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계 박세당 종가 1년에 방문객 1만여명 4년 전 문화재단 설립 “400년 전 종가건물 복원하고 싶어”
▲ photo 염동우 영상미디어 기자
“어휴~ 종갓집이라고 해도 이럴 줄 몰랐죠. 멋모르고 시집왔어요.”
‘사변론’ ‘색경’ 등을 지은 조선 후기 실학자 서계(西溪) 박세당(朴世堂·1629~1703)의 종택을 지키고 있는 12대 종부 김인순(56)씨의 말이다. 서계 선생의 종택은 경기도 전통종가 1호로 지정된 곳이다. 김씨는 서계의 12대 종손 박용우(58·서계문화재단 이사장)씨와 결혼한 이후 30년째 줄곧 이곳을 지키고 있다. 17년 전에 시어머니가, 2년 전에 시아버지(11대손·박찬호)가 돌아가시고 두 아들과 함께 2대가 살고 있다. 경기도 의정부 장암동 197번지. 김씨를 만나기 위해 승용차 내비게이션에 주소를 입력하니 서울 종로구 광화문에서 22㎞ 떨어진 곳이다. 수락산을 병풍처럼 두르고 도봉산을 앞마당처럼 거느리고 있는 종택 마당엔 성인 두 사람이 두 팔을 벌려 안기에도 버거운 은행나무가 수호신처럼 버티고 서 있었다. 400년 가까이 종택의 역사와 함께해 온 이 은행나무 역시 의정부시에서 지정한 보호수다.
김씨는 며칠 후에 서울 삼성동 코엑스에서 열릴 코리아푸드엑스포 참가 준비로 분주했다. 농촌진흥청이 엑스포 행사의 하나로 마련한 전국 15개 종가·명가 음식 전시에 초대된 것이다. 전국의 내로라하는 종갓집 종부들이 고택의 문지방을 넘어 서울 한복판에서 손맛을 겨루는 자리다. 김씨는 이 전시에 간소한 기호지방의 특성을 잘 계승하고 있는 박세당 종가의 제사상을 들고 나섰다. 김씨는 1년이면 12번(4대봉사가 원칙으로 기제사 8번, 설, 추석, 시제, 사당차례) 제사를 치른다. 제대로 된 제사의례를 지내기 때문에 이 집의 명절 차례상은 공중파·케이블 방송에도 소개됐다. 종택과 서계 선생 묘를 찾아오는 사람들이 일 년이면 1만여명에 이른다. 서울 인근 대표 종갓집으로 꼽히는 탓에 잡지사며 방송국에서도 자주 찾아온다. 김씨의 365일은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 특히 11월 달력은 꽉 차 있다. 운전 못하는 남편의 기사로 전국에 있는 반남(潘南) 박씨 시제에 참석해야 하기 때문이다. 종가 일에다 제사 치르느라 손에 물 마를 새가 없는 30년 종부 인생을 들어봤다.
“1인 7役… 명절 친정나들이 꿈도 못꿨죠”
김씨는 결혼할 당시에는 종부의 삶이 이렇게 고달플지 상상도 못했다고 한다. “우리 아버지도 종손이었기 때문에 제사를 지냈어요. 이북에서 혼자 내려온 탓에 제사를 지내긴 했지만 북한에 가족들이 살아계셔서 한두 번 지내고 말았죠. 그래서 시댁도 그러려니 한 거죠.”
부모님이 장사를 해서 일찍부터 자취를 한 김씨는 직접 밥을 해먹으며 학교를 다녔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에는 아예 부엌살림을 도맡아하다 스물일곱 살에 결혼했다. 준비된 종부였던 셈. 지금은 집 바로 앞에 6차선 도로를 따라 차들이 꼬리를 잇고 달리지만 당시는 뒤를 돌아봐도, 앞을 봐도 온통 산뿐이었다. “불과 30년 전이었지만 여기엔 수도도 안 들어왔어요. 개울가에서 빨래하고 펌프질해서 밥해 먹었어요. 고택이니 손 갈 곳은 얼마나 많고 얼마나 불편했겠어요. 게다가 산에서 내려온 뱀들이 마당에 똬리를 틀고 있는 바람에 질겁 하고 놀랐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에요. 그런 세월을 살았어요.”
남편 하나 보고 시집왔건만 남편 얼굴은 구경도 하기 힘들었다. 당시 금성사(현 LG그룹)에 다녔던 남편은 아침 7시에 출근하면 밤 11시가 다 돼서야 퇴근했다. 게다가 몸이 약했던 시어머니는 힘든 일을 할 수가 없었다. 당연히 종갓집의 모든 일은 김씨의 차지였다. 일도 일이었지만 김씨가 가장 힘들었던 것은 집 밖 출입을 못하는 것이었다. “완고했던 시아버지는 여자가 밖에 나가는 것을 좀처럼 허용하지 않았어요. 결혼 후 1년 동안 집안에 갇혀 살았어요. 시장도 시아버지가 봐올 정도였어요. 명절 때 친정 나들이는 아예 꿈도 못 꿨죠.”
넓은 종택 건사하랴, 세 끼 밥해대랴, 시어머니 병수발하랴, 끝나고 돌아서자마자 다시 돌아오는 제사 준비하랴, 농사 지으랴, 두 아들 키우랴, 남편 뒷바라지 하랴…. 그야말로 종부의 고단한 삶은 요즘 며느리들은 상상도 못할 일이다. 그러나 30년 내공의 김씨는 별로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말한다.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인 줄 알고 한 거죠. 그나마 시어머니 돌아가시고 나서는 농사도 안 짓고 지금은 일도 아니에요. 처음 시집와서는 오곡농사에 고추·깨 등 잡곡까지 제 손으로 전부 농사짓고 거뒀어요. 주변에서 제사를 좀 더 간소하게 지내라고 말하기도 하는데 몸은 편할지 모르지만 후손의 도리를 못한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불편하잖아요.”
제사 준비·묘소 관리에만 3000만원 들어
1년에 12~13번이니 30년 동안 400번도 넘게 차려냈을 제사를 김씨는 어떻게 치러냈을까. 김씨는 한번 제사를 지낼 때마다 일 주일 전부터 준비를 해야 한다고 말했다. 제사상에는 기본으로 7과(과일 7가지)와 3전(육전, 간·천엽전, 어전), 3탕(육탕, 어탕, 소탕), 3포(육포, 어포, 대구포), 3가지 나물, 갱(북어와 고기를 넣은 국), 국수, 물김치, 식혜, 잡채, 인절미가 오른다. “김치 담고, 놋제기 꺼내 닦고 마른 음식부터 준비하다 보면 일주일도 부족해요. 그중에서 대추·밤 굄(대추와 밤을 층층이 쌓아 올리는 것)에 가장 손이 많이 가요. 밤을 보통 20㎝ 높이로 쌓아올리는 데 한 말 반이 넘는 밤을 깎으려면 서너 명이 붙어서 하루 종일 해도 부족해요.”
껍질을 깎은 밤을 수십 층 쌓으려면 사이사이 한지를 깔고 밀가루 풀을 붙여가며 올려야 한단다. 이 작업을 하는 데만 2~3시간. 대추까지 쌓아올리자면 한나절이 훌쩍 간다. 그나마 한 상만 차리는 기제사 때는 일도 아니란다. 추석과 설 때는 기본이 두 상이다. 같은 일을 4번 해야 하는 것이다. 인절미도 절구에 찧어 집에서 직접 만든다. 김씨는 “365일 제사떡이 떨어지질 않으니까 가족들이 인절미만 보면 고개를 흔든다”며 “이젠 입에도 안 댄다”고 말했다.
매년 10월에 치르는 시제(묘제)는 가장 큰 행사다. 종택 사당 뒤쪽에 서계 박세당 묘(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13호)를 비롯해서 조상들의 묘마다 모두 11번의 제사상을 올려야 한다. 그때는 큰가마에다 음식을 싣고 나른다. 종가가 아니면 보기 힘든 광경일 것이다. 코리아푸드엑스포의 종가음식전시 자문위원을 맡은 이연자 종가문화연구소 소장은 “이 종가의 제사음식 특징은 다른 집에선 볼 수 없는 잡채가 오르는 것이다. 실학자였던 서계 선생이 간소한 차림을 요구해서 탕평채 대신에 잡채가 올라온 것이 아닌가 싶다. 3적 중 하나로 생간과 천엽을 올리는 것도 특이하다. 전국의 종가집을 다녀봤는데 이 집 종부의 품성과 솜씨는 특히 훌륭하다”고 말했다
“힘 좋은 며느리 들어왔으면”
▲ 종부 김인순씨 뒤에 보이는 건물이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93호로 지정된 서계 박세당 종택의 사랑채이다.
이렇게 제사음식을 해대니 제사 지내는 비용도 만만치 않을 것 같았다. 김씨는 “과일값에 따라 다르지만 보통 한 상 차리는 데 40만원이 넘게 든다”고 말했다. 12번만 계산해도 500만원인데 한 상이 아니라 시제 때는 11반상, 명절 때 간소하게 줄인 것도 2반상이니 전체 상 차림에 1000만원이 넘게 드는 셈이다. 게다가 벌초 등 묘소관리까지 1년이면 3000만원이 넘게 든다고 한다.
도대체 그 비용은 어떻게 충당할까? 서계 선생 종택은 현재 서계 문화재단에서 관리하고 있다. 재단은 2006년 설립된 것으로 46만여㎡(14만평)에 달하는 종택 부지를 둘러싸고 집안 간에 재산싸움이 붙었다. 종택을 지키기 위해 문화재단을 만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종택 근처에 도로가 닦이고 7호선 지하철역이 들어서면서 땅값이 천정부지로 올랐다. 김씨는 “종부세만 1년에 1억원을 내지만 그린벨트 지역인 데다 종택은 문화재자료로 지정돼 있으니 기왓장 한 장 맘대로 못해요. 몇 년 전에 살림집이 너무 불편해 새로 지었다가 의정부시하고 법적 다툼까지 갔어요. 아직도 결론이 안 났어요. 시에서는 불편하면 밖에 나가 살지 왜 굳이 이곳에 살려고 하느냐는데 종손이 안 사는 종택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반문했다. 김씨는 “종택 주변에 있는 종가 땅 임대료로 비용을 충당하고는 있지만 매년 적자를 면치 못하고 있다. 본격적으로 식당을 해볼까 생각 중이다”고 말했다.
“집에 오는 사람에게 따뜻한 밥 한 숟가락이라도 먹여 보내야 직성이 풀린다”고 말하는 천상 종부 김씨의 꿈은 종택 건물들을 원래대로 복원하는 것이다. “서계 할아버지가 계실 때는 머슴을 47명을 뒀을 정도로 집 규모가 컸다고 해요. 6·25 때 폭격으로 건물 대부분이 소실되고 사랑채만 남았어요. 지금 빈터로 남아있는 곳에 건물을 다시 복원하고 싶어요.”
집안에 100호 크기의 유화 그림이 걸려 있어 “누구 작품이냐”고 물어보니 뜻밖에도 김씨의 작품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옆에 있던 박용우 이사장이 “그림, 서예, 도자기, 다도…, 온갖 것을 다 배우러 다녔어요. 서양화로 도전에 출품해 입선도 여러 번 했어요. 서예대회에 나가서도 입선에 당선했고요”라고 말하자 김씨가 “시어른들이 집 밖을 못 나가게 했는데 뭘 배우러 간다고 하면 보내줘서 배운 것”이라며 웃었다.
이제 30년 손맛을 물려줄 며느리를 맞아야 한다. 13대손인 김씨의 큰 아들은 서른 살이다. “어떤 며느리를 원하느냐”고 묻자 김씨는 “본인이 좋아야지 내 마음에 들면 뭐하겠느냐”고 하면서도 “사람을 많이 맞아야 하니 사람 만나는 것을 좋아해야 한다. 아들이 키가 커서 몸집이 작은 사람을 좋아하는데 난 덩치도 크고 힘도 잘 쓰는 며느리가 들어왔으면 한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