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풍나무, 홍릉숲에서(이하 ‘홍릉숲’에서의 풍경)

모리스 에르조그(Maurice Herzog, 1919~2012)의 안나푸르나(Annapurna, 8,091m) 초등은 에
드먼드 힐러리의 에베레스트(8,848m) 초등에 버금가는 장거입니다. 에르조그가 인류 최초로
8000미터가 넘는 산으로 안나푸르나를 오른 때는 1950년 6월 30일 오후 2시경이었습니다.
힐러리는 그로부터 3년 뒤인 1953년 5월 29일 오전 11시 30분에 지구에서 가장 높은 산인 에
베레스트를 오릅니다.
해발 8,091미터의 안나푸르나(제1봉)는 세계에서 열 번째로 높은 산입니다. 포카라 바로 북쪽
이자 네팔의 중앙에 있습니다. 안나푸르나는 에르조그가 최초로 등정한 이후 20년이 지나서
야 영국 등반대인 크리스 보닝턴이 올랐습니다. 우리나라 사람으로는 박정헌이 셰르파 3명과
함께 1994년 10월 10일 처음 올랐습니다.
안나푸르나의 남벽은 난벽 중의 난벽이라고 하는데 세계 유명한 산악인은 주로 그 남벽을 오
릅니다. 우리의 영원한 산악인인 박영석(48)은 2011년 10월 18일 오후 4시 알파인 스타일로
그 남벽을 오르다 교신이 끊기고 실종되었습니다. 알파인 스타일이란 텐트 없이 비박을 하며
등정하는 방식을 말합니다.
메타세쿼이아



에르조그가 1952년에 펴낸 안나푸르나 원정기 『최초의 8000미터 안나푸르나』(원제 :
Annapurna Premier 8000)는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고 합니다. 이 책은 전 세계적으로
1,200만권 가까이 팔렸으며 책을 세우면 안나푸르나의 10배나 되는 높이라고 합니다.
“이 책은 내가 파리 근교 도시인 눠이의 아메리껭 병원에서 비통한 시간을 보내던 시절, 완전
히 구슬로 쓰였다. 아직도 내 기억 속에 생생히 남아 있는 이 사건들에 대한 추억이 이 기록의
뼈대를 이루는 건 사실이지만 …” 에르조그의 위 책에 대한 머리말입니다. 그는 등정을 마치
고 나서 동상에 걸린 손가락과 발가락을 잘라내야 했습니다.

오른쪽 앞은 나래쪽동백


“6월 3일. 우리는 제5캠프의 텐트 지주에 매달려 여명을 맞았다. 바람은 차차 조용해지더니
날이 밝자 완전히 잠잠해졌다. 몸을 조금 움직이는데도 여간 힘들지 않다. 짓누르는 차가운
눈덩이를 안간힘을 다해 밀어보았지만 까딱도 하지 않는다. 사고능력마저 마비되어 머리를
쓰는 것조차 귀찮다. 우리는 서로 아무 말 없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주위가 너무 을씨년스럽
다!"
역사적인 그날 그들은 밤새 엄혹한 폭풍설에 시달렸습니다.
“나 또한 라슈날처럼 발이 시렵다. 나는 걸으면서 내내 발가락을 움직인다. 발가락이 무감각
하긴 하지만 그런 경험은 등산할 때 자주 일어나던 일이라 쉴 새 없이 혈액순환을 유지시켜
주기만 하면 된다.”
“왼쪽으로 몇 걸음을 가보았다. 정상에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고 있었다. 몇 개의 바위덩이를
피해가며 우리는 있는 힘을 다해 올라갔다. 여기가 정망 정상일까? 그렇다! 갑자기 거센 바람
이 뺨을 스친다. 우리는 현재 해발 8,075미터의 안나푸르나 정상에 와 있다. 너무 행복해서 가
슴이 터질 것만 같다.”
에르조그와 그의 동료 랴슈날이 인류 최초로 8,000미터가 넘는 고봉을 오른 순간입니다. 정
상의 한 면은 얼음으로 된 눈처마를 이루고 있고, 또 다른 면에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아찔
하고 깊은 절벽이 발아래 수직으로 떨어지고 있더랍니다.
사람주나무(Sapium japonicum)



“나는 별 뜻 없이 배낭을 풀어 헤친다. 그러자 갑자기 …
어! 내 장갑!
잡을 틈도 없이 장갑이 눈비탈 위를 굴러 시야에서 점점 멀어져 가고 있었다. 멈출 생각도 않
고 떼굴떼굴 굴러 내려가는 장갑을 눈앞에 뻔히 보면서 어쩔 수 없이 그 자리에 멍하니 서있
었다. 이 장갑의 움직임이 내겐 마치 도저히 당해낼 수 없는 숙명처럼 느껴졌다.”
『최초의 8000미터 안나푸르나』를 베스트셀러로 만들고 에르조그를 더욱 세계적인 명사로
만든 단초입니다. 그는 이때의 부주의(?)로 하산하는 데 전에 경험하지 못했던 악전고투에 시
달리고 등정은 하이라이트로 치닫습니다.



“산은 능선 위를 스치고 풀잎들을 쓰다듬는 바람과 대화를 나눈다. 조금 있으면 모든 것이 막
을 내리고 나는 돌과 십자가 아래 눕게 될 것이다. 동료들은 나에게 피켈을 돌려줄 테지. 부드
럽고 향기로운 미풍이 분다. 동료들이 나를 두고 아쉬운 마음으로 서서히 내게 멀어지는 모습
이 상상된다. 좁은 산길로 행렬이 이어진다. 그들은 고요 속에 평야와 아름다운 지평선에 곧
닿게 될 테지…….”
그는 막판에는 포터들에게 업혀 내려왔고 곧바로 병원으로 실려 가서 사경을 헤맸습니다.
에르조그는 생전에 가진 한 인터뷰에서 “안나푸르나를 등정하지 않았다면 내가 누린 삶을 결
코 누릴 수 없었을 것”이라며 “사람들은 내가 등정으로 잃게 된 것을 볼지 몰라도 나는 그에
견줄 수 없이 더 많은 것을 얻었다”고 회고한 바 있습니다. 그는 안나푸르나 등정 이후 여러
공직을 맡았습니다.
그의 『최초의 8000미터 안나푸르나』의 마지막 구절입니다.
“우리 모두가 빈손으로 찾아간 안나푸르나는 우리가 평생 간직하고 살아갈 보배인 것이다.
안나푸르나 정상 등정의 실현을 계기로 역사의 한 페이지가 넘어가고 새로운 삶이 시작된다.
인생에는 또 다른 안나푸르나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모리스 에르족, 최은숙 옮김, 『최초의 8000미터 안나푸르나』(수문출판사, 1997)


건물 내벽 마감재로 사용되는 낙엽송

첫댓글 하~~ 감동적입니다...이 책도 한번 읽어 봐야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