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는 존재의 집
후설은 실증주의에 반대하여 현상학을 통해 현상에 부여되는 의식 작용을 탐구하였다. 그는 사랑하는 제자 하이데거에게 자신의 이 철학사상을 물려주려 하였다. 그래서 교수직까지 물려주었다. 그러나 하이데거는 스승의 그러한 인식론이 아니라 인간 존재를 살피는 존재론을 파고 들었다.
우리는 흔히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라든가 ‘인간이란 존재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한다. 이런 ‘존재’에 대한 질문을 존재 질문이라고 한다. 하이데거는 ‘있음’이라는 사태, 존재라는 현상을 가장 깊이 있게 파헤친 철학자다. 그는 ‘존재’와 ‘존재자’를 구분하였다. 존재자는 나, 토끼, 나무, 돌과 같이 현실에 존재하는 대상물을 가리킨다. 존재란 것은 존재자의 근거가 되는 것으로 존재자를 존재자로 있게 해주는 그 어떤 것이다. 그동안의 형이상학은 ‘있음(존재)’과 ‘있는 것(존재자)’를 구별하지 않았다. 기존의 형이상학은 인간이라는 존재자의 존재 그 자체를 파악하기보다는 존재자를 존재하도록 하는 근원 즉 이데아라든가 신 또는 절대정신이라는 것만 말하기에 급급했다.
그런데 존재자인 인간은 인간의 존재에 대해 물을 수 있다. 이 점이 다른 존재자와 다르다. 인간은 왜 존재하는가를 인간 자신이 스스로 묻는 것이다. 기독교는 인간이 만물을 지배하라며 신이 창조했다고 하고, 유교는 하늘의 뜻에 따라 도를 실현하기 위해 생겨났다고 하였다. 그러나 하이데거는 인간은 아무런 자발적 의도도 없이 그저 이 세상에 내던져진 존재라고 하였다. 이러한 인간의 존재를 현존재(現存在)라고 불렀다. 이것을 이어받아 사르트르는 인간의 실존은 본질에 우선한다고 하였다. 인간은 태어난 목적보다 먼저 존재한다는 것이다. 즉 인간은 고정된 본질을 갖고 태어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렇게 내던져진 현존재이지만 인간은 자신의 존재 의미를 묻는 태도를 지닌 실존이다. 내던져져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 이런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타개해 나갈지를 고민하는 것이 현존재다. 스스로의 존재에 대해 끊임없이 의문을 제기하는 존재가 바로 인간 곧 현존재다. 신이 인간을 만들었는지, 이데아가 정말로 있는 것인지, 절대정신이 실현한 것이 이 세상인지 는 우리 인간은 알 수도 없고 알 필요도 없다. 다만 중요한 것은 인간은 내던져진 현존재가 처한 상황을 어떻게 고민하고 극복하느냐 하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인간을 말하기 위해 로마의 신 쿠라(Cura)를 가져온다. 어느 날 강을 건너던 쿠라는 진흙으로 인간을 만든다. 그런데 이 쿠라(Cura)는 영어의 care이다. 곧 염려, 걱정, 원망, 고뇌, 돌봄이란 뜻이다. 결국 인간은 평생 염려하고 걱정하고 원망하고 고뇌하며 돌봄의 대상이라는 것이다. 과거에 사로잡히고 미래를 염려하고 현재를 불안해 하는 것이 인간 실존의 모습이다.
이러한 궁극적 불안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시간이 흘러가면 도달하는 곳이 죽음이라는 사실 때문에 인간은 불안해 하는 것이다. 인간의 삶은 하루하루 죽음 앞으로 달려가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이 불안을 근본기분이라고 불렀다. 불안이라는 근본기분이 찾아오면 인간은 이때까지 쌓아왔던 것들이 허무하다는 것을 느낀다. 그런데 이때 인간은 세속적인 가치의 집착에서 벗어나 존재 자체를 새롭게 바라볼 기회를 갖게 된다. 이를 통해 인간은 세속적 가치의 집착에서 벗어나 ‘경이(驚異)’라는 기분을 느끼게 된다. 우리가 언젠가는 죽어야 할 존재라는 것을 인지하는 순간 인간은 경이라는 빛을 발하게 된다. 죽음이 우리 삶의 가치를 일깨워 주는 것이다. 모든 존재자는 무로 돌아간다. 존재는 이유가 없다. 존재는 궁극적으로 무와 관련되어 있다. 불안은 이렇게 존재자에게 있음과 없음, 존재와 무가 만날 수 있는 통로다.
그는 이러한 죽음에 대한 불안을 인정하고 수용하라고 말한다. 받아들이면 공포도 불안도 사라진다는 것이다. 불안을 받아들이면 우리는 그동안 얼마나 사소한 것들에 얽매여 있었던가를 깨닫게 된다. 불안을 받아들이는 것은 경이의 존재로 들어서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죽음을 떠올리는 노력을 통해 삶의 숭고함에 다가설 수가 있다고 한 것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 언어다. 언어가 없다면 인간은 실존이 될 수도 없다. 인간은 언어를 통하여 세상을 이해하고 관계를 맺어나간다. 언어가 없다면 인간은 유용한 지식을 생산해 내고 새로운 것을 창조해 내지 못할 것이다. 현존재로서의 인간이 언어를 통해 자기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깨닫고 불안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한다. 언어가 없다면 존재는 있을 곳이 없다. 그래서 그는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 한 것이다.
그래서 그는 언어예술인 시를 최고의 예술로 중시했다.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나 보다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
노오란 네 꽃잎이 피려고
간밤엔 무서리가 저리 내리고
내게는 잠도 오지 않았나 보다
서정주의 ‘국화 옆에서’란 시다. 우리는 국화꽃은 가을이 되면 그냥 피는 줄 알았다. 그러나 시인은 그것이 아니고 봄부터 울어댔던 소쩍새 울음과 여름의 천둥소리가 쌓여서 피고, 그 개화는 간밤의 무서리를 불러오고, 화자 자신의 불면을 가져오게 하는 생명 탄생의 진통을 가져왔다고 하였다.
시는 이렇게 전혀 다른 시선으로 세상을 보는 것이다. 그런 깨달음은 우리에게 경이를 준다. 그런 의미에서 시를 쓴다는 것은 새로운 시선으로 세계를 보는 것이고 존재의 의미를 경이로 보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인간 존재에 대해 깊이 탐구했던 하이데거는 자본주의도 좋게 보지 않고 공산주의도 싫어했다. 그렇던 그가 자본주의나 공산주의보다 훨씬 문제가 많은 히틀러의 나치즘에 빠져 열렬한 추종자가 되었다. 아마도 이쪽 길을 가다가 저쪽 길의 구렁텅이에 빠지는 것이 인간이란 현존재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첫댓글 나치즘에 빠져버렸다니 정말 아이러니입니다. 정신을 바짝 차리고 살아야 하겠습니다. '인간의 실존은 본질에 우선한다'는 문장을 고등학생들에게 이해시키는데, 저도 상당히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망치도 못을 박지 못하게 되면 버려진다는 등의 예를 들어 설명을 했습니다만, 어떤 학생이 다른 동물들도 존재가 우선이지 않느냐고 자꾸 물어와서 상강히 난감했습니다.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