 살고 있다”며 사랑의 찬가에 열을 올린다. 이때도 괴테는 그녀에 대한 절절함을 담은 시 ‘마리엔바트 비가(悲歌)’를 남긴다. 1832년 3월 22일, 바이마르에서 숨져 살아생전 진한 우정을 나눴던 실러 옆에 묻혔다. /조선
[1599년] 반 데이크 Sir Anthony Van Dyck 출생
1599년 3월 22일 태어남 / 1641년 12월 9일 죽음 "반 데이크는 그의 위대한 스승과 같은 개성이나 상상력은 없었지만, 초상화가로서는 모델의 성격을 완전히 파악하고 존중할 줄 안다는 장점을 지니고 있었다. 그가 그린 초상화들은 모델들 자신의 생생한 정신과 아울러 그 자신의 성격을 어느 정도 반영하며 따라서 매우 독특한 매력을 지닌다." - 빌헬름 폰 보데
반 데이크는 17세기 바로크 시대 미술을 대표하는 플랑드르의 화가이다. 초년에는 페테르 파울 루벤스의 조수이자 협력자로 일하면서 많은 영향을 받았지만, 루벤스의 강건하고 힘찬 화풍과는 구별되는 독자적인 분위기를 만들어냈다. 풍부한 색채와 보석 같은 순수함은 티치아노를 위시한 베네치아 화파 화가들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종교적·신화적 주제의 그림들도 많이 그렸지만, 주로 초상화가로 명성을 떨쳤다. 반 데이크 특유의 우아하고 우수 어린 초상화들은 당시 귀족 사회의 이상에 합치하는 것으로 큰 호응을 얻었다. 영국 왕 찰스 1세의 전속 화가로 일하면서 기사 작위와 거액의 연봉을 하사받는 등 명예와 부를 누리다가, 4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1459년] 막시밀리안 1세 (신성 로마 황제) [Maximilian I] 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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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9. 3. 22 오스트리아 비너 노이슈타트~1519. 1. 12 벨스.
오스트리아의 대공, 독일의 왕.
개요
신성 로마 제국 황제(1493~1519 재위)를 지냈으며 합스부르크 왕가를 16세기 유럽에서 지배적인 세력으로 만들었다. 결혼을 통해 네덜란드를 획득하고 헝가리와 보헤미아를 조약과 군사적 압력으로, 스페인과 스페인 제국을 아들 필리프의 혼사를 통해 각각 손에 넣음으로써 오스트리아 본래의 영토에다 광활한 영토를 더했다. 또한 주로 이탈리아에서 프랑스와 여러 번 싸우기도 했다. 그의 손자가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로 거대한 합스부르크 제국을 계승했다.
영토확장
신성 로마 황제 프리드리히 3세와 포르투갈의 엘레아노르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1477년 부르고뉴의 용담공(勇膽公) 샤를의 딸 마리와 결혼함으로써 네덜란드와 프랑스 동부 변경지역에 걸친 넓은 부르고뉴 영토를 차지했다. 1479년 긴가트 전투에서 프랑스군을 물리치는 등 프랑스 루이 11세의 공격에 맞서 새로이 확보한 영토들을 잘 지켜나갔다. 1482년 마리가 사망한 후 막시밀리안은 네덜란드 의회가 어린 필리프(후에 카스티야의 미남왕 펠리페 1세가 됨)의 섭정 역할을 하는 것을 허용할 수밖에 없었으나, 1485년 전쟁을 일으켜 의회를 무찌르고 섭정권을 되찾았다. 한편 그는 1482년의 아라스 조약에 의해 딸 마르가레테와 프랑스의 샤를 8세의 약혼에도 동의해야 했다. 1486년 그는 신성 로마 황제(부친의 상속자로서)로 선출되었으며 그해 4월 9일 아헨에서 즉위했다. 그는 스페인·영국·브르타뉴의 군사적 지원을 받아 프랑스 및 네덜란드 반란세력과 전쟁을 계속했다. 프랑스를 고립시키기 위해 1490년 대리인을 통해 브르타뉴 여공작 안과 결혼했으나 프랑스의 브르타뉴 침공을 막지는 못했다. 사태가 극적으로 악화되어 샤를 8세가 약혼녀인 마르가레테를 막시밀리안에게 되돌려보내고, 안에게 막시밀리안과 이혼하고 자기와 결혼하여 프랑스의 왕비가 되어줄 것을 요구하고 나섰다. 사촌인 지기스문트 대공을 통해 막시밀리안은 티롤을 손에 넣었다. 티롤의 주요도시 인스부르크는 은광이 있을 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매우 유리한 위치라는 점 때문에 막시밀리안의 활동 중심지가 되었다.
1490년 그는 오스트리아에 있는 합스부르크 왕가의 전래 영토 대부분에 대한 통치권을 되찾았는데 그때까지 이 영토는 헝가리가 차지하고 있었다. 이후 그는 공위이던 헝가리의 왕위계승 후보자가 되었다. 보헤미아의 블라디슬라프 2세가 헝가리 왕으로 선출되자 그는 블라디슬라프에 대해 군사활동을 일으켜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다. 또한 1491년 프레스부르크 조약으로 블라디슬라프가 후사를 남기지 못하고 죽을 경우 보헤미아와 헝가리의 왕위계승권이 합스부르크가로 넘어오도록 만들었다. 1493년 상리스 조약을 맺어 네덜란드 및 프랑스와의 분쟁에 종지부를 찍었으며 부르고뉴 공국과 저지대 지방(지금의 베네룩스 3국) 등은 합스부르크 왕가의 수중에 들어가 안전을 보장받게 되었다.
권력강화
1493년 프리드리히 3세가 사망하여 독일 왕국의 유일한 통치자이자 합스부르크 왕가의 수장이 된 막시밀리안은 남동부 국경지대에서 투르크인들을 몰아냈다. 1494년 밀라노의 비앙카 마리아 스포르차와 결혼했으며 같은 해 저지대 지방을 아들 필리프에게 물려주고 통치는 공동으로 하도록 조치해놓았다. 저지대 지방의 융성한 문화는 합스부르크 왕가가 통치하는 모든 지역의 문학·미술·정부형태·정치·군사 등의 분야에 큰 영향을 미쳤다. 1494년 샤를 8세가 이탈리아를 침공하자 유럽의 세력균형이 깨졌다. 1495년 막시밀리안은 나폴리를 점령하고 있던 프랑스를 물리치기 위해 교황·스페인·베네치아·밀라노 등과 함께 이른바 신성동맹을 맺었다. 1496년 이탈리아에 원정하여 프랑스군을 격퇴했으나 별로 이익을 얻지는 못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해 아들 필리프를 스페인의 후아나 공주와 결혼시키고 1497년 딸 마르가레테를 스페인 왕자와 결혼시킨 사실이다. 이 결혼을 통해 막시밀리안은 스페인과 그 식민지에 대한 계승권을 확보했다.
1495년 보름스에서 열린 제국의회(Reichstag)에서 막시밀리안은 제국의 강화를 꾀했다. 의회에서는 제국대법원(Reichskammergericht)과 세제를 개혁하고 항구적인 공공 평화를 확립하기 위한 법률을 마련했지만 많은 문제를 안고 있던 군사제도와 행정제도에 대해서는 해결책이 제시되지 않았다. 군주들은 중앙권력의 강화를 용인하려 들지 않았으며 따라서 이러한 권력의 제한은 제국정책을 추진하는 데 장애가 되었다. 마인츠 대주교인 대법관 베르트홀트가 이끌던 반대파를 무력화시키기 위해 막시밀리안은 초헌법적인 사법 재정위원회를 독자적으로 설치했다. 한편 그는 1499년 스위스 연방과의 전쟁에 패배함으로써 그해 9월 22일에 체결한 바젤 평화조약에 의해 사실상 스위스의 독립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같은 해 프랑스는 스페인과 협력하여 재차 이탈리아를 침공해 밀라노의 제국 봉토를 점령했다.
1500년 아우크스부르크에서 열린 제국의회에서 제국의 군주들은 막시밀리안에게서 권력의 상당 부분을 박탈해 21명의 선제후를 포함한 독일 군주들로 구성된 최고위원회격인 제국통치평의회(Reichsregiment)에 그 권력을 귀속시켰다. 제국의 군주들은 심지어 막시밀리안을 폐위시키는 것까지도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계획은 군주들 각자의 냉담함과 막시밀리안의 효과적인 대응조치 때문에 실행에 옮겨지지는 못했다. 그는 프랑스와 협정을 체결함으로써 유럽에서의 자신의 입지를 강화시켰으며 1504년 바이에른과 라인 팔츠 사이의 왕조 전쟁에서 거둔 승리로 제국 내에서의 위신을 회복했다. 이와 함께 마인츠 대주교 베르트홀트의 사망으로 주요한 적대세력 가운데 한 사람이 사라졌다. 푸거 가문과 같은 남부 독일의 기업들과 신용협정을 맺어 국내외적으로 필요한 자금을 확보했으며 1506년 헝가리에 군사원정을 일으켜 헝가리 왕위에 대한 합스부르크 왕가의 계승권을 한층 강화시켰다. 막시밀리안은 독일 왕이었지만 관례에 따라 교황에 의해 황제의 왕관을 받지 못했으며 적대세력인 베네치아인들에 의해 이탈리아에서 축출당한 후에는 대관식에 참석하기 위해 로마로 갈 수도 없었다. 그는 단지 1508년 2월 4일 교황 율리우스 2세의 동의에 의해 수여된 로마 황제 선출자 칭호에 만족해야만 했다.
그는 베네치아에 대항해서 1508년 프랑스·스페인·교황이 함께 참여하는 캉브레 동맹에 가담했다. 이들은 베네치아 공화국을 분할하는 데 그 목적이 있었다. 이어 발발한 전쟁에서 막시밀리안은 자금과 병력이 부족했기 때문에 신뢰할 수 없는 동반자라는 오명을 쓰게 되었다. 교황 율리우스 2세가 중병을 앓게 되자 막시밀리안은 자신이 교황에 오르는 문제를 고려하게 되었는데 이는 교회분열의 성격을 띠고 있었던 피사 공의회가 그에게 제안한 것이었다. 때로는 신앙적으로 경건하고 한편으로는 반교권적이었던 그는 자신이 교황경쟁자가 된다면 독일 교회로부터 재정지원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결국에는 아라곤의 가톨릭 군주 페르난도 2세의 만류로 이 생각을 단념했다. 동맹을 맺었던 프랑스에게서 등을 돌리고 그는 1511년 교황·스페인·영국과 그 연합세력들에 의해 새로 결성된 신성동맹에 가담했다. 1513년 영국의 지원을 받아 그는 스푸르스 전투에서 프랑스군에 승리를 거두었으며, 그의 동맹군들은 밀라노와 롬바르디아를 회복하는 데 전력을 기울였다. 1515년 프랑스는 마리냐노 전투를 통해 이탈리아에서 승리했으나 밀라노를 다시 차지하려던 막시밀리안의 노력은 비참한 실패로 끝났다. 브뤼셀 조약으로 밀라노는 프랑스에 넘어갔으며 베로나는 베네치아의 수중에 들어갔다. 막시밀리안에게는 단지 티롤 국경 영토만이 남게 되었다. 동쪽에서는 러시아와의 교섭을 통해 폴란드·보헤미아·헝가리에게 압력을 가해서 그의 팽창계획에 동조하도록 할 수 있었다. 1515년 합스부르크 가문과 헝가리 왕가 사이에 유리한 혼인관계가 맺어졌으며 이에 따라 합스부르크가는 같은 왕조의 지배를 받고 있던 헝가리와 보헤미아에서 위상을 강화했다. 중부 유럽과 이베리아 반도까지를 포함하는 막시밀리안의 복잡한 동맹 체제는 그를 유럽 정세에서 강력한 세력으로 만들었다. 그는 손자 카를이 황제에 선출되도록 하고 투르크족에 대항해 유럽을 단결시키기 위해 죽기 전 1년 동안 노력하다가 1519년 1월 12일 오버외스트라이히의 벨스에서 사망했으며 비너노이슈타트의 게오르크 교회에 묻혔다(인스부르크호프 교회에 있는 그의 거대한 묘지는 후에 세워진 것임). 이미 스페인 왕이었던 그의 손자가 그해말 카를 5세로 황제에 즉위함으로써 막시밀리안의 계획은 결실을 보았다.
평가
막시밀리안의 업적은 위대한 것이었지만 그의 야심에 비추어볼 때는 보잘것없었다. 그는 샤를마뉴 대제의 제국을 부활시킴으로써 서유럽 전역을 통합하기를 원했다. 종종 중세적인 사고방식을 고수하곤 했지만 새로운 사고에 대해서도 개방적이었으며 예술뿐만 아니라 과학의 진흥에도 열정적이었다. 라틴어로 자서전을 집필할 계획을 세웠으며 자전적인 내용으로 된 시적인 우화 〈백색왕 Weisskunig〉·〈용감한 생각 Teuerdank〉을 직접 썼다. 또한 사냥에 관한 논문인 〈수렵비법 Geheimes Jagdbuch〉을 집필했으며 자신의 치세를 기리기 위한 사업에 시인들과 예술가들을 동원해 분주히 활동하도록 했다. 군사 분야에서 상당한 재능을 가진 그는 전쟁을 목적 달성의 수단으로 이용했다. 군사·행정 분야에서 실속있는 개혁을 실시했으나 경제문제에 관해서는 문외한이었으며 재정적으로 미덥지 못한 인물이었다.(H. Wiesflecker 글)
그밖에
2005년 박봉주 북한 내각총리 중국 방문
2004년 팔레스타인 무장단체 ‘하마스’ 창설자 야신 피살
2004년 미 항공우주국(NASA)의 스타더스트 우주선, 혜성 `코멧 와일드 2` 근거리 촬영에 성공했다고 보도
2003년 미국 전역에서 사상최대 이라크전 반전시위 개최
1996년 프랑스의 소설가 모리악 사망
1990년 한국,체코와 대사급 외교관계 수립
1987년 부산 형제복지원 사건 발생
1985년 소흑산도 근해서 표류중이던 중국어뢰정 구조
1983년 아마드 샤 말레이지아 국왕 내한
1982년 스위스 유엔가입 발의
1980년 한국여자핸드볼 올림픽예선대회 우승으로 첫 올림픽참가권 획득
1975년 로디지아 민족지도자 헤르베르트 치테포의 장례식
1972년 이화여대 86년 만에 남학생 첫 수강
1969년 삼일고가도로(청계고가도로) 완공
1968년 석유화학계열 공업단지 기공
1966년 켄터베리 대주교 교황청 방문
1965년 단일변동환율제 실시
1963년 3군 비상지휘관회의서 3.16성명 지지결의, 박정희의장 방문
1958년 미국, 열전자엔진 발명
1957년 미군기, 태평양 횡단중 실종으로 67명 사망
1953년 헌병총사령부 신설, 초대 사령관에 원용덕 소장
1948년 딘 군정장관 선거법 및 시행세칙 공포
1948년 일본정부, 재일교포 학교 폐쇄
1947년 트루먼, 파괴분자의 관직추방 명령
1947년 남한에 24시간 총파업, 이를 계기로 좌익조직 검거 시작
1945년 카이로에서 이집트 등 7개국 아랍연맹 결성
1935년 독일, 유럽최초로 정기적인 TV방송 개시
1933년 계초 방응모 조선일보사 경영권 인수
1923년 프랑스의 무언극 배우 마르셀 마르소 출생
1910년 스코틀랜드 열차 충돌로 227명 사망
1889년 화폐 남발로 물가폭등, 주전소 폐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