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5월 23일 연중 제7주간 목요일
너희가 그리스도의 사람이라고 하여
너희에게 물 한 잔이라도 주는 사람은
반드시 자기의 상을 받을 것이다.
(마르코 9,41-50)
"Anyone who gives you a cup of water to drink because you belong to Christ, amen, I say to you, will surely not lose his reward.
말씀의 초대
자기 자신의 힘과 욕망에 사로잡히는 것을 경계하여야 한다. 하느님의 선하심과 자비하심을 핑계로 삼아 죄를 저질러도 다 용서해 주시리라는 생각은 욕망에 이끌려 죄에 죄를 쌓는 것일 뿐이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죄를 단호하게 물리칠 것을 가르치신다. 다른 이들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이 죄를 짓도록 방치하지 않고 몸의 일부를 잃어버리더라도 영혼 전체가 구원을 받는 것이 더 낫다고 말씀하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죄를 더 짓지 않고자 손과 발을 잘라 버리거나 눈을 빼 버리는 것이 낫다고 말씀하십니다. 언뜻 보면 우리에게 다소 위압감을 주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성경 말씀을 글자 그대로 해석하는 것은 위험한 발상입니다. 오리게네스 교부는 탁월한 신학적 통찰력과 경건한 삶으로 교회의 역사에 큰 영향을 끼친 인물입니다. 그는 죄를 짓지 않고 금욕적인 삶을 살고자 스스로 거세(去勢)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오히려 그것이 교회가 그를 성인(聖人)으로 공경하지 않는 이유 가운데 하나라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죄를 짓지 않으려고 실제 자기 몸의 일부를 없애는 것은 오늘 복음 말씀의 뜻을 잘못 알아들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복음 말씀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아프리카에서 원숭이를 잡는 방법은 이렇다고 합니다. 원숭이가 좋아하는 먹이를 나무 구멍에 넣어 둡니다. 그러면 원숭이는 그 안에 손을 집어넣고 먹이를 움켜쥡니다. 그러나 먹이를 움켜쥐면 구멍에서 주먹을 뺄 수 없게 됩니다. 먹이를 포기하면 되는데도 끝내 그것을 고집하다가 결국 잡히고 만다는 것입니다. 원숭이가 참 어리석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렇게 어리석은 원숭이가 우리와 닮은 게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재물에 대한 욕심이나 사람에 대한 욕심, 명예에 대한 집착 등으로 자신의 영원한 생명을 놓쳐 버리는 것은 아닌지요? 오늘 복음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작은 것들을 기꺼이 희생하고 감수하라는 가르침으로 알아들어야 합니다. 썩어 없어질 것들에 대한 집착으로 죄를 짓지 말라고 하시는 주님의 가르침입니다.
용서의 이유
-황태종 신부-
하느님은 한없이 자비하신 분이라서 언제나 우리 죄를 용서해 주시는 분이라고 믿고 있는 사람들에게 ‘네 손이 죄를 짓게 하거든 손을 잘라버리고 발이 죄를 짓게 하거든 그 발을 잘라버려라.’ 하고 말씀하시는 예수님이 무척이나 낯설게 다가올 것이다.
나약한 인간은 언제나 하느님의 자비에 기댈 수밖에 없다. 그러나 하느님의 자비는 자신의 죄를 깊이 통회하며 회개하려는 사람을 위한 것이지, 죄에서 자신을 돌이킬 생각 없이 죄 중에 머물며 자비의 혜택으로 면죄부를 받으려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 아니다. 집회서에서도 “‘죄를 지었어도 내게 아무 일도 없었지 않은가?’ 하지마라. 주님께서는 분노에 더디시기 때문이다.”(5,4)라고 경고하고 있다.
하느님의 용서는 회개를 전제로 한다. 회개하지 않으려는 자를 하느님께서는 용서하지 않으신다. 그것이 그의 영혼에 어떠한 도움도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은 하느님께서 자비로우시기에 아무렇게나 살아도 되는 사람들이 아니다. 오히려 그 크신 사랑에 보답하기 위해 늘 하느님께 마음을 향하고, 힘들고 어려워도 하느님께 믿음을 두고 바른길을 걷는, 세상의 빛과 소금 같은 사람이 되어야 하는 사명을 지니고 있다.
어렸을 때부터 저는 숫자에 상당히 강했습니다. 전화번호도 잘 외웠기에 굳이 수첩에 번호를 기록할 필요가 없었지요. 그래서인지 학창시절에도 제일 재미있고 자신 있는 과목은 수학이었습니다. 그런데 현재의 디지털 문화에 익숙해지다 보니 어느 순간 숫자에 가장 약한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지금도 눈을 감으면 기억나는 전화번호는 한두 개밖에 없고, 그렇게 좋아하던 수학이었지만 이제는 산수도 제대로 하지 못합니다.
저처럼 디지털 문화에 의지함으로 인해 기억력이 떨어진 사람을 ‘디지털 치매’에 걸린 사람이라고 하더군요. 그런데 주위를 살펴보면 이러한 치매에 걸린 사람들이 상당히 많은 듯합니다. 하긴 예전에는 한두 곡 정도는 나의 애창 노래라고 하면서 자신 있게 불렀지만, 이제는 노래방 기계가 없으면 전혀 부를 수가 없지요. 전화번호는 또 왜 이렇게 많은지, 제 휴대전화에 기록되어 있는 전화번호의 양이 무려 900여 개나 되더군요. 이렇게 많은 번호를 당연히 외울 수가 없어 휴대전화와 컴퓨터에 따로 저장을 하면서 더욱 더 기억력이 떨어지고 있습니다.
기계가 대신해준다는 이유로 나의 기억력을 놓아버리고 있는 우리들이 아닐까요? 그런데 우리들이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주님께서 우리에게 전해주신 사랑의 말씀입니다. 특히 악을 피하고 선을 피하라는 것. 그래야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는 사랑의 말씀을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됩니다. 하지만 그 말씀을 너무나 자주 잊어버립니다. 세상의 것들이 좋다고, 또한 복잡한 세상에서 어떻게 곧이곧대로 살 수 있냐면서 주님의 말씀과는 정반대로 살아갈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당신과 함께 영원한 생명을 누리길 원하십니다. 그래서 아주 강한 어조로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네 손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 버려라. 네 발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 버려라. 또 네 눈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빼 던져 버려라.”
섬뜩한 말씀입니다. 그러나 세상의 그 무엇보다도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 중요하기에 이렇게 자극적인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이 사랑의 말씀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자극적이고 세속적인 세상의 것들을 통해 점점 더 주님 말씀이 잊혀질 수 있기에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살아가야 합니다.
요즘 날씨를 보면서 봄의 문턱에 들어섰음을 느끼게 됩니다. 또 한 계절을 보내는 지금, 내 자신은 얼마나 주님과 함께 하고 있었는지를 반성하며 이 봄을 잘 맞이했으면 합니다.
인간은 강인함으로 인해 위대해지지만 약점을 통하지 않고서는 완성되지 않는다(은희경).
죄짓게 하는 자
-정순용-
오늘 복음은 여러 가지 주제들이 서로 연결되어 나옵니다. 하지만 이런 여러 주제들도, 33-37절에서 나오는 제자들의 서열 다툼과 38-41절에서 나오는 제자 공동체에 속하지 않는 이들에 대한 태도와 연결하여 볼 때, 결국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이 가져야 할 태도를 가르치려는 전체적 맥락을 따르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는 한 가지 주제만 다루겠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제자라면 공동체 안에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자, 즉 유혹하는 자는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던져지는 편이 낫다고 합니다. 차라리 물에 빠져 죽으라는 이 충격적인 말씀은 이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들을 일깨우기 위한 엄중한 경고의 말씀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함부로 할 수 있다고 여기는 이들, 즉 자신보다 힘이 약한 이들, 어린이들, 자신이 좌지우지 할 수 있는 손아랫사람들, 부하 직원들, 어리석거나 능력이 부족한 이들에 대해 함부로 대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렇듯 우리가 공동체 안에서 가장 작은 이들에 대해 옳지 못한 태도로 대하는 것을 오늘 복음은 지적하는 것입니다. 공공연하게 드러내지는 않을지라도 무언가 부족한 이웃을 비웃고, 가소롭게 여기고 무시하는 자세는 예수님이 가장 경계하시는 것이라는 걸 잊지 맙시다.
주님은 나의 방패
- 김인순 수녀-
저에 대한 주님의 사랑이 제 주변 사람들한테까지 미치는 것을 알았습니다. 제가 주님께 얼마나 소중히 여겨지는지 생각하니 마음이 벅차오릅니다. 주님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울 줄밖에 모르는 작은 아이인 저를 위해 모든 것을 베풀어 주십니다. 저는 주님 곁에 작은이로 머물러 있기만 하면 됩니다. 당신을 믿고 따르는 사람뿐 아니라 그와 친교를 나누는 사람한테까지 그 사랑을 펼치시는 주님. 주님의 사랑 속에 머무는 저 또한 주님이 보살피시는 사람들을 사랑하라는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이렇듯 저를 사랑하시는 주님을 미처 알지 못했을 적엔 죄의 유혹에 대해 엄중하게 경고하시는 오늘의 말씀이 너무 강해서 두려웠습니다. 주님을 거스르고 자신을 찾는 습관을 버리지 못하고 날마다 유혹에 흔들리며 살아가는 약함을 지닌 제가 따르기엔 불가능한 말씀으로 들렸으니까요.
그런데 저를 사랑하시다 못해 제 주변 사람들한테까지 축복을 베푸시는 주님의 큰 사랑을 알아듣게 된 오늘은 달랐습니다. 제가 죄를 지어 당신 곁을 떠나는 불행을 겪기를 바리지 않으시는 주님의 마음이 느껴집니다. 주님은 강한 표현으로 저를 당신 곁에서 안전하게 살기를 바라시는 간절한 마음을 에둘러 표현하고 계신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을 더 깊이 느낄수록 죄를 지어 주님과 멀어지는 것이 얼마나 큰 아픔이고 두려움인지 깨달아 죄를 멀리하게 될 것입니다. 또한 주님의 사랑을 받는 이웃까지 사랑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될 것입니다.
사랑을 테스트하지 말라!
-김찬선신부-
“‘죄를 지었어도 내게 아무 일도 없었지 않은가?’ 하지 마라. 주님께서는 분노에 더디시기 때문이다. ‘그분의 인자함이 크시니, 수많은 내 죄악이 속죄받으리라.’고 말하지 마라. 정녕 자비도, 분노도 다 그분께 있고, 그분의 진노가 죄인들 위에 머무르리라.”
사춘기의 아이들, 특히 부모 없이 청소년 시설에 사는 아이들과 살다보면 사랑을 시험받는 경우가 자주 있습니다. 착하던 아이가 어느 날부턴가 탈선을 하여 말썽을 부리고, 어깃장을 놓거나 반항을 하여 부모 또는 보모들을 당황케 합니다. 이는 물론 사춘기가 되어 인생의 방황을 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더 이상 종교나 규범이나 부모의 통제를 벗어나 자유인으로서 자기 마음대로 하고 싶은 마음의 발로이기도 하지만 탈선과 반항을 통해서 사랑을 테스트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말하자면, 나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내가 이렇게 못된 짓을 해도 나를 사랑하는지 테스트하는 것입니다. 특히, 사랑을 상대적으로 못 받았다고 생각하는 아이들, 예를 들어 가정에서는 사랑을 많이 받은 첫 째에 비해 둘째가 이런 테스트를 더 많이 또는 심하게 합니다. 자기도 사랑받기 위해, 아니 언니보다 더 사랑받기 위해 언니보다 더 잘하려 했고 또 자기 딴에는 잘 했는데도 부모가 언니를 더 사랑한다고 생각되면 이제는 반대로 일부러 나쁜 짓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정말 자기를 사랑하는지 테스트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릇 대부분의 말썽과 반항은 한 편으로는 사랑의 테스트요 다른 한 편으로는 사랑받고 싶은 마음의 표시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테스트 안에는 사랑에 대한 믿음이 어느 정도 있는 것입니다. 왜냐면 사랑이 전혀 없다고 생각하면 테스트할 필요가 없을 것이며, 감히 테스트하지도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남이나 계부모에게 이렇게 하겠습니까? 그랬다가는 바로 쫓겨날 것이라고 생각하기에 그러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대부분의 못된 짓에는 어떤 믿음이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못된 짓을 해도 자기가 절단나지는 않을 것이라는 믿음, 하느님이 자기를 끝내 버리지 못하실 것이라는 믿음 말입니다.
저에게도 그런 믿음이 있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나의 죄가 아무리 커도 그 죄보다 크기에 나를 용서하실 것이라는 믿음, 하느님의 사랑은 내가 아무리 큰 죄를 져도 결코 나를 버리지 못하실 것이라는 믿음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제가 죄를 짓는 것은 오늘 집회서 말씀처럼 이 하느님의 사랑을 믿고 죄를 짓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믿음이 틀린 것은 아닙니다. 하느님은 정녕 나를 사랑하시기에 아무리 큰 죄를 져도 용서하시고, 아무리 큰 죄를 져도 나를 버리지 못하십니다.
그러나 이것도 알아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랑하시지만 혼을 내신다는 것 말입니다. 벌을 내리시거나 혼을 내시는 것이 사랑이라는 것 말입니다. 말하자면 사랑의 매인 것이지요.
그러므로 하느님 사랑에 대한 오판이 없어야 합니다. 하느님 사랑에는 당근만 있지 채찍이 없다는 오판 말입니다. 그리고 오늘 집회서의 “정녕 자비도, 분노도 다 그분께 있고, 그분의 진노가 죄인들 위에 머무르리라.”는 말씀도 마음에 새겨야 할 것입니다.
얼마 전에 고등학교 동창으로부터 전화 한 통화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이 친구로부터 “왜 이렇게 전화 통화하기가 힘드니? 연락도 하지 않고, 또 연락도 잘 되지 않으니까 기분이 안 좋더라. 이제 서로 연락하면서 좀 살자.”라는 말을 들었지요. 하긴 친구들이 먼저 제게 전화를 했었지, 제가 먼저 전화를 하고 만남을 가졌던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도 스스로는 이렇게 이야기하면서 위로를 삼지요.
‘너무 바빠서 어쩔 수가 없어. 내 다이어리에 빼곡한 일정들을 봐. 이렇게 바쁜데 어떻게 먼저 연락을 할 수가 있겠어?’
그런데 책상 위에서 놓여 있는 휴대전화 요금 통지서를 보면서 반성을 하게 되었습니다. 전화요금이 *만원. 시간이 없다면서 친구들에게 전화를 하지 않으면서도, 다른 사람들에게는 전화를 많이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가장 쉬운 핑계인 ‘시간이 없다’고 말하면서요.
사실 전화를 하는데 그렇게 오랜 시간이 드는 것도 아닙니다. 5분 이내의 통화만으로도 충분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정도의 시간도 뺄 수 없을까요? 아니지요. 아무리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 할지라도 하루에 5분 이상의 시간은 충분히 낼 수가 있습니다.
문제는 바로 내 마음이었습니다. 스스로 여유를 갖지 못하니 가까워야 할 사람들에게 시간을 내지 못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이렇게 쉽게 전화에 손을 대지 못하니 점점 거리가 멀어지는 것이고요.
내 안에 갇혀 있으면 다른 사람을 바라볼 여유를 가질 수가 없지요.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자주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강조하면서 말씀하셨습니다. 특히 오늘 복음에서는 약간 섬뜩한 말씀까지 하십니다.
“나를 믿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자는,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던져지는 편이 오히려 낫다.”
그만큼 남을 죄짓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강조하시는 것이지요. 그런데 문제는 남을 죄짓게 하는 경우가 생기더라는 것입니다. 바로 내 안에 갇혀 있고, 다른 사람들에 대한 배려 없는 행동으로 인해서 나도 모르게 죄를 짓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앞서 연락하지 않는 저의 무관심 때문에 친구가 ‘기분이 좋지 않다’라는 부정적인 생각을 갖게 한 것처럼, 우리들의 무관심과 나만 생각하는 이기심으로 충분히 남을 죄짓게 만들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잘못을 절대로 저질러서는 안 된다고, 주님께서는 그럴 바에는 차라리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던져지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소금이 짠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그 맛을 내겠느냐고 하십니다. 즉, 소금이 짠맛을 잃으면 소금이 아닌 것처럼, 우리 신앙인들 마음속에 사랑을 잃으면 이미 신앙인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따라서 이웃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는 우리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을 믿고 따르는 신앙인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너희는 마음에 소금을 간직하고 서로 평화롭게 지내라.”
어,너냐? .......
-김상조 신부-
한 중년 여인이 심장마비로 병원에 실려갔다... 수술대 위에서 거의 죽음 직전에 이르렀을 때 여인은 신을 만났다. 이제 끝이냐고 물었더니 신은 아니라고 하면서 앞으로 30∼40년은 더 살 것이라고 말했다.
수술이 성공하고 차차 낫게 되자 이왕 병원에 온 김에 얼굴을 고치고 몸도 다듬었다.
얼굴 주름살을 팽팽하게 하고 지방도 제거하고 가슴도 키우고 아랫배도 집어넣었다. 머리도 염색했다. 앞으로 30∼40년은 더 살 것이니 이왕이면 젊고 예쁘게 사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마지막 수술이 끝나고 병원에서 나오다가 달려오는 앰뷸런스에 치여 사망했다. 신 앞에 서게 되자 이렇게 물었다. “제가 30∼40년은 더 살 거라고 했쟎아요?”
신이 대답했다.
“어, 너냐? 미안하다! 너무 많이 뜯어고쳐서 못 알아봤다!”
“손이 죄를 짓게 하거든 그 손을 찍어버려라” 끔찍한 말이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면 영원한 불구덩이에 던져질 것이다. 손을 잘라내고 안 잘라내고는 누가 해주는 것이 아니다. 내가 해야 할 일이다. 죄를 짓고 안 짓는 것도 누가 그렇게 시켜서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는 것이다. 오늘이 즐겁고 안 즐거운 것은 누가 그렇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렇게 만드는 것이다.
누군가를 탓하기 전에 내 스스로 내 운명을 개척하고 나의 삶, 나의 하루를 보다 더 가치있고 행복하게 만들려는 의지가 있느냐가 더 중요하다. 그런 의지가 있다면, 보다 적극적으로 오늘을 내것으로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운명은 정해진 것이 아니라, 만드는 것이다.
그나 저나 소개된 유머에 나오는 여인의 운명을 바꾼 쪽은 누굴까요? 신일까요? 그 여인 당사자일까요???^+++^;
신앙인의 짠 맛
-조명준 신부-
“네 손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네 발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네 눈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예수님의 말씀대로라면 신앙인들 중에 제대로 성한 몸을 가지고 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의 의도는 무엇일까요? 아마도 ‘항상 마음의 지향을 깨끗이 하고 그것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라’는 뜻을 강조하기 위한 수사학적 표현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의도는 오늘 복음 마지막 부분의 “너희는 마음에 소금을 간직하라”는 말씀과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소금의 짠 맛’은 음식이 상하지 않도록 보존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처럼 마음과 영혼의 부패를 막기 위한 신앙인들이 가져야 할 ‘짠 맛’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우리 자신이 ‘하느님의 자녀’임을 항상 기억하는 것입니다. 오늘 독서에 나오는 부자들에 대한 경고는 바로 자신들이 하느님의 자녀임을 잊고 이웃의 고통에 대해 무관심한 이들을 향한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한 형제자매임을 기억할 때 우리는 서로 평화롭게 지낼 수 있을 것입니다.
행복한 소경
- 이상각 신부-
50년 동안 예수님의 오상을 간직한 채 살았던 비오 신부님은 죄인들을 위해 자신을 희생 제물로 바치며 수많은 사람들에게 영적·육체적 치유를 가져다주었다. 비오 신부님을 통해 치유를 받은 사람의 수는 수백 만을 헤아렸다. 그러나 비오 신부님을 만난 병자들이 모두 다 치유를 받았던 것은 아니다. 예수께서도 당신을 찾아오는 모든 병자를 다 고쳐주지는 않으셨다. 육체의 병이 치유되면 이전보다 더 많은 죄를 지어 영혼이 타락할 수 있기 때문이다. 몇 년 전 소경이 된 사람을 그의 친구들이 비오 신부님에게 데리고 와서는 고쳐 달라고 청했다. 비오 신부님은 그를 진지하게 살피더니 말했다. “여기 지상에서 행복해지고 싶은가? 그러면 저 세상에서는 불행해질 것이네. 스스로 선택하게.” 이 말을 들은 소경은 한동안 고민했다. 얼마 후 그는 결심하고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비오 신부님, 그곳에서 행복했으면 합니다.” 비오 신부님은 그를 위로하고 쓰다듬었다. 자신의 무거운 십자가를 지기로 한 그는 비오 신부님의 축복을 받고 힘을 얻어 떠났다. 행복한 소경이 된 그는 비오 신부의 전구로 이 은총받은 카푸친수도회 신부 곁에서 살았다.(「오상을 받은 우리 시대의 형제」 참조)
소경에게 볼 수 있는 것보다 더 절실하고 기쁜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소경은 그러한 기쁨을 포기할 줄 아는 용기와 믿음을 가졌다. 지금 그는 분명 천국의 영원한 행복을 누리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믿음과 희망이 있기에 분명 지상에서도 감사와 기쁨 속에서 행복한 소경으로 살았을 것이다.
“소금은 좋은 것이다. 그러나 소금이 짠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그 맛을 내겠느냐? 너희는 마음에 소금을 간직하고 서로 평화롭게 지내라.”
-양승국신부-
<어떻게 해서든 무너지지 말아야>
늦었지만 ‘불후의 명작’ 박경리 선생님의 ‘토지’를 한번 읽어보려고 합니다. 선생님은 방대한 분량의 대하소설 ‘토지’를 완간한 이후, ‘이제 다 이루었다’고 하셨답니다.
그리고는 남아있던 생의 에너지를 오직 불우한 생명들을 돌보고 헌신하셨습니다. 모든 것을 다 이루신 선생님은 드디어 ‘작은 토지’를 떠나 ‘더 광활한 토지’로 건너가셨습니다.
선생님이 생전에 남기신 말씀은 늘 우리들 가슴에 메아리칩니다.
“가장 순수하고 밀도가 짙은 사랑은 허덕이고 못 먹는 것, 생명을 잃은 것에 대한 연민이다.”
이 땅에 대한 연민, 우리 민족에 대한 자긍심, 우리 문화에 대한 관심, 이 땅 위에 살아가는 사람에 대한 사랑, 생명에 대한 존중에 있어서 선생님처럼 깊이가 있었던 분이 다시 또 있을까요?
그 어떤 생명이든 아직 생명의 숨결이 붙어있다면 모두 존중받아야 합니다. 그 어떤 목숨이든 아직 영위되고 있다면 사랑받아야 합니다.
중병을 안고 태어난 신생아들만 돌보는 의사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참으로 가슴이 아파왔습니다. 출생과 더불어 시한부 인생을 살아가는 아기들도 있답니다. 태어남과 더불어 부모와 격리된 채 끔찍한 고통 속에 살아가는 아기들입니다.
그 아기들, 부모들과 지낸 시간보다 의사인 자기와 보낸 시간이 더 많다고 하십니다. 그 아기들을 매일 대하는 선생님, 너무나 가엾고 너무나 안타까워 어떻게 해서든 한번 살려보려고 기를 쓰신답니다. 조금만이라도 더 생명을 연장시켜보려고 온갖 정성을 다해본답니다.
채 피기도 전에 져버리는 여린 꽃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떠올리며 마치 자기 자식이 떠난 것처럼 눈물 글썽이는 선생님의 모습이 꽃처럼 아름다워 보였습니다.
선생님의 삶은 비록 작고 희미하지만 어두운 세상 꼭대기에 세워진 작은 등불 같았습니다. 짠맛을 잃어버린 이 세상의 소금처럼 소중해보였습니다.
오늘 복음 말미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향해 ‘소금’의 역할에 충실할 것을 당부하고 계십니다.
“소금은 좋은 것이다. 그러나 소금이 짠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그 맛을 내겠느냐? 너희는 마음에 소금을 간직하고 서로 평화롭게 지내라.”
소금, 생각할수록 고마운 조미료입니다. 아직도 열차만 탔다하면 자주 사먹는 삶은 계란, 소금 없이 그냥 한번 드셔보셨습니까? 정말 먹기 힘듭니다. 살짝 소금을 쳐서 먹어야 ‘찐 계란의 절묘한 맛’이 살아납니다. 아무리 정성껏 끓인 비싼 소꼬리곰탕이라 할지라도 소금으로 간을 하지 않으면 심심해서 먹을 수가 없습니다.
음식을 만드는 데 있어서 비록 눈에 보이지 않지만, 소금의 역할은 아주 지대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삶 역시 그래야겠지요. 확연히 눈에 띄지는 않지만, 기본에 충실한 삶, 남들이 보건 말건 묵묵히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는 삶, 비록 손해 보는 것처럼 여겨지지만 편법을 쓰지 않고 정도를 지켜나가는 일, 그것이 바로 소금으로서의 삶이요, 주님께서 원하시는 삶이겠지요.
지금 우리의 시대, 가장 큰 문제 가운데 하나가 생명경시 풍조입니다. 경제에만 치중하다보니 소외된 계층에 대한 인권은 뒷전입니다. 오로지 한 목표를 향해 내 살길만 챙기는데 혈안이 되다보니 뒤처진 이웃들의 고통에는 별 관심이 없습니다.
이런 시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중차대한 과제 하나는 생명 운동입니다. 그 어떤 생명이든 모두가 하느님의 작품으로 차별 없이 대우받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생명의 숨결이 이미 다 빠져나간 존재, 아무런 의미가 없었습니다. 순식간에 부패하고 순식간에 소멸의 단계로 넘어가더군요. 결국 가장 소중한 것은 생명입니다. 특히 관심을 기울여야 할 생명은 꺼져가는 희미한 생명입니다.
어떻게 해서든 살아있어야 합니다. 어떻게 해서든 무너지지 말아야 합니다. 아무리 어둠이 깊어도, 아무리 상처가 심해도 상관없습니다. 어떻게 해서든 일어서려고 몇 번이고 나를 일으켜 세울 때, 우리도 모르는 사이 하느님 자비의 손길이 살포시 우리 어깨위에 내려앉을 것입니다.
흐르게 하라
-김찬선신부-
성북동 수도원에 살던 학생 때
아침 일찍 일어나 늘 수도원 근처를 돌며 운동을 하였습니다.
그러다 심사가 뒤틀린 날이면
성북동의 부잣집들과 멋진 정원을 보며
‘에잇, 도둑놈들!’하고 아침부터 속으로 욕을 하였습니다.
나중에 사제가 되고 난 뒤
그렇게 욕하던 부자들의 속사정을 알게 되었습니다.
알고 보니 다 불쌍하고
어찌 보면 더 불행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다 그런 거 아니고
문제 있는 사람만 저를 찾아왔겠지만
(문제없는 사람 절 찾아올 리 없겠지요)
외부와 단절된 성채와 같은 집에서
그들은 가족 간에도 지독한 단절과 고독을 살고 있었습니다.
사회적 지위와 체면 때문에 누구한테도 얘기 못하고
그래서 저와 같은 사람에게만 털어놓을 수밖에 없는
아픔을 안고 삽니다.
산에 오름은 내려가기 위함인데
이들은 오를 수 있는 만큼 높이 올랐지만
오르기만 하고 내려갈 줄 모르기에
마치 바벨탑을 높이 쌓은 사람들이 말이 통하지 않게 된 것처럼
모든 소통과 나눔이 단절된 것입니다.
이들은 중요한 것을 모르는 것입니다.
참 행복의 천국은 높은 곳에 있지 않고
사람들 가운데 있다는 것을 모르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보라, 여기에 있다, 또는 저기에 있다고 사람들이 말하지 않을 것이다.
보라, 하느님 나라는 너희 가운데 있다.”(루카 17,21)
이들은 알아야 했습니다.
재물은 하느님께서 주신 것이고 주시는 것임을.
지위도 하느님께서 주신 것이고 주시는 것임을.
재능도 하느님께서 주신 것이고 주시는 것임을.
이들은 또 알아야 했습니다.
하느님께서 재물을 주신 것은 나누라고 주신 것임을.
하느님께서 높은 지위를 주신 것은 널리 보고 살피라고 주신 것임을.
하느님께서 재능을 주신 것은 봉사하라고 주신 것임을.
이들은 또 알아야 했습니다.
물이 흐르지 않으면 썩을 뿐 아니라
고인 물을 내보내지 않으면 새 물이 들어오지 않음을.
자기가 가진 것은 주기 위해 가진 것이며,
줄 때 행복하고
줄 때 또 받음을.
그러므로 굳이 천민자본주의나
노불리스 오블리제를 거창하게 얘기할 필요도 없이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을 위해서
부자들은 자신이 형성한 부를 나누어야 합니다.
그러하지 않을 때
재물은 썩고
옷은 좀 먹으며
재난이 닥쳐올 때 이것들이 그들을 고발할 것임을
야고보서는 경고합니다
소금이 짠맛을 잃으면... -이병훈 신부-
소금은 맛있는 음식을 만드는데 있어서 없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고기를 구워먹을 때도, 장을 담글 때도, 국을 끓일 때도, 생선을 보관할 때도 소금은 쓰입니다. 소금을 뿌려서 맛을 맞추는 것을 간이라고 합니다. 국 같은 곳에는 간이 금방 들지만 젓갈류나 생선 또는 배추 김치등은 오래 둘수록 간이 깊이 배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국 같은 것에는 “간이 들었다”라고 하고, 오래 두어야하는 것은 “간이 배였다”라고 하는가 봅니다.
오래 되어 묵은 맛이 배여나올수록 맛있습니다. 간장, 된장, 고추장, 홍어, 막거리 등이 그렇습니다. 오래 되어 묵은 맛이 배여나올수록 좋은 것 중에서 최고는 좋은 친구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오래된 친구와 이어주는 우정은 아무것과도 바꿀 수 없습니다.
옛날 서양 사람들에게도 소금은 음식에 맛을 들이는 것으로 나오기도 하지만, 변치않는 우정, 성실, 맹세의 상징으로도 나옵니다. 그래서 성서에서도 “이스라엘의 하느님 야훼께서는 다윗과 소금으로 계약을 맺으시고”(역하 13, 5)라고 합니다. 그리고 불에 태워 바치는 “번제물 위에 소금을 뿌려 야훼께 바쳐야한다”(에제 43,24)고 하니, 하느님도 싱거운 음식은 별로 입에 맞지 않으셨나봅니다.
하여튼 제물 위에 뿌리는 소금은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 맺는 계약의 의미를 가지면서,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변함없는 우정과 성실을 나타냅니다. 하느님과 인간이 제물 위에 소금을 뿌려 계약을 맺은 역사가 수천년이 되니, 간이 배여도 아주 깊이 배여 있고, 묵은 맛도 그 많큼이나 좋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그리스도의 사람이기 때문에 너희에게 마실 물을 한잔이라도 주는 이는 자기가 받을 상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 라고 하시면서 제자들에 대한 깊은 우정을 표현하십니다. 친구에게 좋은 것은 나에게도 좋은 것이기 때문이겠지요.
그리고 “나를 믿는 이 작인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자는, 차라리 죽는게 낫다”라고 하시면서 친구 사이를 갈라 놓는 이들에게 제자들에 대한 깊은 우정을 과시하십니다. 친구에게 나쁜 것은 나에게도 나쁜 것이기 때문이겠지요.
이렇게 오래된 좋은 친구 사이에 배여나는 깊은 우정을 나타내는 소금은 매우 좋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 소금이 짠맛을 잃으며, 다시말하면 그 우정이 한쪽의 탓으로 깨어지면 어떻게 그 묵은 맛을 다시 낼 수있겠습니까?
오래 묵은 것일수록 상하게 되면 그 맛은 아주 않좋은 것입니다. 우정을 깨어버린 쪽도 우정이 깨어진 쪽도 서로 간에 큰 상처를 남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마음에 소금을 간직하고 서로 평화롭게 지내라고 당부하시는 것이겠지요. 소금에 대해서 집회서에서는 이렇게도 이야기 합니다. “사람이 사는 데 제일 필요한 것은 물과 불과 쇠와 소금이며, 밀가루와 우유와 꿀, 그리고, 포도즙과 기름과 의복이다. 이 모든 것이 착한 사람들에게는 좋은 것이 되고 악인들에게는 악한 물건이 된다.”(집회 39,26)
아무리 좋은 것도 좋은 사람이 사용하면 좋은 것이지만, 악인이 사용하면 악한 것이 된다는 말입니다. 좋은 사람들 간의 우정은 사람들의 부러움을 사는 일이지만, 폭력을 행사하는 사람들 간에 이야기하는 의리라는 것은 보복을 연상케하는 것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재물들은 다른 이들과 나누어 쓸 때는 축복이 될 것이지만, 다른 이들의 아우성을 외면할때는 녹이 슬어, 우리들을 고발하는 증거가 된다고 말합니다. 이렇게 되면 마지막날 예수님께서 젓가락으로 맛을 한번 보시고는 젓가락을 놓고 한마디 하겠지요? “사랑이 식은 게지”
예수님 때문에 다른 사람들과의 우정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깊은 우정의 묵은 맛을 지켜낼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그 맛을 지니고 있는 사람은 마지막날에 예수님께서 젓가락으로 맛을 한번 보시고는 숟가락까지 드시면서 한마디 하시겠지요? “그래! 이 맛이야!”....................◆
올바르게 사는 법
-이철구 신부-
올바르게 살아가기 힘든 세상입니다. 수많은 관계 속에서 나만 올바르고 정직하고 양심적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약육강식의 세상에서 살아 남기 위해서 치열한 생존 경쟁을 해야 합니다. 속고 속이면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야 하며 타인을 밟고 일어서야 합니다. 때론 양심을 지킨다는 것이 사치스럽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런데 나로 인해 누군가 죄를 짓게 된다면 오늘 복음 말씀처럼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던져지는 편이 오히려 낫습니다. 그렇다면 이 세상에서 살아 있을 사람이 있겠습니까? 치열하게 살아가는 세상 속에서 그 누가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우리의 결단이 필요합니다. 죄를 짓고, 죄를 짓게 하는 것의 기준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기 전에 하느님 편에서 하느님 뜻대로 살아갈 것을 다짐하는 나의 결단이 필요합니다. 어쩔 수 없다는 말로 자신을 합리화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 사랑의 양심에 따라 살아갈 것을 다짐하고 언젠가 내가 사랑 자체가 되기를 희망해야 합니다.
너희는 마음에 소금을 간직하고
-양창순-
◆영화 ‘비포 선셋’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마어마한 금액의 복권에 당첨된 사람과 갑작스러운 사고로 커다란 장애를 입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후로 두 사람의 인생이 얼마나 달라졌을지 궁금하시죠? 하지만 놀랍게도 그들의 인생은 별로 달라진 것이 없었다고 합니다. 복권에 당첨된 비비 꼬이고 우울한 사람은 여전히 우울하고 꼬인 채로 인생을 살아가고, 장애를 입은 명랑한 사람은 여전히 유쾌하고 명랑하게 살아가고 있었기 때문이죠. 그리하여 ‘인간의 성격은 변하지 않는다’가 영화의 결론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정신과 의사로 일하는 동안 제가 얻은 결론도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누구에게나 변화는 거의 죽기보다 어려운 일입니다. 하루에 열두 번씩 “이대론 안 돼. 난 변화해야 해! 그래야 살아 남을 수 있어!” 하면서 비명을 질러대지만 그때뿐, 실제로 변화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우리에게 변화의 기적을 체험할 수 있게 하시는 분은 오직 한 분, 하느님뿐이십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마음을 돌이키실 때만 우린 변화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온전히 하느님께 의지하며 기도드리는 수밖에 없습니다. 모든 죄의 유혹에서 우리를 건지시고 우리의 삶을 극적으로 돌이켜 주시기를, 우리가 진정 소금의 짠맛을 잃지 않고 인생이라는 긴 험로를 무사히 걸어갈 수 있기를 기도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어쩌면 우린 스스로 “난 죄나 악에 한 발을 걸치고 사는 사람이 아니야. 그런 점에선 변하고 말고 할 것도 없어” 하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별것 아닌 어리석은 말들, 눈에도 띄지 않는 작은 충돌들, 그다지 해가 될 것도 없는 사소한 습관들이 모여 결국 우리를 때로 악의 길로 이끈다는 사실마저 부정할 순 없겠지요. 그와 같은 낭패를 당하지 않는 길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너희는 마음에 소금을 간직하라”는 예수님의 엄중하신 말씀을 기억하며 기도를 잊지 않는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에 까지 함께 가는 것
-이찬홍 신부-
탈무드에 이런 예화가 소개됩니다.
“어느 날, 왕이 한 사람에게 전령을 보내어 즉시 대령할 것을 명령했다.
그런데, 이 사람에게는 세 명의 친구가 있었는데, 그는 첫 번째 친구를 가장 소중히 여기고 있어, 그 친구가 자기의 가장 좋은 친구라고 여기고 있었다.
두 번째 친구 역시 사랑하고 있으나 첫 번째 친구처럼 소중하게 여기고 있지는 않았으며, 세 번째 친구도 친구이기는 했지만 별로 큰 관심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왕의 부름을 받자 그는 자기가 어떤 나쁜 짓이라도 하여 벌을 받는 것이 아닌가 하여 무서웠다. 그래서 세 명의 친구들에게 함께 가달라고 부탁을 했다.
그는 먼저 제일 소중히 여기고 있는 친구에게 함께 가 줄 수 없겠느냐고 부탁했지만, 그 친구는 아무 이유도 말하지 않고 거절했다.
그래서 두 번째 친구에게 부탁하였더니, 궁전 문 앞까지는 함께 가줄 수 있지만 그 이상은 갈 수 없다고 거절하였다.
다음 세 번째 친구에게 부탁하자.
‘그러지, 내가 함께 가주겠네, 자네는 아무런 나쁜 짓도 하지 않았으니 조금도 두려워할 것이 없네, 내가 함께 가서 임금님께 잘 말씀드려 주겠네.’ 하고 쾌히 응해 주었다.
왜 세 명의 친구들은 각기 그렇게 말했을까?
첫 번째 친구란 곧 재산을 말하는 것이다.
사람이 아무리 돈을 소중히 여기고 사랑하더라도 죽을 때에는 그대로 남겨두고 가야하는 것이다.
두 번째 친구란 친척을 말하는 것이다.
친척은 무덤까지도 따라가 주지만 그를 그곳에 혼자 남겨두고 돌아가 버린다.
세 번째 친구는 곧 선행을 말하는 것이다.
선행은, 평소에는 별로 눈에 띄지 않지만 죽은 뒤에는 영원히 그와 함께 남아 있기 마련이다.”
그렇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선행의 중요성을 알려줍니다.
“너희가 그리스도의 사람이기 때문에 너희에게 마실 물 한잔이라도 주는 이는, 자기가 받을 상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
먼 훗날 하느님 나라에 갔을 때, 하느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실까?
교무금을 얼마나 냈냐고 물으실까요?
교회 행사 때마다 얼마나 많이 돌아보고, 얼마만큼의 희사를 했냐고 물으실까요?
저에게는 ‘성당을 몇 개나 지었느냐?’ ‘신자 분들에게 얼마나 많은 재물을 봉헌하라고 했냐?’고 물으실까요?
또는 왜 그렇게 악하게 살았냐? 왜 그렇게 시기, 질투하며 다투고 그토록 많은 죄를 지었니? 물으실까요?
많은 묵상을 해 보았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하고 또 생각해도 제가 너무 안일하게 생각해서 그런지,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물으시지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오직, ‘너는 나를 위해 무엇을 했니?’ ‘내가 헐벗고 굶주릴 때 뿐만 아니라, 바로 너의 도움을 필요로 할 때, 너만이 나를 도와 줄 수 있을 때, 어떻게 나를 맞이하였니?’ 라고 물으시지 않을까 묵상해 봅니다.
곧, 얼마나 많은 죄를 짓고, 얼마나 그릇되게 살았냐고 묻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더 사랑했고, 얼마나 더 많이 도와주고, 얼마나 더 자주 남을 위해 기도해 주었냐고 물으실 것입니다.
남을 도와주는 것! 남에게 필요한 것을 주는 것!
이는 분명, 예수님의 말씀처럼 선행입니다.
그러나, 선행은 물질적인 측면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물론, 돈이 없는 분에게 돈을 나눠주며 도와주는 것은 필요합니다.
하지만, 요즘은 물질적으로 문제가 없지만, 아니 우리보다 더 많이 가지고 있지만,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물질적인 물이 아니라, 영적인 물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갈수록 많아지고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어떻게 도와줄 수 있을까요?
그들에게 베풀 수 있는 선행은 무엇일까요?
바로 기도입니다.
영적으로 헐벗고, 굶주리고 있는 사람에게 다가가 그 사람과 함께, 그 사람을 위해 기도해주는 것 역시... 하느님의 이름으로 사랑을 베풀어 주는 것 역시 중요하고 필요한 선행입니다.
오직, 우리만 할 수 있고, 우리가 해야 하는 또 다른 이름의 선행입니다.
이 선행 또한 물질적인 도움, 선행과 마찬가지로, 사라지지 않고 하느님 앞에 나아갔을 때, 우리 곁에 꼭 붙어 있을 것입니다.
문득, 심수봉님의 “수백만 송이 장미” 라는 노래가 새롭게 다가옵니다.
“먼 옛날 어느 별에서 내가 세상에 나올 때,
사랑을 주고 오라는 작은 음성 하나 들었지.
사랑을 할 때만 피는 꽃, 백만 송이 피어오라는
진실한 사랑을 할 때만 피어나는 사랑의 장미
미워하는, 미워하는 마음 없이
아낌없이, 아낌없이 사랑을 주기만 할 때,
수백만 송이 백만 송이 백만 송이 꽃은 피고
그립고 아름다운 내 별 나라로 갈 수 있다네.
미워하는, 미워하는 마음 없이
아낌없이, 아낌없이 사랑을 주기만 할 때
수백만 송이 백만 송이 백만 송이 꽃은 피고
그립고 아름다운 내 별 나라로 갈 수 있다네.
진실한 사랑은 뭔가 괴로운 눈물 흘렸네.
냉정한 사람 많았던 너무나 슬픈 세상이었기에
수많은 세월 흐른 뒤 자기의 생명까지 모두 다 준
빛처럼 홀연히 나타난 그런 사랑 나를 안았네.
미워하는, 미워하는 마음 없이
아낌없이, 아낌없이 사랑을 주기만 할 때
수백만 송이 백만 송이 백만 송이 꽃은 피고
그립고 아름다운 내 별 나라로 갈 수 있다네.”
“내가 무엇을 잘못했단 말이오. 다 당신이 어리석어서 빚어진 일 아니오?” -원정학 신부-
한 TV프로에서 서로의 논쟁에 대한 법적 판결을 다루는 과정에서 주로 표현되는 말입니다. 그 중에 한 이야기를 들어보면, 한 점원이 계산을 잘못해서 수십만원의 옷을 몇 만원으로 카드결제를 받았습니다. 손님은 그 잘못된 금액을 보고서도 모른 채하고 유유히 그 매장을 떠났습니다. 결국 이 사실을 알게 된 점원과 손님과의 싸움은 법정 문제로 까지 확대되었던 것입니다. 저는 이 내용을 보면서 과연 어떤 판결이 나올까? 궁금하기도 했지만 “왜 그렇게 까지 되었을까?”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내내 떠나지 않았습니다. 마음으로 부터는 분명 자신의 실수나 부끄러운 점을 알고 있으면서도 무엇이 그들을 화나게 하고 고집스럽게 만들었을까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나를 믿는 이는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당신께서 그들의 삶을 보장해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반면 내 제자들에게 죄를 짓게 하거나 자신들 스스로 죄를 짓는다면 ‘꺼지지 않는 불지옥’에 떨어질 것이라고 경고하십니다. 여기서 말하는 ‘죄’는 법률적 문제가 아니라 미움, 시기, 질투, 증오에 따른 도덕적 행위에 대한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설령 꿈이라 하더라도 누군가를 미워했거나, 잘못을 저질렀다면 다음날 직접 그에게 가서 정중히 사과를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만일 내가 법적인 문제만 피할 수 있다면, 아무런 죄책감 없이 떳떳하다는 식의 태도를 보일 때, 결국 서로에게 상처를 남긴 채 ‘미움’과 ‘복수’만이 남는 삭막하고 어지러운 세상을 만들고 마는 결과를 낳게 될 것입니다. 오늘 복음 말씀이 죄를 짓거든 눈을 빼어버리고, 손목을 자르고 라는 끔찍한 모습을 연상하는 표현을 썼지만, 자신의 잘못된 양심을 덮어둔 채 겉으로 드러난 것만을 가지고 옳으냐, 그르냐 하고 따지는 세상이 떠 끔찍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또 내가 억울한 일을 당해도 누군가가 판결에 따라 그 결과에 승복하라고 한다면 과연 그것이 정의로울 까요? 때로는 죽음보다도 더 고통스러울지 모릅니다.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는 것은 어쩌면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라 마음속에 담아둔 것을 사실대로 표현하고 잘못이 있다면 용서를 청하는 것, 그 자체가 아니겠습니까? 너무나 잘못 없이 완벽하게 잘 살아야 한다는 것이 때로는 자신을 힘들게 하고, 또 허물을 감추는 어리석음을 저지르고, 그 때문에 서로 눈에 보이는 것만으로 싸움을 일삼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왜 예수님이 그렇게 강한 어조로 마음의 죄를 중요하게 말씀하셨는지 조금은 이해할 것 같습니다.
새벽을 열며
어떤 왕이 수백만 개의 거울이 달린 큰 궁전을 지었습니다. 그곳에는 모든 벽이 거울로 뒤덮여 있었지요.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개 한 마리가 그 궁전 안으로 들어온 것입니다. 그 개는 거울에 비친 수백만 마리의 개들을 보았지요. 그리고 일순간 자신이 위험에 처했다고 생각하면서 바짝 긴장하며, 큰 소리로 짖어댑니다. 그러자 자신의 눈에 보이는 그 수백 만 마리의 개들도 동시에 짖기 시작하는 것이었어요.
다음 날 아침에 그 개는 죽은 채로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물론 그 개는 혼자 그곳에 있었고, 그곳에는 오직 거울들만 있었지요.
사실 아무도 그 개와 싸우지 않았고, 싸울 만한 누구도 그 안에는 없었습니다. 단지 그 개는 거울 속의 자신을 보았고 곧 두려워졌습니다. 그리고 용기를 내어 싸움을 하려고 덤벼들었지만, 수백만 마리의 개들도 같이 덤벼들었던 것이지요.
어쩌면 우리들의 모습도 일상의 삶에서 이러했던 것은 아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즉, 그 누구도 나를 위협하고 있지 않은데 또한 나에게 해를 끼치는 것도 아닌데, 스스로 겁먹고 그래서 스스로 해야 할 일을 못했던 것은 아니었는지요?
어제는 인천 가톨릭 대학교에서 강화 지구 신부님들의 체육대회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정말로 오랜만에 축구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몇 번 공을 차보니, 도저히 잘 할 자신이 없었습니다. 그래도 한때는 조금 한다는 이야기도 들었는데, 시합에 앞서 연습을 하면서 공을 차보니 너무나 힘들더군요. 제 뜻대로 공을 찰 수 없는 것은 물론, 조금 뛰니까 다리에 힘이 빠지는 것입니다. 아무튼 자신은 없었지만, 시합에 들어섰습니다. 그리고 결정적인 순간에 아주 멋진 헛발질을 하고 말았지요. 또 골키퍼와 1:1의 상황에서도 엉뚱한 곳으로 볼을 차서 사람들의 웃음을 사기도 했습니다. 그러면서 더욱더 자신감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바로 그 순간 이런 생각이 듭니다.
‘내가 축구 선수도 아닌데 뭐....’
그렇지요. 저는 축구 선수가 아닙니다. 따라서 축구 선수처럼 그렇게 잘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마치 정말로 축구 선수인 듯이 착각을 했었고, 그래서 자신감을 잃었던 것이 아닌가 싶네요. 결국 그런 부담감을 모두 놓았을 때, 오히려 더 볼을 잘 찰 수 있었습니다. 글쎄 골도 한 골 넣었다니까요…….
우리들 삶을 힘들게 하는 것은 스스로 할 수 없다는 용기의 상실이 아닐까 싶네요. 굳센 용기만 있다면 그렇게 힘든 세상도 아닌데 말이지요.
오늘 예수님께서는 죄에 대한 아주 섬뜩한 말씀을 하십니다. 글쎄 죄를 짓느니 차라리 불구의 몸이 되는 것이 낫다고 말씀하시지요. 이런 말씀을 들으면 솔직히 주님을 따르는데 자신감을 잃게도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들은 너무나 죄를 많이 짓고 있으니까요. 그러면서 일찌감치 주님의 길을 가는 것을 포기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죄에 대한 유혹이 생길 때, 처음부터 단호한 마음으로 끊어버려야 한다는 뜻으로 하신 말씀이었지요. 바로 주님을 따르는데 있어서 자신감을 잃었기에, 주님께서 의도하신 원래의 뜻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자신감을 가지고 용기 있게 죄의 유혹에서 벗어나길 원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마치 앞서 나오는 그 개처럼 자신의 모습을 보고서 지레 겁먹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는지요?
오늘도 용기 있게 주님의 뜻을 따르는 날이기를 지향하여 봅니다.
겁먹지 맙시다.
-빠다킹신부-
한 잔의 물
-강영구신부-
+ 나는 분명히 말한다. 너희가 그리스도의 사람이라고 하여 너희에게 물 한 잔이라도 주는 사람은 반드시 자기의 상을 받을 것이다.
그대에게
무엇인가 줄 것이 있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거기에 마음까지 얹어서 줄 수 있다면 더 큰 축복입니다. 목마른 사람에게 한 잔의 물은 한 잔의 물이 아니라 생명입니다. 한 잔의 물을 주는 것은 사랑과 생명을 주는 것이고, 언젠가 생명을 상으로 받게 됩니다. 사랑하는 마음, 맑고 아름답고 자비로운 마음을 가진 사람이 줄 수 있습니다. 배고프고 목마르고 아쉬운 것이 있는 이웃에게 먹을 것과 마실 것 그리고 필요한 것을 나누어주는 것은 예수님께 베푸는 것입니다.(마태25,40)
우리 인생은 길지 않습니다. 더구나 우리는 내일 나의 운명이 어떻게 될지 알지 못합니다. 사랑하고 나누고 베풀고 용서하면서 천국(天國)을 누리며 살아도 시간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배고프고 목마르고 고통당하는 이웃을 외면한 체 혼자 독차지 하고 혼자 누리고 여기에 더하여 나쁜 표양까지 보여 형제를 죄짓게 한다면 그는 차라리 연자 맷돌을 목에 달고 바다에 빠지는 것이 훨씬 더 나을 것입니다.(마태9,42) 유일회(唯一回)적인 인생을 자신만을 위해 탕진하는 것은 불행입니다. 악한 표양으로 이웃을 불행의 구렁텅이로 끌고 가는 것은 더 큰 불행입니다.
당신은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오늘을 어떻게 살 작정입니까? 당신의 오늘은 사랑하는 하루가 되기를 바랍니다. 당신의 오늘은 이웃과 형제들에게 기쁨과 행복을 나누어주는 하루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당신도 예수님으로부터 같은 모습으로 사랑받을 것입니다.(一明)
손이 죄를 짓게 하거든 그 손을 찍어버려라.
-나궁렬 신부-
예수님께서 설교를 하실 때의 상황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예수님은 처음에 회당에서 가르치셨는데 유다인들의 비위를 거슬리는 말을 하자 내쫓아 버렸다. 그러니 자연히 예수님은 회당 밖에서 가르치실 수밖에 없었다. 가끔 야외미사를 하다 보면 신자들의 집중력이 떨어지는 것을 느낀다. 에수님 시대의 청중들은 교육 수준이 낮은 사람들이었다. 예수님은 그들이 당신의 말씀을 오랫동안 기억하게 하기 위해 과장법과 비유를 사용하셨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가르침이 그 부분에 해당한다. 손을 찍어버려라, 발을 찍어버려라. 눈을 빼어버려라. 만일 우리가 그 말대로 한다면 성한 사람이 하나도 없을 것이다. 이 말씀은 죄를 지어 지옥에 가는 것보다 몸이 불구가 되더라도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과장해서 하신 말씀이다.
성서를 이해하는데는 전체적인 맥락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예수께서 무슨 의도로 그런 말씀을 하셨는지를 파악해야 하는 것이다. 결국 예수님은 형제들에게 죄를 짓게 하지 말고 서로 화목하게 지낼 것을 강조하면서 과장법을 쓰신 것이다..........◆
“손이 죄를 짓게 하거든 그 손을 찍어버려라.” -양승국신부-
<환한 얼굴로 고백소를 나오지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듣기에 끔찍하다 못해 민망하기까지 할 정도로 강경한 표현을 쓰시면서 죄를 피할 것을 요청하십니다.
“다른 사람을 죄짓게 하고 사느니 차라리 목에 연자 맷돌을 달고 바다에 뛰어드는 편이 더 낫다”고 하시며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죄짓지 말게 할 것을 강조하십니다.
예수님의 강경한 표현은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손이 죄를 짓게 되거든 그 손을 찍어버려라.” “발이 죄를 짓게 되거든 그 발을 찍어버려라.” “눈이 죄를 짓게 하거든 그 눈을 빼어버려라.”
위와 같은 예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문자 그대로 실천하자면 저 같은 사람은 지금쯤 남아있는 사지(四肢)가 하나도 없겠습니다. 이미 오래 전에 중복장애자가 되어도 몇 번은 되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사용하신 강경한 표현, 그 이면에는 죄를 피하기가 진정 어렵기에 늘 죄짓지 않기 위해 목숨을 걸라는 의미, 죄를 피하기 위해 죽기 살기로 노력하라는 격려의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우리 인간은 나약한 본성상 수시로 죄에 떨어지는 존재이기에 언제나 겸손하게 주님의 자비와 도움을 청하면서 항상 조심하면서 살아갈 것을 요청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너무도 잘 알고 있는 바처럼 우리를 유혹하는 죄악의 뿌리는 얼마나 끈질긴지 모릅니다. 진정 지긋지긋합니다. 한번 악습을 고쳐보겠노라고 수천 번도 더 다짐하지만 어느새 우리의 몸은 자동으로 과거의 악습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죄로 물든 부끄러운 과거를 진심으로 반성하며 다시 한 번 새 삶을 살아보겠노라고 그렇게 눈물을 흘리지만 그 때뿐입니다.
환한 얼굴로 고백소를 나오지만, 사흘이 지나지 않아 우리는 또 다시 똑같은 잘못으로 가슴을 칩니다. 철저한 비참함에 고개를 들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나약한 인간의 실체, 과거와 완전히 결별하기를 머뭇거리는 우리, 우유부단함으로 인해 죄의 사슬을 완전히 끊어버리지 못하는 우리 인간 조건을 잘 파악하고 계셨던 예수님이셨기에 그토록 강경한 어조로 죄를 끊어버릴 것을 요청하십니다.
낙태수술을 더 이상 하지 않기로 공개적으로 선언한 의사 선생님들의 용기에 박수를 보냅니다. 촌지를 절대로 받지 않겠노라고 학생들과 학부형 앞에서 명백히 밝힌 선생님들 정말 존경스럽습니다. 40년간의 공직 생활 동안 단 한 차례도 뒷돈을 주지도 받지도 않았노라고 담담하게 밝히는 한 공무원의 명예로운 뒷모습, 진정 눈물겹습니다.
깨끗한 손을 간직하며 살려다보니 늘 손해보고, 언제나 뒷전으로 밀려났던 사람들, 지지리도 주변머리 없다는 소리를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으면서 살아온 분들, 이 세상에서 그분들이 삶이 비록 고달팠겠지만 그분들은 영원한 생명의 나라가 이미 예약되어 있는 분들입니다.
오늘 다시 한 번 죄와 용감히 맞서기를 다짐합시다. 오늘 다시금 오랜 악습과 결별하기 위한 투쟁을 새로이 시작합시다.
아무리 노력한다고 할지라도 매일 거기서 거기인 것처럼 여겨지겠지만, 노력하고 또 노력하는 가운데 하느님 자비의 손길이 우리도 모르게 다가올 것입니다.
그분의 도우심으로 우리 내면 안에 우리가 사라지고 성령께서 자리하실 그날, 우리는 보다 죄로부터 자유로워질 것입니다.
사랑과 나눔
-조욱현 신부-
세상을 살아가면서 인간은 누 구나 돈이나 재물을 모으기 위해 많은 고생을 한다. 이렇게 어렵게 모은 것을 남과 나눈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면서도 선악을 아는 인간은 선을 행하는 것을 마땅한 것으로 여긴다. 그래 서 많은 경우에 매스컴을 통하여 무슨 대가가 아니더라도, 신앙을 갖지 않은 사람으로 알고있는데도 불 우한 이웃을 위해서 자신의 것을 나누는 사람들을 방송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런 경우에 그리스도인으 로서 나는 무엇을 하면서 살고 있는가 반성하게 된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아깝고 때로는 생 활의 부담이 될 것을 예상하지만, 현세적인 대가를 바라지 말고, 불우한 이웃을 위 해 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과 나누라는 말씀이다. 여기서는 아깝고 필요한 것이기 때문에 더 가치가 있고, 아깝고 필요한 것이기에 희생이 요구되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그리스도의 말씀이기 때문에 우리가 실천하여야 하는 것이다. 자기가 좋아서 하는 일은 그렇게 의미가 크지 않다. 내키지는 않지만 말씀이 계시기에 그리스도의 말씀 대로 살자니 희생을 치르게 될 때, 주님께서 모든 것을 책임져 주실 것이다. 비록 "물 한잔"이라도 예수 님은 그 대가를 기억하시고 영원으로 갚아 주신다는 말이다.
그러나 반대로 누구든지 다른 사람에 게 악표양이 되어 잘못을 하게 만드는 자는 나귀가 돌리는 커다란 연자맷돌을 메고 바다에 던져지는 편 이 낫다는 무서운 말씀을 하신다.
그래서 우리의 신앙의 길은 확고한 결단을 내려야 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여러 가지 예로 말씀하신다. 즉 우리가 생명의 길을 가기 위하여 몸의 일부를 절단하는 고통 과 희생을 요구하고 있다. 여기서 자신의 습관, 죄, 성격 또는 삶 속에서 자신의 하느님의 뜻과 반대되 는 것들을 수술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모든 이웃 을 보이는 하느님으로 생각하고 물 한잔 대접하는 작은 일에서부터 다른 것에 이르기까 지 사랑을 실천하며, 좋은 표양을 드러낼 수 있는 삶이 되도록 노력하여야 할 것이다.
적어도 그리스도인으로서 다른 사람에게 모범이 되어야지 악표 양이 되어서는 안되지 않는가 ? 주님의 도우심과 나의 노력은 그러한 삶을 이끌어 갈 수 있을 것이다. ♡
† 하느님 나라로 가기 위하여 † -박 야고보 수사 -
어떤 사람이 죽어서 하늘나라에 갔다고 합니다. 천국은 그야말로 아름답고 향기롭고 찬란한 곳. 모든 것이 황홀 그 자체였답니다. 그런데 그가 거기서 사는 사람들을 만났을 때, 그는 그만 깜짝 놀라고 말았답니다. 그곳에는 한쪽 손이 없는 사람, 한쪽 발이 없는 사람, 한쪽 눈이나 귀가 없는 사람, 모두가 하나같이 불구자들뿐이었답니다. 세상에 살면서 죄짓지 않으려고 손발을 잘라 버렸기 때문에…
우리가 세상에 살면서 죄짓지 않는다는 것은 말 같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아니, 거의 불가능한 일일 것입니다. 더구나 예수께서는 말씀하신 대로 마음에 품은 죄까지 따진다면, 온몸이 성할 자가 누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우리가 세상에 살면서 죄짓지 않는 것만큼, 아니 그보다 훨씬 더 힘드는 일이 또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다른 사람을 죄짓게 하지 않는 일입니다. 다른 사람이 나 때문에 시험이나 유혹에 들게 하지 않는 일입니다.
대개 사람들은 자신이 죄를 짓고도 자신의 죄를 잘 모릅니다. 나 자신의 허물을 보는 것도 쉽지 않거든, 하물며 나 때문에 다른 사람이 죄짓는 것을 어떻게 할 수 있단 말입니까? 그러나 예수께서는 남을 죄짓게 하는 사람은 차라리 연자맷돌을 목에 달고 깊은 바다에 빠지는 편이 낫다고 하셨습니다. 마소가 끌거나, 여러 사람이 달라붙어야 움직일 수 있는 연자맷돌 말입니다. 자기 죄는 손과 발을 자르는 것으로 끝나지만, 남을 죄짓게 하는 것은 아예 온몸을 던지라는 것입니다. 그게 아주 작은 사람 하나, 별볼일 없는 사람 하나일지라도 말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죄로부터 나를 지키는 것은 소중합니다. 그러나 남을 죄짓게 하지 않는 것, 남을 지키는 것은 더욱 소중합니다.
유혹 많은 이 세상에서 바르게 산다는 것은, 어쩌면 날마다 손과 발을 자르고 눈을 빼는 결단, 切斷의 연속일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누가 고난없이 자신을 지킬 수 있겠는가? 십자가 없이 어떻게 구원이 있겠는가? 더구나 우리에게 맡겨진 작은 자 하나라도 잘 지키려면, 날마다 스스로 맷돌을 목에 걸어야 할지도 모를 일입니다. 정말 조심해야 합니다. 특별히 자신이 어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일수록, 자신이 윗사람, 지도자라고 불리는 사람일수록 더욱 조심해야 합니다. 부모라 일컫는 자들은 더더욱 조심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자신이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더더욱 열 배 백 배나 조심해야 합니다. 내가 지금 그리스도를 가리고 있지는 않는지 더욱더 조심해야 합니다. 나 때문에 그 누군가 시험과 유혹에 빠지지 않는지를 조심해야 합니다. 나 때문에 지금 그 누군가 고통스러워하지는 않는가? 지극히 작은 자 하나라도!...말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조심스럽게 사회생활을 하지 않으면 주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된다고 합니다.
"나는 분명히 말한다. 너희가 그리스도의 사람이라고 하여 너희에게 물 한 잔이라도 주는 사람은 반드시 자기의 상을 받을 것이다. 또 나를 믿는 이 보잘것없는 사람들 가운데 누구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사람은 그 목에 연자맷돌을 달고 바다에 던져지는 편이 오히려 나을 것이다."(마태 18, 6)
그 다음 복음은 기분도 으시시하여 생략할 것이니까, 여러분이 읽어보십시오. 눈깔도 빼고, 옥수수도 뽑아버리고, 팔목가지 발목가지...등등 말죽거리 잔혹사 영화장면 대사같이 한번 해 보았습니다. 주님의 복음 중에 이렇게 잔인한 표현은 처음 접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복음을 자꾸만 되새김질 하다보면 수긍이 갑니다. 얼마나 당시의 세대들이 악하면 그랬을까? 아니 오늘날 우리 세대가 얼마나 악하면 이런 말씀을 성서에 기록해 놓았을까?......하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는 나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 내가 잘 알고 있는 사람에게 잘 해주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그에게 해 준 만큼 나 또한 받을 것이고, 받지 못한다 하더라도 내가 기쁘기 때문에 별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내가 싫어하거나, 모르는 사람에게는 손이 나가질 않습니다. 특히 좀 마음이 많이 상해 있는 사람에게는 '귀신도 뭐하는지, 저런 걸 잡아가지 않고....'라고 독기를 품습니다. 어쩌면 그가 나의 하느님인지도 모르는데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분명히 말한다. 너희가 그리스도의 사람이라고 하여 너희에게 물 한 잔이라도 주는 사람은 반드시 자기의 상을 받을 것이다." 여기서 그리스도 사람이라는 의미는 당시 사회에서 핍박받고 저주받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런 적대자(유다인 측면에서 보면)에게도 사랑을 베풀라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겨우 물 한 잔이라도 말입니다.
그러면 왜 '물한잔이라도...'라는 말씀이 사랑의 표시인지 한번 생각해 봅시다. 성지여행을 가보신 분은 잘 아시겠지만, 팔레스티나 지방에서는, 특히 쨍쨍 내려 쪼이는 햇빛을 받으며 오랫동안 걸음을 걸은 후에는 얻어 먹을 수 있는 물 한잔이 얼마나 고마운 선물인지, 정말 꿀같은 맛입니다. 그 물을 주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별것 아니겠지만, 목에 갈증을 느끼는 순례객들에게는 너무나 고마운 환대일 수 있습니다. 다시말하면 집안에 있는 사람에게 물은 그렇게 큰 가치를 못 느끼지만, 사막을 건너온 사람에게는 그 어떤 보석보다도 귀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각도를 바꾸어 한번 생각해 봅시다. 공동체 안에서 서로가 잘 해 보려고 하다가 마음 상하는 경우가 참으로 많습니다. 그때 상대방에게 필요한 물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봅시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나의 작은 양보와 너그러움, 그리고 다가감일 것입니다. 용서를 청함과 화해의 악수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어려워하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이 있습니다.
또한 비신자와의 관계는 좋으면서도 신자와의 관계는 그리 좋지 않은 사람들도 있습니다. 아마도 비신자와는 신앙에 대해서 이야기 하지 않고, 신앙을 드러내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하느님의 자녀인 신자들을 가까이 하지 않는 것 또한 물 한 잔 주기를 꺼리는 것과 같은 것일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어서 말씀하십니다. "또 나를 믿는 이 보잘 것 없는 사람들 가운데 누구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사람은 그 목에 연자맷돌을 달고 바다에 던져지는 편이 오히려 나을 것이다."
순진한 사람들은 상대방의 말을 그냥 믿어줍니다. 그리고 신앙에 대해서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신앙의 선배들이 하는 말들을 그냥 받아들여 줍니다. 왜냐하면 아직 모르기 때문입니다. 죄를 짓게 한다는 것은 사람을 바른 길에서 방황하게 하고, 신앙에서 멀어지게 하고, 악의 구렁텅이로 끌어들이는 것입니다. 신앙이 아직 튼튼하지도 못하고 잘 알지도 못하는 이들을 잘못 이끈다면 이 얼마나 큰 잘못이겠습니까?
물에 던져 죽이는 사형방법이 이스라엘에는 없었지만, 로마인은 이런 형벌을 행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십자가의 사형 방법과 함께 팔레스티나로 들어온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유다인들은 물에 빠져 죽을 경우, 시체를 묻을 수가 없어서 몹시 싫어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연자맷돌을 달고 물속에 들어가면 죽는 것은 확실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남을 죄짓게 하는 것보다는 낫다고 하십니다.
공동체 안에서 나 때문에 냉담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잘해 보려고 하다가 마음 상해서 등을 돌린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들에게 다시 다가가지 않는다면 우리는 화를 입을 것입니다. 그는 신앙에서 멀어졌기에 화를 당할 것이고, 나는 그를 신앙에서 멀어지게 했기에 화를 당할 것이고...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더욱 단호하게 죄지을 기회를 피하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손이 죄를 짓게 하거든 그 손을 찍어 버려라. 두 손을 가지고 꺼지지 않는 지옥의 불 속에 들어 가는 것보다는 불구의 몸이 되더라도 영원한 생명에 들어 가는 편이 나을 것이다. 발이 죄를 짓게 하거든 그 발을 찍어 버려라. 두 발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는 절름발이가 되더라도 영원한 생명에 들어가는 편이 나을 것이다. 또 눈이 죄를 짓게 하거든 그 눈을 빼어 버려라.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들어가는 것보다는 애꾸눈이 되더라고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편이 나을 것이다."
예수님! 무섭습니다. 이 글 서두에서 예화를 든 것처럼 천국에는 손 없는 사람, 발 없는 사람, 눈 없는 사람 천지가 아닐까요? 저도 제 손과 발, 눈 하나도 남아나지 않겠습니다. 좀 봐주세요. 그런데 입이 빠진 것 같습니다. 사실 가장 큰 죄는 입에서 나오는 것이 아닐까요?
우리는 세상의 빛과 소금입니다. 가정안에서, 직장안에서, 친구들안에서 우리는 나를 내어주고, 받아들여주고, 그가 예수님께로 갈 수 있도록 등을 두드려 주어야 합니다. 나에게 부주의한 말 한마디 던졌다 하더라도 받아들여줘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는 나의 적이 되려고 다가온 사람이 아니라, 나와 함께 하느님의 일을 하기 위해서 온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오놀복음 묵상을 다음과 같이 마무리합니다. 함께 생각해 보기로 합시다. 첫째, 신자들과 함께 공동체의 일치를 위해서 일을 하면서 마음 상하는 일들이 많이 생깁니다. 어떤 사람은 냉담하는 사람까지도 있습니다. 그리고 신부님, 수녀님들로부터 상처를 받아서 괴로워하는 사람들도 더러 있습니다. 혹시 이런 경우가 있었습니까? 둘째, 나 때문에 공동체가 어려움에 처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나 때문에 공동체가 활기를 띠는 경우도 있습니다. 내가 어떻게 해야만이 가정이나 공동체가 서로 기쁨을 나누며 활기찬 생활을 할까요? 서로가 만나고 싶고, 서로가 하느님을 찬미할 수 있도록 될까요? 셋째, 우리는 세상의 빛과 소금입니다. 필요한 이들에게 물 한 잔을 내어 줄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내가 내어주어야 할 물 한 잔이 무엇인지 함께 생각해 봅시다.........◆
너희가 그리스도의 사람이기 때문에(9, 41 - 50 )
-유 광수신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그리스도의 사람이기 때문에 너희에게 마실 물 한잔이라도 주는이는, 자기가 받을 상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 소금이 짠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다시 그 소금을 짜게 하겠느냐? 너희는 소금을 간직하고 서로 목하게 지내라.
우리는 앞의 복음에서 제자들이 길에서 "누가 큰 사람이냐?" 하는 문제로 서로 논쟁하는 것을 보았고 또 "저희를 따르는 사람이 아니므로, 저희가 그가 그런 일을 못하게 막았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예수님은 그들의 말을 듣고 "막지 마라."고 말씀하셨다. 제자들은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왜 안되는가? 제자들의 생명은 자기의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람이기 때문이다." 제자들이 다른 사람들과 다르게 말하고 행동해야 하는 이유는 제자들의 신원이 "그리스도의 사람"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누구나 혼자 살 수 없다. 함께 더불어 살아야 하고 어디엔가 소속되어 있어야 한다. 소속감은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 중에 하나이다. 소속감이 없을 때 인간은 외톨이가 된 느낌이고 끈 떨어진 망아지처럼 방황하게 된다. 인간이 어디에 소속되어 있느냐 하는 것은 그 사람의 신원과도 같다. 그리스도인이란 "그리스도의 사람"이라는 것을 말한다. 즉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이다."라는 말이다. 이 세상에 "내가 그리스도의 사람이다"라는 것보다 더 명예로운 것이 있는가? "그리스도의 사람"이라는 말은 "하느님의 사람"이라는 말과 같다. 자연인이 아니라 "하느님의 사람"이라는 말이다. 이 세상의 것으로만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의 것으로 살아가고, 하느님의 것을 위해서 살아가고, 하느님과의 친교를 나누고, 하느님과 하나되어 살아가는 사람이라는 말이다. 내가 누구의 아내, 누구의 남편이라고 하면 서로 떨어질래야 떨어질 수 없는 관계요 모든 것을 서로 공유하고 함께 권리를 갖고 함께 책임을 지고 함께 가정을 가꾸어 나가는 관계이다. 나 없이는 상대방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는 존재요, 서로가 서로를 위해 존재하고 서로 서로를 사랑해주는 존재이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은 하느님의 사람으로서 하느님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사람이다. 사제나 수도자가 신자들로부터 그래도 존경을 받고 사랑을 받는 것은 "그리스도의 사람"이라는 신분 때문일 것이다. 사제나 수도자의 신분에서 벗어났을 때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는다. 오히려 손가락질 하고 비웃을 것이다. 왜 그런가? 외적으로 드러난 "그리스도의 사람"이라는 위대한 신분을 포기했기 때문이다. 사실 한번 세례를 받았으면 누구나 다"그리스도의 사람"이요, 영원히 "그리스도의 사람"이지만 적어도 겉으러 드러난 모습에서 "그리스도의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의 사람"이라는 신분이 참으로 영광스러운 신분이지만 한편 얼마나 책임있는 신분인지 모른다. "그리스도의 사람"이라는 신분은 단순히 사제나 수도자의 옷을 입었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 신자"라는 이름만 가지고 "그리스도의 사람"이라고 사랑받고 존경받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그 신분에 맞게 말하고 행동하고 생활해야 한다. 우리가 무엇을 잘못했을 때 일반 사람들은 흔히 말하기를 "사제가 또는 수도자가 아니면 그리스도인이 그럴 수 있는가?"라고 말한다. 그 사람의 개인 이름을 부르는 것이 아니라 "사제, 수도자, 그리스도인"이라는 보통명사를 사용한다. 왜 그러는가? 모두가 다 "그리스도의 사람"이기 때문이다. 결국 나의 잘못된 행동은 내 개인의 명예를 더럽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또는 교회, 사제, 수도자, 그리스도인" 전체의 명예를 더럽히는 것이 된다. 따라서 우리가 말하고 행동할 때는 반드시 "그리스도의 사람답게" 말하고 행동해야 한다. 과연 내 생활에서 "그리스도의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즉 다른 사람이 나를 보고 "아, 저 사람은 사제이기 때문에 수도자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어딘가 좀 다르다."라는 말을 들을 수 있는 점이 있는가?
사제나 수도자나 그리스도인은 다 같이 "그리스도의 사람"이다. 사제나 수도자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보다 더 그리스도다워야 하고 그리스도의 향기를 더 많이 풍겨야한다는 것은 아니다. 교회 안에서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로 구분하는 것은 신분상의 구별이요, 자기 역할의 구분이지 "그리스도의 사람"이라는 소속감 또는 "그리스도의 사람"이라는 신분을 구분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다만 교회 안에서 공동선을 위해 각자의 역할이 다르다는 것이고 주어진 사명이 다르다는 것이다. 성직자 수도자이기 때문에 평신도보다 더 그리스도다워야 하고 평신도는 성직자 수도자보다 덜 그리스도다워도 괜찮다는 말이 아니다. 우리는 가끔 착각을 하고 있는 것 같다. 성직자 수도자는 반드시 그리스도인답게 살아야 하고 평신도는 그렇게 살지 않아도 된다는 착각, 성직자 수도자는 평신도보다 반드시 모든 면에서 더 거룩해야하고 더 그리스도다워야 하고 평신도는 성직자 수도자 보다 덜 그리스도다워도 된다는 뚱딴지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다. 모든 이는 너나 할 것이 없이 다 "그리스도의 사람"으로서 그리스도다워야 하고 그리스도의 향기를 풍겨야 한다. 다만 교회 안에서는 각자의 위치와 각자의 역할을 통해서 말이다. 우리는 누구나 할 것 없이 다 그리스도처럼 말하고 생각하고 행동해야할 의무가 있다. 즉 "우리는 하느님께 바치는 그리스도의 향기입니다."(고린후 2,15)라고 말한 것처럼 그리스도의 향기를 풍겨야 할 사람들이다. 우리 교회가 사제는 사제로서 수도자는 수도자로서 평신도는 평신도로서 각자 자기의 위치에서 자기 나름대로 그리스도의 향기를 풍기고 있다면 우리 교회는 그리고 우리 사회는 지금보다 훨씬 더 정의와 평화 사랑과 겸손의 향기가 넘칠 것이다.
"소금은 좋은 것이다. 그러나 소금이 짠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그 맛을 되돌리겠느냐? 너희는 마음에 소금을 간직하고 서로 평화롭게 지내도록 하여라."라고 말씀하신 대로 소금의 역할을 충실히 해야한다. 어쩌면 우리는 너나 할 것 없이 "소금이 짠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그 맛을 되돌리겠느냐?"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지금 우리는 "사제의 맛 수도자의 맛, 그리스도 신자의 맛을" 많이 잃어버리지나 않았는지 모른다. 또 한편 우리가 묵상해야 하는 것은 "너희가 그리스도의 사람이기 때문에 너희에게 마실 물 한잔이라도 주는 이는, 자기가 받을 상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라는 말씀이다. 우리가 남에게 무슨 말을 하고 행동을 할 때 상대방을 보고 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어떤 마음으로 하느냐가 중요하지 상대방의 태도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내가 그리스도의 사람으로서 말하고 행동을 했으면 비록 물 한잔이라도 "그리스도의 사람"으로서 주었다면 그리고 상대방을 "그리스도의 사람"이라는 마음으로 했으면 그 복은 내가 받는 것이다. 복은 아무나 받는 것이 아니다. 복 받을 일을 했을 때 복을 받는 법이다. 상대방이야 어떻게 대하든 내가 상대방을 "그리스도의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물 한 잔이라도 주었다면 그 상은 내가 받는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항상 복을 전해주는 사람이어야 한다.
<보나와 함께하는 묵상> : † 주님의 제자로서의 도(道) †
이제 예수님은 갈릴래아의 활동을 마치시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어 인류의 구원을 위한 보속의 십자가를 지시고자 합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님의 마음을 알지 못하고 여전히 이 땅에 이루어질 메시야 왕국을 소망하며 누가 더 높은가를 경쟁하고 다투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제자들의 내면을 아시고 진정 위대한 자가 되는 길이 어디에 있는가를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한 마디로 제자로서의 내면성을 쌓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성공을 위해서는 피나는 투쟁을 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내면성을 쌓는 데에는 별로 투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진정으로 성공한 인생, 행복한 인생을 살고자 한다면 예수님의 제자로서 가져야 할 내면성을 쌓기에 힘써야 합니다. 오늘 묵상을 통해서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제자들이 예수님에 대해서, 다른 사람에 대해서, 자기 자신에 대해서 가져야 할 자세가 어떠해야 되는가, 그 내면성이 어떠해야 되는가를 배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예수님의 제자는 십자가의 비밀을 깨달아야 합니다(30-32). * <월요일 복음임> 둘째, 예수님의 제자는 겸손, 섬김의 내면성을 가져야 합니다(마르 9,33-37). *<화요일복음임> 세째, 예수님의 제자는 포용성이 있어야 합니다(38-41). *<수요일 복음임>
네째, 예수님의 제자는 죄에 대해서 민감해야 합니다(42-50). <오늘 목요일 복음 묵상>
예수님은 계속해서 제자들이 범하기 쉬운 죄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나를 믿는 이 보잘것없는 사람들 가운데 누구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사람은 그 목에 연자 맷돌을 달고 바다에 던져지는 편이 오히려 나을 것이다." 여기서 '보잘 것 없는 사람'이란 앞에서 말한 대로 어린아이 또는 믿음이 있지만 믿음이 나약한 자를 말합니다. 믿음이 어린 자는 쉽게 상처를 받고 작은 유혹에도 잘 넘어집니다. 또 다른 사람의 말 한마디, 행동하나 하나에 쉽게 영향을 받습니다. "죄를 짓게 한다"는 것은 예수님을 떠나게 한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어린 양을 죄를 짓게 하는 자는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매달고 바다에 들어가는 것이 더 낫다고 하십니다. 이는 믿음이 어린 자를 얕보고 그래서 냉담하게 하거나 불신자로 만드는 것이 얼마나 심각한 죄인가를 말해 줍니다. 말하자면 죄를 짓게 하는 자는 바다에 빠져 육신만 죽는 자보다도 더 심각한 형벌 곧 영혼이 지옥에 떨어지는 형벌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목자들은 말 한 마디, 행동 하나에도 조심해야 됩니다. 사목자에게는 영광과 특권이 따르지만 그만큼 자기 생명을 걸고서라도 주님이 맡기신 한 영혼을 감사하게 이끄는 책임감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사목 생활을 누가 하겠는가 반문하겠지만 그러나 조심하는 자에게 주님께서는 함께 하시고 충분히 감당할만 한 힘과 지혜를 주시리라 믿습니다.
어린 자는 특히 사목자의 부도덕한 행동이나 함부로 하는 행동에 쉽게 상처를 받습니다. 사목자가 조심한다고 하면서도 죄를 짓게 하는 일이 큰 죄가 되는데 하물며 의도적으로 믿음이 약한 자에게 의심과 불신을 심고 죄를 짓게 하는 것은 얼마나 더 악하고 큰 죄가 되겠습니까? 예수님의 제자는 자기에게 있는 자유를 양들을 위해 포기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옷을 야하게 입을 수 있고 화장을 화려하게 할 수 있는 자유도 있고, 술을 마실 수 있는 자유도 있지만, 양들의 믿음이 상처를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삼가 할 수도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1고린 8,9).
이상을 볼 때 예수님은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조차도 매우 귀하게 여기심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날 우리는 대량을 중시하고 외모를 중시하는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에 튀지 않거나 대수롭지 않게 보이는 작은 자 하나를 무시하고 왕따를 시키거나 다수가 몰려들어 한 사람을 때려서 뇌사에 빠지게 하는 일이 빈번하게 일어납니다. 그러나 작은 자, 즉 보잘것 없는 자를 귀하게 여기시는 예수님의 마음을 본 받아서 현재 보잘 것이 없이 보이는 사람이라도 경외심을 가지고 섬겨야 합니다. 내가 돌보는 사람이 현재는 어리고 약하게 보이지만 후에 위대한 하느님의 사람이 될지 아무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스코틀란드 어느 작은 마을 교회에서 기도회가 열렸습니다. 한 주간 계속 기도회가 있었지만 사람들은 별로 모이지 않았습니다. 신부님은 마지막으로 그동안 은혜받고 예수님을 구세주로 받아들이고 주님께 헌신할 사람을 초청했지만 아무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오직 한 작은 소년이 앞으로 나왔습니다. 신부님은 1주일간의 집회에서 겨우 한 소년만이 함께한 상황에 대해 매우 실망했습니다. 그런데 이 소년의 눈에서 뜨거운 불꽃이 일어나서 "오! 하느님, 저의 생명을 주님께 드립니다. 저에게 아프리카를 주십시오" 라고 외쳤습니다. 이 소년이 바로 '리빙스턴'입니다. 작은 자라고 깔보아서는 안됩니다. 또 소수가 모이는 곳이라고 마음이 위축되어서도 안됩니다. 이 모임을 통해서 리빙스턴 같고, 사도 바오로 같은 위대한 인물이 나오게 될 것을 믿어야 합니다.
마르코 복음 9,43-49에서는 죄의 심각성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죄를 짓게하는' 죄를 포함해서 우리 마음 속에 일어나는 죄는 바로 제자 자신을 망하게 합니다. 예수님은 "손이 죄를 짓게 하거든 그 손을 찍어버려라. 두 손을 가지고 꺼지지 않는 지옥의 불 속에 들어가는 것보다는 불구의 몸이 되더라도 영원한 생명에 들어가는 편이 나을 것이다."(43) 계속해서 발이 죄를 짓게 하거든 그 발을 찍어버려라. 두 발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는 절름발이가 되더라도 영원한 생명에 들어가는 편이 나을 것이다. 또 눈이 죄를 짓게 하거든 그 눈을 빼어버려라.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들어가는 것보다는 애꾸눈이 되더라도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편이 나을 것이다(45,47).
우리는 이 말씀을 들을 때 예수님이 과연 이렇게 과격한 말씀을 하셨단 말인가 놀라게 됩니다. 그러면 이 말씀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이는 죄를 짓게 하는 근원적인 요소를 철저하게 잘라내라는 뜻입니다. 무엇보다도 다른 사람의 죄에 대해 민감하기보다는 자신의 죄 문제에 민감하라는 말입니다. 사목자는 남을 가르치기에 앞서 자신을 말씀에 비취어 철저히 가르쳐야 합니다. 이때 만일 주님의 이 말씀을 문자적으로 해석해서 손이나 발이나 눈을 잘라 낸다면 모두 다 성한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눈이 50개라도 하루에 다 뽑히겠다고 하였습니다. 무엇보다도 그렇게 육신의 손이나 발이나 눈을 잘라 냈다고 해서 그 사람이 죄로부터 자유한 자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는 마음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을 떠난 인간의 마음은 부패하여서,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 생의 자랑 가운데 인간을 여러모로 죄의 노예가 되게 합니다. 죄는 당장에는 달콤한 것 같지만 그러나 사람으로 하여금 죄의식에 시달리게 하고 그 인격을 파괴시키며 그 영혼을 병들게 합니다. 아무 쓸모없는 폐인이 되게 하고 결국 죽음과 심판에 이르게 합니다. 그래서 꺼지지 않는 지옥 불못에 던져지게 합니다. 이런 죄와 죽음으로부터 우리가 어떻게 구원받을 수 있습니까?
이는 선행이나 고행으로 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다만 하느님이 약속하시고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했습니다. 여기에 오신 분들은 이미 예수님을 만났거나 예수님을 받아들이고 따르고 있기 때문에 구원의 은총을 받은 줄로 믿습니다. 그러나 한번 은혜를 받았다고 다 된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육신을 입고 있고 음란하고 패역한 이 세상에 살고 있는 한, 죄의 소욕이 우리를 반복해서 죄를 짓도록 유혹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로 하여금 죄를 짓도록 유혹하는 음란 비데오나 음란 싸이트나 이단 사상이나 써클로부터, 혹은 나쁜 친구나 환경으로부터 과감히 나의 손이나 발이나 눈을 벗어나도록 투쟁해야 합니다. 이에 대해 꼭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는가 반발심이 드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적당히 즐기는 것은 무방하지 않는가 생각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아직 죄의 심각성을 잘 알지 못하는 영적인 무지에서 나오는 생각이요 말입니다.
죄가 그렇게 무섭고 심각하지 않다면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시고 십자가에 모진 형벌을 당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 시대에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만나고 구원의 은총을 받은 사실을 가볍게 여겨서는 안됩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당신의 하나밖에 없는 외아들을 희생시키신 아버지 하느님의 절대적인 사랑을 가볍게 여겨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구원의 은총을 감사함으로 생각하고 다시는 죄를 범하지 않고자 죄를 미워하며 죄와 싸우되 피흘리기까지 싸워야 하겠습니다(히브 12,4).
죄를 짓지 않겠다는 생각만으로는 죄를 이길 수 없습니다. 죄를 짓도록 유혹하는 그 근원으로부터 과감하게 떠나야 합니다. 그리고 나서 자신의 영육을 주님께 적극적으로 바치고 헌신해야 합니다. 1대1 말씀 공부와 소감 투쟁에 힘써야 합니다. 힘써 자기 부인, 자기 십자가의 제자의 길을 가야 하겠습니다. 이때 주님께서 함께 하시어 우리를 죄에서 지키시고 승리하게 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영원한 하느님 나라의 영광에 참례하게 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구원의 은총을 가볍게 여기고 자기 좋을 대로, 세상의 풍조를 좇아 죄를 죄로 여기지 않고 죄를 정당화 하며 죄를 즐긴다면 영원히 꺼지지 않는 지옥 불못에 던져지게 될 위험이 있습니다.
그러면 지옥은 어떤 곳입니까? 그 곳은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않습니다48). "지옥은 정말 있습니다" 라는 책을 보면 지옥의 구더기는 팔뚝만하다고 합니다. 그 곳의 불은 태워서 없어지지 않는 불입니다. 썩은 냄새도 없어지지 않고 오직 뜨겁게만 합니다. 또 그곳의 사람들은 절대로 죽지도 않습니다. 누구나 다 불소금에 절여질 것이라고 합니다(49). 살아있는 생선에 소금을 뿌리면 펄펄 뛰듯이 사람들은 꺼지지 않는 지옥 불못에서 펄펄 뛰며 고통을 당하고 태워지는가 싶으면 다시 살아나서 그 고통을 영원히 받는다고 합니다.
우리는 지옥의 실재를 인정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느님은 사랑이신데 무슨 지옥이 있냐고 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지옥의 실재를 인정하셧습니다. 또한 하느님은 사랑의 하느님이실 뿐만 아니라 공의의 하느님이심을 모르고 하는 소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옥의 실재를 인정하고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하느님 앞에서 죄를 미워하고 죄와 피흘리기까지 싸워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먼저 나 자신이 주님의 은총을 감사하게 받아 들여 거룩한 자녀들이 되고, 주의 제자들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결론적으로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50절을 보십시오. "소금은 좋은 것이다. 그러나 소금이 짠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다시 그 소금을 짜게 하겠느냐? 너희는 마음에 소금을 간직하고 서로 화목하게 지내라." 소금은 맛을 내고 부패를 방지하는 좋은 역할을 합니다. 그런데 때로는 맛을 잃은 결정체의 소금이 만들어진다고 합니다. 이런 것들은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주님은 우리 제자들이 세상의 소금이 되라고 하셨습니다(마태 5,13).
주님은 우리 제자들이 우리 마음에 소금을 간직하고 서로 화목하게 지내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소금은 우리 제자들이 마땅히 가져야 할 충성심이나 온유나 절제의 품성을 말합니다. 혹은 예수님이 가르치신 영원한 진리, 십자가와 부활의 진리를 가리킵니다. 더 나아가 예수님 자신을 가리킵니다. 충성심이나 온유, 절제나 십자가와 부활의 진리는 모두 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 주신 것들입니다.
우리는 다 죄인들입니다. 하느님 앞에 어린 아이와 같이 나약하고 무지한 자들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하심으로 온전히 죄와 죽음과 심판으로부터 구원 받고 거룩한 하느님의 자녀요 주님의 제자들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자기가 살기 위해서 다른 사람을 무시하고 짓밟고 죽이는 이 세상 풍조를 좇지 않고 십자가와 부활의 진리 안에서 서로 약점과 허물을 감당하며 용서함으로 진정으로 화목한 공동체를 이루는 성숙한 주님의 자녀들이요 제자들이 되어햐 하겠습니다.
오늘복음 묵상마무리입니다.
"나는 분명히 말한다. 너희가 그리스도의 사람이라고 하여 너희에게 물 한 잔이라도 주는 사람은 반드시 자기의 상을 받을 것이다." "소금은 좋은 것이다. 그러나 소금이 짠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다시 그 소금을 짜게 하겠느냐? 너희는 마음에 소금을 간직하고 서로 화목하게 지내라."
대부분의 사람들은 돈이나 재물을 벌어서 자기 것으로 만들기 위해 많은 노력과 고생을 하게 되고, 이 재물이 자신의 현세 생활에 평안함을 제공해 주기 때문에 이유없이 아무런 대가없이 타인에게 내어 준다는 것은 그리 마음에 내키는 일이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악보다 선을 행하는 것이 사람다운 도리임을 알기 때문에 신문이나 라디오, TV를 보면 어떤 대가를 바라지도 않고, 신앙인이 아닐지라도 때로는 엄청난 금액을 불우한 이웃에게 희사한다든지, 하나 밖에 없는 자기 생명을 바치는 사람들을 많이 봐왔습니다. 오래전 ' 눈을 떠요'라는 TV프로그램을 보면서 혼자서 많은 눈물을 흘린 적이 있다. 세상에는 어려운 사람도 많고 그들을 위해 희생하는 사람도 많은데 나는 무엇하는 사람인지를 돌이켜 보면서 흘린 눈물이었습니다.
현세적인 대가를 바라지 않고 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웃에게 아낌없이 내어 준다는 것은 어려운 일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아깝고 필요한 것일수록 남에게 베풀었을 때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누군가 이야기 했듯이 천주교 신자들은 받을 때는 삽으로 받고 줄 때는 티 스푼으로 준다고 합니다. 받은 은총은 풍부한데 작은 희생이나 기부마저도 아까워하면서 하느님께서 더 큰 은혜를 베풀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많은 것 보다는 이웃에 대한 작은 배려가 중요합니다.
어린이들이 산수를 배울 때에 더하기, 빼기를 먼저 배우고 나누기를 나중에 배웁니다. 그만큼 나눈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작은 것일지라도 나누면서 더불어 살아갈 때 가슴 속에서 느끼는 기쁨은 클 것이고, 주님께서도 많은 상을 베풀어 주시리라 믿습니다. 내가 만나는 세상과 사람과 작은 공동체 안에서 물 한잔이라도 나눌 수 있는 여유있는 사람이 됩시다...............◆
[두올묵상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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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고맙습니다
감사합기다...