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바위성지 → 진산성지 → 김천Q1 모텔
44.3Km 142.2Km
17. 나바위성지
전라북도 익산시 망성면 화산리,
금강물이 굽이굽이 흐르는 평야 한가운데 사발을 엎어놓은 듯 작은 산이 있다.
우암 송시열은 이 산이 너무 아름답다고 해서 ‘화산(華山)’이라 이름 붙였다.
산의 줄기가 끝나는 지점에 광장같이 너른 바위가 펼쳐진다.
이름하여 ‘나바위’.
오늘날 화산 위에 자리 잡고 있어 ‘화산 성당’이라고도 불리는 나바위 성당은
이 너른 바위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바로 이곳이 1845년 10월 12일 밤
중국에서 사제품을 받은 김대건 신부가 페레올 주교, 다블뤼 신부와 함께
작은 배 한 척에 몸을 얹고 한국에 첫발을 내디딘 곳이다.
김대건 신부로서는 그 해 1월 육로로 한 번 입국한 데 이어
두 번째이자 마지막으로 밟은 고국 땅이었다.
그 때는 나바위 바로 발끝까지 금강물이 넘실거리며 흘렀다고 한다.
하구로부터 거슬러 올라오자면 황산포(지금의 강경)가 가장 큰 포구였고
나바위는 황산포를 3km 가량 남겨 둔 한적한 곳이다.
나바위 성당은 1897년 본당 설립과 함께
초대 주임으로 부임한 베르모렐(Vermorel, 張若瑟) 요셉 신부가
1906년에 시작하여 1907년에 완성하였다.
설계는 명동 성당 설계자인 프와넬(Poisnel) 신부가 했고
공사는 중국인들이 맡았으며
건축양식은 한국인의 정서에 맞게 한옥 형태를 취했다.
그 뒤 1916-1917년에 흙벽은 양식 벽돌로, 용마루 부분의 종탑은 헐고
성당 입구에 고딕식으로 벽돌을 쌓아 종탑을 세웠으며,
외부 마루는 회랑으로 바꿨다.
그리고 1922년 회랑 기둥 아랫부분을 석조로 개조하여
지금까지 보존하고 있다.
한국의 전통양식과 서양의 건축양식이 독특하게 혼합된 나바위 성당은
그 가치를 인정받아 1987년 7월 18일 ‘화산 천주교회’라는 명칭으로
사제관과 함께 사적 제318호로 지정되었다.
특히 성당 내부에는 전통 관습에 따라 남녀 자리를 구분한
칸막이 기둥이 그대로 남아있다.
한 때는 화산 성당이라 불렀으나 1989년부터 본래 이름을 따라
나바위 성당으로 부르고 있다.
암벽 위 암반에는 1912년부터 매년 6월이면 이곳에서 피정을 하던
대구교구장 드망즈(Demange, 安世華) 주교를 위해
베르모렐 신부가 지은 망금정(望錦亭)이 있다.
그 옆 너럭바위 위에는 1955년에 세운 화강석으로 만든
4.5미터 높이의 김대건 신부 순교비가 있다.
이곳이 김대건 신부가 사제품을 받고
조선에 첫 발을 내디딘 곳임을 알리기 위해 김 신부가 타고 왔던
라파엘호와 똑같은 크기로 제작되었다.
18. 진산성지
충청남도 금산군에 속해있는 진산(珍山)은
한국 천주교회 최초의 참수 순교자인 윤지충 바오로(尹持忠, 1759-1791년)와
권상연 야고보(權尙然, 1751-1791년)가 태어나고 성장한 곳이며,
교회의 가르침에 따라 신주(神主)를 불사르고 유교식 제사를 거부한
‘진산사건’(珍山事件)이 발생한 곳이다.
윤지충과 권상연의 참수 이후 그들이 나고 자란 진산군은
삼강오륜(三綱五倫)을 저버린 강상죄(綱常罪)에 해당되어
지역 전체가 연좌의 벌을 받아 5년간 현으로 강등되었다.
진산성지는 1791년 제사 문제로 촉발된 진산사건(신해박해)으로
한국 최초로 순교한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권상연 야고보를 기념하는 곳이다.
2014년 8월 16일 광화문에서 거행된 124위 시복식에서
윤지충은 대표 순교자가 되었으며, 권상연 역시 복자품에 올랐다.
두 분 복자 외에도 진산 성지는 같은 동네에서 거주하다 1866년 병인박해 이후 순교한
김영오 아오스딩, 김영삼, 김요한 세 분의 순교자들도 함께 기리고 있다.
진산성지 성당은 2017년 5월 29일부로
국가 지정 등록 문화재(682호)로 등록 되었다.(대전교구홈피)
한국 최초의 순교자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복자 권상연 야고보 성당인
진산성지 성당은 가사벌공소이였던 때인 1927년에 가사벌과 장대울 교우들의 노력과
프랑스 선교사 박 파르트네 신부에 의해 성당을(현재건물)건립.
그해 11월 5일에 봉헌
1929년에 초대 주임신부 부임.
1931년 성직자 부족으로다시 공소가 됨.
2009년에 이곳을 진산성지.성당으로 복원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등록문화재여서 성지에서 마음대로 수리를 할 수가 없고,
면에서 해야 하는 것이여서 기다리고 있는 중이랍니다.
1791년 신해박해(辛亥迫害)의 원인이 된 진산사건은
윤지충과 그의 외종사촌인 권상연이
신주를 불태우고 유교식 제사를 폐한 사건을 말한다.
1790년 북경의 구베아(A. Gouvea, 湯士選) 주교가 조선 교회에 제사 금지령을 내리자,
윤지충은 권상연과 함께 이 가르침을 따르기 위해 집안에 있던 신주를 불살랐다.
또 이듬해인 1791년 음력 5월 윤지충은 어머니인 권씨(권상연의 고모)가 사망하자
음식을 드리거나 신주를 모시는 등의 유교식 제사 대신
천주교의 예절에 따라 정성껏 장례를 치렀다.
이는 ‘교회의 가르침에 위배되는 일은 하지 말라.’는 어머니의 유언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는 당시 사회 안에서 패륜의 행위로 받아들여졌다.
친척과 이웃들이 윤지충과 권상연을 무군무부(無君無父)의 불효자로 고발함으로써
이 사건이 조정에까지 알려졌다.
이로 인해 윤지충과 권상연에 대한 체포령이 내려졌고,
권일신 프란치스코 하비에르(權日身, (?-1792년)와 이승훈 베드로(李承薰, 1756-1801년),
최필공 토마스(崔必恭, 1745-1801년), 이존창 루도비코(李存昌, 1759-1801년),
최창주 마르첼리노(崔昌周, ?-1801년) 등 많은 교우들이 체포되었다.
이와 함께 회유책으로 천주교 서적을 없애고 자수한 이들에게는
죄를 묻지 않는다는 내용의 포고문이 전국에 붙게 되었다.
그 후 12월 8일 윤지충과 권상연은 전주 남문 밖(현재 전동 성당 부근)에서 참수되고,
이승훈은 배교했음에도 불구하고 면직되고, 권일신은 유배가는 도중 사망하고,
그 외의 교우들은 배교하고 석방됨으로써 신해박해는 일단락되었다.
하지만 그 결과 서학서의 구입이 금지되는 등 천주교에 대한 탄압이 더욱 강화되었다.
체포령을 듣고 피신했던 윤지충과 권상연은 진산 군수가 그들 대신 숙부를 감금하자
숨어 있던 곳에서 나와 진산 관아에 자수하였다.
관아에서 진산 군수의 회유와 협박을 용감히 이겨낸 그들은
전주 감영으로 이송되어 더욱 혹독한 형벌을 당했다.
죽음을 각오한 그들은 “천주님을 큰 부모로 삼았으니, 천주님의 명을 따르지 않는다면
이는 결코 그분을 흠숭하는 뜻이 될 수 없습니다.”라고 대답할 뿐이었다.
윤지충은 “만약에 제가 살아서건 죽어서건 가장 높으신 아버지를 배반하게 된다면
제가 어디로 갈 수 있겠습니까?”라고 증언하며 권상연과 함께 끝까지 신앙을 지켰다.
당시 전라 감사가 조정에 올린 보고서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들어 있었다.
“윤지충과 권상연은 유혈이 낭자하면서도 신음 소리 한 마디 없었습니다.
그들은 천주의 가르침이 지엄하다고 하면서 임금이나 부모의 명은 어길지언정
천주를 배반할 수는 없다고 하였으며,
칼날 아래 죽는 것을 영광스럽게 생각한다고 말하였습니다.”
오늘도 아내가 갖고있는 책자에만 있는 되재성당지를 추가로 순례.
전주에서 숙박하려고 했으나 대부분의 숙소들이 만실(금요일)이었기에
2일 일정으로 잡았던 전주지역 성지를 하루에 끝내고 김천으로 향했다.
어제 부랴부랴 예약했던 전주시에 있는 호텔(130,000원)은 취소했고
김천의 Q1모텔(50,000원)에서 숙박했다.
전주지역에 있는 성지는 대부분 가깝게 위치하고 있어 1일로 가능했다.
고속도로 톨게이트를 지날 때마다 하이패스 차량이 아니어서
차별대우를 받는 것 같았고 불편했다.
어느 곳에서는 하이패스차량만 나가는 출구로 잘못 나가 미납으로 처리되어
고속도로 사무실에서 정산하기도 했다.
제주도에서는 하이패스가 필요없었지만 육지에 나오니
계속 고속도로로 연결되기에 하이패스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여러번의 시행착오와 바쁜 일정이었던 3일차 여정도 끝났다.
전주에서의 일정을 하루 단축했기에 김천에 있는 큐1모텔에서
홀가분한 마음으로 쉬면서 그 동안의 순례를 정리할 수 있었다.
첫댓글 내일(대림 첫날)부터 2차 성지순례여행을 떠납니다.
당분간 포스팅을 중단하고 여행 다녀온 후 재개하겠습니다.
대림 2주에 뵙겠습니다.
글 영상 잘 읽고 보았습니다 너무 강행군하지 마시고 잘다녀오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