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샘추위가 물러가니 이제 비로소 봄을 맞는 느낌이 듭니다. 요즈음 틈이 나면 직장에서 가까운 용산초교 근처 산길 한 자락을 찾아갑니다. 포장된 농로를 따라 조금 걸어가면 호젓한 산길이 이어집니다. 차가운 바람이 있을 때와는 달리 따사로운 해살이 내릴 때는 걷는 즐거움이 무척 큽니다.
걸으면서 봄이 들어가는 정겨운 말들을 떠올려 봅니다. 봄비, 봄산, 봄처녀, 봄길, 봄바람, 봄빛, 봄소풍, 봄나물, 봄꽃…. 산길을 걸으며 ‘봄길’에 관한 시 몇 편을 외우면 봄날의 행복이 배가 됩니다.
잘 알려진 정호승 시인의 〈봄길〉이 있습니다. 대구에 사는 막내누나가 아들 결혼식 후 폐백 때 덕담 대신 신혼부부에게 이 시를 암송하는 모습을 흥미롭게 지켜본 적이 있습니다. 다른 말보다도 이 시의 귀한 메시지를 전해 주고 싶은 마음이 있었겠지요. 며칠 전엔 경기도 용인에 사시는 L선생님이 〈노시인을 춤추게 한 어린이의 칭찬〉이란 아름다운 수필을 보내 주셨는데 글의 마지막 부분에 이 시가 소개되어 반가웠습니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있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되는 사람이 있다/ 스스로 봄길이 되어/ 끝없이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 강물은 흐르다가 멈추고/ 새들은 날아가 돌아오지 않고/ 하늘과 땅 사이의 모든 꽃잎은 흩어져도/ 보라/ 사랑이 끝난 곳에서도/ 사랑으로 남아 있는 사람이 있다/ 스스로 사랑이 되어/ 한없이 봄길을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
치과대학장을 역임한 B교수님이 퇴임식 때 이 시를 암송하여 박수를 받았다고 합니다. 크고 작은 여러 행사에서 시 암송이 적절히 활용되면 좋겠습니다.
또 한 편의 ‘봄길’에 관한 시는 이기철의 〈봄길과 동행하다〉입니다.
“움 돋는 풀잎 외에도/ 오늘 저 들판에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꽃 피는 일 외에도/ 오늘 저 산에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종일 풀잎들은 초록의 생각에 빠져 있다/ 젊은 들길이 아침마다 파란 수저를 들 때/ 그때는 우리도 한 번쯤/ 그리움을 그리워해 볼 일이다/ (중략) / 꽃들이 함께 피어나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말로/ 편지를 보내는 것이다/ 그 꽃의 언어로 편지를 쓰고/ 나도 너를 찾아/ 봄길과 동행하고 싶다/ 봄 속에서 길 잃고/ 몸 속에서 깨어나고 싶다.”
문학평론가 장효구 교수는 “그의 시는 아름답다. 이 말은 시인이 언어를 잘 갈고 닦을 줄 안다는 뜻을 담고 있다”고 평을 했습니다. 그에 걸맞게 이기철 시인의 이 시는 신선한 표현이 많이 들어 있어 읊을 때마다 마음이 환해지곤 합니다. “꽃들이 함께 피어나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편지를 보내는 것이다”라는 구절은 얼마나 멋진 은유인가요.
이번 장에서 추천하는 암송 시는 이호우 시인의 〈개화〉입니다. 그는 청마 유치환의 연인이었던 시조 시인 이영도 여사의 오빠입니다. 이 시인은 현대시조의 격을 한 차원 높였으며, 그 누이인 이영도 시인은 민족 고유의 정한을 단아하고 섬세한 가락으로 승화시켰다는 평을 받습니다. 허균과 허난설헌처럼 남매가 함께 문학사에 남는 드문 경우입니다. 이 시조에서 꽃이 피어나는 순간을 설레는 마음으로 지켜보는 시인의 모슴이 아름답게 느껴집니다.
개화/ 이호우
꽃이 피네, 한 잎 한 잎
한 하늘이 열리고 있네
마침내 남은 한 잎이
마지막 떨고 있는 고비
바람도 햇볕도 숨을 죽이네
나도 가만 눈을 감네
암 송 사 랑
300편의 시를 외우고 있는 이순옥 간호사가 시 낭송회에서 낭송 전에 건넨 인사말입니다. “저는 병원에서 산모나 신생아를 돌보고 있는 간호사예요. 산모가 산후우울증으로 괴로워할 때, 아기가 울 때 시를 들려줘요. 그러면 신기하게도 산모와 아기가 안정을 찾습니다. 덕분에 제가 직장에서 사랑받고 있답니다.” < ‘흔들릴 때마다 시를 외웠다(문길섭, 비전과리더십, 2016)’에서 옮겨 적음. (2019.08.23. 화룡이) >
첫댓글 시를 암송하는 일이 좋은 일인데 자꾸 어려워 진다. 내 작품 한 편도 외어 낭송하지 못하고 있으니 내가 생각해도 민망하다.
70이 지나고 나니 알 던 것도 금방 생각이 나지 않는 나이나이라고들 하는데, 새로운 시를 암송한다는 것이 어찌 쉽게 될 수 있겠는지요.
안 되는 것을 잡고 억지로 버티기 보다는 안 되는 것은 안 되는 대로 두고, 잘 되는 것을 더 열심히 하는 일도 보람되고 행복한 일이 될 수 있을 터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