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0년 오스트리아 도나우강 근처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난 에곤 쉴레는, 그의 부모의
표현을 빌리자면, 두 살 때부터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였다고 해요.
초등학교 시절에도 밤낮으로 그림에만 빠져있는 쉴레와 엄격한 규율의 학교는 서로에게
맞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그는 학교 교육을 자유에 대한 억압으로 느끼며 교사들을 적대시하곤 했죠.
15살이 되던 해에 매독으로 아버지가 사망하자, 생활비를 벌기 위해 온 식구들이 발벗고
나서는 상황에서 그는 그림을 배우기 위해 빈 미술 아카데미에 입학했습니다.
그림에 대한 그의 열정에 그의 어머니가 두 손을 든거죠.
동기생들 중에서 가장 어렸던 쉴레가 입학한 빈 미술 아카데미는 1년전 히틀러가 입학 시험을
보았다가 떨어진 곳으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만약 히틀러가 아카데미에 입학을 하게 되고, 또 쉴레와 서로 영향을 주고 받는다면 아마도
세계의 역사는 많이 달라졌겠죠? 어쨌든 지나치게 권위적이고 보수적인 아카데미에서의 생활
또한 그에게는 쉽지 않았습니다.
교수들과의 불화와 자유에의 갈망으로 인해 쉴레는 삼년 만에 학교를 그만두고서는 바로 당시에
유행처럼 번지던 “예술가 그룹” 을 결성하게 됩니다.
그 와중에 만나는 사람이 바로 구스타프 클림프 입니다.
당시의 그는 빈 미술계의 명사였지만 과감하고 충격적인 누드화로 인해 많은 이들의 비난과
공격의 대상이었죠.
열 일곱 살의 쉴레가 자신의 데생에 대한 조언을 구하자 “자네가 나보다 더 많이 알고 있는 것 같은데.”
라며 어떠한 의지도 사용하지 않았지만, 클림프는 쉴레의 인생에 가장 결정적인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마흔 다섯의 클림프는 열 일곱의 쉴레에게 휼륭한 스승이면서 의리있는 친구로서의 역할을 다하였습니
다.
후에 클림프는 쉴레보다 9개월 먼저 세상을 떠나게 되는 데요, 그 때 쉴레는 클림프의 침대로 달려가
막 숨을 거둔 그의 얼굴을 스케치하였답니다.
다음주에는 에로틱하면서 매력적인 클림프의 그림과 그의 생애에 대해 마저 소개할께요.
쉴레의 데생에는 비정상적으로 비틀린 모습과 과격한 포즈를 한 어린 소녀의 누드화가 많이 있습니다.
적나라하게 성적인 부분을 강조한 모습, 심지어 자위하는 소녀 혹은 자신의 초상화를 그리기도 하였습
니다. 그는 거리나 공원에서 놀고 있는 여자 아이들을 집으로 초대해 모델로 그린 적이 많았습니다.
한번은 이런 모습을 수상하게 여긴 이웃들이 “미성년자 유괴”와 “풍기문란”의 명목으로 쉴레를 고소하
여 24일 동안 교도소에 수감되기도 하였습니다.
어른들 뿐만이 아니라 어린이도 성적인 존재라고 생각했던 쉴레의 인식을 당시의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었던 모양입니다.
예전에 성교육 강사 구성애씨가 TV에서 이와 같은 내용의 강의를 했던 기억이 나는 데요.
사실 제게도 쉽지는 않은 생각입니다.
재판 결과로 자신의 그림이 불태워지는 모욕을 당한 뒤 쉴레는 은둔 생활을 하다가, 1914년 옆집의
총명하고 조신한 여인을 발견하고 결혼을 생각하게 됩니다.
당시 쉴레에게는 17살의 나이에 그에게 찾아와 4년 동안 모델과 부인 역할을 해주며 동거하던 여자
발리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무정하게도 그는 “나는 결혼을 할 작정입니다.
다행스럽게도 발리와는 아니지요.” 라고 친구에게 말합니다.
일년 뒤 쉴레는 부모님의 결혼 기념일에 결혼식을 올리고 4일 뒤 입대를 합니다.
군대에서도 쉴레는 재능을 인정받아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아틀리에와 박물관 근무 라는 혜택을
얻었습니다.
게다가 전시회도 하죠. 당시의 오스트리아는 이탈리아와 전쟁 중이었습니다.
1918년 즈음, 쉴레는 여러 전시회와 그룹의 초대를 받기도 하고, 그림이 비싼 가격에 팔렸으며
애호가들도 생겼습니다.
화가로서의 지위와 가족을 돌볼 수 있는 경제적 기반이 생긴 거죠. 하지만 유럽에 불어 닥친
독감의 유행으로 그의 아내가 숨을 거두고, 3일 뒤 그 자신도 그 독감으로 생명을 잃게 됩니다.
비웃는 여인 (1910 )
제목의 걸맞은 여인의 비웃는 듯하기도 하고, 신경질적이기도
한 감정이 거친 피부와 치켜 올라간 눈썹, 뻗친 머리칼 그리고
팔짱 낀 두 팔로 잘 표현되고 있습니다. 그녀는 바라보고 있는
감상자에게 당장이라도 한마디 할 것 같군요.
예수의 고뇌 (1912 )
당시 쉴레는 그림을 그리기 위한 전원 생활중에 이 작품을 제작하였습니다. 작품의 제목과는 달리 그림 속에
표현된 쉴레의 정서는 풍요로워 보입니다. 사용한 색채도, 꽉 찬 구성도 역동적인 표현도….
오른팔을 들고 있는 자화상 (1914 )
자화상을 무척 많이 그린 쉴레는 자기 자신을 무척 사랑했던
모양입니다.
어머니에게 받은 전신거울을 늘상 자신의 아틀리에에 놓고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끊임없이 관찰하며 자화상을
그렸다고 해요.
여러 포즈와 인상으로 그려진 그의 자화상 속에는 시기에 따라
행복과 불행을 느꼈던 예술가의 인생이 담겨 있습니다.
붉은 옷을 걸친 남자누드 (1914 )
깡마른 이 남자의 모습은 자화상일 것 같기도 한 데,
제목에는 자신이라 표현하지 않았네요. 허리를 감싼
천의 붉은 색조가 창백하고 날카롭기까지 한 인물에게
생동감을 부여하고 있습니다.
한 손으로 턱을 괸 인물은 깊은 생각을 하는 듯,
그 눈 속에는 깊이감이 느껴집니다.
죽음과 소녀 (1915 )
이 작품은 4년간 동거 후 버린 발리와의 이별을 상징한다고 합니다. 남자에게 거의 매달린 듯 안겨있는 여인의
모습은 불안하고 위태로워 보입니다.
깍지를 낀 여인의 손가락은 결코 남자를 잃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여주지만 남자는 동요하지 않는 듯 하네요.
손가락의 깍지만으로는 남자를 붙잡을 수 없는 여인이 애처롭고 안쓰럽습니다.
네 나무 (1917 )
그는 인물화 뿐 아니라 마을, 방, 나무, 집 등을 그린 풍경화도 많이 남겼습니다. 그 중 하나인 위의 작품은
노을지는 가을 석양을 배경으로 서있는 마른 잎의 나무들이 사실적이면서도 여유로워 보입니다.
완만한 굴곡의 언덕 선과 수직으로 뻗어있는 나무의 선들이 나름대로의 단아한 의지를 느끼게 합니다.
포옹 (1917 )
<연인들> 이라고 불리기도 하는 이 작품은 쉴레의 작품 중 가장 유명하죠.
주름진 시트 위에 전라의 남녀가 서로를 안고 있으나 밀착한 부분은 상반신 뿐 서로의 다리는 살짝 닿는 데 그치고 있습니다.
화면 한가운데 위치한 근육질의 남자와 여인의 포즈가 주는 생동감 뿐 아니라 화려하고도 밀도감이 느껴지는 색채감이
그림 속으로 관찰자를 끌어당기고 있습니다.
초록색 스타킹의 여인 (1917 )
군에 복무 중에 전시회를 준비하기도 하며 작품을 제작하던 시기에 그려진 그림입니다.
전형적인 쉴레 스타일의 작품이죠.
한쪽 무릎을 들어 올리며 누운, 대담한 포즈의 이 여인은 화가를 유혹하는 듯하기도 하고, 자기만의 세계에 빠져있기도
하는 듯한 자신있는 눈빛을 보이고 있습니다
왼쪽 다리를 곧추세운 여인 (1917 )
녹색 민소매 상의에 검은 스타킹, 그리고 하얀 색 반바지 입은 여인은 아무 감정없이 앞에 있는 사람을
응시하고 있습니다.
아무 배경도 없이 그려진 여인은 그녀가 입고 있는 블라우스의 색 만큼이나 쓸쓸하고 적막해 보입니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공간에 어떤 이도 초대하고 싶은 생각은 없어 보이네요.
앉아 있는 화가의 부인 (1918 )]
그의 아내 에디트는 얌전한 중상류 계층의 여인이었습니다.
하지만 동거하는 여인도 있는 남자와 결혼을 결심했던 만큼,
그만한 의지의 소유자였던 것 같습니다.
성숙한 느낌의 묻어나는 이 그림 속 화가의 부인은 기존의 왜곡된
형태의 인체 표현이 없어서 쉴레의 그림이 맞나 하는 생각이 들게 합니다.
어쩌면 그만큼 부인을 신뢰하고 인정하고 있다는 화가의 마음일지 모르겠습니다.
쉴레의 드로잉 감각은 일찍부터 현저하여, 그는 소년기의 대부분을 연필로그림 그리는 일로
보내었다. 1907년, 그의 드로잉을 당시 이름높던 선배 화가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에
보일 기회가 주어졌다.
클림트는 소년의 비상한 재능을 알아보고 후원 했다. 클림트의 아르 누보 양식과
소재의 영향은 1909년까지의 쉴레의 작품에서 현저히 보인다.
Semi-Nude Girl Reclining
스승의 우아하고 장식적인형상을 떠나서, 쉴레 자신의 표현적인 스타일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1910년 경에 이르러서였다.
화가로서의 명성이 높아가던 참에, 쉴레는 노이렝바하 감옥에 24일간 갇히고 마는데,
죄명은도덕과 꾐 으로, 모델로 섰던 가출 소녀가 그를 고발했던 것이었다.
재판과정에서 판사는 쉴레의 드로잉 한 점을 불에 태워, 일찍이 그의 부친이 쉴레
에게 가한모독감을 일깨우게 했다. 감옥살이 경험은 쉴레에게 지워지지 않는 상
처를 남겨 그 후로 쉴레의 성격과 예술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그는 거의 철두철미 은둔적이 되었고 그리고 자신을 수도승이나 은둔자로 그린
초상화들을 그리기 시작했다.
형태의 왜곡과 작가의 내면세계를 자유롭게 표출해 나감으로서 자가가 자신들은
혼란스러우면서도 힘든 시대적 상황속에서 그들의 내면적 불안과 고뇌 비통등을
작품으로 보여주었다.
아내가 먼저 사망하고, 쉴레는 사흘 뒤인 10월 31일 밤에 아내 뒤를 따랐다.
쉴레가 최후로 남긴 작품은 죽어가는 아내를 그린 소묘였다.
사망때까지, 에곤 쉴레는 선과 색채를대가적인 솜씨로 다를수 있게 되었고, 3천여 점에
이르는 드로잉과 약 3백 점에이르는회화를 남겼다, 쉴레의 예술의 내용은 대단히 아름
답게 그려 져있다.
쉴레의 자화상은 밝혀진 것만으로도 100점이 넘는데, 이는 쉴레가 내면세계의
표출에 있어 자기표현을 중시했음을 의미한다.
쉴레가 표현하는 뒤틀어진 자아는 인간이다. 그러므로 자화상을 통한 내면의
추적은 나르시스적인 표현이 아니라 인간의 본질을 파헤치는 작업이다.
성적인 열정에 사로잡힌 도착증환자, 또는 비극적이며 신경질적인 화가로 불리기도
하는 쉴레는 어린소녀를 유혹하고 어린이들을 도덕적으로 타락케 했다는 죄명으로
감옥에 갇힌다.
아름답게 그려진 쉴레의 인물 형상은 단순히 에로틱한 것이 아니라
시각적으로 미학적으로 보아 하나의 이상화된 이미지이다.
우리가 그의 풍경화나 시내풍경을 시각적 통일에 방해받지 않는 선으로 보게 된다면,
자주 그것들이 기차유리창으로부터 들어오는 광경을 기록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것이다.
쉴레의풍경화와 시골풍경은 작업의 과정을 살펴보는데 가장 적절하다.
죽어가는 가을나무는 단지나무가 아니다.
자연일뿐 아니라 정신적 상태의 상징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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